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화
“잘 알았어요. 관포로 준비해 놓고 기다리죠.”
최 선달은 이제 부친을 봉양하는 문제도 최 진사가 모두 책임진다는 형태라 부담감은 완전히 사라졌다. 이제부터 자신은 무과를 보기 위해 무술 연마에 힘쓰기만 하면 된다.
검술은 물론 궁술이나 창술 그리고 기마술까지 모조리 새로 익혀야 하는 상황이다. 더구나 말도 생겼으니 해야 할 일들이 많아졌다.
‘부지런히 움직여야 해.’
정리할 일들을 떠올린 최 선달은 어린 노비들과 같이 서둘러 벼락주막으로 갔다.
그런 최 선달을 바라보던 최 진사는 그가 멀어지자 즉시 먹쇠에게 지시했다.
“너, 들고 다니던 새끼줄 가지고 돌쇠와 같이 낮과 작대기를 들고 나를 따라와.”
“넷!”
이곳에서 사과 과수밭과 인삼을 재배할 생각이라 우선 벌목할 지역을 표시해야 한다. 먹쇠가 그동안 꼬아 만든 긴 새끼줄이지만 그런 정도로는 표시할 수 없었다.
“먹쇠야! 새끼줄 잘라서 그 나무에 감아.”
“예이!”
작대기 두 개를 세워 그저 눈짐작으로 선을 이어서 걸리는 소나무에 새끼줄을 묶도록 지시했다.
먹쇠와 돌쇠는 땀을 펄펄 흘리면서 눈이 쌓여 푹푹 빠지는 온 산을 뛰어다녔다. 대략 벌목할 소나무들을 표시하고 나자 준비된 새끼줄을 모조리 써버렸다.
“먹쇠야, 앞으로 너는 여기서 지낼 것이니 시간이 나면 새끼줄 많이 꼬아 놓아!”
“예, 진사님, 그런데 얼마나요?”
“지금보다 10배는 많아야 하니 그렇게 알아.”
“소인 잘 알겠나이다.”
최 진사는 먹쇠에게 베어낼 소나무들에 대해 자세하게 설명해 주었다.
“먹쇠야! 나중에는 모조리 베어 버릴 것이야. 하지만 우선 집과 가까운 소나무부터 잘라서 반듯한 것은 나중에 집지을 재료로 남기고, 나머지는 네가 장작 패서 시장에다 팔아.”
“예. 진사님.”
구름이 가득해 다소 어두운 하늘에서 빛이 계속해서 발산되었다. 과거 일어났던 빛과는 다른 다소 음침한 빛이지만 사람들은 전혀 알아보지 못했다.
최 진사는 자신에게 어떤 불행한 운명이 서서히 다가오는지 전혀 모르고 태연하게 나름의 희망찬 미래를 꿈꾸며 먹쇠에게 지시를 내렸다.
“먹쇠야, 집에서 때는 나무야 벌목한 소나무의 잔가지와 잡목이면 충분하니 그렇게 하고.”
“진사님, 잘 알겠나이다.”
산에서 내려온 최 진사는 오른쪽의 사랑채를 보며 지시했다.
“집수리가 모두 끝나면 앞으로 너희들은 여기서 지내. 여자들은 살림살이하기 편리하게 모두 부엌 쪽의 새로 방들인 사랑채를 쓰고.”
이런 지시에 돌쇠가 즉시 물었다.
“진사님, 새로 들이는 방은 구들까지 놓으려면 며칠 지나야 되잖아요?”
이런 물음에 최 진사는 매몰차게 응수했다.
“이놈아! 그때까지야 너희들은 추녀 밑에서 거적을 쓰고 자던 각자 요령 것 알아서 하는 거지. 그것까지 내가 일일이 말해줘야 하냐?”
“알겠사옵니다.”
큰 목소리로 우렁차게 답한 먹쇠는 마음이 급해졌다. 추운 엄동설한에 그냥 거적만 쓰고 자다가는 얼어 죽기가 십상이다. 당장 오늘밤에 잠잘 것이 걱정되자 급하게 다른 두 녀석에게 소리쳤다.
“야! 돌쇠야 우리 지게 지고 산으로 나무하러 가자.”
“알았어!”
먹쇠는 조갑중을 바라보며 다부진 목소리로 지시했다.
“갑중이는 도끼와 톱 챙겨서 따라와.”
“알았어!”
먹쇠가 주도적으로 앞장서서 나서는 것을 보며 최인범은 빙그레 웃었다.
세 녀석은 모두 같은 나이라 서로 묘한 주도권 싸움이 있었다. 그런데 하는 행동으로 보아 머리가 다소 모자라 보이는 먹쇠가 우두머리 역할을 했다.
‘보기보다는 먹쇠가 제법 똑똑해.’
최 진사는 장목수를 만나 새 건물 건축과 수리 공사를 잘 하도록 부탁하고 서둘러 초가집에서 떠났다.
남아 있는 세 소녀들은 바쁘게 부엌으로 가서 밥을 짓기 시작했다.
“이순 언니! 쌀 많이 퍼야지?”
“그래, 한 되는 더 퍼야 돼. 삼순아.”
눈치로 보아하니 이제부터는 새로 온 세 명의 오라버니들과 한 집에서 살아야 한다. 쌀을 더 푸라는 이유는 그들의 밥도 같이 지어야 하기 때문이다.
전에 살던 집에는 보리와 콩 그리고 조만으로 밥을 해 먹었지만 여기는 전혀 달랐다.
순전히 쌀밥을 해먹어도 되고 보리와 콩을 섞어서 해먹어도 누구도 간섭하지 않았다. 더구나 식량은 아주 넉넉하다고 하며 밖으로 퍼내지만 말고 마음껏 해먹으라고 했다.
외딴집이라 호랑이가 울자 너무 무서웠다. 그러나 앞으로는 듬직한 오라버니들이 세 명이나 같이 지내게 되니 마음도 푸근해졌다.
더구나 젊은 주인인 최 진사 어르신은 매우 후한 것 같았다.
“일순 언니, 콩을 조금 넣어서 해먹자.”
“좋지.”
일순이, 이순이, 삼순이라고 불리는 세 명의 자매들은 밥하는 부엌일이 너무 즐거웠다.
초가집을 나선 최 잔사는 먼저 풍기주막으로 향했다.
말이야 매몰차게 먹쇠에게 했지만 세 녀석에게 솜이불이라도 보내줄 심산이다.
눈길을 터벅터벅 걸어 풍기 주막으로 돌아와 묵고 있는 방으로 갔다. 종종거리며 기다리던 최복동이 궁금한 표정으로 조심스럽게 물었다.
“진사님, 언제 봉화로 떠나실 거죠?”
“왜? 벌써 아내가 그렇게 보고 싶은가?”
이런 물음에 최복동은 화들짝 놀라며 급히 답했다.
“예? 무슨 그런 말씀을. 그게 아니라 종놈들도 모두 여기에 놔두신다니 이상해서요. 그 애들도 놔두시면 이제 갈 때가 됐다고 생각돼서요.”
최 진사는 잠시 생각하다가 앞으로의 일정을 설명했다.
“금명간 봉화로 돌아가야지. 하지만 지금 선산 아래에 마구간을 짓고 있으니 그것이 대충이라도 끝나야 떠날 수 있지. 소와 말은 돌쇠가 여기서 키우니까.”
“아하! 그렇군요.”
최 진사는 방의 구석에 쌓여 있는 면포와 쌀 등을 보며 지시했다.
“최 서방, 면포 30필만 놔두고 깔끔하게 처리해야겠어. 숙박비는 모래 아침까지면 계산하고.”
“진사님, 모래면 떠나나요?”
“대략 그렇게 떠날 생각이야.”
“알겠사옵니다.”
“최 서방의 아내가 쓸 면포로 10필을 별도로 놔두고 나머지는 모조리 먹쇠에게 가져다 줘. 거기에 녀석들이 덮고 잘 이불이 없으니 이불부터 사다 주고. 파는 이불이 없으면 솜이라도 사다 주면 만들어서 덮고 자겠지.”
“알겠나이다. 소인 바로 처리하겠나이다.”
“이제 사람도 없으니 방은 하나만 쓰고 같이 자도록 해.”
“예이!”
최 진사는 지시를 끝내고 나자 바쁜 걸음으로 풍기 관아로 향했다.
관아로 들려 그곳에서 아전인 공방(工房)을 만나 그에게서 거리를 측정하는 주척 하나를 얻었다. 지방의 공방은 고을 관아에서 건축이나 토목 공사 등 도량형에 관한 사무를 보고 있다.
공방에서 얻은 자인 주척(周尺)은 중국의 주나라에서 만든 자라고 해서 그리 불렸다. 1주척은 20,7센티미터로 조선의 경우 고려시절부터 사용하는 자다.
굳이 주척을 사용하려는 이유는 사대주의(事大主義)도 아니고 그저 자신에게 익숙한 미터법을 적용하기 제일 쉬운 자이기 때문이다.
이미 조선의 거리측정에 주척을 널리 사용했다. 그 때문에 조선에서는 여러 가지의 자가 사용되지만 최인범은 하나로 통일해 백두상단에서 사용해볼 계획이다.
벼락주막으로 향하는 최 진사는 발걸음이 무척 가벼웠다.
‘좋았어. 이제 내가 해야 할 일들을 하면 돼.’
최 진사는 벼락주막으로 가서 백두상단(白頭商團)의 운영에 관한 문제만 깔끔하게 마무리하고 풍기를 떠날 예정이다.
상단의 일만 잘 정리되면 편안한 마음으로 봉화현의 집으로 돌아갔다가 한문공부를 위해 부석사로 떠날 수 있었다. 그러나 마음 한구석으로는 은근히 걱정됐다.
‘백여우 녀석이 변수야.’
최 진사는 백삼수를 앞으로 백여우라고 칭하기로 결정했다. 이유는 그가 매우 위험한 인물이라는 것을 항상 뇌리에 담아둘 필요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백여우가 감히 장물을 취급하다니.’
백두상단에 접장으로 최 선달이 있다고는 하나 장사에는 별로 소질이 없는 것 같았다. 그러니 실질적으로 장사하고 백두상단을 이끌어갈 백삼수가 자신의 뜻과 같이 잘 움직이게 될지 은근히 걱정이다.
‘백여우가 내 뜻대로 잘 움직여 줄지 모르겠어.’
하고많은 사람 중에 음양인이라고 추측되는 녀석을 만나서 다루려니 약간 고민이다.
백여우를 이용해 자금을 불려 자신이 바라는 목적을 이루려니 벌써부터 머리가 지끈거렸다. 그러나 그런 놈도 다루지 못하면 앞으로 하고자하는 일을 아무것도 못할 것 같았다.
‘그런 녀석 정도야. 나에게 걸렸으니 밥이지.’
마음을 다잡은 최 진사는 백삼수가 음양인이 확실하다면 활용 가치가 높다고 판단했다. 앞으로의 행보에서 여러모로 이용할 수 있는 꼬리가 여섯은 달린 백여우가 분명했다.
잔머리로 가득한 머릿속에서는 경천동지할 엄청난 음모들이 저절로 떠올랐다. 인생이란 ‘위기가 곧 기회.’라니 이건 위기가 아니고 분명히 좋은 기회라고 판단했다.
‘좋았어, 그놈을 최대한 활용하자고.’
최 진사의 입가에서는 미묘하고 의미 삼삼한 미소가 살포시 품어졌다. 뭔지는 모르지만 아주 음험한 생각을 하는 것 같았다.
미래란 전혀 알 수 없는 것이 세상사다.
내성천 변에 있는 벼락 주막에는 많은 사람들이 몰려왔었다. 이제는 주막으로 찾아오는 사람들이 별로 없었다. 이유는 이곳에 있던 많은 물건들이 모두 관아로 보내지거나 소상인들에게 모조리 팔렸기 때문이다.
이제는 벼락 주막도 정상적으로 운영했다. 다만 최 선달의 일행이 건넌방과 행랑채에서 장기 투숙을 약속하고 지낸다는 것만 달라졌다.
최 진사는 벼락 주막에 도착해 최 선달을 만났다. 건넌방 안으로 들어가 최 선달에게 면포 200필짜리 어음을 4장이나 넘겨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