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화
모두 중요한 무반 가문의 소장품들이다. 하지만 너무 가난해서 힘들게 살면서도 마적 2장을 이직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 정말로 이상했다. 더구나 이제 수가 늘어 5필이나 되었다니 실로 괴사가 아닐 수 없었다.
최인범은 급하게 마적에 대해 물었다.
“아버님, 어떻게 아직까지 마적을 사용하지 않고?”
“아! 그 마적은 아비가 사용할 수 없도록 되어 있어.”
“사용하지 못한다면 나라소유인 군마인가요?”
이런 응수에 최용민은 황당한 표정을 지으며 즉시 나무라는 투로 말했다.
“무슨 소리야? 나라 소유 말의 마적을 아비가 소유하고 있다니.”
“그러시면 왜?”
“말은 아비 소유이지만 내가 양자를 얻어서 족보에 내 아들로 입적한 놈만 말을 도로 찾을 수 있게 계약하고 말 2필을 넘겨줬으니까. 아비는 사용하지 못한다는 것이지.”
“그런 이유가 있어서 말을 팔아 생활하시지 않았었군요.”
아마도 장차 무관으로 활동하게 될 양자를 위한 배려로 독하게 마음먹고 그렇게 조치를 취했던 것 같았다.
최인범은 장애자로 마음이 약해질 것까지 고려한 처사라 대단하다고 느껴 고개를 끄덕였다.
최용민은 계속해서 설명을 이어갔다.
“아마 약아빠진 예천의 최진웅은 내가 양자를 들이지 않고 죽기만을 기다렸는지도 모르지. 그놈이 말을 그냥 차지할 욕심 때문에 자기 아들을 내 양자로 보내려고 애 좀 많이 썼어. 그런데 어지간하면 같은 최씨라 받아 주려고 했더니 너무 허약해서 장수로 써먹을 재목이 아니야. 그래서 거절했지.”
“아하! 그렇군요.”
괴팍한 노인이라고 소문이 났던 배경은 이런 숨은 속사정이 있었다. 흔히 외다리 양반으로 불리나 병마절제도위(兵馬節制都尉)를 해서 절제도위라고 불리기도 한다.
흐릿하던 눈빛이 다시 살아난 최용민은 계속해서 마적에 대해 설명했다.
“너에게도 말을 차지하려면 두 가지 조건이 따른다. 하나는 우선 말 한 필은 양자로 입적하면 가질 수 있지만 나머지는 대과에서 무과에 합격해야 네가 가질 수 있어.”
“말을 차지하려면 무과에서 급제해야 한다고요?”
최용민은 다시 자세하게 설명했다.
“그렇지. 무술을 배워 그냥 벼슬을 안 하고 야인으로 살면 그게 뭐에 써먹겠냐? 잘 해봐야 청탁받아 사람이나 죽이는 검귀가 되거나 혹은 한양거리의 왈짜패의 두목 노릇이 고작이지. 그러니 사내란 무과에 응시해서 군인으로 최소한 나라를 위해 힘써야 진짜 대장부가 할 일이야.”
어떤 과정이 있었던 자신은 이제 조선이란 신분사회에서 양반에 해당하는 무반의 자손으로 변했다. 그러니 아버님의 명령을 모른 척 하기는 곤란했다.
최인범은 자리를 잡으면 자신의 무력으로 무과를 봐볼까 하는 생각도 있었던 터라 즉시 답했다.
“아버님, 잘 알겠사옵니다. 말을 찾도록 최선을 다해 노력해보겠사옵니다.”
“그래, 잘 생각했다. 아비야 얼마 남지 않은 여생을 어찌 살아도 좋지만 굳이 너까지 어렵게 살 필요는 없어.”
최용민은 자신의 속을 털어놓을 상대인 아들이라고 판단한 것인지 다시 설명했다.
“아비가 여진족과 치열하게 전투를 벌이면서 배운 점이 많아. 기동력이 좋은 말은 많이 있어야 여진족들을 이길 수 있다. 그러니 너도 기마술을 지금부터 열심히 배우도록 해. 그들의 기마술보다 뛰어나지 않으면 전투에서 살아남기 힘들어. 이점을 특별히 명심해.”
“알겠사옵니다.”
최용민은 물끄러미 최인범의 손가락을 보더니 매우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
“너는 활은 전혀 쏘아 보지 않았구나. 손에 군살이 하나도 없어.”
“예, 격투술만 조금 수련하고 나머지는 아직·····.”
최용민은 다소 엄숙한 목소리로 진지하게 강조했다.
“인범아! 주변의 나라들 보다 조선이 유리한 무기는 활이다. 특기 통아를 이용해 쏘는 편전은 배우기가 어렵지만 아무튼 숙달만 되면 대적할 상대가 없는 강한무기니 그것도 항상 명심하고.”
“잘 알겠사옵니다. 아버님.”
모든 물건을 넘겨준 최용민은 피곤한 기색으로 자리에 누우며 다시 당부했다.
“아비야 봉화의 최 진사가 돌봐줄 거니 너는 무예 수련이나 해. 너는 잘 모르지만 그 집안과 우린 인연이 깊은 사이야. 그동안 아비를 돌봐준 집안이다. 최인범 진사는 너보다 3살이 많으니 앞으로 만나면 형님으로 잘 모시고. 사람이 은혜를 모르면 인면수심이야.”
“잊지 않도록 명심하겠사옵니다.”
최용민은 넌지시 말을 이어갔다.
“말이 나왔으니 내가 해 주는데 너와 이름이 같은 최인범 진사가 전에는 너무 답답할 정도로 유학 공부에만 매달리더니 오늘 새벽에 와서 하는 말을 들어보니 많이 변한 것 같더라. 아비가 보기에 그동안 백두산에서 무예 수련만 했을 네가 배울 점이 많아 보이는 구나.”
이런 설명에 속으로 감탄했다.
잘 생긴 외모를 가지고 유약해 보이던 최인범 진사는 아주 발 빠르게 움직였다. 내기바둑으로 많은 재물을 챙기더니 과감하게 자신들에게 투자를 해줬다.
이어서 풍기에서는 자신의 앞길을 슬며시 조종하는 행보를 보였다. 더구나 여자 세 명을 보내 자신의 아비를 돌보도록 조치해 놓았다. 그러니 두뇌 싸움으로는 도저히 그를 따라가기 힘들었다. 견제심리와 자존심이 남아는 있지만 이제는 그것을 훌훌 털어 버릴 때가 됐다.
‘그래, 인정할 것은 인정해 주자고. 실제로 나이도 연장자니 형으로 대해주지.’
그렇다고 굴종하는 형태로 지내기는 싫었다. 그러자면 자신도 대과를 봐서 어느 정도 벼슬도 높아져야 될 것 같았다. 그러나 수많은 무과 응시자를 이기고 대과에서 합격하기란 결코 쉽지 않아 보였다.
상대적으로 라이벌 의식이 조금 있는 최인범도 어려울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어려우면 그 사람도 어려울 거야. 설마하니 한문학 교수 출신이 아니면 대과의 문과 급제는 어려워.’
잠시 누어서 생각하던 최용민이 부드럽게 말했다.
“내가 네 아비라고 해서 별로 해준 것이 없으니 나를 너무 의식해 앞날을 결정하지는 마라. 사람이란 저 살고 싶은 대로 사는 것이 제일 행복한 것이니까.”
“알겠사옵니다. 아버님.”
“그래서 하는 말인데 네가 잘 곳도 없으니 여기서 지내지 마라. 네가 편한 곳에서 지내.”
“예. 아버님.”
피곤한 기색으로 눈을 감으며 가라고 손짓하며 조용히 말했다.
“인범이는 바쁠 것이니 이만 가 보거라. 너에게 넘겨주는 물건들은 우선은 여기에다 놔도 되니 염려 말아. 필요할 때는 언제든지 가지고 가고.”
“예, 아버님, 따로 살더라도 자주 찾아오겠사옵니다.”
최인범은 좁은 방안이라 불편하지만 큰절을 올리고 방에서 조용히 나왔다.
밖으로 나와 보니 칠복이 형제가 사랑방의 문짝을 만지며 방바닥의 구들을 들추고 있었다. 여자애들은 모두 두 녀석의 주변에서 호기심어린 얼굴로 바라봤다.
최인범은 칠복이에게 가까이 다가가서 물었다.
“너희들 지금 여기서 뭐하냐?”
“접장님, 사랑방의 구들이 무너져서 불을 때지 못해서요. 저희들이 고치려니 너무 어렵네요.”
어린 여자애들이 추위에 떨고 있는 것이 안타까워 돕고 싶은 모양이다. 어른이나 애들이나 사내란 여자의 힘든 모습을 보면 도와주고 싶어 하는 마음은 똑 같았다.
최인범은 즉시 칠복이에게 지시했다.
“구들을 어설프게 고치면 안 돼. 내가 목수를 데리고 와서 고치도록 할 것이니 너희들은 주막으로 돌아가자.”
“예.”
초가집을 한 바퀴 돌며 수리할 부분들을 생각했다. 병든 노인이라 계속 뜨겁게 불을 때자면 나무를 넣어둘 밖에 헛간은 있어야 된다고 판단했다.
조금 좁아 보이는 사랑채를 조금 늘릴 수 있어 3명의 여자애들이 조금 편하게 지낼 것 같았다. 마주한 사랑채는 말을 넣어두던 마구간처럼 되어 있었다. 집을 지금보다 편리하게 사용하기 위해 집수리할 사람을 데리고 와서 고칠 생각이다.
이런 결정을 내리자 급하게 초가집을 나섰다.
이때 뭔가를 잔뜩 들거나 지게로 지고 오는 10명의 남자들이 다가왔다. 최인범 접장은 그들과 같이 집으로 찾아오는 최인범 진사를 봤다.
전에 기차 안에서 봤던 얼굴로 자신처럼 어려졌지만 얼굴 윤곽은 확실했다. 사내치고는 다소 여려 보여 흠이지만 아주 잘생긴 얼굴이다.
‘어려서는 더 미남이었군.’
그동안 별스러운 사연들이 너무도 많았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감회가 새로웠다.
최인범 집장은 직접 만나보고 싶었던 터라 반갑게 소리쳤다.
“여! 최 형!”
엉겁결에 기차 안에서 쓰던 호칭이 저절로 튀어 나왔다. 그러자 최인범 진사가 빠르게 다가와 주위를 슬쩍 살피더니 작은 목소리로 정정해주었다.
“쉿! 호칭은 똑 바로 해야지. 최 형이라니? 최 진사라고 불러야지.”
순간 ‘실수 했구나.’하는 생각이 들어 주변을 힐끗 살폈다. 다행히 주변에 있는 사람은 아무도 두 사람의 대화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최 접장은 입가에서 멋쩍은 미소를 흘렸다. 그러자 최 진사는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다시 낮은 목소리로 경고했다.
“앞으로 조심합시다.”
“그래야죠.”
최인범 진사는 가벼운 대화를 끝내고나자 같이 와서 집안을 둘러보는 사람들에게 지시했다.
“장목수, 저쪽 밖에 바깥채로 나무 넣는 헛간을 겸한 마구간을 지으시오. 그리고 옆에 뒷간도 같이 만들고.”
“예, 진사님.”
“지금 사용하는 사랑채 공사를 먼저 끝내고 오른 쪽의 마구간은 방으로 들이시오. 그리고 담장도 싸리나무로 새로 해 놓고.”
“예, 진사님.”
대답한 장 목수는 빠르게 연장들을 한쪽 구석에 놓으며 물었다.
“진사님, 집지을 목재는 언제?”
“지금 소달구지로 목재를 싣고서 이리로 오고 있으니 그리 아시오. 우선 터부터 잡고 기둥 세워놓을 주춧돌로 쓸 큰 돌이나 찾아서 놓으시오. 저쪽으로 가면 무너진 집터가 보일 거요. 그곳으로 가면 주춧돌이 있소.”
“예.”
이런 지시를 내리고 나자 이내 최인범 접장에게 제안했다.
“최 선달, 우리 산을 올라가 보도록 합시다.”
“산에요?”
“여기서는 편하게 대화하기가 그렇지 않소?”
사실 최인범 진사는 다른 최인범 접장을 만나자 물어 보거나 하고 싶은 말들이 너무 많았다.
물론 최인범 접장도 마찬가지다. 둘 만이 지닌 공통의 비밀을 있으니 다른 사람이 없는 곳에서 조용히 대화를 나누는 것이 좋았다.
최인범 진사가 슬며시 앞장을 서자 최인범 접장은 그 뒤를 천천히 따라갔다. 두 사람 모두 발걸음을 천천히 옮기며 아무런 대화를 나누지 않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