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화
멧돼지 고기가 모조리 사라지자 최인범은 돌쇠에게 면포 200필짜리 어음을 넘겨주고 지시했다.
“너, 가서 이 면포로 망아지를 한 마리 사와.”
“망아지요? 선달님, 면포가 200필이면 큰 말도 사는데요. 제가 싸게 살 수 있어요.”
돌쇠의 이런 응수에 최인범은 고개를 가로 저으며 지시했다.
“당장 큰 말은 더 필요 없으니 망아지로 사고 나머지는 돼지를 사와.”
“알았어요.”
이곳에서 지내는 사람들이 많다보니 아무래도 음식물 찌꺼기인 구정물이 많이 나오게 된다. 그래서 이번 기회에 돼지도 몇 마리를 키워 보기로 결정했다.
이미 어미 멧돼지를 잡았으니 멧돼지 새끼를 잡게 되면 그것들도 우리에 넣어 같이 키워서 먹기 좋은 교잡종을 만들어볼 구상이다.
‘과수원을 운영하려면 거름도 많이 필요하니 돼지도 사육하는 것이 좋아.’
이렇게 판단한 최인범은 며칠간 돼지를 키울 축사를 지으며 시간을 보냈다.
돌쇠가 망아지 한 마리를 사오고 어린 돼지를 무려 20마리나 사왔다. 그래서 돼지를 키울 축사가 많이 필요했다. 뿐만 아니라 진짜 순종인지는 모르지만 호랑이도 잡는다는 풍산개인 강아지도 몇 마리 사왔다.
이렇게 되자 먹쇠가 장작을 시장에다 팔아서 거위와 병아리 그리고 오리새끼와 집토끼도 많이 사왔다. 농장은 점점 진짜로 여러 종류의 동물들을 키우는 동물농장으로 변했다.
한편으로는 월녀에게 곱하기와 나누기를 집중적으로 알려 주었다. 틈나면 반복해서 알려주자 월녀는 그럭저럭 기본적인 수리에 대해 알게 되었다.
“월녀야, 너는 앞으로 상단의 서기로 일해야 하니 빨리 배워.”
“네, 오라버니.”
벼슬자리도 좋지만 우선 처음 계획한 백두상단의 사업이 제일 중요하기 때문에 마음이 조금 급했다. 별로 믿을 놈이 되지 못하는 백삼수에게 상단운영을 전적으로 맡기기는 조금 불안했다.
‘항상 따라 다니기도 그렇고 골치가 아프군.’
월녀에게 회계방법을 알려주어 서기를 시키면 그나마 조금 안심할 것 같았다.
최인범은 우선 월녀의 교육 때문에 많은 시간을 보내고 다른 일은 조금 소홀했다. 물론 칠복이 형제나 배도치 일당의 무술 수련이나 군사 훈련은 하루 종일 반복했다.
무술이나 군사훈련은 오랜 기간을 반복적으로 수련해야 실전에서 사용이 가능했다. 그 때문에 몇 가지만 알려줘도 계속해서 그들 스스로 훈련에 임했다. 대장간에 주문한 천막 지주목을 겸한 단창도 20개가 농장으로 가져오게 되자 그것으로 새로운 투창술을 지도했다.
손가락 굵기로 만들어진 단창은 길이가 1미터를 조금 넘는다. 그리고 손잡이 부분에 가죽 끈이 달려 단창을 투척할 때 끈의 지래 작용을 더해 더 멀리 던지게 된다. 고대 그리스 병사들이 사용하던 단창의 형태다.
투창술을 숙달하게 되면 사슴이나 멧돼지 그리고 호랑이 사냥에도 아주 유용한 힘을 발휘하는 단창이다. 각자 2개씩 줘서 항상 휴대할 수 있도록 했다.
최인범은 투척 요령을 알려주고 나서 배도치와 그의 부하들 그리고 칠복이 형제에게 지시했다.
“투척하는 방법을 배웠으니 수시로 반복해서 연습해서 숙달되도록 익혀 두도록 해. 어느 정도 숙달되면 산토끼나 멧돼지도 단창을 투척해 잡아보고.”
“알겠습니다.”
어느새 산적을 잡고 농장으로 돌아온 지 보름이 지났다. 이제 들판에는 농부들이 농사를 짓기 위해 쟁기질이 바쁘고 날씨는 더욱 빠르게 따스해졌다.
일순이 자매와 월녀는 가끔 들에 나가서 나물을 깨다가 돈 나물 무침이나 맛난 냉이 국을 끓여주었다. 이곳 동물농장은 각자의 역할을 담당하며 점점 자리를 잡아가고 있었다.
한창 안방에서 월녀에게 산수를 알려주는 중에 관아의 아전인 형방이 찾아왔다.
“무슨 일이죠?”
“자네를 고발하는 소장이 관아에 접수되어서 찾아왔네.”
갑작스럽게 관아로 자신을 고발하는 소장이 들어 왔다는 소리에 최인범은 화들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도대체 누가 왜 무슨 사건으로 고소했는지 알 도리가 없었다. 그래서 최인범은 다소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며 형방을 바라보았다.
그런 최인범을 보더니 형방은 일순이 자매를 힐끗 쳐다보며 말했다.
“저 애들의 아비가 자네를 고소했네.”
“뭐요?”
“어떻게 해서 저 애들이 이 집에서 살게 된 것인지 말해보게.”
소장이 관아로 접수되면 조사하기위해 흔히 관아로 부르게 된다. 사또는 그렇게 하지 않고 형방을 보내 진상을 알아보라고 지시했다.
최인범은 이미 어찌된 사실인지 정확하게 알지만 전혀 모른 척 간단하게 답했다.
“나는 죽은 최 진사가 저 애들과 아비가 연서로 쓴 고용계약서에 따라 그대로 집에서 지내도록 한 거요. 그게 무슨 잘못이 있나요?”
“그럼, 노비가 아니고 단순한 고용계약서라는 거요?”
“그렇지요. 본래 고용계약서는 제 선친이 살아있을 때까지지만 자매들이 집으로 돌아가고 싶어 하지도 않고 계속 지내고 싶어 해서 계약 기간을 늘린 것이죠.”
“그 계약서가 있나?”
“당연히 있죠.”
최인범은 안방의 궤짝에 들어 있는 계약서를 꺼내 보여 주었다. 계약서는 두 장으로 하나는 최 진사가 작성한 계약서이고 다른 하나는 백삼수가 조작해서 만든 계약서다.
계약서에는 일순이 자매들은 이 집에서 안살림을 하면서 지내게 된다. 또한 개인적으로 벌게 되는 재물은 모두 최인범에게 맡기다가 혼인할 때 혼수를 장만해서 가지고 간다는 내용이다.
계약서를 읽어 본 형방은 이상하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이건 저 자매들의 아비가 고발한 내용과 너무 다르군.”
“그런가요? 조금 이상하군요. 나는 전에 최 진사가 말하기를 저 애들의 아비인 콩 장사가 노름을 너무 즐겨 노름 빚 때문에 딸을 팔아먹는 못 된 아비라 딸들을 구해주기 위해 이런 고용계약서를 썼다는 소리만 들었습니다. 아무튼 내가 아는 것은 그것뿐입니다.”
“알았네. 다시 조사해보고 나중에 다시 찾아오지. 계약서는 잠시 내가 가지고 가야겠소.”
“그건 안 되죠. 그게 원본이니 여기에 놔두고 사본을 만들어 가져가야죠. 굳이 원본을 가지고 가려면 지금은 소용없는 최 진사가 작성한 계약서만 가지고 가시죠.”
“알았네.”
원본을 보내지 않으려는 이유는 계약서가 조작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원본을 넘겨주게 되면 자세하게 살펴 글씨체가 틀린 점을 발견할 수 있다. 그리되면 조작 혐의가 드러나니 일단 사본을 적어서 가져가라고 했다.
문방사우를 꺼내주자 형방은 고용계약서를 그대로 옮겨 적고 뜬금없이 말했다.
“자네, 보름 전에 관아에다 가져다 놓은 사체는 어찌 방치하고 놔두나?”
“뭐요? 그거야 사또께서 처리하지 않았나요?”
“무슨 소리인가? 자네가 가져온 사체이니 자네가 깔끔하게 처리해야지. 봄이라 사체 썩는 냄새가 진동하니 빨리 처리를 하시게.”
이런 말에 최인범은 너무 어처구니가 없었다. 산적의 시신이야 관아에다 넘겨줬으니 당연히 사또가 처리해야 되는데 자신보고 처리하라니 황당했다.
‘군수나 되는 놈이 도통 뭘 모르네.’
순간 이렇게 생각했지만 이내 왜 이런 말을 하는지 깨달았다.
‘아차, 내가 이미 병방에게 면포를 받고도 산적을 생포해 오지 않아 벌어진 독촉이군.’
양반을 상대로 공적을 사고파는 일이라 병방은 콩장사의 고소 사건을 기화로 자신에게 빨리 그 건에 대해 마무리 해달라는 뜻을 이렇게 전한 것이다.
봄이 되어 시체가 완전히 썩게 되면 졸지에 변사체로 판결이 날 수도 있다. 그러니 최인범은 별 수 없이 병방의 요구도 들어주고 또한 고소사건도 원활하게 해결하기 위해 산적을 생포하러 갈 수밖에 없다고 판단했다.
‘산적을 잡으러 가야 되겠어.’
어차피 검교직을 노리고 시작한 작전이니 깔끔하게 정리하는 것이 자신도 마음이 편했다. 그래서 형방에게 즉시 말했다.
“무슨 소린지 잘 알겠소. 내일 아침 일찍 해가 뜨기 직전에 떠날 갈 것이니 병방에게 두산골에서 만나자고 전해 주시오.”
“알았네. 그렇게 전하지.”
최인범의 이런 말을 듣자 형방은 그제야 관아로 돌아갔다.
‘빨리 떠나는 것이 좋겠어.’
병방과 같이 움직이기가 불편한 최인범은 즉시 칠복이 형제에게 명령했다.
“칠복아, 말 두필을 가지고 떠날 것이니 배도치에게도 전해. 군장 잘 꾸리고.”
“넷!”
이런 지시를 내리고 나자 안방에서 군장을 꾸렸다. 산적을 습격해 생포해야 되니 밧줄이 많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밧줄 두 뭉치를 배낭에 챙겨 넣었다. 이미 산적들의 산채는 잘 알기 때문에 오래 걸릴 생포 작전은 아니다.
‘어디로 도망치지 않았으면 금방 끝날 침투작전이야.’
이윽고 군장을 다 꾸려서 밖으로 나가려고 할 때 밖에서 배도치가 크게 외쳤다.
“선달님, 떠날 준비 모두 끝났사옵니다.”
“알았어.”
배낭을 짊어지고 밖으로 나오니 배도치와 부하들이 배낭을 짊어지고 단창을 들고 기다렸다. 그래서 즉시 지시했다.
“너희들은 먼저 떠나. 우린 말을 타고 뒤 따라 갈 것이니까.”
“넷!”
배도치와 5명의 부하들이 군장을 매고 빠르게 이동했다. 그동안 훈련을 계속해서 그런지 제법 깡똥한 모습으로 일정한 속도를 유지하며 달렸다.
이때 멀리 안동까지 상행을 떠났던 백삼수가 말을 4필을 가지고 농장으로 돌아왔다. 말 등에는 많은 짐을 싣고 다가와 보고했다.
“접장님, 지금 막 도착했습니다.”
“그래? 말은 샀나?”
“아닙니다. 예천을 들려 최진웅에게서 받아온 것입니다. 계약서의 내용이 무과급제가 아니고 무관이 되면 인수를 받게 된다고 조금 억지를 부렸더니 불평하면서도 넘겨주긴 하더군요.”
“그러냐? 마침 잘 됐어. 말이 필요하던 참인데.”
백삼수는 최인범이 어디로 떠나는 행장이라 슬며시 물었다.
“접장님, 어딜 가시려고요?”
“별일은 아니야. 갑갑해서 애들을 데리고 조금 멀리 훈련을 다녀오려고.”
“그렇군요. 그럼 이번 장사의 결산은 언제 하죠?”
“우선 장부를 정리해서 월녀에게 넘겨줘. 그 애가 수익금이나 비용을 쓴 내역을 자세하게 살펴서 정산서를 작성할 것이니.”
“알겠습니다.”
말에 실린 짐을 내리고 그중에 제일 좋아 보이는 말에 안장을 올리고 칠복이 형제에게 지시했다.
“너희들도 말을 타고 가니. 빨리 준비해.”
“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