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화
“그래, 추우면 바로 방으로 들어 와.”
“예, 오라버니.”
주막에서 일하던 월녀는 눈치가 보통이 아니다. 백삼수의 눈짓으로 자신이 들어서는 안 될 중요한 이야기를 하기 위한 것임을 안 것이다.
월녀가 밖으로 나가고 나자 백삼수는 바짝 다가가 앉으며 작은 목소리로 속삭이듯이 말했다.
“접장님, 주위에 듣는 사람이 전혀 없으니 제가 제일 상책을 말씀드립지요.”
조금 전에 중책을 썼다고 하더니 다시 상책이 남아 있다니 이상했다.
최인범은 매우 궁금한 표정을 지으며 다그치듯이 물었다.
“상책이라니?”
“접장님, 풍기에는 전에 무관이던 양반인 노인이 한분 계십니다. 부인도 없고 자식도 없으며 친인척은 모두 주변에 없고요. 천지사방에 아무도 없는 외로운 늙은이라고 봐야 하옵니다.”
“그런 사람이 있어?”
“접장님, 더구나 그 노인은 한쪽 다리도 없고 지병도 너무 깊은데 옆에 부리는 종도 없어요. 쉽게 말해서 죽을 날만 기다리며 사는 장애자인 노인이옵니다.”
장황하게 설명하지만 자신과 상관없는 이야기라고 판단해 퉁명스럽게 내뱉었다.
“그런데? 그게 나와 무슨 상관인가?”
최인범 접장이 불쾌하다는 식으로 응수하자 백삼수는 급하게 답했다.
“접장님, 노인의 성이 최씨라는 겁니다.”
“뭐? 최씨?”
“예, 최씨 성을 가진 양반이 확실하옵니다.”
백삼수의 대답에 최인범도 척하면 삼천리라고 말귀를 알아들었다.
자신은 지금 남의 호패를 사용하고 있다. 그러니 이번 기회에 호패를 새로 만들고 그 방법으로는 최씨라는 노인의 양자로 입적하라는 것이다.
백삼수는 계속해서 왜 그 노인의 양자로 들어가야 하는지 자세하게 설명했다.
최인범이 양자로 들어가야 하는 노인은 비록 고관대작은 아니지만 어느 정도 내세울 정도의 무반 벼슬을 했단다. 그러니 양반이라 나중에 자신이 무과를 보기에 어렵지 않다는 것도 중요한 이유가 된다.
백삼수는 마치 한이 맺힌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접장님, 이놈의 조선이라는 나라는 신분사회라 평민으로 살기는 너무 어렵사옵니다. 기왕이면 접장님은 양반의 가문으로 입적하는 것이 좋사옵니다. 그리고 백두상단도 최소한의 권력이란 배경이 있어야 앞으로 계속해서 성장이 가능하고요.”
전혀 예측하지 않았던 돌발 상황이다. 자신의 미래가 걸렸으니 망설일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슬며시 궁금한 점을 물었다.
“무반이라면 어떤 정도의 벼슬을 했나?”
“함경도에서 근무한 병마절제도위 출신으로 한때는 전라도 섬에 있는 말 목장을 감독하는 감목관도 했던 최용민이란 분이옵니다.”
병마절제도위(兵馬節制都尉)나 감목관(監牧官)는 모두 종6품의 외관직이다. 대부분 문관인 고을의 현감(종6품)이 겸임했다. 필요에 따라 별도로 두는 경우가 있었다.
죽을 날을 기다리는 노인은 성격이 매우 깐깐하다고 했다. 주변의 평민들이나 양반이라도 내세울 벼슬이 없는 사람이 양자로 입적하려고 했으나 전혀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무술도 할 줄 모르는 놈에게는 가문의 족보를 넘겨줄 수 없다고 고집을 부렸다는 것이다. 양자로 들어올 사람은 함경도에서 여진족에게 다리를 잘린 원한을 갚아줄 정도의 무술은 지녀야 한다고 주장했다.
많은 재물을 준다며 설득해도 양자를 아직까지 들이지 않았다고 했다.
벼락주막의 건넌방에서는 계속해서 최인범 접장과 백삼수가 은밀한 대화를 진행했다. 양자로 들어갈 노인에 대한 설명을 마치고 나자 백삼수는 본론으로 들어갔다.
“접장님, 호방의 말에 의하면 풍기군수도 그 노인 때문에 머리가 아프답니다.”
“왜 머리가 아파?”
백삼수는 호방을 만나서 얻어들은 정보를 자세하게 설명했다.
“그분은 함경도에서 북방을 지키느라 전공을 세운 장애자인 양반입니다.”
“그래? 그런 분이 그렇게 가난한가?”
“그렇습니다. 그래서 그냥 방치하면 풍기군수는 지역의 목민관으로 명성에 흠이 가니 어떻게 해서라도 양자를 들이게 해서 노인을 돌보게 하려고 고심하는 중이랍니다. 호방이 먼저 저에게 접장님의 양자에 대해 제안을 했사옵니다.”
“무슨 말인지 알겠군.”
조선시대에는 의외로 장애자에게 많은 배려를 했다. 매우 선진적인 장애인 복지정책을 시행했다. 그래서 그들에게 직업을 알선해 주거나 끝없는 진휼 정책을 펼쳤다.
그러나 나라에서 베푸는 물질적인 지원이 지방 고을까지는 미치지 못했다.
하지만 근본적으로 장애자에게는 어느 정도 기본적인 삶을 보장해 주려는 정책을 시행하라고 지방 수령들에게 지침을 하달했다. 그런 이유로 지방 수령인 풍기군수는 전공 장애자인 양반에 대해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런 내용을 잘 모르는 최인범은 풍기군수의 지시 받은 호방이 먼저 제안했다니 다소 이상해 반문했다.
“관아에서 양자를 들이라고 먼저 제안을 해?”
“접장님, 그렇사옵니다. 호방에게 제가 접장님은 백두산에서 호랑이 사냥하며 사신 분이라고 소개하니 함경도에서 노인이 근무하며 지내다가 낳았을 자식일 수 있다고 하면서요.”
백두산이 함경도라는 점만 가지고 그런 어처구니없는 판단을 했다니 너무나 황당했다. 최인범은 너무 어이가 없는 말이라는 생각에 즉시 응수했다.
“군수나 된다는 양반이 이상한 쪽으로 같다가 잘도 붙이는군. 아무튼 무슨 의도인지는 충분히 이해가 돼.”
“군수도 재물이 소요되니 이런 방법으로 해결하려는 거죠.”
“그렇겠군.”
풍기군수의 입장 그리고 아전인 호방은 그들의 필요성에 의해서 움직였다. 전공 장애자인 노인의 양자로 최인범이 들어가는 것을 적극적으로 권했다는 것이다.
중종은 연산군을 몰아내고 나름 나라를 잘 다스려 보려는 여러 가지 새로운 정책을 시도했다. 조광조를 등용해 개혁 정치도 해보고 또한 좌절도 했다.
이 시절은 호패제도도 전보다 강화되고 또한 호적을 새로 정비하며 양자 제도를 활성화시키고 있었다. 호패제도 강화를 통해 조세수익을 늘리려는 의도도 있었다. 조정에서는 호적도 없이 떠도는 유민을 최대한 한곳에 정착시키려 노력했다.
시대가 그런 상황이지만 자세한 내막이야 전혀 모르니 망설일 수밖에 없었다.
‘어떻게 하지?’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잠시 여러 가지 정황을 고려하며 고민했다.
조선의 호패제도 즉 호적 제도는 허술해 보이지만 또 그렇지도 않았다. 또한 그렇다고 해서 완벽한 제도도 아니라 지방의 수령이 눈만 감으면 얼마든지 호적이야 새로 만들 수 있는 여지가 많았다.
그러나 연고권이 전혀 없는 자신으로는 이런 좋은 기회가 쉽게 찾아오지 않는다는 것을 자각했다.
‘조금 불안하지만 이런 정도 조건이라면 호패를 내 것으로 새로 발행해 가지고 다니는 것이 좋아.’
이렇게 판단하고 나자 조금 더 욕심이 났다. 이름뿐만 아니라 나이도 지금 자신의 신체를 기준해서 정하는 것이 적당하다고 판단했다.
‘그래, 내년 정도에 호패를 만들면 아주 적당해. 생일은 정월 초하루로 정하고.’
정월 초하루면 외우기도 쉽고 여러 가지로 편할 것 같았다.
‘대충 생일상을 겸해서 차례 상도 겸하니 편하겠어.’
이런 결정을 마음속으로 하고 나자 그에 대해 백삼수에게 설명해 주었다. 그러자 백삼수도 별 말없이 찬성해주며 다른 문제를 거론했다.
“접장님, 호적을 만들면 반드시 내년에 다른 지방으로 이사를 가야하옵니다.”
“이사를?”
“예, 이곳에서 지내게 되면 양자라는 것이 문제가 생길 여지가 있으니 이사하셔서 최대한 과거를 지워야 하옵니다.”
“알았어, 그럼 그렇게 하도록 하지.”
적진이라고 보는 조선시대로 들어와 사는 최인범이라 완벽한 신분위장이자 세탁이 반드시 필요했다. 그러니 백삼수의 제안을 수용하기로 마음먹었다.
마음속에 품고 있던 월녀에 대한 생각도 제안했다.
“백집사, 기왕에 남의 집으로 들어가는 양자이니 이번 기회에 월녀를 면천시켜서 내 여동생으로 같이 입적시키는 것은 어떤가?”
그러자 백삼수가 기겁하며 급하게 답했다.
“접장님, 그건 너무 욕심이옵니다. 아직 접장님의 신분도 불확실한 상태에서 무리하시면 곤란하옵니다. 그러니 월녀는 나중에 해야 되옵니다.”
가능한 일 같은데 극구 반대하는 이유가 뭔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백삼수 말대로 너무 무리한 신분 변화를 시도하기는 곤란하다고 판단했다. 그래도 미련은 남아 못이기는 척 답했다.
“자네가 어렵다니 월녀의 입양 문제는 나중으로 미루지. 우선 나만 양자로 가자.”
“접장님, 아주 잘 판단하셨사옵니다.”
백두상단으로도 중요하고 또한 최인범 접장도 중요한 문제 하나를 과감하게 결정됐다. 당분간은 이곳 풍기에서 머물면서 적응기간을 가질 계획이다.
“백 집사. 예천으로 나도 따라 가야 하나?”
“접장님, 이미 저희 백두상단의 명성이 그곳가지 퍼졌으니 꼭 그렇지는 않사옵니다. 하지만 예천에도 왈짜패거리가 있으니 접장님이 같이 가시면 제가 편하죠. 접장님, 장사야 여기서 해도 되니 너무 그런 문제를 가지고 신경 쓰시지 않아도 될 것이옵니다.”
이런 대화를 나누고 백삼수는 자신의 방으로 가게 됐다.
그가 나가고 나자 월녀가 방으로 조용히 들어왔다. 슬며시 자리에 가서 앉자 최인범은 조용히 권했다.
“피곤할 거니 어서 자!”
“예, 오라버니.”
최인범은 자리에 누워 곰곰이 생각했다. 오늘은 밤이 너무 늦었으니 양자를 들인다는 노인은 내일 아침 일찍 찾아가 볼 생각이다. 계획대로 그 노인의 양자로 입적만 된다면 자기가 하고자 하는 일에서 큰 걸림돌이 사라지게 된다.
‘흠! 잘하면 과거를 통해 벼슬길도 열리겠어.’
앞으로 갈 수 있는 길이 많아진다고 생각하니 조금은 마음이 설레고 있었다.
밖에서는 소상인들이 찾아와 백삼수에게 부탁해 뭔가를 가져가는 거래가 계속됐다.
다음날 아침. 밤사이에 내린 함박눈으로 온 세상이 하얗게 변해 있었다. 어제 오후 낮에는 좋았던 날씨가 저녁이 되자 갑자기 추워지며 밤사이에 폭설이 내린 것이다.
잠을 곤하게 자던 최인범은 약간 소란스러운 소음 때문에 다소 늦게 잠에서 깨어났다.
건넌방의 문을 지그시 열고 밖을 내다봤다. 차디찬 바람이 방안으로 휘몰아쳐 들어왔다. 차갑고 서늘한 느낌이 전신을 감쌌다. 밖에는 온통 하얀 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눈이 너무 많이 왔어.’
어른 무릎 위까지 푹푹 빠질 정도의 적설량이다. 가까운 곳으로도 이동이 불가능했다. 밖에서는 주모를 비롯한 여러 사람들이 벼락주막의 안마당에 쌓인 많은 눈들을 치우고 있었다.
‘흠! 저 녀석들도 왔군.’
배도치를 비롯한 5명의 왈짜패들이 안마당에서 부지런히 눈을 치우고 있었다.
아직 개과천선이야 못했다. 하지만 강한 무력에 굴종한 불쌍한 처지라 할 수 없이 여기로 새벽 같이 달려와서 힘을 보태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