115화
‘이건 우리에게 무장을 완전히 해제하라는 뜻이야.’
이미 소집령을 내리고 굳이 지금 시점에 이런 조치가 내려 왔다는 것은 너무 이상했다. 그 사이에 뭔가 중요한 변수가 생긴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조금이라도 조정의 조치에 불평하거나 심기가 편치 않다는 것을 노출해 봐야 이로울 것이 없었다.
최인범은 이내 명확하게 답해 주었다.
“좋습니다. 조정의 명령으로 군수께서 저희들 장비를 한양으로 보내야 한다면 그렇게 하죠.”
“그렇게 해주겠나?”
“예, 당장에 50벌은 마련해 해드리죠. 나머지는 시간이 조금 걸릴 겁니다.”
“알았네, 한 번에 나를 수 없으니 우선 50벌을 먼저 보내도록 하지.”
최인범은 즉시 동헌 앞마당에 모여 있는 부하들에게 명령했다.
“부대원들은 현재 입고 있는 군복 이외에 개인소지품이나 비상식량 등은 모두 꺼내고 모든 무기나 장비는 여기에서 모조리 내려놓도록 해.”
“넷!”
“그리고 보급병들은 빨리 장비 생산업자를 찾아가서 앞으로 제작되는 50벌의 장비를 신속하게 제작하라고 전해. 면포를 받고 파는 것이니 너무 걱정하지 말고.”
이런 지시를 하자 배도치가 다가와 슬며시 말했다.
“소대장님, 그렇다면 농장에 있는 비축장비도 모두 가져와서 팔아야 되겠네요.”
이런 말에 최인범은 낮은 목소리로 엄하게 나무랐다.
“내무반장, 너는 바보냐? 그럼 네 부하들은 앞으로 뭐를 가지고 훈련하고?”
“죄송합니다.”
“일단 비축한 장비로는 네 부하들은 최소한의 장비로 재무장을 해야지. 중요한 무기인 단창은 2개에서 1개로 줄이더라도. 소형천막도 없으니 그건 우선 거적으로 만들어 지내.”
“알겠습니다.”
이윽고 생산 업자들을 찾아가 이미 생산된 장비들을 모두 수거해 와서 50벌은 풍기군수에게 넘겨졌다. 장비를 모두 확인한 풍기 군수는 2500필의 관포 어음을 넘겨주며 말했다.
“나머지는 언제까지?”
“그건 지역에 있는 생산업자들이 얼마나 빨리 만드느냐에 달렸죠. 아무튼 한 달 정도는 걸릴 것입니다.”
“알았네. 그렇다면 우선 50벌을 보내고 나중에 보낸다고 조정으로 보고하지.”
일단 무장이 해제된 상태라 최인범은 풍기군수에게 구두로 보고했다.
“군수님, 저는 일부 병사들만 데리고 함경도로 갈까 합니다. 그러니 조정으로 그런 내용을 보고해 주세요. 함경도로 가는 병사는 저를 포함해 총 11명이니 그렇게 아세요. 나머지 병사들은 모래재에서 사냥이나 하면서 조용히 지낼 것이고요.”
“알았네.”
관내에서 군대를 조직해 움직이기 때문에 군수에게 이렇게 보고하는 것이다.
무기나 장비도 없는 부대원을 이끌고 다시 동물농장으로 돌아온 최인범은 비축하고 있던 장비를 모조리 배도치에게 넘겨주고 나서 지시했다.
“앞으로 부대는 내무반장이 지휘하게 되니 내가 돌아오기 전에는 모래재에서 풍기로 절대 나오지 말도록 해. 계속 전에 소백산에서 훈련 받은 그대로 부하들을 조련하며 지내. 함부로 무단이탈하면 전에 네가 처벌 받은 형을 기준해서 처벌해.”
배도치는 산속에서 산적처럼 지내라며 훈련하라는 명령이라 은근히 걱정되어 물었다.
“소대장님, 그러려면 반드시 식량으로 쓸 사냥감이 필요한데요.”
“그건 너무 염려하지 말고. 적당한 때에 동물농장에서 기르는 멧돼지를 그쪽 지역에 방사할 것이니 조금 크면 사냥해서 잡아먹어. 그 전에는 여기서 식량을 충분히 가져가고.”
“넷! 잘 알겠습니다.”
사실 새로 입대한 신병들을 끌고 함경도로 가기는 부담되었다.
호랑이를 비롯해 야생동물만 사냥한다면 모르지만 전투를 벌이기는 군사훈련이 부족했다. 만약 함경도로 가서 여진족과 전투라도 벌이라는 조정의 명령이라도 떨어지면 목숨이 위험했다. 아직은 여진족들과 전투를 벌이기에는 무력이 시원치 않다고 판단했다.
‘어차피 잘된 일이야.’
그래서 조정의 이런 명령을 핑계로 이미 소집된 착호부대 병사들을 단단히 조련하는 기간으로 삼을 생각이다.
허접한 장비지만 한곳에서 계속 지내니 움집이라도 지어서 지낼 것이라 별로 문제될 것은 없었다. 일단 무기가 다소 부족해도 충분히 훈련이야 할 수 있었다.
“장비와 식량을 최대한 챙겼으면 바로 훈련장으로 떠나.”
“넷!”
배도치의 지휘아래 부대원들이 모래재로 떠나고 나자 최인범은 축산담당인 양돌쇠에게 지시했다.
“너는 며칠 후에 멧돼지를 모래재로 보내서 방사하도록 해. 100마리를 가지고 가서 산채에서 조금 떨어진 골짜기마다에 5마리씩 풀어. 먹쇠와 갑중이도 같이 가고.”
“그럼 20개 골짜기를 찾아다니며 풀어야 되겠네요.”
“그래야지. 대신 마을에 피해가 올수 있으니 되도록 주변에 마을이 없는 깊은 곳에서 방사해. 소백산도 방사하면 잘 자랄 것이니 풀고.”
“잘 알겠습니다.”
새끼 멧돼지로 야생에서 적응해 살아남은 정도 크기로 자란 놈을 골라 보내기로 했다.
“돌쇠야, 사나운 놈이 야생에서 적응하기 쉬우니 골치 아픈 놈을 잘 골라서 방사해.”
“알겠습니다.”
이런 조치를 내리고 나자 소대본부에 속한 부하 10명과 같이 모두 말을 타고 동쪽으로 떠났다.
전에 가봤던 강원도 내륙을 통해서 가지 않고 동해안을 따라 무조건 올라가기로 했다. 그쪽의 해안으로 이동하면 길을 찾는 번거로움도 피할 수 있었다.
동해안으로 가기 위해 최인범 일행은 모두 말에 올라 선산의 산자락을 지나 이동했다. 산자락을 타고 동쪽으로 이동하면 장인 마을로 가는 지름길이다. 그곳으로 가서 부족한 개인장비를 챙겨 떠날 예정이다.
천천히 산길을 가다가 보급병인 임무영에게 물었다.
“임 상병, 우리가 가지고 갈 장비는 장인마을에서 모두 만들어 뒀겠지?”
“넷! 장인 마을로 가서 찾기만 하면 됩니다.”
이런 대답을 듣자 안심했다.
‘다행이야. 예비로 무기와 장비를 만들어 둬서.’
조정의 돌연한 명령으로 착호 부대가 보유하던 모든 장비나 무기를 풍기군수에게 넘기게 됐다. 물론 면포를 받고 팔게 되어 손해는 아니다. 하지만 부대의 훈련 일정은 크게 차질이 생겼다.
소대 본부 대원들만 데리고 가서 호랑이 사냥을 해야 하니 은근히 걱정이다.
특히 풍기에서 훈련하게 되는 배도치 일행들이 더욱 걱정이다.
‘배도치가 부대원들의 체력 훈련을 잘 시키고 있겠지.’
활이나 창 그리고 검이 우선하는 조선시대에서 체력이 우선 좋아야 전투력 향상을 기대할 수 있다. 그래서 무기가 공급되기 전에는 체력 훈련 위주로 조련하라고 지시했다.
장차 기마병으로 운용할 예정이다. 하지만 본시 자신의 주특기를 살려 특전을 수행하는 기마부대로 만들 생각이다. 대규모 부대를 지휘하기는 현재의 지위로 보나 스스로 능력으로 어렵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작은 규모의 부대원을 데리고 적진에 침투해 후방을 교란하거나 파괴하는 작전을 구상했다.
‘소규모 병력으로 큰 효과를 보기는 적진의 후방에 침투해서 벌이는 게릴라 전술이 제일 유리해.’
물론 당장 이웃나라와 전쟁이 터지는 것도 아니고 전투가 있는 상황도 아니다. 하지만 지금부터 차분하게 미래를 위해 준비하는 것이다. 나중에 조선을 침탈해 무참하게 유린하는 왜나 여진족의 준동을 미리 막아볼 요량이다.
‘어떤 방법이 좋을지는 추후에 생각하고 일부 군대라도 전력을 향상해 놓는 것이 좋아.’
이렇게 애국적인 마음을 먹기는 얼마 되지 않았다.
처음에는 그저 심복부하들의 전투력을 향상시켜 사병으로 양성해 백두상단의 호위무사로나 활용하려고 했다. 그저 자신이나 주변 사람만 지금보다 나은 생활을 하면 족하다고 판단했었다.
조정에서 계속해서 벼슬을 올리며 긴밀하게 연결되자 차츰 나라의 장래를 생각하게 됐다.
예비로 만든 무기나 장비들의 성능이 궁금해 물었다.
“임 상병, 급하게 만든다고 장비나 무기가 불량품들이 나오는 것은 아니지?”
“그건 절대로 아닙니다. 장인들은 자신들의 자존심 때문에도 모두 정품으로 잘 만들고 있습니다.”
“하긴, 그렇겠군. 장인들은 그런 고집이 있지.”
최인범이 사용하는 장비나 무기는 여전히 가지고 있다. 하지만 다른 부하들의 개인장비는 조정으로 보낼 50벌을 채우기 위해 모조리 벗어 줘서 지금은 거의 없었다. 그래서 장인 마을로 가서 일단 개인장비를 인수해 휴대하고 떠날 생각이다.
다각 다각.
계속 이어지는 낮은 산의 능선을 통해 말을 몰고 가는 중.
간간히 산나물을 캐기 위해 산으로 올라오는 처녀들이 보였다. 보통은 들판에서 봄나물을 캐는데 산으로 올라 산나물을 캐는 것을 보자 의무병인 장주한에게 물었다.
“장 일병, 여자들은 뭐를 캔다고 산에 오르는 거지?”
약초를 다루기 때문에 산나물에 대해 잘 아는 장주환은 즉시 답했다.
“나리, 여자들은 산에서 나는 두릅이나 돌나물, 취나물을 캐러 올라온 것 같사옵니다. 대보름도 지나 요즈음에 나오는 산나물이 제일 맛있습니다.”
이런 답변을 듣자 갑자기 산나물을 먹고 싶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장인 마을로 가면 산나물이나 먹어 봐야겠네.”
“나리, 산나물을 좋아하시는 군요.”
“특별히 좋아하기보다 여자들이 산나물을 캐는 모습을 보니 갑자기 먹고 싶어서. 그리고 야산에서도 산삼을 캐는 경우가 많지?”
이렇게 말하자 장주환은 잠시 생각하다 답했다.
“나리, 그러시면 동해안으로 가시다가 길과 가까운 절에 들리시면 산나물무침은 얼마든지 드실 수 있어요. 그리고 이제 근동에서 캐는 산삼은 모두 백두상단에서 사기 때문에 산삼 씨도 많이 구해 질 겁니다.”
“그렇겠군.”
이들이 이런 대화를 나누는 이유는 가끔 보이는 여자들 때문이다. 낮은 산자락을 타고 산길을 계속해서 가다보니 양지바른 골짜기에는 나물 캐는 여자들이 보였다.
이른 봄에 나는 산나물을 여자들이 나서서 많이 캐는 이유는 매년 오게 되는 춘궁기 때문이다.
겨울이 지나고 봄이 되어 보리가 수확되기 전에는 식량사정이 제일 좋지 않을 시기다. 그때 굶어 죽는 사람도 생겨서 보통 넘기 힘든 보릿고개라고 한다. 그래서 가난한 백성들은 최대한 식량을 아끼려고 이른 봄에는 산나물을 집중해서 캐는 것이다.
앞으로 재물이 더 많이 모아지면 간척사업이나 저수지를 만들어 볼 생각이다. 또는 하천에서 제방 사업을 벌여 농토를 늘려 대규모로 농장도 운영해볼 생각이다. 그러려면 지금의 재력으로는 자금력이 너무 부족했다.
“풍기는 전보다 살기가 좋아졌나?”
“조금은 좋아졌죠.”
이런 대화를 나누자 권영묵이 슬며시 나서서 말했다.
“소대장님, 풍기의 경제는 조금 정도가 아니라 전에 비해 살림살이가 많이 좋아졌습니다. 특히 장인마을은 우리가 계속해서 장비를 주문해서 잘사는 동네로 변했습니다.”
“그런가? 그렇게 변한 이유가 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