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8화
<인연과 악연들>
남쪽으로 내려가며 백삼수는 벌써부터 매섭게 다그칠 최인범의 무서운 모습을 떠올리자 두려웠다.
사실 서로 잘해보자고 벌인 미녀를 동원한 비밀스러운 뇌물 공세다. 하지만 그것이 자칫하면 크게 문제가 될 소지가 많았다. 하지만 이미 저질러진 사건이라 침묵해야 한다.
‘설마하니. 나는 전혀 모르는 일이라고 하면 죽일 수야 없을 거야. 협박해도 모른다고 답하며 배 째라고 버텨 보자고.’
한편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행보를 주시하고 있는지 전혀 모르는 최인범은 단양에 도착했다. 단양은 자신이 처음으로 사람들과 접촉한 곳이라 조금 의미가 있었다.
전에 평창으로 올라갈 때는 착호부대와 같이 같으니 세세하게 돌아볼 기회가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여유가 있어 단양을 천천히 둘러볼 생각이다.
그러나 단양에 도착하자마자 단양군수가 보낸 통인을 만나게 되었다.
최인범 일행은 단양 관아로 가게 되었다. 동헌으로 들어가자 단양군수는 매우 다급한 표정으로 사정했다.
“최 사맹! 긴히 부탁 좀 합시다.”
지방 수령인 군수(종4품)께서 말단에 해당하는 사맹(정8품)에게 사정하고 있었다. 뭔지 모르지만 다급한 일이 생긴 것 같았다. 분명 산적이나 또는 호랑이가 출몰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휘하에 부하들도 별로 없는 처지로 함부로 나설 일이 아니다.
최인범은 군수가 다급해 하지만 전혀 모른 척 태연하게 응수했다.
“무슨 일인지 모르나 저는 바로 죽령을 넘어야 합니다.”
못 도와주겠다는 식으로 선수를 치자 단양 군수는 더욱 다급했다. 군수가 다급한 이유는 자신이 지닌 포졸로는 상대하기 어려운 산적들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근처에서 활동하던 다른 착호 부대원들도 전혀 없었다. 얼마 전까지 충청도의 동부 지역에서도 착호부대가 활동했었다.
40대 후반인 단양군수는 매우 초조한 표정으로 말했다.
“최 사맹, 우리 고장에 갑자기 산적들이 떼로 나타나 행인을 약탈해 조정에서 문책을 받게 생겼네. 그러니 나 좀 도와주시게.”
아니나 다를까 산적들을 소탕해달라고 부탁하자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
“저는 지금은 착호부대가 완전히 해산되어 휘하에 부하들이 별로 없어요. 그러니 산적들 소탕작전에 참여할 수도 없습니다. 그러니 널리 양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우리도 포졸을 움직이니 지금 데리고 있는 사람들과 같이 가면 되는 소탕작전이요.”
최인범은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거절했다.
“설사 그렇더라도 저는 검교직이라 함부로 움직이기 곤란합니다. 더구나 산적 소탕은 이제 조정에서 보상금을 없애고 전면적으로 중단한 상태인데요.”
“보상이야 내가 별도로 해주면 되지 않겠소?”
“설사 그렇더라도 힘듭니다.”
호랑이를 잡으면 조정에서 보상금을 받지 않더라도 호피나 뼈나 살코기를 일반에게 판매해 필요한 재물인 많은 면포가 생긴다. 하지만 산적을 잡아봐야 공적은 조금 오를지 모르지만 보상금에 대해서는 막연했다.
‘지금은 보상금이나 공적 점수를 기대하기도 어려워.’
지금은 공적 점수를 올리기가 여간 어렵지 않았다. 생포가 아니면 죽일 경우 산적이라는 증거가 확실해야 공적을 올리게 된다.
공적 점수 심사가 전에 비해 무척 까다로워졌다.
처음에는 산적 소탕에 대한 보상금이나 공적을 올리는 점수가 제법 많았다. 하지만 많은 보상금이나 공적 점수 때문에 큰 문제가 생겼다.
전국에서 공적을 올리거나 보상금을 타기 위해 어처구니없는 잔악하며 염기적인 사건들이 벌어졌다. 산속에서 사는 심마니나 또는 화전민을 몰살해 죽이고 산적을 소탕했다고 조정으로 보고서를 올리는 사태가 벌어졌다.
일부 지역에서는 늦여름에 홍수가 나서 물에 빠져 죽은 변사체를 산적이라고 보고하는 경우도 있었다. 보상에 눈이 어두워져 별 이상한 일들이 많았다. 전국에 분포되어 활동한 착호 부대들도 그런 비슷한 사건들을 저질렀다.
또한 지방의 수령인 군수, 현령, 현감도 그런 짓을 서슴없이 벌였다. 잡으라는 산적들은 전혀 안 잡고 애매한 백성들만 무참하게 죽인 것이다.
사실 조정에서 산적 소탕에 급급했다. 너무 쉽게 생각하다 보니 지방의 탐관오리들은 그런 허점을 노린 것이다.
조사해서 드러난 것만으로 각 도에서 한 두건이 벌어졌다. 그래서 많은 지방수령들이 파직을 당하고 유배 떠났다. 일부 관련자인 갑사나 포졸 그리고 고을의 수령들은 백성을 학살했다고 극형인 사약을 먹이거나 효수형에 처해져 처벌 받기도 했다.
산적이나 호환 못지않은 시끄러운 사태가 전국에서 벌어졌었다.
‘산적이란 조금 애매모호한 점들이 많아.’
사실 그런 학살사건 때문에 기존의 착호 부대는 완전히 허물어졌다. 그래서 최인범의 착호 부대도 해산되고 새로운 부대를 조직하기로 결정된 것이다. 또한 정규군이라는 갑사들도 대폭 바꿔야 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그런 사실 때문에 조정에서는 팔도로 암행어사를 파견 보낸 상태다.
‘어떤 경우는 산적인지 평범한 양민인지 구분하기가 매우 모호한 경우도 많아.’
깊은 산속에서 화전민으로 살다가 배가 고프면 산길을 통해 고갯길에서 행인들을 털고 다시 화전민으로 돌아가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니 산적인지 그냥 화전민인지 확인하기가 참으로 애매모호한 경우가 많았다.
‘자칫해서 실수라도 하면 개 박살이 나.’
별로 하고 싶지 않은 산적 소탕을 군수가 간곡하게 부탁하자 최인범은 그런 사실이 떠올라 회피하고 싶었다. 더구나 자신의 고향도 아니고 타지인 충청도에서 함부로 산적소탕 작전을 참여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
“군수님, 저는 아무리 생각해도 참여하기가 힘들겠네요.”
다시 어렵다고 말하자 군수는 더욱 다급하게 매달렸다.
“최 사맹, 어려울 때 나를 조금만 도와주시오. 부하들이 없으면 지금 있는 부하들만 참여해 옆에서 도와만 주시오. 사실 이번 산적 출몰 사건은 경상도도 관련이 많소.”
“예, 그건 무슨 말씀이죠?”
“사건은 충청도인 단양군에서 벌어졌지만 산적들이 탈취해간 물건들은 모두 경상도에서 한양으로 올려 보내는 물건들이야.”
도통 잘 알아듣기 힘든 설명이다. 죽령을 넘어가면 한양으로 가는 짐들이 대부분이다. 그러니 굳이 경상도나 충청도를 따질 이유가 전혀 없었다. 도대체 무슨 영문인지 궁금해서 물었다.
“그 물건이 왜 경상도의 물건이라고 하죠?”
“사실 그 물건은 모두 경상도의 안동과 경주 지역에서 한양의 윤임 대감에게 보내는 봉물과 조정으로 보내는 진상품이기 때문이네.”
“전하께 보내는 진상품이라고요? 그런 짐을 포졸들이 호송하지 않고 누가 날라서 산적에게 털려요?”
“사실 그게 조금 설명하기 곤란한 물건들이 같이 있어서 그러네.”
이런 설명을 듣자 단양군수가 다급해 하는 이유를 조금은 알 것 같았다.
‘오라! 거의 뇌물이군.’
윤임이야 세자의 외숙으로 한창 권세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있었다. 더구나 정적으로 소윤이라 불리는 윤형원 형제를 멀리 유배 보냈기 때문에 그를 대적할 위인은 조정에는 없었다.
그래서 조선 팔도의 지방 수령들은 윤임 대감에게 잘 보이려고 혈안이 되어 있었다.
윤임 대감에게 보내는 봉물이란 당연히 뇌물이다. 그러니 그것이 외부로 드러나면 문제가 되니 이래저래 단양군수는 노심초사 하고 있었다.
‘그래서 관찰사에게 보고해 병력 지원 요청을 못하는군.’
충청도 관찰사는 윤임 대감의 정치세력에 속한 사람이다. 그러니 단양군수는 신속하게 산적을 소탕해 봉물짐을 찾던가 아니면 깔끔하게 사라져 버리게 처리해야 되는 시급한 상황이다.
아무리 윤임이 세자의 외숙이라고 하더라도 엄청난 뇌물을 받는 증거가 정확하게 나타나면 삼사(三司)가 들고 일어나 탄핵을 받게 된다. 윤임 대감에게 선을 대고 있는 단양군수는 자신의 영달을 위해서도 이번 사건을 빨리 처리해야 된다.
조금 사태를 파악하게 된 최인범은 조용히 물었다.
“내가 어떻게 해달라는 겁니까?”
“우선 산적들의 소재를 파악해 주고 그들의 일부만 잡아 주면 되오.”
“완전 소탕이 아니고 일부만 잡아요?”
“그렇소. 그대가 전에 보초를 서는 산적들을 잡았다고 하니 그런 식으로 산적 한 두 명만 생포해 오면 되는 거요.”
이런 요구에 최인범은 너무 어이가 없었다. 군수의 말에 의하면 산적들의 소재도 전혀 파악하고 있지 않으면서 무조건 잡아달라니 그런 추포작전은 결코 쉬운 임무가 아니다.
“군수님, 산적들의 소재도 파악 못했다니 저는 더욱 참여하기가 어렵습니다. 숨어 있는 산적을 찾기가 어디 그리 쉬운가요? 제가 산적을 찾는 이상한 신통 술이 별도로 있는 것도 아니고.”
“물론 어려운 줄은 잘 아네. 하지만 숨어서 사는 호랑이도 잘 찾아서 잡았으니 비슷하게 산속에서 숨어 사는 산적들도 찾기가 쉬울 것 아닌가?”
“그건 군수님께서 잘 모르는 말씀입니다. 전혀 그렇지 않아요.”
최인범이 보기에는 단양군수는 참으로 답답한 인사다. 호랑이야 풍산개를 이용해 호랑이 흔적을 찾아 냄새로 추적이 가능하다. 하지만 산적은 일반 사람들과 같으니 찾는 것이 쉽지 않았다.
도대체 언제 터진 사건인지 궁금해 물었다.
“도대체 사건은 언제 터진 겁니까?”
“벌써 보름이나 지났네.”
보름이 지난 사건이라고 하자 최인범은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그런 정도 시간이 흘렀다면 약탈한 물건들은 벌써 사라지고 산적도 멀리 도망칠 시간이 흐른 것이다.
그래서 짜증난 표정으로 다소 퉁명스럽게 응수했다.
“뭐요? 그런데 아직도 소재를 찾지 못한다면 근처에 없는 것이 아닙니까?”
“그저 짐작이지만 아직 산적들이 탈취한 물건들이 외부에 전혀 나타나지 않은 것으로 보아 근처에 잠적해 있다고 보네. 그러니 그들이 과연 봉물짐을 어찌 처리한 것인지 우선 알아내도록 산채를 찾아서 산적을 생포해 주게. 그러면 우리는 대대적인 화공으로 산적을 소탕하겠네.”
대대적인 화공을 펼친다는 말에 최인범은 군수가 미쳤나 싶었다. 그래서 급하게 응수했다.
“아니? 산에 큰 불을 질러서 산적들을 모조리 불태워 죽인다고요? 만약 산적들에게 억울하게 끌려간 사람이 있으면 어찌 하려고요?”
“지금 상황에서는 어쩔 수 없네.”
“뭐요? 지금 그것을 말씀이라고 하세요?”
“산적에게 탈취당한 봉물짐만 사라지면 되니 그 수가 현재로는 최선일세.”
문제는 뇌물이 외부로 들어나지 않도록 해야 한다. 산적들이 소유한 봉물짐의 소재만 정확하게 파악되면 대대적으로 화공을 펼칠 생각이다. 뇌물의 증거인 재물까지 모조리 사라지게 한다는 뜻이다.
이런 말을 듣자 최인범은 속으로 생각했다.
‘아마도 뇌물인 물건들 속에 중요한 서찰이 들어 있거나 아니면 누가 누구에게 보내는 뇌물인지 정확하게 기록해둔 모양이군.’
이런 복잡한 사건에 끼게 되면 나중에 더욱 혼란스럽게 변할 수 있었다. 그래서 못하겠다고 하려다 문뜩 떠오른 생각이 있었다.
‘그렇지! 그때 그 무당을 찾아오던 산적 놈이 있었지.’
이미 1년이나 지난 일이다. 그러니 지금도 무당이 산적과 내통하고 있다고 볼 수는 없었다. 하지만 만약 여전히 보급품 조달을 위해 무당과 접선하고 있다면 쉽게 꼬리를 잡을 수 있다고 판단했다.
‘어차피 산적이란 확실한 증거를 잡아야 하니 관아와 협조하던 안하던 상관없어.’
그래서 다소 애매하게 승낙했다.
“우선 소재가 파악되어야 하니 당분간 머물며 조사를 해보죠.”
“고맙소. 이제야 안심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