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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임트레인-54화 (54/519)

54화

배도치는 술을 모조리 마시자 벌떡 일어나 부하들을 향해 다부지게 명령했다.

“다들 물레방앗간으로 가자!”

“도치 형님, 연장 가져가려고요?”

“그래. 연장이 있어야 깔끔하게 끝장을 보지.”

연장을 챙겨서 완전히 끝장을 보자는 계획에 부하들은 머뭇거렸다. 배도치는 그런 부하들을 독촉해 선술집에서 빠르게 떠났다.

그런 배도치를 바라보던 주모가 속으로 한숨을 토해냈다.

‘후우! 저 놈의 표정으로 보아 크게 일을 저지르고 산속으로 토낄 모양이군. 다 타고난 팔자가 그런 거야.’

어려서부터 거칠고 포악한 성품으로 보아 언젠가는 큰일을 저지를 것으로 어느 정도 짐작했다. 그 시기가 조금 빨라진 것뿐이다.

배도치는 주모가 죽령 고갯마루에서 길손들을 상대로 들병이 짓을 하다가 산적에게 끌려갔다가 겨우 풀려나고 낳은 자식이다.

힘없이 들마루에 앉아 있는 주모의 얼굴에는 뭔가 과거를 회상하는 표정이다.

배씨 성을 가진 그 산적은 이미 오래전에 관군에게 잡혀 한양의 저잣거리에서 망나니에게 목이 잘렸다. 주모는 그런 깊은 사연을 남에게 숨기고 애비도 없이 홀로 배도치를 키웠다. 그런데 아들인 배도치도 애비처럼 산적 질을 하게 생기자 말리지도 못하고 그저 한숨만 연신 토해냈다.

‘후우, 피는 못 속이나?’

주모는 넋을 잃고 먼 산만 한없이 바라봤다. 남들은 다들 산적이라고 욕했지만 천한 들병이 출신인 자신을 유난히 알뜰살뜰하게 챙겼던 사내다.

주모의 옆에서는 최인범 진사가 일행들과 같이 시래기 국밥을 퍼먹고 있었다. 배도치와 깊은 관계가 있어 보이는 주모의 거동을 유심히 살폈다. 시래기 국밥을 먹으며 귀를 세워 모두 들었다.

아무래도 두 사람의 나누는 말투로 보아 모자 사이가 분명했다. 방금 여기서 사라진 왈짜 패거리의 거동들도 심상치 않았다.

연장이라는 소리에 ‘이놈들이 꼴에 은어를 쓰네.’하며 입가에 엷은 미소를 지었다.

자신들은 폼 나게 은어를 쓴다고 연장 운운하지만 그런 은어야 검이라고 충분히 알아들을 수 있었다. 아마도 외딴 물레방앗간에 검을 숨겨둔 것 같았다.

잠시 생각에 잠겼다.

‘공교롭군. 최인범과 싸운 왈짜패 두목 녀석의 어미가 운영하는 선술집으로 시래기 국밥을 사먹으러 오고. 두목인 배도치가 죽령에서 산적 질하는 애꾸눈을 안다니 이상해.’

장차 사과 과수밭을 운영하려면 축산도 꼭 필요했다. 그래서 소나 돼지 등의 정확한 시세를 알아낼까 해서 일부러 소시장을 찾았다.

이곳에서 시래기 국밥을 파는 선술집을 찾았더니 여기서 또 이리 저리 엮였다.

이런 것으로 보아 좋은 인연인지 끔찍한 악연인지 모르지만 계속 자신과 연결될 것이라고 미루어 짐작됐다.

‘하긴 이미 내가 거액을 투자했으니 단단히 엮인 사이야.’

풍기에서 당분간 머물며 최인범 접장의 행동을 지켜보기로 결심했다. 시래기 국밥을 먹고 선술집을 나오자 슬며시 최복동에게 지시했다.

“최 서방, 나는 대장간에 들려 볼 것이니 농주를 마시며 주모의 거동을 조사해봐.”

“애꾸눈 때문인가요?”

“아무래도 죽령의 애꾸눈을 왈짜 두목인 배도치가 잘 아는 사이 같아. 한번 조사해 보는 것이 좋겠어.”

“알겠사옵니다.”

우시장과 인접한 대장간은 항상 영업하는 곳이다. 농기구를 비롯해 부엌에서 사용하는 칼들을 만들고 말의 편자도 진열됐다.

대장간 안으로 들어가 한창 부엌칼을 만드는 50대인 대장장이에게 물었다.

“여기서 연장을 파나?”

“선비님, 무슨 연장을 찾으시는 데요?”

“내가 요즈음 호랑이가 많이 나타나서 집에 장도 하나를 비치해 놓아 볼까 해서.”

“선비님, 장도는 주문하시고 오래 지나야 만드옵니다. 워낙 찾는 사람들이 적어 항상 비치해 놓고 팔지는 않사옵니다.”

이런 대답에 이곳이 산적이나 혹은 왈짜패들의 무기를 만드는 대장간임을 알았다.

용도를 정확하게 알고 제작해 판매했는지 까지는 모른다. 하지만 여기도 죽령의 애꾸눈과 어떤 식으로라도 연결된 것이 틀림없었다. 거리도 가까우니 의심해 볼 여지가 많았다.

당장 무슨 도구나 장검이 필요해서 찾은 것은 아니다. 그래서 이것저것 계속 만지며 가격만 알아봤다.

구석에 벌목에 필요한 대형 톱이 보이자 흥미를 느끼고 물었다.

“이 톱은 파는 것인가?”

“예, 사신다면 당연히 팔죠. 주로 벌목할 때 사용하는 톱이옵니다.”

의외로 대장장이는 솜씨가 아주 좋았다. 이곳이라면 철제품은 거의 만들 수 있다고 판단됐다.

‘나중에 무기가 필요하면 여기서 만들면 되겠어.’

이렇게 판단하고 여전히 벌목용 대형 톱을 자세하게 살폈다.

그는 사과 과수밭을 만들 생각이라 아무래도 대형 톱이 필요해 관심을 두는 것이다. 만족할 수준은 아니지만 사업을 하기 위해 필요한 철제품은 구입이 가능했다.

‘도끼도 여러 자루 필요하겠어.’

일단 빈 서책에 사야할 물건들을 하나하나 기록했다. 농사를 지으려면 그에 따라 필요한 농기구도 많고 또한 목수들이 사용하는 연장도 많이 있어야 한다. 수시로 시세의 변동이야 있지만 그래도 보통 지역 특성에 따라 통용되는 공정가격은 있었다.

잠시 뒤에 선술집에서 농주를 마시며 주모와 대화를 나누던 최복동이 대장간으로 왔다. 필요한 정보를 모두 수집한 최인범은 대장간에서 나왔다. 일행과 같이 천천히 걸어가며 잡담처럼 대화를 나누었다. 이런 방법은 최인범에게는 매우 중요한 정보수집 수단이다.

“최 서방, 뭐 알아낸 것이 있나?”

“예, 배도치는 주모의 아들이옵니다. 그리고 주모는 죽령에서 들병이 짓을 하던 여자고요. 배도치의 아비도 산적이었던 것 같사옵니다.”

“그것을 주모가 직접 말하던가?”

“아뇨. 그냥 아비 닮아서 산으로 들어가려고 한다며 푸념해서 짐작하는 거죠.”

나중에는 모르지만 지금은 필요한 정보가 아니었다. 이후 다른 쪽으로 대화를 나누었다. 최인범은 주로 봉화현의 일들을 슬슬 물어봤다.

최대한 많은 정보를 수집한 상태에서 봉화로 돌아가야 별 탈이 없다고 판단해 알아내는 중이다. 어느 정도 자신에게 필요한 정보를 수집해 습득한 이후에 봉화로 돌아가야 한다.

‘이런 정도의 정보로는 너무 부족해. 더 알고 나서 봉화로 가자고.’

봉화현에서 살았던 과거에 대한 많은 정보가 절실하게 필요했다. 최인범은 최복동과 조금씩 집안이나 기타 자신 주변 사람들에 대해 대화를 나누었다.

“최서방! 봉화로 돌아가면 어디부터 인사하러 가야지?”

“진사님, 어르신들께 인사를 가시려면 풍기의 어르신을 먼저 만나는 것이 급하죠.”

“아! 그렇군.”

“진사님, 그간의 정리를 봐서라도 절제도위를 지내신 최용민 어르신을 먼저 만나는 것이 도리 같사옵니다.”

“그분은 요즈음은 어떤가?”

최용민이라는 사람에 대해 전혀 모르면서 적당히 응수했다. 유도 심문을 하듯이 변죽만 울리고 최복동이 알아서 토설하도록 대화를 이끌어갔다.

시간이 지날수록 많은 정보가 하나하나 최인범의 머릿속으로 들어와 흡수됐다. 많은 정보가 들어오자 차츰 일부러 생각하려고 하지 않아도 됐다.

과거의 기억과 자신의 현재 정신이 합쳐서 새로운 정보로 각인됐다. 이런 현상으로 보아 빠른 시간 안에 많은 경험을 쌓아야할 필요성이 있었다.

‘후우! 다리 품 좀 들여야 되겠어.’

너무 부실한 몸을 조금 났게 만들 욕심도 있었다. 그래서 운동 삼아 걸어서 부지런히 돌아다녀야 된다.

풍기는 나중에 인삼(장뇌삼)이 많이 재배되는 지역이다. 그렇다면 그만큼 이곳에는 먹으면 만병통치로 널리 알려진 산삼도 많이 난다는 것이다.

벌써 때 이르게 인삼을 잘 받아들이던 자신의 몸에 좋은 여름철 보양식품인 삼계탕 맛이 저절로 떠올랐다.

그래서 몸을 생각해 최복동에게 물었다.

“산삼을 살 수가 있나?”

“진사님, 살 수야 있지만 워낙 고가라 사먹기야 힘듭지요.”

“그렇게 비싼가?”

“예, 상당히 비싸죠.”

이런 대답을 듣자 산삼은 사먹기가 힘들겠지만 장뇌삼이라도 많이 재배해 넉넉하게 먹어보고 싶었다. 그러니 이곳 풍기에서 인삼재배 즉 장뇌삼 재배는 반드시 해야 할 사업으로 결정했다. 이런 치밀한 계획으로 최인범의 발길은 자연히 약초상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한편 내성천 모래밭을 떠난 최인범 접장은 바쁜 걸음으로 걷고 있었다.

좁고 구불구불한 길을 따라 산속으로 들어갔다. 산속이라고는 하지만 주변의 산이 비교적 낮은 야산이다. 메마른 가지들이 축 늘어져 산길을 가로막았다.

천천히 걸으며 산속의 나무들 사이에 쌓여 있는 눈들을 바라보며 터벅터벅 걸었다. 겨울의 찬바람이 휘리릭 휘리릭 하며 골짜기의 능선을 따라 강하게 불었다. 느낌이지만 북쪽에서 많은 눈구름이 밀려오고 있었다. 써늘한 찬바람이 옷깃을 스쳤다.

‘앞으로 많이 추워지겠어.’

한참을 산길을 따라가다 보니 드디어 갖바치가 사는 산골마을에 도착했다.

갖바치나 기타 장인들이 모여 사는 옆에는 소를 잡으며 사는 백정들도 살고 있었다. 본시 백정은 다른 곳에 따로 사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이곳은 여러 가지 물건을 만드는 장인들과 같이 옹기종기 모여살고 있었다.

마을은 골짜기를 따라 너와집과 초가집이 뒤엉켜 있었다. 소나무 판자로 지붕을 덮은 허름한 너와집 앞으로 다가가 작게 소리쳤다.

“노인장 게시오?”

“누구요?”

다소 까랑까랑한 노인의 목소리가 들렸다. 목소리의 주인공이 바로 이곳에서 제일 솜씨가 좋다는 갖바치라는 사실을 직감했다.

반가운 마음에 다소 급하게 용건을 말했다.

“가죽신을 주문하러 왔습니다.”

“들어오시오.”

판자로 만든 문을 밀치고 집안으로 들어가자 약간 역겨운 진한 가죽 냄새가 진동했다. 역겨운 냄새가 코를 자극하자 자신도 모르게 코를 벌름거리며 인상이 잔뜩 찌부러졌다.

다소 어두운 집안에는 수염이 허연 갖바치노인은 두박한 손을 부지런히 움직여 뭔가를 만들고 있었다. 시선을 집중해서 바라보자 여자들이 신는 고급가죽신인 당혜다.

집안을 잠시 두리번거리던 최인범은 슬며시 자신이 그려온 종이를 펼쳐 갖바치노인에게 보여주며 물었다.

“소가죽으로 이렇게 신을 만들 수 있나요?”

“가죽신이 이상한 모양이네. 사냥꾼들이 신는 가죽신발과 비슷하긴 한데.”

그림을 보자 갖바치노인이 쉽게 이해하는 것 같아 천만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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