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화
사람 심리란 다른 사람이 많이 사가면 더 많은 물건을 구입하고 싶은 충동이 저절로 생기게 된다. 면포 거래는 더욱 활발해졌다.
사람들이 면포 구입에 열을 올리자 젊은 선비는 슬며시 백두상단에서 사라졌다.
면포를 주고 다른 물건을 샀던 사람이 은근히 뿔이 나서 불평했다.
“착호갑사들은 도대체 뭐하는 거야. 빨리 호랑이와 산적들을 잡아야지. 그놈들 때문에 면포를 싸게 넘기고 비싸게 사게 생겼네.”
죽령을 통하는 길이 막혔다는 새로운 소식을 듣자 사람들은 면포 가격이 더욱 많이 오르게 생겼다고 판단하면서 탄식을 토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콩을 한가마 가지고 오는데.”
“조라도 많이 퍼올걸.”
후회란 아무리 빨라도 그저 흘러간 과거일 뿐이다.
중요한 유통 경로인 죽령 길이 막혔다니 앞으로 5일장도 잘 형성되기 어렵다며 걱정했다. 아무튼 그런 일들이 벌어져서 그런지 백두상단의 면포장사는 아주 잘 됐다.
백두상단에서 이상한 말로 사람들의 심리를 자극한 젊은 선비는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다른 포목가게로 가서도 비슷한 말로 바람을 슬슬 집어넣고 있었다. 아주 익숙하게 여론을 조성하는 것이다.
풍기장의 분위기를 이상하게 바꾸고 다니는 젊은 선비는 의외로 창락골을 떠나서 이곳 풍기로 오게 된 최인범 진사다. 그는 이곳에 떨어져 제일 힘든 것이 물가의 가치다. 그러니 시세를 알 수 있는 정보가 가득한 5일 시장을 그냥 지나칠 리 없었다.
지금 시대에 어울리지 않는 차일과 백두상단 깃발을 보자 가까이에서 살펴보기로 했다. 조금 전에 벌인 면포가격 오르도록 바람잡이 노릇이야 당연히 선거판에서 선거 운동하던 솜씨다.
옆에서 따라다니는 최복동은 이런 최인범의 행동이 너무 이상했다.
‘도련님이 머리를 크게 다치시더니 변했나? 전에는 안하던 행동을 다하시고.’
자신이 조금만 집안 이야기를 하려면 머리가 아프다고 회피했다. 가문의 명예를 살린다고 부석사로 들어가서 몸이 상하도록 공부하던 지난 시절의 모습과는 너무 달랐다.
혹시 과거 공부에 너무 신물이 나서 ‘다른 방식으로 몰락한 가문을 일으키려는 것은 아닌가?’ 하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드디어 최인범 진사는 최인범 접장을 조우하게 되자 이런 식으로 은근히 면포장사를 돕고 있었다. 물론 백두상단이 잘 되어야 자신이 투자한 면포 800필의 수익도 보장되기 때문이다.
풍기 장을 마구 휘저으면서 면포 가격의 폭등을 예측하는 바람잡이 노릇을 수행했다. 그는 다시 백두상단이 장사하는 곳으로 향했다.
‘바람 잡은 효과가 있는지 확인해 봐야지.’
물가에 대한 시세도 알아보면서 면포가격을 올리는 여론몰이를 하며 지나갔다.
앞에 뭔가 가지고 사고 싶은 물건을 살피는 아낙네가 보였다.
그러자 그저 옆으로 지나가는 척 하며 옆에 있는 먹쇠에게 슬며시 눈짓하고 나서 슬며시 물었다.
“먹쇠야! 백두상단이 말이나 됫박이 다른 곳보다 후하게 친다며?”
“예, 다른 곳보다 후하게 쳐서 면포와 바꿨어요.”
이미 눈치를 채고 있던 먹쇠는 태연하게 응수했다. 일단 먹쇠가 자신의 의중을 알아채고 응수하자 다른 녀석들에게 지시했다.
“뭐해! 너희들도 밥값은 해야지.”
“예이!”
지시를 받는 녀석들도 주변에 물건을 가진 사람들이 보이면 최인범 진사와 비슷한 방식으로 백두상단에 대해 은근히 선전했다.
최인범 진사와 일행들은 온 장을 싸돌아다니며 선전하다가 다시 상단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시장은 장꾼들 때문에 점점 번잡스럽게 변했다.
다시 백두상단으로 오자 엿 장사 옆에 은밀하게 앉았다. 갱엿을 사먹으며 백두상단의 장사하는 모습을 지켜봤다.
옆에서 엿이 먹고 싶어 침을 흘리는 먹쇠와 돌쇠를 보더니 한마디 던졌다.
“엿이 먹고 싶으면 이놈아 무겁게 들고 다니는 새끼줄이라도 팔아서라도 갱엿을 사먹어. 공짜로 얻어먹으려고 하지 말고.”
말이야 이렇게 하지만 어느새 커다란 갱엿을 앞으로 불쑥 내밀었다. 그러자 세 녀석은 정신없이 받아서 갱엿을 맛있게 빨아 먹었다.
옆에서 곱지 않은 시선으로 세 녀석을 바라보는 최복동에게 부드럽게 지시했다.
“최 서방은 떡을 좋아하는 것 같으니 떡 좀 사와서 먹어.”
“예.”
길을 걸으며 콩떡을 맛있게 먹던 모습이 떠올라 이런 지시를 내렸다. 최갑동이 찰떡을 사오자 나누어 주면서 최인범이 생뚱맞은 소리를 토했다.
“애들은 빨아먹으면 달콤한 갱엿 먹길 좋아하고 어른은 떡메로 후려친 찰떡을 좋아하는 법인가?”
최복동이 이내 답했다.
“진사님, 그거야 당연하죠.”
정확하게 뜻을 알아듣고 답하는 것인지는 모르나 이런 응수에 빙그레 웃었다.
잠시 뒤에 슬며시 삿갓을 쓴 최인범 접장을 턱으로 지적하며 조갑중에게 조용히 물었다.
“갑중아, 저 사람을 전에 만나 본 적이 있어?”
“진사님, 그런 일 없사옵니다.”
“그럼 네가 도망치기 전에 혹시 마을에서 무슨 특별한 일이 있었어?”
최인범의 이런 물음에 조갑중은 매우 놀랐다. 어떻게 알았냐는 표정을 지으며 급하게 답했다.
“진사님, 이상한 일이 있었사옵니다. 소인이 마지막으로 김천 댁을 만났던 짚더미 속에서 개가 새끼줄에 목이 졸리고 투박한 칼로 찔려서 죽어 있더라고요.”
“그래? 투박한 칼이라면?”
“부엌칼로 찌른 것 같이 상처가 깊었어요. 단 한 번에 목이 잘려서 죽었사옵니다.”
이런 설명을 듣자 섬뜩한 느낌과 함께 몸이 부르르 떨렸다.
‘독종이군.’
아무리 개라지만 그렇게 쉽게 죽일 정도면 쉬운 상대는 결코 아니라고 판단됐다. 조갑중의 이야기를 듣자 이제는 대략적으로 최인범 접장의 행보가 짐작됐다.
여자가 숨긴 조갑중의 호패를 찾았던가? 아니면 여자와 머슴 놈을 죽여 몰래 매장시키고 호패를 차지하고 죽령을 넘어 경상도로 숨어 들어왔을 것으로 추측했다.
이런 생각을 떠올리자 가슴이 서늘해졌다.
‘그는 매우 잔인하고 험악한 사내야. 내가 섣불리 접촉을 시도하다가는 자신의 비밀을 감추기 위해 나도 죽이려 들지 몰라.’
몸조심이 최우선인 처지라 조심하는 것이 만사불여튼튼이다.
최인범 접장은 삿갓을 쓰고 백두상단에서 조금 떨어져 있었다. 그런 모습을 살펴보며 조심해야 된다면서도 계속해서 지켜봤다.
최인범 진사는 범상치 않은 기운을 풍기는 최인범 접장이 자신에게 매우 위험한 인물이 될 수도 있으니 기회에 더 자세하게 알아둘 필요성이 있었다.
‘적을 알면 백전백승이야. 기회야 더 자세하게 알아보자고.’
적이 될지 우군이 될지는 여전히 예측하기 어려웠다.
백두상단은 규모도 크지만 됫박이나 말이 조금 후하다는 소문이 퍼지자 손님들이 우르르 몰렸다. 그러자 다른 포목가게는 졸지에 한가하게 변해 버렸다.
상인들은 마을에서 가져오는 물건을 중간에서 사서 되파는 수법으로 돈을 벌기도 한다. 그러나 백두상단으로 물건들이 모조리 몰리자 투덜거렸다.
“우리 같은 소상인은 다 죽으라는 짓이야.”
“관아로 찾아가서 저런 짓은 막아 달라고 해야 해.”
소상인들은 심하게 투덜거리지만 관아로 찾아가도 별로 좋은 결과를 기대하기 어렵다. 저렇게 큰 상인이야 당연히 관아의 아전들과 뒷거래가 있었다.
장꾼들이 백두상단으로 몰리자 장터는 큰 변화가 있었다. 사람들의 발길을 따라 쉽게 이동이 가능한 광주리로 장사하는 아낙네는 백두상단 주변으로 모였다.
그러다 보니 다른 곳은 상대적으로 썰렁해질 수밖에 없었다. 손님이 전혀 없자 상인들은 앞으로 먹고살 걱정이 태산이다.
“에이 쌍! 겨울이라 안 보이는 파리만 날려.”
최인범 진사는 몰래 숨어서 지켜보았다. 자신이 거액을 투자한 백두상단의 장사가 잘되자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쉽게 생긴 면포라 과감하게 투자했더니 의외로 사업이 아주 번창할 조짐이 보이자 좋을 수밖에 없었다.
‘오호! 가만히 앉아서 큰 부자가 되겠어.’
재물을 버는 것도 중요했다. 하지만 백두 상단의 접장이란 사내의 진짜 정체가 더욱 궁금했다. 전에 기차 안에서 자신은 배가 터지라 각종 재주에 대해 자랑했지만 그는 별로 말도 없었고 전혀 자랑하지 않았다.
‘도대체 전에 뭐하던 사람이지?’
대오리로 만든 삿갓을 쓰고 대나무 지팡이를 들고 서 있는 자세가 범상치 않아 보였다.
최인범은 본시 다소 허약해 무술실력이야 별로다. 하지만 보는 눈이야 있으니 최인범이 무술 고수라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이때 건장한 청년 3명이 아주 느릿한 걸음으로 백두상단으로 다가왔다.
거친 시래기 국밥이라도 얻어먹은 것인지 시커먼 손톱이나 뾰족한 나뭇가지로 이빨들을 쑤시고 있었다. 모두 인상이 아주 험악하고 행동들이 매우 불량스럽게 보였다. 상투를 틀었지만 머리를 감지 않아 정갈하지 못해 흐트러져서 봉두난발과 같았다.
건들거리며 다가오는 그들을 알아본 장꾼들이 슬금슬금 자리를 피했다.
어슬렁어슬렁. 기웃기웃.
풍기 장을 내 세상처럼 활보하며 누비고 다니는 청년들은 모두가 알아주는 왈짜들이다. 그들은 팔자걸음으로 상인들이 장사하는 길목을 휘휘 휘저으며 다가왔다.
최인범 접장은 이런 왈짜들의 모습을 바라보다 이제야 자신이 해야 할 업무가 생겼다는 듯이 눈빛을 빛내며 반가운 표정을 지었다.
‘오라, 여기서 활동한다는 왈짜 놈들이군.’
왈짜란 5일 시장에서 어슬렁거리며 장세 이외에 별도의 자릿값을 요구하는 패거리들이다. 어느 한 지역에서 활동하는 무뢰배들로 단체를 구성했다.
어젯밤 주막에서 백삼수는 이곳 풍기 장에서 활동하는 왈짜 패거리는 모두 10명이고 평소에는 3-4명 정도가 돌아다닌다고 알려줬다. 자신은 저런 왈짜 패거리들을 퇴치해줘야 하는 것이다.
어슬렁거리며 백두상단으로 다가온 왈짜 한 놈이 공연히 훼방을 놓고 있었다. 한창 흥정하고 있는 젊은 아낙네의 치마를 발끝으로 슬쩍 들추었다.
“어마!”
기겁한 아낙네는 흥정하다말고 너무 놀라 다른 곳으로 몸을 피했다. 몰상식한 무뢰배를 탓해야 손해만 본다. 그러자 옆에 있던 순박하게 생긴 농부도 슬금슬금 눈치를 보며 다른 곳으로 갔다. 공연히 옆에 있다가 몸이라도 다칠까 겁이 난 것이다.
다른 손님들도 하나 둘 자리를 피했다.
최인범 접장은 장사를 방해하는 왈짜 패거리 옆으로 느릿느릿 다가갔다.
이때 아주 앙칼진 소녀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저씨! 뭐예요. 손님들이 도망가잖아요.”
왈짜들에게 서서히 다가가던 최인범이 놀라 멈출 정도인 큰 목소리로 월녀가 당차게 외치고 있었다. 아직 어리지만 두 눈을 부릅뜨고 항의하는 암팡진 모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