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화
<준착호갑사의 양성>
사랑채에서 지내던 먹쇠, 돌쇠, 갑중이는 이제 축사 옆인 행랑채로 가서 지내게 된다. 그들이 사용하던 사랑방은 명봉 댁으로 불리는 비구니 출신과 월녀가 같이 지내게 되었다.
25살 나이인 명봉 댁은 쓰라린 지난 세월을 잊고 싶다고 고향도 말하지 않고 이름도 말하지 않았다. 그래서 결국 그녀가 산적에게 잡힌 사찰의 명칭을 따서 명봉 댁으로 불렸다.
일순이 자매의 아비인 콩 장사는 소송을 취하했다. 산적을 잡아 조정에서 공로를 인정받아 벼슬하게 생긴 최인범에게 더 이상 시비를 걸다가는 다칠 수 있는 위험성이 높았다. 오히려 양반을 상대로 소송해 모독한 죄로 풍기관아에서 곤장 10대를 맞았다.
관아에서 풀려난 콩장사가 절룩거리며 농장으로 찾아와 최인범에게 사정했다.
“선달님, 저는 두 번 다시 딸들 주변에 나타나지 않겠사옵니다. 용서해 주세요.”
“앞으로 노름하지 마시오. 노름이란 패가망신을 당하는 행위가 아니요.”
콩 장사는 두 번 다시 딸에게 접근하지 않겠다고 단단히 약조하고 아예 풍기에서 멀리 떠났다. 그래도 아비라고 일순이 자매들은 떠나는 아비에게 그동안 삯바느질해서 벌게 된 면포를 모조리 넘겨주었다.
“아버님, 혹시 근처에 오시면 꼭 들리세요.”
“아니다. 이제 멀리 충청도로 가서 살 거다.”
“충청도 어디요?”
“충청도 정산으로 갈 생각이야. 그곳에는 칠갑산 자락의 밭들이 많아 콩을 키우기 좋다고 하니 앞으로 콩 장사는 때려치우고 콩 농사나 지어야겠다.”
결국 아비는 주변에서 살다보면 딸들에게 계속 손을 벌릴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해 아예 생이별 하듯이 멀고먼 타지로 떠난 것이다.
꽃뱀에게 물린 최인범이 동물농장에만 처박혀 있는 동안·····.
풍기군수는 산적들을 소탕하기 위해 착호갑사와 포졸 그리고 장정들을 동원해 산채를 쳐들어갔다. 그러나 그곳에는 산적들이 모조리 도망치고 병들어 버려진 여자들 5명만 구할 수 있었다.
죽령 근처에서 출몰하던 왕눈이가 두목인 산적패들은 멀리 충청도의 월악산 쪽으로 달아났다.
산적들의 출몰 때문에 일시적으로 행인이 대폭 줄어들었던 죽령은 이제 상인들이 활발하게 오가는 중요한 교통로로 다시 변했다.
또한 호환이 극성했으나 착호갑사나 호랑이 사냥꾼들이 적극적으로 사냥에 나섰다. 근동에서 출몰하던 호랑이들은 죽거나 생포되었다. 나머지는 모두 깊은 산중인 강원도로 달아났다.
호랑이들이 깊고 높은 산이 많은 강원도 쪽으로 대부분 이동했다는 것은 그쪽 지역에 호환이 자주 발생하기 때문에 알 수 있었다.
어느덧 햇볕이 너무 강렬해 저절로 그늘을 찾게 되는 뜨거운 여름이 되었다.
최인범은 동물농장에서 지내며 월녀의 회계교육이나 부하들의 무술지도에 전력을 다했다. 시간이 흘러 무더운 여름이 되자 약간 의문이 생겼다. 마루에 앉아 부채로 더위를 식히며 중얼거렸다.
“아니? 조정으로 산적 잡은 공적을 올린지가 언제인데 아직도 소식이 없어.”
혹시 풍기군수가 공적서류를 조정으로 보내지 않았나 하는 의심이 들었다. 하지만 같은 입장인 병방의 말에 의하면 정확하게 조정으로 보냈다고 했다.
이때 백두상단을 이끌고 단양으로 장사를 떠났던 백삼수가 동물농장으로 찾아왔다. 그는 안동에서 간고등어와 안동포를 대량으로 사서 예천, 풍기, 영천, 그리고 충청도의 단양이나 제천까지 판매하러 다녔다.
백삼수는 마루로 다가와 선물을 펼쳤다.
“뭔가?”
“단양으로 갔다가 구입한 자석벼루입니다.”
단양의 특상품인 자석벼루는 돌이 단단해 먹을 잘 흡수하지 않아 먹을 갈아 놓고 오래 사용할 수 있다. 또한 벼루가 쉽게 마모되지 않는 특성을 지녔다.
백삼수는 조심스럽게 그가 지나온 지역의 소식을 전해주었다. 대부분 별로 관심을 둘만한 사항들은 아니다. 계속해서 흘려듣던 최인범은 그가 하는 말에 귀가 번쩍했다.
“창락골의 윤 진사의 아들인 윤태길이 한강에 있는 노들나루의 도진별장에 임명되어 한양으로 떠났다고 합니다.”
“포도청에서 고문을 당해 병들어 누었다던데 멀쩡한 모양이군.”
“제가 알기로는 엄살을 부린 것 같습니다. 호피를 4장이나 사서 바쳐 명예직인 검교직이 아니고 실직인 도진별장이 되었다고 하네요.”
백삼수의 말에 최인범이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
“본래 나루터를 지키는 별장은 도승(渡丞)이라고 하지 않나?”
“그러지요. 하지만 도진별장이라고도 부릅니다.”
이런 대답을 듣자 최인범은 속으로 생각했다.
산적이야 잡아서 죽여도 남는 것이 전혀 없었다. 하지만 호랑이는 잡으면 호피나 기타 써먹을 것이 많으니 조정에서 빨리 조치를 내리는 것 같았다.
자신이 하려던 별장을 허접한 놈이 재물로 사게 되자 은근히 뿔이 났다. 벼슬이 욕심나서가 아니라 일이 깔끔하게 정리가 안 되어 은근이 짜증난 것이다. 실직을 받은 윤태길의 경우 전에 한양으로 뇌물을 많이 보낸 효과가 있었던 것 같았다.
잠시 객쩍게 이런 생각을 하던 최인범은 여전히 싱글벙글거리는 백삼수를 바라보며 너무 이상해서 물었다.
“백 집사, 무슨 좋은 일이 있냐? 왜 실실 웃고 그래.”
“에이! 입이 간지러워서 참지 못하겠네요. 선달님, 아니지 이제부터는 사용님이지요.”
“사용이라니, 무슨 사용?”
사용(司勇)은 오위도총부 소속의 하급관리인 정9품의 벼슬이다. 그리고 갑사로 통칭되는 정규군들의 직급으로 임명되는 지위다. 호랑이를 전문으로 사냥하는 착호갑사들도 사용이나 부사용 때로는 그보다 높은 직급인 사맹이나 부사맹도 있었다.
백삼수는 다시 설명했다.
“지금 죽령을 넘어서 선전관이 내려와요. 접장님을 검교직이지만 착호갑사인 사용으로 임명하고 풍기군수도 중앙으로 영전했고요.”
“어디로?”
“그건 잘 모르고 지금 종4품인 군수이니 최소한 정4품으로 한 계급은 올라가겠죠.”
한 계급을 오르려면 보통 2-3년은 소모해야 하는데 예상한 계급보다 한 계단이 높다니 싫지는 않았다. 문제는 하필이면 착호갑사인 사용 벼슬이라니 앞으로 계급이 오르려면 계속 호랑이를 잡아야 된다.
‘에이, 별로 좋은 것도 아니네.’
속으로 이렇게 생각하지만 겉으로는 빙그레 웃었다. 벼슬하면 잔치를 여는 것이 보통이라 백삼수는 즉시 제안했다.
“사용님, 우리 잔치를 해야죠?”
“무슨 잔치를 해. 검교 직이라 녹봉도 전혀 없는 단순한 명예직인데. 나는 돈이 없으니 네가 잔치하려면 해. 잔치에 쓸 고기는 사냥해서 장만하던지.”
이렇게 말하자 백삼수가 즉시 답했다.
“사용님, 잔치비용은 선물이 들어오면 그것으로 충당하면 되죠. 벌써 잔치에 쓰라고 윤 진사께서 면포 100필을 보냈사옵니다.”
“뭐? 윤 진사가 왜?”
“전에 딸을 구해 줬잖아요. 그때 모른 척했던 것이 은근히 마음에 걸렸던 모양이죠.”
약아 빠진 윤 진사로는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처세술이다. 벼슬한 잔치에 쓰라고 면포도 받아서 챙겼다고 하니 결국 승낙했다.
“알았어, 그 면포 범위에서 잔치를 해.”
이렇게 지시하는 중에 풍기 관아에서 통인(通引)이 찾아와 군수의 전갈사항을 전했다.
“선달님, 사또께서 빨리 의관을 갖추고 관아로 오시랍니다. 한양에서 벼슬의 임명장을 가지고 선전관이 오신다고 하옵니다.”
“알았어, 바로 가지.”
서둘러 의관을 차려 입고 풍기 관아로 가게 되었다. 그의 앞에는 새로운 인연이 기다리고 있었다.
관아의 동헌으로 가자 풍기군수를 비롯한 6방 관속의 아전은 물론 포졸 그리고 이 지역의 많은 양반들이 모여 있었다.
웅성웅성.
다소 시끌벅적한 가운데 사람들은 한양에서 내려오는 선전관들이 도착하길 기다렸다.
조금 시간이 지나자 말을 타고 3명의 선전관이 도착했다. 왕명을 받은 선전관들의 수장으로 정5품 선전관인 한정문이 내려왔다. 선전관은 참상관도 있고 참하관도 있다.
한정문은 덩치도 우람하고 호걸 같은 분위기를 풍기는 사람이다. 너무 위풍당당한 모습이라 최인범 속으로 감탄했다.
‘대장군의 풍체군.’
군왕의 명령인 교지를 받들기 위해 군수가 절을 올리고 최인범도 옆에 서 있다가 따라서 절했다. 왕명에 의해 풍기군수인 양진묵은 예문관의 응교(정4품)로 임명되어 한양으로 떠나게 되었다.
이어진 다른 교지에는 풍기군의 병방이던 정만수가 별장(종9품)으로 임명했다. 그는 영양현으로 떠나게 되었다.
제일 마지막으로 최인범이 검교직으로 착호갑사인 사용(정9품)에 임명하는 교지가 내려졌다. 하급 무관인 갑사의 경우 무과를 보지 않고 수시로 취재(取才)라는 형식으로 특별히 임명되기도 한다.
일단 왕명을 전하고 나자 한정문은 양진묵 군수에게 가볍게 덕담을 던졌다.
“영전을 축하드립니다. 앞으로 잘 부탁합니다.”
“아이고, 고맙습니다. 제가 부탁을 드려야죠. 한양으로 올라가면 반드시 찾아뵙도록 하죠.”
일단 풍기군수에게 덕담을 던진 한정문이 최인범을 위아래도 살펴보며 약간 놀란 표정을 지었다.
“최 사용은 소문보다 더 어려 보이는군. 자네가 수박도를 잘 한다니 나와 한번 겨루어 보세.”
“예? 여기 서요?”
“어디 다른 곳을 갈 필요가 있나? 오해는 하지 말게. 자네의 무술 실력이 뛰어나다고 해 특별히 주상전하께서 자네와 무술을 겨루어 보라고 하교하셨네.”
이렇게 말하니 겨루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것 참 골치 아픈 일이 생겼군.’
어찌 되었건 지금으로는 올려다보기도 힘든 높은 직위인 상관인 셈인데 격투기를 겨루려니 여간 찜찜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냥 두들겨 맞아 줄 수도 없는 노릇이다.
최인범은 갓을 벗고 나서 준비하는 한정문에게서 강한 승부욕을 보이는 투지를 보았다. 이런 모습에 자신도 모르게 같이 투지가 생겼다.
드디어 거추장스럽던 옷은 벗고 바지와 저고리 차림으로 두 사람은 겨루게 되었다.
“탓!”
“핫!”
처음에는 서로 주먹이나 장권 등으로 드잡이 질을 시작하다 나중에는 발길질을 서로 교환했다. 최인범은 상대방의 공격을 요리저리 피하며 가끔 발길질이나 주먹질을 했다.
휘익!
“차!”
“타!”
두 사람은 바람소리를 내며 손과 발로 격렬하게 공격과 방어를 했다.
겉으로 보면 아주 심하게 결투를 벌이는 모습이다. 하지만 두 사람 모두 결정적인 공격은 하지 않았다. 서로 그저 상대방의 실력을 가늠해 보는 정도다.
한참을 겨루던 두 사람은 이마에 땀방울이 송송 배어나왔다.
드디어 조금 더 강도 높은 공격을 상대방에게 마구 퍼부었다. 불꽃 튀는 대결을 하지만 승부는 전혀 나지 않았다. 손기술로는 분명 한정문이 뛰어나 보이지만 발길질은 최인범이 뛰어 났다.
그리고 최인범의 몸이 더 날래고 도약력이나 회피 동작은 더욱 빨랐다. 한참을 겨루어도 결국 승부가 나지 않자 한정문이 공격을 멈추고 나서 말했다.
“자네 실력은 충분히 알았으니 우리 그만 하지.”
“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