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화
“백집사, 이번에 풍기에서 판매한 수익금이 대략 얼마지?”
“접장님! 그건 아직 계산을 정확하게 할 수 없사옵니다. 일단 곡물이나 모든 것을 판매해야 수익 금액이 최종적으로 결정되옵니다.”
최인범은 기본적인 회계방법에 대해서 조금 알고 있었다. 하지만 복잡한 복식부기 같은 회계는 전혀 몰랐다.
백삼수가 이렇게 응수하자 고개를 끄덕이고 간단하게 명령했다.
“자본금으로 산정되는 면포 2천필을 채울 때까지는 백 집사가 알아서 처리해.”
“넷! 접장님.”
점점 해가 서산으로 기울며 석양은 빨갛게 물들고 있었다. 초겨울의 날씨는 더욱 매섭게 추워졌다.
소상인인 봇짐이나 등짐장수들이 벼락주점으로 줄줄이 찾아왔다. 그들은 접장인 최인범에게 고개를 숙여 가볍게 인사했다.
상인들은 백삼수에게 다가가 더욱 정중하게 인사했다. 아무래도 백두상단의 실질적인 관리자는 백삼수라는 것을 눈치 챈 것 같았다.
졸지에 전에는 보잘 것 없던 상인에 불과하던 백삼수가 큰 상단의 실권자로 변해 있었다.
상인은 평상에 엉덩이를 살짝 걸치고 백삼수의 손을 부여잡고 사정했다.
“백 집사님, 저에게 콩을 좀 파세요. 순흥 장으로 가서 판매할 물건이 전혀 없어서 그러니 콩이라도 사갈까 합니다. 오늘 장에서 죽을 쑤었습니다.”
이미 잘 아는 사이라 그런지 백삼수는 쉽게 결정을 내려 주었다.
“알았소. 대금은 군포로 계산하시오.”
“예, 이미 어음을 가지고 왔사옵니다. 발행처는 영천군입니다.”
“군포 어음이라니 좋소. 콩은 필요한 만큼 가지고 가고 남는 수량은 다른 것이 필요하면 가져가시오.”
“감사합니다. 나머지는 조로 가져가겠사옵니다.”
이런 대화를 나누더니 어음을 건네 준 상인은 다소 빠른 동작으로 5말씩 자루에 담아 놓은 콩들을 밖으로 내갔다. 이어서 조를 담은 자루도 바쁘게 내갔다.
어음 발행처인 영천군은 후에 영주시로 변하는 소재지 지역이다. 이미 그런 정도는 아는 터라 고개를 끄덕이며 백삼수가 중간도매로 장사한다는 의미를 정확하게 알았다.
콩장사가 물건을 사서 떠나자 이번에는 미곡상이 찾아왔다. 미곡상은 백미의 수량으로 기록한 어음을 내놓고 면포를 가져갔다.
최인범은 옆에서 가만히 거래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면포 1필에 백미 5말 5되로 계산해 셈을 따졌다. 오늘 풍기의 파장에서 면포 1필당 백미 6말까지 오르게 되자 중간도매의 가격도 상당히 오른 것이다.
면포는 줄고 또다시 백미는 늘어나 벼락주막은 쌀가마니가 산처럼 쌓였다. 이제 벼락주막은 행인을 받는 장소가 아닌 커다란 쌀 도매상점처럼 변했다.
거래를 끝낸 백삼수가 옆에서 지켜보는 최인범을 향해 조심스럽게 물었다.
“접장님, 다음에는 예천으로 가시는 것이 어떠한지요?”
“예천?”
“특별히 다른 볼일이 없으시면 며칠 여기서 머물고 다음에는 예천으로 갔으면 하는데요.”
최인범은 갖바치에서 가죽신발을 주문했으니 그게 완정되어 찾게 되면 다른 볼일이야 이곳에서는 없었다. 그러니 예천으로 이동해도 상관은 없었다.
그러나 백삼수가 굳이 예천을 지목하는 이유를 몰라 그에 대해 넌지시 물었다.
“나야 특별한 일이 없지만 백집사는 꼭 예천으로 가야하는 이유가 있나?”
“접장님 있사옵니다. 제가 가진 군포 어음이 예천군에서 발행한 것이 많아 예천으로 가면 물건을 많이 가지고 가지 않아도 크게 장사를 벌일 수 있사옵니다.”
“면포를 관아에서 인수해?”
“그렇사옵니다. 관아에 군포 어음을 제출해 물건을 인수해 소상인들에게 판매하면 되니까요.”
“알았어. 그럼 며칠간 여기서 머물다가 다음에는 예천으로 가서 장사하지.”
이곳을 떠나야 한다는 사실을 자각한 최인범은 대검을 주문한 대장장이를 만나야 했다. 그 때문에 평상에서 슬며시 일어나며 칠복이 형제에게 지시했다.
“너희들은 호랑이고기도 먹었으니 소화도 시킬 겸 지금부터 검법을 익히도록 해. 그렇다고 너무 무리는 말고 지루하면 격투기도 수련하고.”
“넷! 접장님.”
이어서 월녀를 보며 부드럽게 당부했다.
“월녀는 내가 늦더라도 너무 걱정하지 말고 일찍 자.”
“예, 오라버니, 조심해서 다녀오세요.”
최인범은 삿갓을 쓰고 대나무지팡이를 챙겨 벼락주점을 나와 우시장 근처에 있는 상설 대장간으로 향했다.
한편 최인범 진사 일행은 우시장에서 시래기 국밥을 먹고 나자 다시 관아가 있는 풍기의 중심가로 돌아왔다. 우선 약초상에 들려 산삼 씨를 구할 길이 있는지 자세하게 알아봤다. 구입이 가능하지만 심마니들이 산삼 씨는 잘 팔지 않는다고 했다.
‘쉽게 되는 일은 하나도 없어.’
여기 풍기군부터는 자신을 알아보는 사람이 많은 지역이다.
자신이 사는 지역인 봉화현과 풍기군 사이에는 영천군이 있어 상당히 먼 거리다. 하지만 그래도 양반들 사이에는 교류가 있어 아는 사람이 많다고 판단했다.
진사시에서 100명 중에 5명이 결정되는 1등으로 합격했으니 유명할 수밖에 없었다.
수염이 허연 노인이 반갑게 다가와 인사했다.
“최 진사님, 한양으로 올라가 성균관엘 안가시고 여기에 계시네요.”
“갑자기 급한 볼일이 생겨 다시 내려왔어요.”
“아, 그렇군요.”
누군지 전혀 모르지만 상대방의 말에 대충 응수해 주는 수밖에 없었다.
전혀 알지 못하는 노인과 조우되어 정신이 번쩍 들게 됐다. 아무리 생각해도 봉화에서는 살기가 힘들다고 판단됐다.
‘도저히 안 되겠어. 이곳으로 와서 터를 잡는 것이 좋아.’
어느 정도 돌아 다녔다고 판단되자 주막을 찾아갔다.
최인범은 본업을 해결사, 부업으로 농업, 별업으로 내기바둑을 구상했다. 지금은 본업의 실적이 저조하고 제일 후미의 별업이 실적이 좋지만 앞으로 점차 바꾸어 나갈 생각이다.
본래의 최인범이 추구하던 입신양명(立身揚名)의 생각은 이제는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나 주변 사람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어 노력하는 척은 해봐야 한다.
‘봉화로 가면 바로 부석사로 들어가야지.’
그러자니 많은 정보를 수집해야 하는 입장이다. 그래서 풍기에서 제일 번창한다는 풍기주점으로 숙소를 정해 찾아갔다.
숙소로 정해진 풍기주점은 손님들이 기거하는 행랑채와 안채가 있다.
안채나 행랑채는 모두 과객들이 이용하는 형식으로 운영했다. 다른 주막들과 같이 넓은 안마당에는 평상들이 많았다.
와글와글
풍기주막으로 들어가자 수많은 사람들이 음식을 먹거나 술을 마셨다. 50대인 주모가 운영하는 풍기주막으로 많은 손님들이 모이는 이유가 있었다. 풍기주막에는 다른 주막과 달리 쪽진 머리지만 다소 어려보이는 젊은 여자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평창 댁, 오늘밤 어때?”
“어머머! 이상한 손님이시네. 나를 길에서 떠도는 들병이로 아나?”
“어허! 서로 두루두루 좋으니 하는 말이 아닌가?”
대화를 들어보니 젊은 여자들은 모두 평민이나 노비신분인 과부들이다. 양반의 과부들이야 평생 수절이 기본이다. 그러나 평민이나 노비들은 조금은 너그러운 편이다.
‘양반보다 운신에 폭이 넓은 평민 신분이 과부들 입장에서는 더 좋을 수 있겠어.’
사람이 사는데 부부간의 성생활이 전부는 아니다. 하지만 그게 없다면 삶의 큰 부분을 잃고 사는 무의미한 삶일 수 있다고 판단해 이렇게 판단하는 것이다.
주모가 안내하는 행랑채의 제일 끝인 구석진 방 둘에 자리한 뒤에 먹쇠에게 자세하게 설명하며 지시했다.
“먹쇠와 돌쇠는 나가서 월녀를 만나 봐. 들고 다니는 새끼줄을 가지고 가서 팔 곳이 있는지 알아보는 척하면서 월녀에게 접근해서 아까 말한 것을 자세히 알아 오도록 해. 면포를 가지고 가서 갱엿도 사서 꼬일 준비 잘하고.”
“예이.”
아직 호패를 지니지 못한 조갑중은 주막에서 처박혀 있도록 지시했다.
최복동에게도 별도로 명령을 내렸다.
“최 서방은 아까 이야기하던 최용민이란 노인을 찾아가 봐. 면포 몇 필을 가지고 가서 먹을 것을 사다주고.”
“알겠나이다.”
모두 지시를 받고 주막 밖으로 나가자 너무 심심했다. 이제 돌아다녀도 만날 사람도 없으니 그저 방에 처박혀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서책에 물가 등에 대해 기록은 철저하게 해두었다.
잠시 무료한 표정으로 앉아 있던 최인범은 슬그머니 조갑중에게 지시를 내렸다.
“가서 주모에게 장기판을 빌려 달라고 해.”
“예이!”
조금 지나서 조감중이 장기판을 가지고 왔다. 장기판을 방문 앞의 좁은 마루에 올려놓았다. 아주 쉬워 보이나 난이도가 높은 박보장기를 펼쳐 놓았다. 장기판을 보자 조감중이 바싹 다가와 호기심을 표했다.
그저 흘리듯이 권했다.
“갑중아, 너 이것 풀어 봐.”
“예.”
초(楚)와 한(漢)이 격돌하는 장기는 본시 인도에서 전래된 놀이다. 그래서 코끼리 상(象)이 있는 것이다. 바둑이 상류층 놀이로 자리 잡고 있다면 장기는 민초들이 주로 즐기는 놀이다.
행랑채 구석의 마루에서는 장기 두는 소리가 요란했다.
“장이야!”
“멍이야!”
“장이야!”
“멍이야!”
박보장기의 특성상 공격자가 매번 장군을 불러 쉽게 이길 것 같아도 결코 녹녹치가 않았다. 계속해서 장군을 불러 봐도 이기지 못하자 조갑중은 얼굴이 점점 붉어졌다.
“어라? 이상하네.”
쉽게 이길 것 같은데 이기지를 못하니 속으로 은근히 열불이 났다. 그러다 보니 조갑중의 장군을 외치는 소리는 점점 높아졌다.
“장군!”
“멍!”
최인범 진사는 처음에는 멍군을 외치더니 그것도 귀찮아 멍이라고 응수하더니 나중에는 그 소리도 토하지 않았다. 조갑중이 딴에는 머리 써서 힘들게 구상한 공격을 이리 저리 잘도 피했다. 도저히 이길 수 없는 장기라고 생각한 조갑중은 슬며시 제안했다.
“진사님께서 공격해 보세요.”
“그래? 내가 공격해서 이기면 어떻게 할 거야? 나는 그냥으로 장기를 절대로 안 둔다.”
그러자 조갑중은 품속에서 은가락지 2개를 꺼내더니 소리쳤다.
“이거 걸고 하죠.”
도망자 주제인 조갑중이 제법 굵은 은가락지를 소지하고 있자 약간 놀란 표정을 지었다.
‘요 녀석 봐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