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화
<왈짜는 아무나 하나>
산골마을에서 나온 아낙네들은 대나무로 만든 광주리에 물건들을 넣어놓고 쪼그리고 앉아 있다. 오가는 손님들이 사가기를 마냥 기다리고 있었다.
대바구니 장사꾼이 목을 길게 빼며 크게 외쳤다.
“자! 자! 구경들 하세요. 어서 오세요. 싸요!”
이제 추워졌기 때문인지 겨울을 따스하게 보낼 겉옷들이나 혹은 누비옷을 만들 면포가 호황을 누리며 잘 팔렸다. 면포는 대부분 쌀이나 보리 그리고 콩, 조 같은 잡곡과 교환됐다.
5일 시장은 다소 시끄럽고 어수선하지만 그런대로 질서를 유지하며 성행했다.
젊은 아낙네가 머슴으로 보이는 녀석과 같이 작은 포장을 친 포목가게 앞으로 와서 주인과 흥정했다.
“면포를 주세요.”
상인이 아낙네의 자루를 슬쩍 들추며 물었다.
“뭐를 가지고 왔소?”
“콩이 네 말인데요.”
“알았소. 자루를 주시오. 좋은 콩인지 보고 네 말이 되는지 되어서 확인해 봅시다.”
포목가게 주인은 익숙한 솜씨로 10되 들이 말을 가지고 되어봤다. 하지만 아낙네가 분명히 집에서 4말을 여유롭게 되어 가져온 콩은 의외로 4말이 되지 못했다.
아낙네는 고개를 가로 저으며 중얼거렸다.
“이상하네, 내가 오다가 흘릴 리도 없고.”
참으로 귀신이 곡할 노릇이다. 아낙네는 아무 죄도 없는 머슴만 공연히 눈을 흘기며 노려봤다. 그러자 머슴은 영문을 모르고 그저 얼굴만 벌게졌다.
건장한 머슴 놈은 속으로 떡줄 놈은 생각도 안하는 김칫국을 마시는 중이다.
‘아씨가 혹시 날······.’
이런 사단들이 장에서 자주 벌어지는 이유는 말의 크기가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외형이야 똑 같아도 안을 더 파내거나 오목하게 만드는 식으로 눈을 속였다. 설사 그렇지 않아도 상인이 말이나 됫박을 가지고 장난치는 수법이야 다양했다.
말을 툭툭 쳐서 최대한 부피가 줄어들게 하거나 때로는 물건의 품질을 놓고 트집을 잡는다.
일행과 같이 풍기 장에 들어서자 이런 모습을 살피며 바쁘게 돌아다녔다. 그의 뒤에는 일행인 4명이 졸졸 따라다녔다. 최인범이 관심을 두고 유심히 살피는 것은 몸에 좋다는 식품들이다. 커다란 산 도라지를 발견하자 속으로 은근히 침을 삼켰다.
‘와아! 도라지가 크다. 폭 고아서 먹으면 힘이 좋아지려나?’
너무 허약한 몸이라 그것이 제일 걱정이다.
재물도 좋지만 몸이 너무 허약하면 모두 다 허사다. 더구나 두둑하게 재물도 챙겼으니 마음에 드는 물건이 있으면 과감하게 사볼 생각이다.
먹쇠는 밤과 새벽에 꼰 새끼줄 뭉치를 등에 지고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짚신을 파는 사람이나 새끼줄을 사려는 사람을 찾아보는 것이다.
그런 먹쇠를 보며 돌쇠가 슬며시 권했다.
“돌쇠야, 나에게 짚신 만드는 것 배우라니까.”
“싫다, 너에게는 그것 안 배워.”
먹쇠는 퉁명스럽게 답했다. 그러자 옆에 있던 조감중이 슬며시 나서며 말했다.
“돌쇠야, 내가 그냥 만들어 줄게. 그러니 싫으면 안 배워도 돼.”
“정말?”
조갑중은 이제 같이 살아야 하기 때문에 다른 두 녀석에게 나름 호의를 베푸는 것이다. 그런 모습을 바라보며 속으로 생각했다.
‘다 자신들이 살 구멍은 잘 찾아 가고 있군.’
한편 먼저 창락골의 죽죽이 주막을 떠난 최인범 접장 일행은 전날 이곳 풍기에 도착했다.
그는 숙소로 벼락주막에서 기다리던 5명의 상인들을 만났다. 모두 20대 후반의 장사꾼들이지만 대부분 10년은 장돌뱅이로 살아온 화려한 경력이 있었다.
서로 인사를 하고나자 5명의 상인은 상단 규칙이 적혀 있는 약정서에 서명하고 백두상단의 회원이 됐다.
회원들은 숙박비나 기타 경비를 포함한 여비, 그리고 보호에 대한 비용을 부담하게 된다. 그런 회비는 모두 집사인 백삼수가 지니며 지출과 수익을 계산해 정산하게 된다.
물론 상하관계로 조직되기 때문에 조금은 강제적인 규약이 많았다. 규약에 서명하고 나자 각자의 역할이 분배되어 바쁘게 움직였다.
풍기의 5일장에는 전과는 다르게 대형 차일이 쳐져 있었다.
근동에서는 이렇게 대형 차일을 친 상인이 그동안에는 전혀 없었다. 처음으로 엄청나게 큰 규모의 대형 차일을 치고 면포를 장사하는 대상인이 나타난 것이다.
차일 양쪽에는 백두상단(白頭商團)이라는 한문과 언문 글씨가 써진 아주 긴 대나무 깃발이 세워져 있었다.
풍기의 장터를 찾아 온 누구도 쉽게 알아 볼 수 있도록 해놓았다. 업종은 면포장사로 전에는 전혀 보지 못한 엄청난 규모다.
장으로 나온 사람들은 처음 보는 광경이라 너무 신기하다는 표정으로 바라봤다.
“저긴 도대체 뭐를 파는 곳이야?”
“면포를 판다는군.”
“가서 구경이나 해볼까?”
차일의 규모가 크자 호기심이 생긴 사람들은 우르르 몰려들어 기웃기웃 구경하거나 흥정했다.
미곡이나 면포가 화폐구실을 하는 시대다. 그렇기 때문에 면포를 파니 당연히 미곡이나 잡곡 그리고 삼베를 받고 면포를 넘기는 물물교환이다.
“자! 쌀로 가져온 분은 이리로 오세요. 그쪽으로 가시지 말고.”
“삼베나 명주는 이리오세요.”
간혹 특수한 경우이지만 명주나 비단 그리고 은비녀나 금가락지를 가지고 와서 면포와 교환한다.
그런 고가품의 감정은 어김없이 백삼수가 담당했다.
최인범은 백두상단의 접장이라고 하지만 물건의 시세를 전혀 몰랐다. 또한 물건들의 가치를 전혀 알아보지 못하니 도무지 장사에 개입할 수 없었다.
‘이거야 원, 보면 볼수록 어지러워서 머리만 아프군.’
너무 바빠 보여 옆에서 도와주려고 해도 도울 방법이 전혀 없었다.
상단에 합류한 5명의 회원들은 모두 과거의 경력이 무시된 상태로 모조리 면포 장사에 매달렸다. 대부분 말이나 됫박으로 부피를 확인하거나 면포와 바꿀 물건의 품질을 확인했다.
백두상단의 집사인 백삼수는 일계장인 장부를 들고 기록했다.
거래되는 품목이나 수량을 바를 정(正)자로 빠르게 기록했다. 5명의 회원들에게 모두 100필씩의 면포를 나누어주고 장사를 시키고 있었다. 5명의 회원은 졸지에 큰 상점의 점원과 같이 변했다.
언뜻 보기에는 매우 무질서하게 장사하는 것 같았다.
경력에 따라 물건을 가지고 온 손님들과 흥정했다. 포목을 포목장사, 잡곡은 잡곡장사 대로 각기 주특기에 따라 손님을 담당했다.
“아저씨, 삼베는 이쪽으로 오세요.”
“알았네. 머리카락도 받나?”
“예, 한 번 보죠.”
백두상단에서 거래되는 품목은 의외로 아주 많았다.
칠복이와 팔복이는 처음으로 장사에 합류했다. 하지만 어젯밤에 주막에서 백삼수에게 단단히 교육을 받아서 그런지 동작들이 아주 민첩했다. 두 녀석들은 흥정이 끝난 손님들이 가져온 물건들을 재빠르게 한쪽으로 치우며 종류별로 분리했다.
자신이 옆에 있어야 장사하는데 거치적거리기만 해서 약간 떨어져 지켜봤다. 그러다가 월녀를 바라보다 눈이 동그래져서 자세하게 살폈다.
‘어, 저 녀석 좀 보게.’
어린 월녀는 의외로 아주 쉬운 방법으로 수량을 계산해 파는 물건과 받는 물건의 차이를 말해줬다. 그런 모습을 바라보며 약간 놀랐지만 조금 이해됐다.
‘아하! 주막에서 숙박비나 술과 밥값을 계산하면서 배웠군.’
백삼수가 앉아서 장부를 기록하는 옆에는 화려하고 아름다운 방물들이 진열되어 있었다.
방물이 놓인 좌판 앞에는 아녀자들이 호기심어린 눈으로 살피고 있었다. 일부는 쓰개치마를 머리에 두르고 일부는 장옷을 쓰고 있다.
여자들은 예쁜 노리개를 보자 사고 싶어서 마른침을 삼키며 호기심이 가득해 바라봤다. 함부로 만지거나 가격 흥정은 잘 이루어지지 않고 있었다.
간혹 만지작거리는 여자들도 보이고 남자들도 만지다가 뭔가 생각난 듯이 다른 곳으로 바쁘게 사라졌다. 고와 보이는 물건을 사서 누군가에게 주고 싶지만 장엘 나와 꼭 사가야 할 물건이 떠올라 애써 포기하는 눈빛이다.
유심히 노리개를 살피던 처녀가 고운 색실을 지목하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이것 주세요.”
“그건 면포 반 필.”
고운 색실이나 바늘 등 꼭 필요한 물품들은 여자들이나 사내들이 면포를 들고 찾아와 사갔다. 교환 방법은 무조건 면포만 받아들였다. 그런 면포는 월녀가 따로 분리해 챙겨놓았다.
새벽 일찍부터 열린 풍기의 5일 장은 성황을 이루었다. 아직 점심때가 되지 않았어도 많은 면포가 팔려나갔다.
대부분 겨울옷을 만들기 위해서 면포를 사갔다. 흥정하면서 토하는 손님들 말로는 호랑이 때문에 5일장에 나오기 겁이 나서 급하게 대량으로 사가는 경우도 많았다.
흥정하는 아낙네가 장으로 오면서 주워들은 이야기를 토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호랑이도 늘고 도적들이 늘어나 정말 큰일이에요.”
“그래요? 산골마을에 사시나요?”
“별로 그렇지도 않은데 어제 옆 마을에서 개가 몇 마리나 사라졌어요. 호랑이 털도 수북하게 발견됐고요. 어떤 마을은 사람도 죽였다고 하던데요?”
흥정하면서 이렇게 말하자 옆에 서있던 부채로 얼굴을 살짝 가린 젊은 선비가 나서면서 말했다.
“죽령 고개가 막혔다고 하던데 큰일이오.”
“죽령이 막히다니요?”
젊은 선비의 말에 옆에 있던 농군 차림인 순박하게 생긴 사람이 묻고 있었다. 그러자 젊은 선비는 아주 부드럽지만 많은 의미가 담긴 말을 했다.
“죽령에서 산적 질하는 애꾸눈이 사람을 죽였다고 해. 그것도 2명씩이나.”
“뭐? 사람이 죽어요?”
“죽령에는 호랑이가 여러 마리나 돌아다녀서 장사꾼은 물론 길손들도 오가지 못한다고 하네. 아무래도 면포 값이 2배로는 오르게 생겼어요. 더구나 겨울이니 산적 토벌대라도 조직하려면 면포 값은 앞으로 더 많이 오를 수 있어요.”
“면포 값이 그렇게 올라요?”
“내가 장사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죽령은 물론 큰 고개는 모두 흉악한 산 도적 떼들이 날뛴다니 큰일이지. 당연히 5일 장도 잘 안 서게 되니 물가가 오르는 거야 당연하지. 특히 군포로 납부되는 5승 면포야 더욱 그렇지 않겠소.”
“그렇군요. 더 많이 사가야 되겠네요.”
젊은 선비의 말에 다들 고개를 끄덕이면서 서둘러 면포를 구매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