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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임트레인-67화 (67/519)

67화

서서히 발걸음을 옮기자 눈이 내린 뒤에 약간 녹은 터라 부드득 부드득하며 발에 짓눌리는 작은 소리가 들렸다.

짧은 기간이지만 두 사람은 이런 저런 인연으로 서로 엮인 것이 너무 많았다. 운명의 수레바퀴는 앞으로 어떻게 돌아갈지 전혀 모른다.

다시 만나게 된 두 사람은 천천히 하얀 눈 위에 발자국을 내면서 각자의 진로를 생각했다.

높은 산줄기가 이어져서 내려오다가 나지막한 언덕을 이루는 야산.

마치 긴 조롱박을 엎어놓은 형태의 산에는 많은 눈이 쌓여있었다. 산등성이에는 싸늘한 바람이 점점 거세졌다. 잔뜩 흐린 날씨로 보아 아무래도 눈이 더 많이 내릴 조짐이 보였다.

많이 내렸던 눈이지만 이미 남쪽은 대부분 녹았다. 야산의 정상으로 오르는 경사도는 완만하고 다른 지역보다 매우 온화한 곳이다.

초가집의 뒷산으로 천천히 오르는 최 진사는 뒤에 묵묵히 따라오는 최 접장을 가끔 뒤돌아봤다. 무슨 이야기부터 먼저 꺼내는 것이 좋을지 망설였다.

‘산의 소유권을 이전하는 이야기부터 하면 자존심 상해서 기분 나빠할까?’

하지만 해서 소유권이 결정되어야 앞으로 하려는 일들이 순조로울 것 같았다. 그래서 소유권에 대해 설명하기로 결심했다. 모든 것을 툭 털어놓고 허심탄회하게 대화하는 편이 좋다고 판단했다. 이미 땅의 소유주인 최용민과는 거래하기로 합의가 끝난 상태다.

초가집에서 충분이 떨어졌다고 판단한 최인범 진사가 먼저 손을 슬며시 내밀었다.

“이렇게 다시 만나네요. 우리 구면이니 악수나 합시다.”

“그렇군요.”

두 사람은 악수하면서 입가에 미묘한 미소를 지었다. 참으로 괴이한 경험을 하고 있다. 이름이 똑 같은 두 사람이 이상한 곳에서 살아가기 때문에 쓴 웃음이 저절로 나왔다.

굳게 악수를 나누고 나자 아까 최 접장이 자신을 부르던 호칭이 생각나 빙그레 웃으며 가볍게 말을 건넸다.

“만나자 마자 크게 최 형이라고 불러서 조금 당황했소.”

“최 진사님이란 칭호가 너무 어색해서 엉겁결에 그랬네요.”

최 접장의 이런 응수에 최 진사는 가볍게 대꾸했다.

“그게 그렇게 어색하면 그냥 형님도 좋지.”

그러자 최 접장은 장난기 어린 말투로 가볍게 다시 응수했다.

“에이, 객지 벗 10년이라는데 그냥 친구가 어떻습니까?”

“뭐? 그것도 나쁠 것도 없지. 하지만 장유유서라고 위아래는 있어야 되니 잘 생각하시오.”

최 진사가 고리타분하게 장유유서(長幼有序)를 들먹이자 최 접장은 다소 어이가 없지만 틀리지는 않은 말이라 가볍게 답했다.

“좋습니다. 뭐로 봐도 형은 형이니 형의 대우는 해 드리죠.”

최 접장의 응수에 환하게 웃으며 그래야 하는 이유를 자세하게 설명했다.

“내가 최 선달에게 형의 대우를 받자는 것이 아니라 서로 그래야 실수가 적어진다는 겁니다. 자칫 너니 나니 함부로 칭하다보면 서로 여기서 안 쓰는 단어들이 우리들도 모르게 불쑥 불쑥 튀어 나오게 되요. 그리고 나는 앞으로 최 접장을 최 선달이라고 칭할 거요.”

“알았어요. 무과에 응시 자체도 못해본 저에겐 과한 호칭지만 예외도 있으니 좋습니다.”

선달(先達)이란 문무과 급제자로 관직으로 나가지 못한 사람을 칭했다. 그러나 대부분 무과(武科)가 그런 경우가 많아 무과 급제자로 관직에 오르지 못한 사람을 통상적으로 칭했다.

때로는 과거에 급제하지 못했더라도 무예가 출중한 사람에게도 붙여서 사용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래서 이름을 부르기 곤란하니 선달과 진사라는 칭호를 사용하기로 결정했다.

야산의 정상으로 오르자 그곳에는 작은 규모인 산소가 여러 개 보였다.

동그란 산소들 앞에는 자그마한 비석들이 일자로 나란히 서있었다. 산소에는 양쪽에 망두석(望頭石)만 서있고 기타 석물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정상에 오르는 두 사람은 잠시 산자락을 바라보며 깊은 생각에 잠겼다.

최 진사는 다시 한 번 자신의 사업계획을 속으로 점점했다.

잠시 침묵하고 나서 산자락을 휘하니 손으로 지적하며 입을 열었다.

“최 선달, 여기가 최 진사라는 사람의 종산이요. 어쩌면 내 선조일 가능성도 있소.”

“아, 그렇군요. 일찍 최 진사의 재산 상황을 파악하셨네요.”

최 진사는 가볍게 설명하는 것이 편하다고 판단해 계속 말을 이어갔다.

“창락골에서부터 항상 옆에 행랑아범이 같이 있어서 비교적 쉽게 재산 상태를 알게 된 거요. 물론 그러기 위해서 한동안 골이 좀 많이 아팠지만······. 그렇다고 초가집이 있는 토지까지는 아니고 집터와 밭으로 된 1정보는 그대 부친인 최용민 어르신의 소유요.”

“그렇군요.”

일단 선산이나 집터 주변의 토지 소유권 대해 자세하게 설명했다.

최 진사는 천천히 발길을 돌려 북쪽으로 비스듬히 있는 구릉 지역을 손으로 지목하며 설명했다.

“최 선달, 북쪽인 여기서 저쪽까지 약 3정보가 되고 남쪽으로 2정보가 되어 총 5정보요. 내가 굳이 여기 선산에 대해 말하는 이유는 앞으로 나는 최선달의 소유가 될 남향의 밭까지 모조리 같이 개발해보고 싶어요.”

1정보는 3000평씩으로 5정보라 총 15000평을 말한다. 최 선달의 소유가 될 밭까지 합산하면 18000평이다. 그래서 작은 언덕과 같은 야산 하나의 전부를 차지했다.

북쪽의 구릉 지역에는 아름드리 소나무가 울창했다. 남쪽은 북쪽보다는 다소 작은 소나무가 가득했다. 개발하려면 노력이 많이 필요하고 힘들어 보이는 곳이다. 하지만 소나무를 모조리 베어내고 밭으로 일구면 일부는 아주 좋은 밭으로 변하게 생긴 야산이었다.

최 진사의 자세한 설명에 최 선달은 약간 의외라는 표정을 지으며 응수했다.

“아! 그래서 산을 오르자고 했군요. 그런데 무슨 개발을 하시려고요? 지금은 부동산 투기를 하는 시절도 아니고 그렇게 발전될 지방도 아닌데.”

“그건 그렇지 않아요. 앞으로 여긴 많이 발전된다고 봅니다. 물론 우리가 하기 나름이지만.”

“아하, 그런 이야기인가요.”

가볍게 응수하는 최 선달을 보며 잠시 하던 말을 멈추었다.

그가 계속해서 침묵하자 답답한 것인지 드디어 최 선달이 슬그머니 입을 열었다.

“최 진사님, 졸지에 여기로 와서 살려니 쉬운 것 같으면서도 너무 어렵네요.”

“최 선달, 그야 나도 마찬가지요. 물가도 전혀 모르고 도무지 함부로 움직이지도 못하겠고. 나는 한문 실력도 별로 없는데 턱하니 한학자 같은 진사인 몸으로 살아가야 하니 죽을 맛이요.”

이렇게 엄살을 떨고 나서 잠시 침묵하다가 다시 설명했다.

“행랑아범인 최복동은 어사를 따라다니던 종자 출신이죠. 그는 노련한 형사는 저리가라 할 정도로 눈매가 아주 예리하니 나는 바늘방석에 앉아 있는 기분이요.”

“그래요. 그런 사람이 옆에 있으면 신경이 많이 써지겠군요.”

앞날이 아득한 생각이 들어 심란한 표정으로 말했다.

“앞으로 봉화로 돌아가면 내가 어린 시절부터 하던 행동을 잘 아는 사람들이 지천일 것인데 앞날이 진짜로 아득해요.”

“그렇겠군요.”

“그렇다고 마냥 바보처럼 굴 수는 없고, 살아남기 위해서 어렵고 힘든 한문 공부를 새로 시작하려니 벌써부터 머리가 쥐가 나고 미치겠소.”

최 진사가 이렇게 탁 터놓고 애로사항을 말하자 최 선달도 따라서 마음속에만 담고 있던 힘든 점을 토해냈다.

“최 진사님도 그런 애로사항이 있었군요. 최 진사님은 그래도 가복으로 충성심은 확실하게 있으니 다행한 일이 아니요. 나는 옆에 여자도 아니고 남자도 아닌 것 같은 괴상한 놈이라 때로는 미치고 환장할 지경이요.”

“나도 백삼수라는 그녀석이 조금 이상해 보이더군.”

최 선달은 그동안 지내오면서 보았던 백삼수에 대해 느낌을 말했다.

“백삼수라는 녀석은 재물을 워낙 밝히는 놈이라 그것도 큰 문젭니다.”

최 선달은 잠시 심란한 얼굴로 생각에 잠겼다.

인생이란 출발점이 좋아야 하는데 이래저래 문제점이 많은 윤 진사나 주모 그리고 창락골 사람들과 접촉했다. 그러니 미래가 불안정할 것 같았다.

더구나 그런 이상한 곳에서 재물을 얻어내 백두상단을 운영하니 찜찜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최 선달은 한숨을 토했다.

“후우! 어째 앞으로 일이 결코 순탄치 않아 보이네요. 최 진사님께서 넘겨준 자금도 내기바둑으로 따고 더구나 출처가 요상한 곳이라.”

최 선달이 이렇게 하소연을 토하자 최 진사는 심각한 얼굴로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이래저래 처음부터 이상한 내기바둑으로 자금을 만들다 보니 불안한 것은 나도 마찬가지요. 그건 그렇고 그동안 지내며 어떻게 다시 과거로 돌아갈 길이나 있는지 최 선달은 생각해봤소?”

“아뇨. 저는 그것을 일찌감치 포기했어요. 그런 생각하면 두통이 아주 심해서 잠도 못자니 생각해서 뭐해요. 돌아가기는 틀려 보이는데.”

최 진사는 다시 심란한 표정을 지으며 두통이 오는 것인지 인상을 쓰며 관자놀이를 손가락으로 눌러봤다. 마주한 최 선달 역시 갑자기 과거를 떠올리자 머릿속이 아파왔다.

최 선달은 두통을 느끼자 그에 대해 말했다.

“나도 그런 쪽으로 머리를 너무 쓰면 두통과 현기증이 생겨요. 지금도 두통이 생겼어요.”

“그렇군요. 우리 둘 다 같은 증상이 있군요.”

두 사람은 천천히 부드득 부드득 소리가 나는 하얀 눈을 밟으며 산을 돌아다녔다. 산을 산책하듯이 천천히 도는 중에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이 시대로 떨어져 각자 지내던 이야기를 대부분 털어놓았다.

또한 앞으로 어찌 살아야 할지도 서로의 의견도 들었다. 그러나 모두 한치 앞도 내다 볼 수 없는 막막한 처지다. 그래서 지나가는 뜬 구름 잡기 식의 대화를 나눌 수밖에 없었다.

결국 두 사람의 공통적인 의견은 있었다. 같은 공간에서 접촉을 자주하며 생활하다가 보면 말실수가 많아질 수 있다고 판단했다.

자칫 그런 말실수는 자신들에게 치명타를 가져올 가능성이 높았다. 그래서 지금처럼 일정한 거리를 두고 돕기는 하지만 서로 각자의 길을 가기로 결정했다.

이미 백두상단에 서로 투자한 입장이니 상단운영은 같이 해보기로 확정했다. 이런 결론에 도달하자 자연스럽게 둘을 합의됐다.

최 진사는 그동안 자신이 구상한 계획을 차분하게 설명했다.

“최 선달. 백삼수는 우리의 정체를 전혀 모릅니다. 더구나 나에 대해서는 전혀 모를 것이라고 봐서 백여우 같은 그놈은 내가 집중해서 관리하겠소.”

“어떻게 말이요?”

자신 있게 말하는 최 진사를 보며 최 선달은 이상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자 최 진사는 별로 힘든 일이 아니라는 듯이 쉽게 설명했다.

“이재에 밝은 놈은 돈으로 해결하는 것이 최선이요. 그러니 내가 관포 200필의 어음을 추가로 줄 것이니 깔끔하게 자본금을 정리해요. 그래서 내 자본이 면포 1000필, 최선달이 면포 600필, 백삼수가 면포 400필의 출자하는 것으로 확정하는 거요.”

“그거야 이미 그런 식으로 확정했는데요.”

이렇게 답하자 최 진사는 심각한 얼굴로 자세하게 설명했다.

“아까 말한 백두상단의 회계처리 방법은 조금 문제점이 있어요. 무조건 영업이익의 5할을 경비로 지출한다는 것은 믿기 어려운 백삼수 놈이 중간에 농간을 부릴 여지가 많아요.”

“설마 겁이 많은 놈이 그런 짓을 하려고요?”

“그렇지 않아요. 겁이란 모든 행동에 적용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니 그놈과 정산하기로 결정한 회계방법은 별로 좋은 생각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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