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화
연락병인 최산필의 보고를 받자 최인범은 즉시 되물었다.
“한양에서 선전관이 직접 내려 왔나?”
“넷! 한정문이라는 종4품인 선전관입니다.”
“뭐? 그 사람이 또 여기로 와?”
한정문 선전관은 전에는 정5품이던 무관인데 한 계급이 올랐다. 최인범은 자신과 격투기를 직접 겨룬 그가 주상전하의 명으로 이곳에 왔다고 하자 반가웠다.
“혹시, 우리 착호부대는 어찌 한다는 것은 모르나?”
“그건 잘 모르겠습니다. 일단 관아의 동헌으로 내일 중으로 전 부대원을 데리고 이동해서 오랍니다. 제 느낌이지만 부대를 여기서 해산한다는 것 같았습니다.”
“알았어. 내일 아침에 가면 되겠군.”
이제 한양에서 교서가 내려왔으니 앞으로 어떻게 될지 모른다. 그러니 오늘이 부대원들과 실질적으로 같이 지내는 시간이다.
착호부대가 정식 착호갑사로 이루어진 부대가 아니다. 얼마든지 즉시 해산이 가능했다.
그저 느낌이지만 해산하라는 명령이 내려온 것 같았다. 이제 이 일대에서 호환이 완전히 사라졌으니 부대를 존속시킬 이유는 없었다. 조정에서는 큰불은 껐다고 판단할 것이다.
최인범은 즉시 배도치에게 명령했다.
“배 반장, 모든 식량이나 보급품을 보급병과 협조해서 부하들에게 골고루 배분해 주도록 해. 분대별로 남긴 면포도 분대원들에게 모조리 나눠 주고.”
이런 지시에 배도치도 즉시 눈치를 채고 응수했다.
“소대장님, 그렇다면 우리 부대가 해산되나요?”
“아직은 정확하게 모르지만 일단 그렇게 처리하는 것이 좋아. 공연히 분대의 공동 기금으로 남겨야 여러 가지로 머리만 아프니까.”
“알겠사옵니다.”
부대를 운영하기 위한 공금이라고 많은 재물을 보유하고 있어봐야 골치만 아프다. 남들의 구설수에 올리거나 조정에서 욕심을 부릴 염려가 많았다.
그래서 일단 나중에 어찌 되더라도 공동기금으로 남겨둔 재물은 부대원들에게 줘 분산시키기로 했다.
‘어차피 이참에 떨어져나갈 놈들은 떠나보내는 것이 좋아.’
이렇게 판단하고 보급병이나 행정병이 가진 재물도 분산해서 일단 정산해 놓도록 지시했다. 이런 지시로 부대원들은 밤이 늦도록 보급품을 분배 받아 새로 짐을 꾸리게 되었다.
당연히 전에는 후일을 위해 남겨 놓았던 고기나 가죽 그리고 식량도 모조리 나눠줬다. 말의 먹인 건초나 콩은 말을 보유한 사람들에게 넘겨졌다.
다음날 아침 일찍이 부대는 소형천막을 철거하고 빠른 속도로 이동해 평창군 관아로 가게 되었다. 별로 멀지는 않은 거리라 오전 중에 도착했다.
평창군 관아의 동헌 앞마당에 착호부대원들이 보부도 당당하게 도열했다. 그제야 한정문 선전관이 큰 목소리로 주상께서 내리신 교지를 읽었다. 교지 내용은 착호부대의 대원들에 대한 공적에 따른 포상이다.
서두에 부대가 이룬 공을 치하하는 장황한 글귀가 있었다. 그리고 부대장인 최인범은 비록 검교직이지만 정8품인 사맹(司猛)으로 임명한다고 했다. 품계를 두 계단나 올려 승진시켜 주었다.
이어서 부대원들 중에 양반들의 경우는 모두 검교직인 부사용(종9품)으로 임명했다. 그래서 부대원의 거의 반수에 해당하는 20명이나 검교직으로 착호갑사인 부사용으로 임명되는 교지를 별도로 받았다.
한정문 선전관은 부대 전체에 내리는 명령을 읽었다. 착호부대는 이제 임무가 모두 끝났으니 여기서 해산하고 각자 본업으로 돌아가라는 내용이다. 이렇게 교지 내용이 발표되자 최인범은 즉시 물었다.
“아니? 타지에서 갑자기 해산하면 어찌 고향으로 돌아가고요?”
“그거야 각자가 알아서 돌아가면 되지 않나? 더구나 조정에서 보상 받은 면포도 많은데. 다들 여비로 쓸 면포를 충분히 가지고 있지 않나?”
“그야 그렇지만. 원대 복귀를 시키고 해산하는 것이 원칙이죠.”
“정규군이 아닌데 그렇게 할 필요가 없지.”
사냥이 끝나면 사냥개를 잡아먹는다는 토사구팽도 아니고 갑작스런 해산 명령에 최인범은 은근히 열불이 났다.
더구나 신분을 철저하게 구분해 임명장을 주었다. 이제까지 자신은 물론 양민들의 경우 양반들의 벼슬자리를 얻어주기 위해 헛고생한 것 밖에 안 되게 생겼다.
‘기어이 조정에서 탈을 잡았어.’
웅성웅성.
이렇게 되자 부대원들은 약간 술렁이고 있었다.
양민 출신 부대원은 단 한 명도 부사용에 임명되지 못했다. 그러니 이건 분명히 조정에서 양반과 양민을 차별 대우하는 조치다. 그러나 부대원들은 그렇다고 대놓고 불평이야 못하고 그저 수군거리는 정도다.
이어서 한정문 선전관은 검교직인 부사용으로 임명된 양반들에게 제안했다.
“검교직인 부사용들 중에서 착호갑사로 실직을 받고 싶은 사람은 모두 나와 같이 한양으로 올라가면 돼. 그래서 내년 초에 그들을 주축으로 한양과 경기도에서 활동하는 착호 부대를 새로 만들게 되니까. 지원자가 있으면 그대로 동헌에 남으면 돼.”
이런 조치를 듣던 최인범은 너무 황당해 물었다.
“부사용만 실직을 준다고요?”
“그렇다네. 물론 자네는 한양으로 올라가도 나이 때문에 실직을 줄 수가 없고. 자네는 일단 고향으로 돌아가 지내며 내 후년이 과거이니 그 준비나 하시게.”
결국 부대를 해산함과 동시에 두 조각으로 완전히 분산해 버린다는 의미다. 이런 조치가 조정에서 내려지자 최인범은 순간 뭔가 크게 어긋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군가가 우리 부대에 영향력을 발휘한 거야.’
자신이 염려하던 사태가 결국 벌어지고 말았다.
‘그놈의 신분제도가 또 말썽이야.’
사실 엄격한 신분사회인 조선왕조다. 그런데 양반이나 양민이 마구 뒤엉켜서 상하구분이 없도록 부대를 운영한다는 것은 사회적으로 큰 문제다.
호랑이를 잡은 실적이 너무 좋다가 보니 다른 착호 부대에서 불만을 토했을 수도 있었다. 너무 많은 호랑이를 잡아 보상금을 너무 많이 챙기자 크나 큰 문제까지 생겼다.
자신이 이곳에 오기 전에 항상 염려했던 갑작스러운 해산명령이다.
그러나 이미 철저하게 대비는 해두고 있어 최인범은 행정병들에게 즉시 지시했다.
“어제 정산한 그대로 면포들을 모두 부대원에게 넘기도록 해.”
“넷!”
결국 소대 공동자금까지 분배해서 모두 나누어 주게 되었다. 물론 사노비인 구종이나 여전히 노비인 칠복이 형제들이나 부대장인 최인범 자신도 분배를 받았다.
모조리 나누어 주고 나서 최인범은 한정문 선전관에게 슬며시 물었다.
“풍기로 돌아가야 하는 부대원들이 한 번에 이동하는 것은 상관이 없나요?”
“그야 상관은 없겠지. 하지만 20명 이상이 떼를 지어 무기를 들고 동시에 이동하려면 지나가는 관아에 매번 신고해야 하니 잘 생각하게. 내 생각에는 10여 명씩 분산해서 이동하는 것이 좋아.”
“잘 알겠습니다.”
최인범은 부대원들에게 무사히 돌아가라고 당부하며 크게 외쳤다.
“부대! 해산!”
해산 명령이 떨어지자 부대원들은 동헌 밖으로 나갔다. 양반출신으로 검교직인 부사용에 임명된 사람들은 동헌의 마당에 그대로 남았다.
그들은 한양으로 올라가면 명예직이 아닌 실직을 준다니 선전관을 따라 한양으로 올라갈 생각들이다. 결국 양민출신과 양반출신이 완전히 둘로 갈라진 것이다.
떠나는 부하들과 작별 인사를 하기 위해 동헌에서 밖으로 나왔다. 양민 출신인 부대원들은 단 한명도 떠나지 않고 그대로 기다리고 있었다.
“왜? 풍기로 돌아가지 않나?”
“돌아가긴 가야죠. 하지만 풍기로 돌아가도 별로 할 일이 없어서요.”
“그래? 그렇다면 풍기로 돌아가서 동물농장에서 같이 나와 같이 짐승이나 키우면서 지내면 되겠군. 필요하면 백두상단의 호위무사로 근무해도 되고.”
“감사합니다.”
최인범은 배도치에게 지시했다.
“배 반장은 부대원을 인솔해서 멧돼지 새끼를 가지고 풍기로 먼저 돌아가도록 해. 이동할 때는 조를 둘로 나누어서 떠나고.”
“알겠습니다. 그런데 소대장님은 언제 풍기로 가시고요?”
“나는 뒤에 천천히 갈 것이니까 먼저 풍기군으로 돌아가서 멧돼지를 동물농장의 우리에 넣어 놓고 잠시 집에서 쉬면 돼.”
이런 지시에 배도치는 고개를 끄덕이고 즉시 답했다.
“알겠습니다. 집으로 안가는 사람은 동물농장에서 지내게 하면 되죠?”
“그게 좋다면 동물농장에서 지내며 소나무도 베어내고 같이 도우면서 지내. 나중에 내가 풍기에 도착하면 별도로 조치를 해줄 것이니까. 그렇더라도 틈나면 무술은 계속해서 익히고.”
“알겠습니다. 명을 따르겠사옵니다.”
결국 배도치를 비롯한 양민출신인 부대원들은 2개 조로 나뉘어 떠나고 있었다. 그들이 떠나고 나자 최인범은 다시 동헌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3명의 행정병이 다가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소대장님, 저희들은 한양으로 올라가지 않겠습니다. 어차피 몇 년은 복무해야 검교직인 부사용을 하겠다고 생각했는데 덕분에 빨리 됐으니 한양으로 올라가고 싶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앞으로 뭐를 하려고?”
“동물농장에서 일을 한다니 저희들도 소대장님과 같이 일하며 틈틈이 무술을 수련할 생각입니다.”
이렇게 답하자 최인범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이번의 부대 결성에 제일 어려웠던 점은 행정처리 때문에 많은 시간을 소모했다. 그러니 이들 행정병들이 옆에 남아 있다는 것이 좋기는 했다. 하지만 나중에라도 이들은 자신의 주변에서 떠날 수 있으니 그때 문제가 생길 수 있다고 판단했다.
“알았네. 그럼 조건이 있네. 자네들의 사노비인 구종을 모두 나에게 넘겨줘야 되겠네.”
구종들이 행정병들을 도왔으니 한문 서찰 작성 이외에 부대의 행정 업무는 모두 숙달되어 있다고 판단해 이렇게 제안했다. 또한 양반이라고 해서 구종을 데리고 동물농장에서 같이 지내지 못한다는 뜻이다.
또한 사노비란 반역죄가 아니면 주인을 배신하지 못하게 된 점을 고려했다. 그러자 잠시 생각하던 행정병들이 즉시 답했다.
“알겠습니다. 그렇게 하죠.”
“면포는 200필로 정하겠네.”
“알겠습니다. 노비 매매 서류를 만들어 넘기겠습니다.”
최인범은 이렇게 조치를 내리고 두 의무병을 만났다. 두 사람을 만나려는 이유는 그들의 사노비인 구종도 이참에 사볼 생각이기 때문이다.
양반인 의무병들은 실질적으로 의학 지식이 별로 없었다. 그들의 사노비인 구종들이 의학 지식이 있다. 그 때문에 농장에도 치료사가 필요하다고 판단해 그들은 수중에 넣을 생각이다.
의무병들을 만나 슬며시 제안했다.
“한양을 기마갑사로 가는 것이 아니니 사노비를 나에게 팔게. 그리고 말도 팔고. 어떤 가? 한양으로 올라가면 재물이 많이 필요할 것 같은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