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화
작은 고을의 왈짜패거리라 그런지 너무 허접해 보였다.
최인범은 자신의 무력이 전보다 빠르게 좋아지고 있다는 사실을 아직도 온전하게 인식하지 못했다. 그리고 아까부터 자신을 몰래 주시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한편 다소 떨어진 곳에서 구경꾼들과 같이 최인범 접장의 무술 실력을 바라보다 최인범 진사는 기겁하고 말았다. 무술 실력이 자신이 상상하던 것보다 더욱 뛰어 났던 것이다.
‘와! 아주 오래전에 보았던 드라마의 백동수도 아닌 놈이 왜 저리 무술이 뛰어난 거야?’
펄펄 나는 모습은 중국 무협영화의 주인공 정도는 아니었다. 하지만 액션영화에서나 봄직한 무예솜씨다. 그리고 긴대나무 지팡이에는 분명히 검이 들어있다고 짐작했다. 불편하게 그것을 굳이 들고 다닐 하등에 이유가 없었다.
알면 알수록 살벌한 사람이라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검을 가지고 다니다니. 여차하면 사람을 죽이겠다는 뜻이군.’
자신도 역사드라마나 영화에서 나오는 조선시대를 기억해 겨우겨우 적응하는 처지다. 보아하니 최인범 접장도 그런 방법으로 적응하는 중 같았다.
살벌하게 풍기는 분위기로 보아 과거 조직폭력배의 행동대장 정도로 보였다. 살기가 풀풀 풍기는 살벌한 분위기는 정말 무서울 정도다. 도대체 진짜 정체가 뭔지 너무 궁금했다.
모래판을 떠난 최인범 접장이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지자 최인범 진사는 옆에서 같이 구경하던 먹쇠에게 슬며시 물었다.
“먹쇠야. 너 아까 백두상단의 월녀를 잘 안다고 했지?”
“예, 그 애도 저처럼 윤 진사 댁의 노비였는데요. 주로 주막에서 일하던 애예요. 그러니 서로 아주 잘 알죠.”
그렇다면 그 월녀를 통해 자신에게 필요한 정보를 알아낼 수 있다고 판단해 지시했다.
“먹쇠야, 시장으로 가서 시래기 국밥 먹고 월녀를 만나!”
“월녀를 만나요?”
“갱엿을 넘겨주면서 월녀에게 죽죽이 주막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자세하게 알아봐.”
“진사님, 소인이 그것만 알아보면 되나요?”
먹쇠는 왜 자신이 그래야 하는지 몰라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자 다시 보다 구체적으로 알아낼 사안을 명령했다.
“창락골을 떠난 이후에 있었던 일들도 소상하게 물어보고. 눈치 안채게 조심해.”
“소인 잘 알겠나이다.”
혹시 몰라 다시 강조해 다부지게 명령했다.
“절대로 내가 시킨 것을 눈치 채게 하면 안 돼.”
“진사님, 잘 알겠사옵니다.”
마침 배가 출출해 옆에서 의아하게 자신을 바라보는 최복동에게 지시했다.
“최 서방, 우리 우시장으로 시래기 국밥이나 사먹으러 가지.”
“예이.”
최인범의 이런 지시에 먹보나 돌쇠 그리고 조갑중은 신이 났다.
새로운 주인은 아주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자신들과 똑 같이 식사를 했다. 그 때문에 멋있는 시래기 국밥을 먹게 생겼다. 벌써 먹고 싶어서 저절로 입안에는 침이 가득 고였다. 이들마저 떠난 황량한 모래밭은 싸늘한 찬바람만 갑자기 불어 닥쳤다.
최인범 진사 일행은 내성천 변에서 떠나 우시장으로 가기 전에 풍기 장으로 돌아왔다. 일행들과 함께 종이를 파는 곳으로 갔다. 이곳은 한지인 종이도 팔지만 먹과 벼루 그리고 서책이나 그림도 파는 곳이다.
상설시장과 같이 난전이 아니고 허름한 건물의 가게 안에서 물건을 팔았다.
가게 안으로 들어가 그림을 보자 대부분 풍속도다. 남녀들이 방사를 벌이거나 또는 수작을 부리는 다소 야한 그림들이다. 자신이 보았던 그림들 보다 질은 떨어지지만 더욱 야한 것도 많았다.
잠시 서서히 눈길을 돌려 야한 그림들을 구경하다가 최복동에게 지시했다.
“최 서방, 면포 5필을 주고 서책과 종이를 사지. 그림 그리는 채색용 물감도 사고.”
“예이, 진사님, 하온데 서책이라면?”
“천자문과 소학을 사면되지. 그리고 장부로 사용하게 되는 빈 서책도 사고.”
“알겠나이다.”
이미 진사시에 우수한 성적으로 합격한 학문이 높은 분이 천자문과 소학을 산다니 너무 이상했다. 최복동은 지시한 그대로 사서 챙기고는 있지만 너무 이상해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그러자 최인범 진사는 흘리듯이 가볍게 설명했다.
“이번에 내가 느낌 점이 많아 초심으로 돌아가 처음부터 공부를 다시해볼 거요. 천자문이나 소학 서책을 필사해서 새로 만들어 이놈들에게 하나씩 나누어 줄 생각이고.”
“아하, 그렇군요.”
마구 부리는 사노비지만 멍청하거나 글을 전혀 모르면 부리는 것이 별로 좋지 않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자신이 공부를 시작하면서 주변 사람들도 공부를 같이 시킬 계획이다.
일단 필요한 물건들을 사고 나자 최인범 진사 일행은 천천히 장터를 구경하며 우시장으로 향했다. 가는 도중 노트와 같이 백지를 묶어서 만든 서책에 세필을 들고 뭔가 계속해서 기록했다.
한편 왈짜들과 한판을 벌이고 내성천의 모래밭을 떠난 최인범 접장은 백두상단이 있는 장터가 아닌 전혀 다른 방향으로 향했다. 그가 향하는 곳은 묵고 있는 벼락주막도 아니고 장인들이 모여 사는 산골마을 쪽이다.
그곳으로 가서 필요한 물건을 주문할 계획이다.
‘장날인데 오늘은 집에 있으려나?’
어제 도착과 동시에 갖바치가 사는 산골마을로 찾아 갔으나 자신이 만나려던 장인은 출타 중이었다. 그래서 이미 길을 잘 아니 혼자서 가고 있다.
필요한 휴대용품들은 많지만 추운 겨울이라 가죽신발이 우선 필요했다. 소가죽으로 등산화처럼 만들어 달라고 주문할 생각이다.
‘밑창을 오래 쓰려면 징을 박으면 되는데. 그러면 너무 무겁고 은밀하게 움직이기가 좋지 않은데. 가죽을 여러 겹 대서 만들어 달라고 하나?’
똑 같은 형태로야 애초 만들 수 없는 노릇이다. 그러니 모양은 비슷하게 해서 끈으로 졸라야 하는 등산화를 만들어야 한다. 머릿속으로 형태를 생각하다가 품에서 종이를 꺼내 다시 확인했다. 어설프게 그린 그림이지만 그래도 제법 형태는 잘 알아볼 정도다.
‘여기는 털신처럼 토끼털을 붙여 달라고 해야 되겠어.’
그가 장터를 벗어나는 이유는 사람들의 시선이 의식했기 때문이다.
아직은 모든 것이 완벽하지 않은 상태에서 남들의 주목을 받는 사건을 벌이면 매우 위험하다. 어쩔 수 없이 왈짜패거리와 싸움을 벌였지만 더 이상 사람들의 시선을 받을 수 없었다. 그런 이유로 사람들의 출입이 드문 곳인 장인 마을로 향하는 것이다.
최인범 접장은 사람의 출입이 드문 산길을 향해 혼자서 터덜터덜 걸어갔다. 그런 뒷모습을 바라보던 떠꺼머리 녀석이 빠르게 어디론가 달려갔다.
5일 장터에서 약간 떨어진 우시장의 옆에 있는 선술집.
우시장이라고 해야 장터로 나오는 소는 불과 몇 마리 되지 않았다. 워낙 고가인 소라 우시장으로 나와서 거래되는 경우가 매우 드물다. 대부분 돼지나 염소 그리고 개나 토끼가 거래됐다.
때로는 거위나 오리들도 많이 나와 그런대로 가축시장은 형성되고 유지됐다. 하지만 호랑이가 출몰하자 산동네에서 끌고 오는 가축들이 줄어들어 한산하기 그지없었다.
내성천에서 사라진 왈짜패들이 선술집에 모두 모여 술을 마시고 있었다.
우시장으로 모여든 농부나 가축 장사들을 대상으로 시래기 국밥을 팔던 주모가 왈짜들을 바라보며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혀를 차고 있었다.
“쯧쯧! 한 놈에게 주어 터지고 오다니. 그래서 왈짜라고 해 어디 밥이나 빌어먹게 생겼어?”
그러자 배도치가 퉁명스럽게 말했다.
“열불 나니 술이나 더 주쇼.”
“알았어, 이놈아! 누굴 닮아서 저 지경인지.”
본시 우시장인 가축시장은 다른 장보다 일찍 개장된다. 그렇게 일찍 열리는 이유는 잘 모르지만 간혹 큰 거래가 이루어지고 있어 이곳 주변에는 투전꾼들도 모여드는 곳이다. 왈짜패들은 5일 장터나 또는 이곳의 투전판에서도 개평을 뜯어내서 지냈다.
나이가 많은 주모가 농주를 작은 항아리에 담아 표주박과 같이 넘겨주었다.
왈짜패들이 다투어 술을 퍼마셨다. 턱을 얻어터진 놈은 입을 조금 벌리고 힘들게 마셨다. 그러면서도 턱을 어루만지며 엄살했다.
“어구구! 턱이 안 벌어져.”
“지랄해요. 턱이 안 벌어진다는 놈이 말만 잘 하네.”
다들 한 방에 나가떨어진 처지라 누굴 원망하거나 비난하지도 못하고 술만 퍼마셨다. 그러나 여전히 눈빛들은 살아남아 있어 뭔가 크게 일을 저지르고 싶은 표정들이다.
내성왈짜패들은 오늘 당한 수모를 두고 우시장의 선술집에서 술을 퍼마시며 울분을 토했다. 그러나 복수하려해도 뾰족한 수가 떠오르지 않았다.
이때 선술집으로 떠꺼머리 녀석이 헐떡이며 달려왔다.
“헥! 헥! 도치 형님!”
혀를 길게 앞으로 내밀며 헐떡이는 부하를 바라보던 두목이라 불린 배도치가 짜증난 목소리로 외쳤다.
“복날에 모가지 졸린 멍멍이도 아니고 왜 혀는 내밀고 달려와?”
“도치 형님, 아까 형님과 싸우던 그 접장이란 놈이 갖바치 마을 쪽으로 혼자 갔습니다.”
“뭐? 그게 정말이냐?”
배도치는 부하의 보고에 눈에서 빛이 났다. 떠꺼머리 녀석은 배도치가 호기심을 표하자 다시 설명했다.
“도치 형님, 제가 갖바치 마을로 혼자 가는 것을 두 눈으로 똑 바로 봤어요.”
“자식 말하는 것 보게, 애꾸눈 형님이나 한 쪽 눈으로 보시지 당연한 말을 하고 지랄이야.”
왈짜패의 두목은 주모의 아들인 배도치다. 그래서 왈짜 패거리는 배가 고프면 항상 여기로 와서 시래기 국밥을 공짜로 얻어먹고 있었다.
아무튼 배도치는 애꾸눈인 산적을 형님이라고 칭했다. 도무지 멍청한 것인지 뭐한지 모르나 아무튼 겁이 없는 놈이다. 관아에서 알면 산적과 내통했다고 옥에 끌려갈 판국인데 함부로 말했다.
배도치는 부하의 보고에 잠시 생각했다.
‘혼자라 이거지.’
오늘 내성천을 중심으로 활동하는 왈짜패거리가 모두 한 명에게 철저히 당했다. 배도치는 앞으로 풍기를 비롯한 근동에서 왈짜패 우두머리 노릇도 해먹기가 힘들게 생겼다. 그나마도 일자리가 사라지니 앞으로 먹고 살 길이 막막했다. 그러니 앞날이 아득하기만 했다.
배도치는 술을 들이키며 울화통을 터트렸다.
“어휴! 열 받아.”
“도치 형님, 앞으로 어쩌죠?”
배도치는 전부터 아는 애꾸눈 형님을 찾아 산속으로 들어가 산적 질이나 해볼 요량이다. 그래서 겁도 없이 자신의 속셈을 마구 토해내는 것이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 앞에서 주어 터지고 보니 복수는 한 뒤에 풍기를 떠나고 싶었다. 그런 판국에 부하 놈이 그 접장이라는 애송이 놈의 향방을 알아내어 보고하니 호승심이 생겼다.
배도치는 이를 갈며 속으로 굳게 다짐했다.
‘그 놈을 죽이고 떠야지.’
더구나 인적이 거의 없는 갖바치 마을로 혼자 간다니 안성맞춤이다. 그놈이 우릴 파묻는다고 협박했으니 반대로 죽여서 깊이 파묻어 버려야 속이 후련 할 것이다. 그 놈만 몰래 죽이면 다시 풍기에서 내성왈짜패의 우두머리로 살 수도 있다.
‘그래, 엉겁결에 어린 연놈들에게 뒤치기 당했으니 이번에는 그놈의 뒤통수를 우리가 먼저 치자고.’
이렇게 결심한 배도치는 서둘러 먹던 농주를 모두 퍼마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