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화
은가락지가 부모가 주신 유산이던 또는 도적질한 물건이던 자신이 상관할 바가 아니다. 휴대하기 좋은 고가품을 머슴으로 부리려던 놈이 가지고 있어야 딴 마음 먹기 십상이다.
‘머슴 주제에 감히 나와 내기를 하자고 덤벼? 진짜 겁 없는 놈이군.’
겁도 없이 자신과 내기 장기를 두자고 덤비는 조갑중을 완전히 털기로 결정했다.
완전히 알거지로 만들어야 녀석의 발목에 무거운 쇠고랑을 채우게 되는 것이다. 다른 두 놈이야 사노비지만 이놈은 평민이라 완벽하게 가둘 방법은 그 수밖에 없었다.
“굳이 하고 싶다면 하지.”
“진사님, 제가 방어를 하겠사옵니다.”
“그렇게 해.”
자신은 면포를 걸고 조갑중은 은가락지 둘을 내놓고 박보장기를 두게 됐다. 무료한 시간도 때울 겸이라 한판은 너무 싱겁고 5판 정도를 둘 계획으로 은가락지의 가치를 계산해 시작됐다.
단순한 장기가 아니고 내기 장기를 두자 사람들이 주변으로 우르르 모여들어 구경했다.
공수가 바뀌어 두는 박보 장기는 그야말로 전광석화 같이 장군 서너 번에 조갑중이 패하고 말았다. 정확하게 수순이라면 20수는 두어야 이기지만 조갑중의 장기 실력이 형편없어 빨리 끝났다.
지고 나서 식식 거리는 조갑중을 보며 권했다.
“이놈아! 바꿔서 해볼래.”
“좋아요. 공격해 보죠.”
그러나 공격에 나선 조갑중은 또 이기지 못하고 말았다. 이유는 한 번 잘 못 두어 말을 하나 잡히니 도저히 이길 수 없는 상태로 변해 버렸기 때문이다.
박보 장기는 바둑의 고난도의 묘수풀이와 같다. 복잡한 수순을 단 한수도 차질이 없도록 진행해야 상대방을 이길 수 있다.
물론 거기에 파생되는 변수까지도 모조리 알고 있어야 된다.
결국 얼마 지나지 않아 은가락지는 최인범 수중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이어진 박보장기로는 판돈이 커져서 조갑중이 면포 50필의 차용증을 써주게 되는 빚쟁이로 만들고 말았다.
“갑중아, 어때 더 할 거냐?”
“아뇨.”
조선시대에는 빚으로 졸지에 노비로 변해버린 사람들도 많았다. 그래서 끔찍하게도‘노름하는 자식을 낳으려면 그냥 엎어버리라고.’하는 말들도 있었다.
최인범의 교묘한 격장지계와 조갑중의 견물생심과 승부욕이 낳은 결과다. 조갑중은 이제 세경을 받는 머슴도 되지 못하고 언제라도 관아로 차용증만 드밀면 노비 신세가 될 지경에 이르렀다.
최인범은 자신의 목적을 무난하게 달성하자 회심의 미소를 짓고 이제는 박보장기를 거둘 때가 되었다고 판단해 치우려했다.
이때 옆에서 구경하던 50대인 사내가 슬며시 나서고 있었다. 그는 콩을 조금씩 사서 모아 이장 저장으로 팔러 다니는 콩 장사다. 다소 볼이 늘어진 것으로 보아 욕심이 많아 보였다.
“나와 장기 한판 하면 안 되겠소?”
“뭐를 걸겠소?”
“콩 한 말을 걸겠소.”
시작은 이렇게 아주 미미했다. 하지만 내기란 것이 늘 그렇듯이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변했다.
내기 금액은 산비탈에서 굴러 내려오는 눈덩이처럼 점점 커졌다. 박보장기로 이기지 못하자 드디어 정식으로 두는 장기로 대국은 바뀌었다.
판돈이 커지자 여전히 덤비고 있는 콩 장사를 보며 넌지시 만류했다.
“이거 너무 무리하는 것 아닌가? 내가 보기에 자네의 전 재산 같은데.”
“진사님, 소인은 내기 장기를 두기 시작하면 반드시 끝장을 보는 성품이라.”
“알았어, 그렇게 화끈하게 끝장을 보길 원한다면 상대해 주지. 방으로 들어와 한번 끝까지 두어 보세.”
방안으로 들어와 두게 된 내기 장기는 얼마시간이 지나지 않아 콩장사가 쫄딱 망하는 상태로 끝장났다. 그가 장터로 끌고 다니던 암소 한 마리와 소달구지를 최인범에게 넘겨주는 것으로 마무리 됐다.
“소달구지까지 잃었으니 이제 더 이상 걸 것이 있나?”
“없사옵니다.”
“그럼, 오늘 판은 완전히 끝난 것이군.”
인정사정없이 매몰차게 판을 이끌어 버렸다.
물론 덤으로 콩 15가마까지 챙겼으니 콩 장사는 졸지에 알거지가 되어 버렸다. 끝장을 보겠다는 콩 장사를 그의 소원대로 완전히 끝장내버린 것이다.
‘어디서 감히 까불고 있어.’
세상에는 부나비처럼 사는 사람들이 너무 많았다.
이곳 풍기주점도 예외는 아니었다. 젊은 선비가 많은 재물을 따자 그것이 욕심난 부나비들이 있었다.
“나하고도 둬 봅시다.”
“뭐를 걸겠소?”
“백미 4가마가 있소.”
“딱 한판으로 끝내기로 합시다.”
양반이나 상놈이나 노름판에서는 보통 말투가 조금은 예의가 없어진다. 그것이 싫으면 노름판은 구경도 하지 말아야 한다. 그래서 나온 말이 ‘객지 벗 10년 노름판 벗 30년.’이라고 한다. 그래서 고금을 막론하고 노름판은 위아래가 거의 없었다.
콩 장사에 이어 여러 사람들과 장기를 두어 제법 많은 재물을 차지했다. 물론 큰판도 있고 작은 판도 있었다. 때로는 일부러 져주기도 하면서 무료해진 시간을 보냈다. 이런 내기는 최인범에게는 그저 심심풀이인 별업에 해당됐다.
풍기주막은 완전히 풍기가 문란한 상태에서 많은 도박판이 벌어졌다. 내기 장기판이 깨고 나서 공짜로 생긴 콩 15가마나 백미 그리고 면포들을 어찌 처리할까 고민 중이다. 장기를 두다 전 재산을 날리거나 장사 밑천을 날린 사람들이 봐달라고 사정했다.
“진사님, 한번만 봐주세요.”
“어허! 일 없으니 가 보게.”
들어 보면 사정은 무척 딱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일단 품안으로 들어 온 재물을 다시 돌려줄 너그러운 마음은 전혀 없었다.
‘자신들이 나를 허수로 보고 덤빈 것이 잘못이지.’
사기 도박판을 벌이기 위해 어떤 작업을 일부러 해서 내기 장기를 두도록 유도한 것이 아니다. 그들이 두자고 사정해서 두었으니 양심의 가책을 느낄 필요가 전혀 없었다. 세상은 어디고 모자라는 머리로 혼자서 잘났다고 판단하는 머저리들은 있었다.
‘세상에는 등신들이 너무 많아.’
무료하다고 해서 그나마 두던 내기 장기판도 완전히 깨지자 방안에 벌러덩 누웠다. 바둑에 이어 장기도 이제 별업으로 변했다고 생각하니 한숨이 토해졌다.
‘어휴! 나도 정말 한심해 진사라는 놈이 노름이나 하고.’
이때 월녀를 만나러 갔던 먹쇠와 돌쇠가 달려와 급하게 보고했다.
“진사님, 백두상단의 접장이 호랑이를 잡아서 벼락주점으로 돌아왔어요.”
“뭐라? 그 사람은 다치지 않았고?”
호랑이를 잡았다니 혹시 크게 다치지 않았는지 궁금했다. 자신이 어렵게 좋은 계책을 마련해 그가 정착할 자리를 만들었는데 죽기라도 하면 큰일이다. 어느새 그와는 동반자로 살아야 하는 강한 동질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러자 먹쇠가 고개를 가로 저으며 답했다.
“아뇨. 접장이라는 사람은 멀쩡하게 호피와 고기를 지게에 지고 왔더라고요.”
무사히 돌아왔다니 천만다행이다. 자리를 털고 일어나며 지시했다.
“알았어. 너희들은 주모에게 가서 밥 달라고 하고 조갑중은 새로 생긴 황소와 소달구지는 네가 관리해야 하니 잘 챙겨.”
“예, 진사님.”
최인범이 두루마기를 입고 밖으로 나가려고 했다. 그러자 계속 사정하며 서있던 콩 장사는 얼굴이 사색으로 변했다. 결국 최인범의 바짓가랑이를 부여잡고 애걸복걸 울면서 사정했다. 사정하면 뭔가 구명될 가능성이 있을까 생각해 죽자 사자 매달렸다.
“아이고오. 선비님, 저 좀 한번만 살려 주세요. 선비님이 이대로 가시면 저희 식솔들 모조리 굶어 죽사옵니다. 그러니 제발 살려주세요. 흑! 흑!”
“어허! 이놈이 장기를 둬줬더니 강상의 법도도 모르나? 감히 양반의 옷자락을 잡고 늘어지다니.”
조선은 신분사회로 평민이 지금처럼 양반의 바짓가랑이를 잡고 욕보이면 중죄로 다스렸다. 워낙 다급한 콩 장사는 양반의 바짓가랑이를 잡으며 울면서 매달렸다.
“선비님, 제발 한번만 살려 주세요. 소인에게 딸이 있는데 딸을 달라시면 드리겠사옵니다. 그러니 제발 한 번만 살려주세요.”
“어허! 누가 들으면 내가 사람을 패 죽이는 줄 알겠네.”
콩장사가 재물을 돌려받기 위해 딸을 내놓겠다는 말에 순간적으로 좋은 생각이 떠올라 눈빛을 반짝 빛냈다.
‘이것 봐라 딸을 준다고? 아주 못된 애비군.’
잠시 생각에 잠기다가 크게 인심을 쓰는 것처럼 제안했다.
“자네에게 딸이 있다니 나에게 노비로 보낼 수 있다면 내가 한번 고려해 보지. 그러나 너무 얼굴이 박색이면 보기가 싫어서 곤란해.”
“아무렴요. 제일 예쁜 딸로 골라서 데리고 오겠사옵니다.”
그러자 최인범이 다시 눈빛을 빛내며 은근한 목소리로 제안했다.
“소나 콩을 모조리 돌려받으려면 딸이 셋은 있어야 되겠어.”
“셋을요?”
“요즈음 노비 시세가 하락추세라 가치가 그것밖에 안되니 낸들 어쩌나? 그리고 내일까지 여기서 머무니 딸을 데리고 올 수 있으면 오도록 해. 나도 갈 길이 바쁘니까.”
“예! 예! 소인이 반드시 데리고 오겠사옵니다.”
콩 장사는 죽고 싶어도 죽지도 못한다. 내기장기를 둔 손모가지를 제 손으로 자르고 싶어도 남은 가족들의 생목숨이 자신의 손에 달려있기 때문이다. 하긴 이런 식의 핑계야 노름꾼들이 늘 하는 자신만을 위한 구차한 변명이다.
최인범은 순간적으로 잔머리가 잘 돌아가고 순발력이 있었다. 특별한 목적이 있어서 콩 장사에게 딸들을 요구했다. 나름 뚜렷한 목적은 있었다.
‘그래, 나도 두루두루 좋은 일 좀 해보자.’
풍기주막을 나온 최인범 진사는 바쁜 발걸음으로 벼락주막으로 가게 됐다. 그리고 맛있게 호랑이 고기를 구워서 먹는 모습을 보자 침을 삼켰다.
‘오호! 숯불로 호랑이고기를 구워서 먹네. 진짜 맛있겠다.’
그러나 살벌한 최인범을 아직은 마주치기 싫어 대문 밖에서 슬슬 돌아다니며 관망했다.
이윽고 벼락주막에서 최인범 접장이 밖으로 나가자 그제야 슬그머니 움직였다.
최인법 진사는 밖에서 어정거리며 안을 살피다가 슬며시 주막 안으로 들어와 백삼수에게 다가왔다. 그리고 의외라는 표정으로 반갑게 말을 건넸다.
“백 집사, 자네를 여기서 만나는군. 너무 반갑네.”
“진사님, 저도 무척 반갑사옵니다. 창락골의 윤 진사 댁에서 바로 떠나 여기로 오신 모양이군요.”
“그렇다네. 봉화 현으로 가다가 보니 여기서 만나게 됐군.”
거액을 투자해준 막강한 물주를 만났으니 백삼수는 매우 공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