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타임트레인-61화 (61/519)

61화

<오래전에 예정된 인연들>

주막을 떠난 먹쇠는 이번 기회에 신고 다닐 짚신을 좀 따볼 생각이다.

‘좋았어, 진사님께서 두시는 것을 보니 박보장기에 대해 조금은 알겠어.’

최인범이 박보장기를 많이 두고 먹쇠도 옆에서 계속해서 지켜보다 보니 한수 배운 것이다. 이런 것으로 보아도 먹쇠는 보기와는 전혀 다른 녀석이다.

최인범 진사 일행은 적당히 돌아다니며 이렇게 장기나 바둑을 두며 호랑이 뼈의 효능에 대해 선전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이런 소문들은 빠르게 확산됐다.

풍기 고을에 사는 많은 부자들은 처음에는 최인범 진사의 호언장담에 대해서 긴가민가했다. 부자들은 차고 넘치는 것이 재물이라 드디어 호환을 대비해 준다는 호랑이 뼈를 구할 방도를 모색했다.

‘면포 몇 필에 목숨이 안전해 진다면 아까울 것이 전혀 없어.’

풍기에서는 면포에 이어 호랑이 뼈의 가격이 폭등하게 되는 조짐이 일어났다. 면포야 구하려면 얼마든지 구하기 쉽지만 호랑이 뼈는 구하려고 해도 쉽게 구해지는 물건이 아니다.

다른 집에서 하룻밤을 자고 풍기주막으로 돌아와 이곳에서도 바쁘게 움직였다. 주막의 손님들을 통해서도 호랑이 뼈가 호환을 피할 수 있는 효과가 있다고 선전했다.

그러자 위험한 길을 떠나야 하는 상인들이 호기심을 표해 물었다.

“진사님, 그게 정말입니까?”

“허! 그런 것은 입으로 말해야 아나? 절에 가면 산신각에는 모두 호랑이 뼈가 있어. 그러니 깊은 산속에서 사는 중들이 호환을 안 당하는 것이고.”

“그렇군요.”

상인들은 대부분 고개를 끄덕였다. 상인 중에 한명이 나서서 아는 척을 했다.

“호랑이 뼈에 그런 효력이 있다는 것은 부석사에서 공부하시면서 아신 비밀이군요.”

“그렇다고 봐야지.”

점심때가 되어 다시 주막으로 돌아와 먹고 장기만 두는 먹쇠와 돌쇠에게 지시했다.

“이놈들아, 장기를 두려면 답답한 여기서 두지 말고 동네 사랑방에 가서 두어야 옆에서 훈수도 하고 구경꾼도 있어 재미있지.”

주인이 밖으로 내모니 싫어도 어쩔 수 없이 따라야 한다.

“알겠나이다.”

“혹시 돌아다니다 호환을 당할 염려가 있으니 호랑이 이빨은 반드시 목에 걸고 가.”

“예. 진사님.”

풍기주막에 이어 여론의 근원지인 동네 사랑방으로 두 놈을 보내 자연스럽게 소문이 퍼지도록 계속 유도했다. 이런 여론 조성 방법이야 전생에 선거운동하며 자주 해본 초보단계다.

바쁜 와중에도 한자나 한문을 부지런히 익히려니 머리가 너무 복잡했다.

그래서 이런 자신의 행동을 풍기주막과 접목시키어 뜻풀이를 했다.

‘흠! 풍기주막이라······. 바람 풍(風)에 기운 기(氣)니 바람을 일으키는 여론 조성할 최적의 장소야.’

이때 주막에서 일하는 젊은 과부들과 다소 진득한 농을 주고받는 손님들의 걸쭉한 목소리를 듣자 또 달리 해석했다.

‘오라! 여긴 집터 자체가 내성천 주변으로 풀숲이 너무 많아서 풍기문란(風紀紊亂)이 자연스럽게 형성되는 곳이군.’

이렇게 풀이도 해보지만 다르게도 했다.

‘풍요(豊饒)로운 기초(基礎)가 튼튼한 고을이니 부평초 같은 주모(酒母)의 천막(天幕)친 인생 안식처로 적당해.’하며 풍기주막을 나름대로 풀이했다.

한문공부를 부지런이해 허접한 시의 한 구절이라도 지어보려면 어쩔 수 없었다. 말이나 글이 되던 안 되던 이런 식으로라도 계속해서 한문을 배워야 한다.

뜻글자인 한자나 한문은 사실 이런 식으로 외우는 것이 매우 효과적이다. 그래서 자신과 인연이 많은 최인범도 이런 식으로 이름 풀이를 했다.

‘범과 인연이 최고로 많은 놈.’

자신은 남의 몸속으로 정신만 들어온 귀사를 경험하고 있다. 그러니 무술이 뛰어나고 범상치 않은 최인범은 혹시 ‘호랑이의 힘을 차지하고 살아가는 것이 아닌가?’하고 생각했다.

이제 충분이 바람은 잡아 놨으니 벼락주점에서 있는 최인범 접장 일당은 재물 벼락을 맞게 된다. 그런 재물은 돌고 돌아 자신의 품속으로 돌아온다고 생각하니 매우 흐뭇했다.

‘나도 백두상단의 대주주로 이런 정도는 협조해야 날로 먹는다고 불평을 안 할 거야.’

효과가 어느 정도 있을지 잘은 모르지만 일단 자신이 할 일은 모조리 끝났다고 판단했다.

따뜻한 아랫목에서 편안하게 누워 깊은 생각에 잠겼다.

곰곰이 생각해 봐도 최복동과 같이 살기는 부담감이 너무 컸다. 예리하고 날카로운 매서운 눈을 지닌 그를 언제까지 피하기가 어려웠다.

진사시에 합격한 사람과 자신의 미천한 한문 실력 차이가 제일 큰 문제다. 이런 일이 벌어질 줄 알았다면 어려서 한자 공부라도 잘하고 커서 다녔던 붓글씨 학원을 대충 다니는 것이 아니었다고 후회했다.

‘이참에 봉화에서 나와 분가해야 되겠어.’

엄밀하게 말하면 분가가 아니라 이사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 생각했다. 모든 조건은 봉화현 보다 풍기군에서 터를 잡는 것이 좋다고 판단했다. 최소한 군수가 수령으로 있는 고을이 발전의 여지가 많다고 판단했다.

방에 누워서 너무 거북스러운 최복동과 헤어지는 분가 문제로 한없이 생각에 잠겨 있었다. 어떤 방식이 제일 좋은지 결정하기가 쉽지 않았다.

“진사님, 안에 계세요?”

이때 밖에서 작은 목소리로 자신을 찾는 소리가 들렸다. 자길 찾아올 만한 사람이 없는데 조금 이상했다.

“누군가?”

“진사님, 소인의 딸들을 데리고 왔사옵니다.”

“뭐라?”

전 재산을 내기 장기로 날려 워낙 다급해진 콩 장사가 드디어 딸들을 데리고 최인범을 찾아온 것이다. 너무 어이가 없지만 방문을 열고 밖을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자그마한 여자애들이 눈만 동그랗게 뜨고 있었다. 손에는 작은 보퉁이 하나씩을 들고 있었다. 의외로 콩장사의 집이 가까웠던 모양이다.

“방으로 들어오지.”

“예이!”

방으로 들어온 콩 장사는 딸들을 넘겨 줄 것이니 내기 장기로 잃어버린 재물을 모조리 돌려달라고 사정했다.

조선 시대로 떨어져 다른 것은 어느 정도 적응이 되나 노비제도에 대해서는 여전히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런데 아비가 딸을 노비로 준다며 데리고 와 재물과 바꾸자며 애원했다.

‘허! 난처하군.’

막상 좋은 일을 해보자고 딸들을 데리고 오라고 했다. 그러나 막상 재물을 주고 딸들은 차지하는 일은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았다.

‘내가 공연히 일만 벌이는 것 아냐?’

너무 거북스럽다 보니 콩장사가 사람으로 보이지 않았다. 아비라는 놈이 해도 너무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의 앞에서 업어져 사정하는 콩장사의 턱주가리를 발로 올려 차주고 싶었다.

‘진짜 한심한 아비로군. 노름에 미쳐 딸을 저렇게 똥 치운 막대기처럼 함부로 버리다니. 그나저나 교환 조건을 이미 토해 놨으니 바꿔줘야 되지만 세 명이나 되는 어린 여자들은 어떻게 처리하지?’

잠시 생각하다가 본시 결정했던 계획이 있어 쾌히 승낙했다.

“좋아! 자네가 그렇게 사정한다면 딸들은 내가 받아들이고 재물은 모두 돌려주기로 하지.”

“감사하옵니다. 진사님.”

아주 강한 어조로 다짐을 받았다.

“대신 다시는 아비로 권리를 주장하지 못하는 문서를 작성해 줘야 되겠어.”

“소인은 글을 잘 모르는데요.”

“자네야 수결만 하면 되지.”

콩장사와 이렇게 합의되자 콩과 소 그리고 소달구지를 돌려주게 됐다. 재물을 넘겨주는 대신 그의 딸 세 명을 절제도위 출신인 최용민의 집으로 보내기로 했다.

‘잘하면 최인범이 쉽게 자리 잡게 될 거야. 최용민 어르신이 양자로 받아들일 충분한 여건이 돼.’

최인범이 최용민이란 장애자인 노인에 대한 정보를 잘 아는 이유는 최복동 때문이다. 집안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최복동이 같은 성씨인 최씨 양반에 대한 이야기를 했기 때문이다.

양쪽 모두 양반이지만 너무 가난한 처지라 서로 교류가 있었다. 그리고 최복동이 같은 최씨라고 가끔 그 양반에게 먹을 것을 가져다 줘서 소상한 내막을 잘 알았던 것이다.

그리고 최인범 진사의 집은 봉화현이지만 선산은 이 근처인 풍기군에 있었다. 선산과 붙은 땅에 병마절제도위 출신인 최용민이란 노인이 살고 있었다.

어린 여자들 처리방법을 결정하고 옆방을 향해 크게 외쳤다.

“최서방, 이리 와서 언문으로 고용계약서를 쓰지.”

“예이,”

최 서방이 넘어오자 귀찮다는 듯이 지시했다.

“진사가 언문으로 계약서를 쓰기는 그렇고 콩 장사가 글을 잘 모르니 언문으로 쓰는 것이 좋지.”

“알겠나이다.”

고용조건은 기본적인 생필품을 계속 보내줄 것이니 혼자 사는 노인의 병수발을 들어줘야 한다. 무보수인 고용기간은 노인이 죽을 때까지라고 정했다. 대신 여자들은 바느질이나 뭐를 해서라도 착실하게 재물을 모아 최인범에게 보관시킨다는 조건이다.

이런 식으로 처리되자 콩 장사는 천만다행이라고 판단하고 고용계약서에 딸들과 연명해 수결했다. 나이가 10-15살 사이인 딸들을 바라보며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허어! 그 많은 콩을 돌려주고 겨우 먹지도 못하는 콩알 세 개를 차지한 셈이군.”

다소 의미삼삼한 말이다. 하지만 여자아이들이 너무 어려서 이런 소리를 한다고 최복동은 아주 넉넉하게 이해했다.

서류를 챙기고 있는 최복동에게 지시했다.

“지금 당장에 생활에 필요한 물건을 준비해서 최용민 어르신 댁으로 보내도록 하지. 주막에 상인들이 많으니 필요한 물건은 쉽게 구할 수 있을 거야.”

“예이, 바로 어르신 댁으로 보내도록 하겠나이다.”

“가서 뭐가 필요한지 잘 살펴보고.”

“예이!”

여자애들과 최복동은 주막의 상인들에게 꼭 필요한 생필품을 사서 급하게 풍기주막을 떠났다.

딸들이 사라지자 콩 장사는 이제 재물을 찾고 보니 너무 억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돈 많은 사람을 만나 딸들을 넘기면 한 재산을 두둑하게 생길 수 있는 좋은 기회가 사라지자 열불이 났다.

‘이대로 당할 수는 없지.’

콩 장사는 뭔가 다른 해결책을 구상했다. 가난하고 신분이 낮은 백성들도 너무 억울한 일을 당하면 양반을 고발할 길은 있었다. 물론 쉬운 송사는 아니지만 잘하면 딸들을 돌려받을 수 있다고 판단했다.

‘그래 잘하면 딸들을 고스란히 돌려받을 길이 있어.’

이렇게 판단한 콩 장사는 바쁘게 주막을 떠났다.

최인범 진사는 이런 콩장사의 은밀한 계획을 전혀 예측하지 못했다. 하루 종일 바쁘게 돌아다니느라 너무 피곤해 어느새 잠이 들었다.

많은 사연을 풀풀 풍기던 풍기주막의 주변은 점점 겨울바람이 거세지고 서서히 눈발이 휘날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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