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5화
민천복의 제안에 최인범은 그저 빙그레 웃고 응답하진 않았다. 혼사 문제를 잘 못 거론하면 상대방의 자존심을 무척 상하게 하는 일이라 매우 조심스럽다. 또한 아직 혼인은 별로 생각하지 않았다.
‘뭐 부담감이 전혀 없는 여자라면 또 모르지.’
최인범도 남자의 속물근성이 있었다. 그렇다고 여자를 굳이 일부러 찾아서 탐하고 싶을 정도는 아니다. 그저 오는 여자 거절 안하고 부담만 없으면 취할 생각이다.
‘진득이 붙어 답답하면 첩으로 삼지.’
속 편하게 생각하면서 말을 몰아 천천히 이동했다, 물론 이런 생각은 잡스럽게 살았던 최인범의 성품과 또는 주변의 암놈을 독식하려는 동물적인 본능에서 나온 발상이다.
눈이 너무 쌓여 도로라고 해도 이동하기가 힘들었지만 다들 무사히 대강주막에 도착했다.
이제 날이 어두워지고 있어 근처에서 동원된 장정들은 신속하게 집으로 돌아갔다. 단양군수나 포졸 그리고 아전들은 대강주막에서 묵게 되었다.
포졸들은 말을 따라서 급하게 뛰어오느라 다들 지친 표정들이다.
“이제야 진짜 살아난 기분이군.”
“그런데. 착호부대 군사들은 등에 뭘 잔뜩 지고도 저렇게 싱싱하게 뛰니 도대체 뭘 먹어서 저러는 거야?”
말을 여유 있게 가지고 갔지만 군수나 나이 많은 아전들에게 넘겨줘 부대원들은 배낭을 지고 뛰어서 포졸들과 같이 왔다. 그래서 도착해서도 여전히 싱싱한 그들을 보고 다들 이렇게 놀라는 것이다.
이미 잘 구워 놓은 통돼지 고기를 먹으며 아전들이 모여서 수군거렸다. 자신의 불찰로 죽을 고생을 하게 된 이방은 다른 아전들에게 술을 권하며 사죄했다.
“정말 미안하게 됐네, 내가 잘 알지도 못하고 함부로 지름길로 가자고 해서 고생들 했네.”
“살다보면 그럴 수 있는 거지. 산속에서 갇혀 있을 때는 춥기도 하고 배도 고파서 진짜로 자네를 잡아먹고 싶고 너무 원망스럽더군.”
“내가 몇 년 전 봄에 그 개울로 물놀이를 가본 기억이 있어 그랬는데. 이건 눈이 많아지자 도통 어디가 어딘지 모르겠더군.”
이런 대화를 나누던 중에 형방이 나서서 토벌작전의 성과를 말했다.
“이번 산적 토벌작전에서 산적들은 잡지 못했지만 그래도 그들의 아내들은 모두 잡아서 성공적으로 끝냈으니 군수님은 이제 한양으로 승차해서 올라가시겠어.”
“그야 당연하지. 윤임 대감의 골치 아픈 사건도 이번에 너무 깔끔하게 처리 했잖아. 그나저나 공이 많은 최 사맹은 또 다시 품계가 오르게 될 거야.”
이런 말에 형방이 나서며 말했다.
“최 사맹의 품계가 오른 지 얼마 지나지 않았는데 또 오르려나?”
“무슨 소리야. 강원도에서 호랑이 추포로 그때 주상전하께서 이미 더 높은 품계를 하사하려다가 일부 대신들의 반대가 있어 포기했다고 하던데. 더구나 또 산적을 토벌했으니 반드시 본래 주려고 했던 품계까지 오른다고.”
지방에서 토착세력을 이루는 아전들은 그들 나름대로 한양의 소식을 접하는 소식통이 있었다. 한양에도 중인에 해당하는 하급관료들이 있어 그들과는 신분이 같다는 이유로 서로 통교하고 있었다.
어찌되었건 눈 속에서 조난당해 죽을 위험을 구해준 최인범이라 아전들 사이에서도 호의적인 대화가 오갔다. 아전들은 먼저 단양 군수나 최인범 사맹의 품계가 또 오른다는 식의 대화를 나누다가 산적들의 아내가 되어버린 여자들의 문제도 거론했다.
“아무래도 관노비가 되겠지?”
“그야 확실하지 않지. 군수께서 어떻게 장계를 쓰느냐에 따라 조금은 달라질 거야.”
주막의 건넌방에서 지내게 된 단양군수는 밤이 늦도록 우선 조정에 올려야 한 장계를 작성하느라 끙끙거리며 매우 고심했다.
토벌 작전 진행에 대한 장계는 추후에 여자들을 자세하게 조사해 올려야 한다. 우선은 산적을 토벌해 멀리 쫒아버린 기본적인 내용은 올려 보내야 된다.
단양군수의 동원령으로 산적토벌에 협조한 최인범은 조정으로 문서를 보낼 자격이 없었다. 그저 단양군수가 써서 보내는 내용으로 공적이 결정된다.
참고하라고 여자들을 조사하며 알아낸 내용도 모두 단양군수에게 넘겨주며 말했다.
“여자들의 진술서니 가지고 가서 참고하세요. 아마 특별히 거짓을 진술하지는 않았을 겁니다.”
“알았네, 관아로 가져가 다시 심문해 사실 여부를 확인하겠네.”
종합적으로 산적들의 처음부터 행적을 정리한 서류를 보고 참고했다. 산적토벌에 대한 장계를 모두 작성한 단양군수는 최인범은 불러 보여주며 말했다.
“자네가 요구하는 내용으로 이런 정도면 됐나?”
“군수님께서 하시는 일인데요. 제가 보기에 그런 정도면 여자들의 사정을 충분히 반영했다고 보입니다.”
장계의 내용은 여자들이 관군에게 모두 스스로 투항했다는 식으로 작성되었다.
사실은 산적들이 버려뒀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산채에 남아 있었다. 그러나 단양군수는 최인범의 부탁으로 아주 작은 차이지만 그것을 투항으로 표현했다.
살인죄를 저지른 사람의 경우를 제외하고는 투항하면 대부분 죄를 사면해주는 특혜가 있다는 점을 노린 장계다. 장계 안에는 최인범이나 그의 부하들이 벌인 활약 사항도 소상하게 적혀 있었다. 이런 정도면 조정에서도 부하들에 대해 어떤 좋은 조치가 있게 생긴 보고서다.
“조금 과하게 저나 부하들의 공적을 너무 높이 평가를 하셨네요.”
“아닐세. 과장이 아니고 진실이니 그리 쓴 것이지. 아무튼 다시 목숨을 구해준 일을 감사하네.”
다시 구조되던 때를 떠올리는지 그 당시의 이야기를 했다. 대부분 최인범이 던진 단창이 멀리까지 날아간 사실에 대해 문의하고 있었다.
“단창에 달린 고리가 지래 작용을 해 더 멀리 나가고 비틀어 던지면 정확성이 높아진다고?”
“그렇습니다. 하지만 사실 그것을 익히기는 매우 오래 걸리는 투창술입니다.”
“그렇군.”
이런 대화를 나누면서도 단양군수는 매우 고민하는 표정으로 조용히 입을 열었다.
“내가 자네 때문에 머리가 아프네. 당집에서 압수한 공물을 관아로 보내서 그것을 어찌 처리할지 매우 난감하게 되었어. 그러니 그 봉물의 처리 방법을 자네가 말해보게.”
“그런가요? 그냥 국고로 집어넣으면 되지 않나요?”
최인범의 이런 속편하게 하는 가벼운 응수에 단양군수는 여전히 답답하다고 난갑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자네는 내가 여러 번 말해도 아직도 주상 전하의 깊은 속에 담긴 뜻을 잘 모르는군. 그 봉물은 어떤 서류에도 존재해서는 안 되는 재물이야. 그러니 머리가 지끈거리고 아픈 거지.”
“그렇군요.”
“그러니 그 재물을 적절하게 사용할 방법이 있으면 말해 보게.”
단양군수가 하는 말의 뜻은 서류에는 나타나지 않으며 뭔가 명분이 확실한 곳에 재물을 소모해야 된다는 것이다. 주상께서도 알고 많은 사람이 아는 재물이다. 그러니 개인이 날름 처먹거나 함부로 소모할 수 없었다. 그러니 그 재물의 처리가 고민될 수밖에 없었다.
단양군수의 물음에 최인범은 잠시 생각하다가 자신의 의견을 말했다.
“제 생각에 두 가지 방법이 있다고 봅니다. 하나는 산적들의 아내가 된 사람들이 잘되어서 무죄로 방면되면 그들에게 살길을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오라, 그것도 한 가지 방법은 되겠어. 다른 하나는 뭔가?”
“죽령의 도로를 정비하는 겁니다. 개울에 돌다리도 놓아 곧게 만들고 도로에 배수구를 설치해 잘 다지고 조금 더 넓이는 등의 정비를 대대적으로 하시면 지금보다는 교통이 좋아져 단양이나 풍기가 서로 협조하며 더욱 잘사는 고장이 되니까요.”
최인범의 말에 단양군수는 무릎을 탁 치면서 기쁜 표정으로 응답했다.
“그렇군. 그런 좋은 방법이 있었어. 내 관할 단양이나 자네가 사는 고장이나 두루 잘 되는 좋은 생각이군. 내가 바로 주상전하께 주청을 드려 그렇게 처리해야겠네.”
지방의 군수가 주상께 주청을 드리는 방법은 장계뿐인데 이렇게 말하자 이상해서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러자 단양군수는 즉시 그에 대해 설명했다.
“그 재물은 서류로 남기지 말아야 하니 주상전하께 장계로 주청을 드릴 수는 없지. 내가 따로 전하께 주청을 드리는 방법이 있으니 그리 알게.”
“그렇군요.”
다음날 아침이 되자 단양군수는 포졸들과 함께 산적의 아내들을 관아로 압송해 떠났다. 최인범은 더 이상 이곳에 있을 이유가 없어 단양군수와 작별했다.
“그럼, 다음에 지나게 되면 관아로 가서 인사를 드리겠습니다.”
“꼭 그렇게 하게. 그때는 우리 수담도 나누어 보세. 나도 바둑이라면 아주 즐기는 사람일세. 실력이야 별로 높지는 않지만.”
단양군수는 주막에서 사람들이 나누는 이야기를 들었다. 장기와 바둑을 두어 최인범이 큰 재물은 아니지만 그럭저럭 많은 면포를 딴 고수라는 것을 알고 이런 제안을 했다.
최인범은 단양군수도 바둑을 즐긴다고 말하자 반가운 마음에 얼른 응수했다.
“아, 그러세요. 군수님도 바둑을 잘 두시는군요.”
“바둑을 잘 두지는 못하고 그저 즐기는 정도야. 다음에 단양으로 올 때는 미리 관아로 연통을 넣어주면 좋지. 지역의 바둑 고수를 불러서 같이 수담을 나눌 수 있으니까.”
“잘 알겠습니다.”
작별 인사를 끝내고 돌아서려는 순간 단양군수는 마지막으로 할 말이 있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참! 자네가 산삼 씨를 구한다니 나도 단양에서 구해 보내 주겠네.”
“감사합니다.”
단양군수 일행과 여자들과 아이들이 떠나는 모습을 지켜보고 나자 최인범은 배도치에게 명령했다.
“우리도 빨리 정리하고 떠나도록 하자.”
“넷!”
이미 떠날 준비를 끝낸 상태라 주모를 만나 숙박비를 계산하려고 하니 단양의 아전인 호방(戶房)이 이미 모두 지불한 상태다.
최인범 일행은 서둘러 죽령을 향해 길을 떠났다.
눈이 수북하게 쌓인 죽령을 올라 이동하던 최인범은 이곳에서 가까운 희방사 입구 근처인 댓미골에서 사는 심마니들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희방사 근처에 사슴들이 많다고요?”
“예, 사슴과 고라니 그리고 멧돼지가 엄청나게 불었어요. 호랑이가 사라지니 특히 멧돼지가 극성입니다. 겨울이라 먹을 것이 부족해 그런지 마을로 많이 나타납니다.”
“그래서 농가들이 피해가 있나요?”
“예, 멧돼지들이 사람을 보면 도망치지 않고 덤비니 문제죠. 저희 마을에서도 벌써 여러 명이 다쳤습니다. 특히 희방사 절 마당에는 사슴들이나 고라니 그리고 멧돼지들이 자주 돌아다니고요. 스님들이 가끔 먹을 것을 줘서 더욱 그런 모양입니다.”
어차피 사냥도 수련과정 중에 하나다. 그런 생각으로 심마니들이 산다는 마을 근처에서 활동하는 멧돼지를 사냥하기로 결정했다. 그래서 심마니들과 약속하고 있었다.
“그럼, 우리가 멧돼지를 잡아 줄거니. 잡은 멧돼지를 가지시고 대신 산삼 씨를 구해 줄 수 있어요?”
“예, 최대한 구해 드리죠.”
심마니들은 산삼 씨를 구해서 인삼(장뇌삼)을 재배하고 있었다. 물론 규모가 아주 작고 그냥 마을 근처의 음지에 살포해 놓는 정도다. 아직은 재배 기술이 발달하지 못해 씨의 소비가 많은 편이다.
최인범이 구상하는 인삼(장노삼) 재배는 현대화된 재배방법인 그늘막을 설치해 대단위다. 그렇기 때문에 반드시 많은 씨가 필요했다.
‘산삼 씨를 구할 좋은 기회야.’
사실 이 시절은 인삼이란 산삼을 칭하는 것이고 현대처럼 산삼, 장뇌삼, 인삼이란 구분이 전혀 없었다. 산삼(山蔘)을 인삼(人蔘)이라 칭하는 이유는 뿌리가 사람 형상을 닮았다고 해서 붙여진 것이다.
나중에 산삼 씨를 인공적으로 파종해 키운 장뇌삼 그리고 그 후에 완전히 품종이 개량된 인삼으로 구분되게 된다. 심마니들의 요구대로 마을 근처에 출몰하는 멧돼지를 사냥하고 결국 희방사까지 올라가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