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화
조금 뒤에 최인범 진사도 최복동이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가만히 돌이켜 생각해 보니 자신들이 떠난 마을은 줄초상이 나서 배웅해주거나 또는 자신들의 뒤를 따라온 사람이 전혀 보이질 않았었다.
구불구불한 산길이지만 어디고 길이 보이지 않았는데 갑자기 청년이 나타난 것이다.
무명옷에는 숲에서 나왔다는 결정적 증거인 덤불이 이곳저곳에 묻어 있었다. 분명히 옷을 턴다고 덜었지만 몇 곳에는 흔적이 남아 있었다.
‘숲의 낙엽을 뒤집어쓰고 자다가 급하게 옷을 털고 나타났군.’
확실하게 의심해볼 여지가 많아지자 청년을 자세하게 살폈다. 이상하게도 생김새가 마치 먹쇠와 비슷하고 덩치 역시 비슷했다.
‘어라? 이상하게 사촌 형제 정도는 되는 사람들처럼 닮았어.’
하긴 시대가 다른 곳에 와서 보니 여자의 모습도 비슷하고 남자도 거의 비슷해 보였다.
현대에는 다양한 색의 옷을 입지만 지금이야 다들 똑 같은 모양의 무명바지저고리 차림이다. 그래서 얼굴의 형과 체구만 비슷하면 머리모양도 같아 비슷해 보였다.
이런 거동이 수상한 놈에게는 먼저 행선지를 물어 보는 것이 좋았다. 슬며시 청년에게 다가가서 물었다.
“자네는 어디로 가나?”
“봉화현으로 가려고요.”
“봉화?”
“예.”
행선지가 같다는 소리에 혹시 ‘창락골에 있었던 녀석이 아닌가?’하고 생각 됐다.
그곳에서 머물었다면 분명 자신들을 알고 따라 왔다는 이야기다. 많은 의문이 꼬리를 물었지만 녀석의 정체는 서서히 밝혀졌다.
최복동이 아주 직접적으로 청년에게 물었다.
“자네 어디서 사는 누구인가? 우리도 봉화현에서 사는데.”
“예? 봉화에서 사시는 분들이세요. 저는 단양에서 사는 조갑중입니다.”
조갑중이라는 대답에 어디서 들었던 이름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조갑중? 누구지?’
얼마 지나지 않아 조갑중이란 이름을 어디서 들었는지 정확하게 떠올랐다. 창락골에서 자신에게 내기바둑의 판돈을 빌려 줬던 백삼수라는 청년의 꼭두 형님의 이름이다.
‘조갑중? 이름이 같다니 정말 이상하네?’
세상에는 우연한 일도 많고 동명이인도 많았다. 하지만 공교롭게 자신과 깊은 인연이 있어 보이는 사람의 이름이라 소홀하게 생각할 수 없었다.
이런 생각을 하는 중에 최복동은 지나가는 말처럼 중얼거렸다.
“요즈음 도망치는 노비도 많고 또 호환도 많아 기찰이 심한데 자네는 호패를 차고 다니나?”
“호패요?”
“그래, 호패를 차지 않으면 관아로 끌려가 치도곤을 당하지.”
최복동의 엄포에 청년은 얼굴이 파랗게 질리고 있었다. 아무리 속이려 해도 직접적으로 이렇게 말하자 그만 본색이 드러난 것이다.
당황한 조갑중은 그래도 딴에는 변명한다고 급하게 답했다.
“저는 호패를 집에 놓고 왔어요.”
“그래? 그럼 죽령 고개는 어떻게 넘고. 양쪽에서 기찰하는데.”
매서운 수사관이 용의자를 심문하듯이 최복동은 청년을 매섭게 몰아세웠다. 최복동은 노여운 눈빛으로 청년을 노려봤다.
그러자 청년은 겁이 나서 그런지 머뭇거리더니 실토하고 말았다.
“어르신, 저는 지금 도망 중입니다. 여자가 제 호패를 가지고 도망쳤어요.”
“뭐라? 그럼 그 여자가 봉화에서 사는 여자라는 건가?”
당황한 청년은 급하게 변명하고 말았다.
“그건 아니고 죽령을 통해 경상도로 간다고 해서 쉽게 잡을 수 있다고 생각해 죽령을 넘어 왔습죠. 급하게 따라 왔지만 그년 놈은 다른 곳으로 도망친 것 같아요. 그래서 전에 살았던 봉화로 가려고요.”
“단양으로 갈 생각은 없고?”
“예, 어르신, 호패가 없이 다시 단양으로 갈 수도 없고 돌아가면 저는 죽은 목숨입니다. 어르신 한 번만 저 좀 살려주세요.”
청년은 묻지도 않은 말을 토해 냈다. 자신을 몰아세우는 최복동에게 애걸했다. 그러자 자신이 찾아낸 비밀을 완벽하게 마무리했다는 듯이 최복동은 기가 살아서 호통 쳤다.
“이놈아, 내가 남들 보기에는 어수룩한 농부로 보여도 한때 어사를 수행한 종자였어. 지금까지 내 눈을 속인 녀석은 한 놈도 못 봤다.”
이러 말에 옆에서 지켜보던 최인범의 가슴이 철꺽 내려앉았다.
‘아고야. 중요한 것이 이제야 생각나다니.’
그제야 자신의 조부가 사헌부의 지평을 하면서 어사(御使)로 파견 나갔었다는 것을 떠올렸다. 또한 어사를 수행해 큰 공을 세웠다고 해서 최복동이 노비에서 면천을 받았던 사실도 떠오른 것이다.
남의 몸으로 들어와 살게 된 처지다. 도둑놈이 제발에 저리다고 최인범의 등에서는 식은땀이 흐르고 있었다. 애리한 눈을 가진 최복동이라 자신이 달라진 것을 알아낼 것 같았다.
‘사람을 외향으로 판단하기 어렵군.’
노비에서 면천 받은 순박하게 생긴 최복동은 생김새와 전혀 달랐다. 어사의 수족이 되어 비밀리에 각종 조사를 하는 수사관 역할을 했으니 자신의 정체가 드러날 위험성이 높았다.
‘이거야 원 자칫하면 호랑이 아가리로 들어가겠어.’
하늘은 무척 맑고 햇볕도 따스했다.
먼 길을 가게 되는 길손들에게는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는 좋은 날씨다. 그래서 마냥 편안한 마음이다가 바싹 긴장했다. 마냥 순진하게만 보이던 최복동이 어사이던 조부를 따라다닌 사람이라는 것을 알자 심각해질 수밖에 없었다.
‘조심해야 돼.’
어사까지 하고 벼슬을 그만 둔 조부에게도 무슨 특별한 이유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거야 차츰 알아내면 될 것이고 우선 청년의 사연이 무척 궁금했다.
그러나 자신이 물어 볼 틈도 없이 최복동이 먼저 단언했다.
“네놈의 행색을 보아하니. 분명 평민으로 남의 집에서 세경 받으며 머슴살이 하던 놈이야. 그리고 주인인 과부나 혹은 옆집 과부나 며느리와 간통을 저지른 놈이고. 내 말이 맞지?”
최복동의 추궁에 조갑중은 입을 떡 벌리며 놀라고 말았다. 너무도 정확하게 단언했기 때문에 엉겁결에 되묻지 않을 수가 없었다.
“어르신, 그것을 어떻게?”
“이놈아, 방금 네 놈이 다 자복하지 않았어? 허! 진짜 멍청한 놈일세.”
조갑중은 자신의 정체가 그대로 노출되자 삶을 포기한 표정으로 자세하게 실토했다.
“사실은 제가·······.”
조갑중의 말은 두서가 없었다. 하지만 요점만 추리면 간단했다.
옆집에 과부와 화간을 벌여 같이 도망치자고 해 호패를 넘겨줬다고 한다. 그러나 밤에 만나자던 여자가 낮에 집에서 데리고 사는 종놈과 달아났다고 했다. 그래서 자신의 호패를 찾기 위해 여자가 간다던 죽령을 넘어 경상도로 추적해 따와 왔지만 도망친 남녀는 흔적도 찾지 못하게 됐다는 것이다.
이야기를 모두 듣던 최복동이 너털웃음을 웃으며 쉽게 결론을 내주었다.
“헛! 헛! 녀석 생긴 것처럼 힘이 좋은 모양이군. 내가 판단하기로는 그 과부는 너에게 말한 반대 방향인 멀리 경기도 쪽으로 도망갔을 것이야. 네가 아무리 돌아다녀도 잃어버린 호패를 다시 찾기는 틀렸어.”
이런 분석에 조갑중은 사색으로 변해 사정했다.
“어르신 그럼 저는 앞으로 어쩌면 좋죠. 마을사람들은 제가 과부를 데리고 도망쳤다고 생각할 수도 있는데요.”
“물론 당연히 마을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겠지. 하지만 네가 살길은 있어. 우리 진사님 집으로 가서 같이 살면 호패야 다시 만들면 되니 그렇게 염려하지 않아도 돼.”
“정말요? 감사하옵니다.”
최복동은 오갈 길 없는 녀석을 노비나 다름없는 처지로 만들어 같이 살 요량이다.
최인범은 이런 최복동을 바라보며 더욱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자칫하면 조갑중으로 위장했을 최인범이 드러날 수 있다고 판단됐다.
‘어쩌면 조갑중의 호패는 최인범이 가지고 있을 수 있어.’
그런 쪽으로 생각해 보니 여러 가지로 정황상 맞아 떨어졌다.
주막에서 머무는 동안 최인범이 위장했을 조갑중은 전혀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다. 그는 분명 남의 시선을 많이 의식한 사람이었다.
더구나 부잣집 딸을 호랑이로부터 구했으니 공로를 인정받아 재물을 챙길 수도 있는데 그렇게 하지도 않았다. 또한 거액을 내기바둑의 판돈으로 투입하는 것으로 그 사람이 확실해 보였다.
‘그 사람은 내가 기차에서 바둑실력이 좋다고 자랑했으니 믿고 과감하게 투자한 거야.’
이미 최복동이 조갑중을 가솔로 받아들이기로 결정했으니 자신은 그저 추인만 하는 셈이다. 그래서 속으로야 다소 불안한 마음도 있었지만 환한 웃음으로 승낙했다.
“갑중아!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 같으니 우리 봉화로 가서 같이 살자.”
“감사하옵니다. 진사님.”
조갑중은 너무 감격해하며 즉시 다른 사람과 같은 방식으로 최인범을 칭했다. 힘을 전혀 안들이고 최인범 때문에 노비나 다름없는 머슴이 생긴 셈이다.
만약 죽죽이 주막에서 지내던 사내가 또 다른 최인범이 확실하면 조갑중이란 인물은 그 사람에게는 매우 불리한 증인이 될 수 있었다.
‘좋았어. 내 면포를 처먹고 함부로 나르지는 못하는 안전장치 하나는 챙긴 셈이야.’
조갑중 때문에 자신의 위치까지 노출될 위험성이 농후했다. 하지만 먼저 떠난 최인범 접장의 약점 하나는 틀어쥐고 있는 셈이다. 일단 손해는 전혀 아닌 좋은 여건이 생겼으니 기분이 너무 좋았다.
이것으로 그 사람과 자신 사이의 관계는 자신이 매우 유리한 쪽으로 기울었다고 판단했다. 나이, 사회적 지위, 재력 모두가 자신이 앞서고 있다.
‘좋았어! 그놈을 만나 살살 꼬여서 부하로 삼아야지.’
혼자만의 기대감으로 한껏 부풀어 있었다. 그러나 세상일이란 그리 녹녹치 않으니 잘 될지는 스스로도 장담하지 못했다.
새로운 사람이 합류한 최인범의 일행은 발길을 재촉해 풍기로 향했다. 오늘은 풍기에서 장이 서는 날이라 그곳에서 많은 정보를 알아낼 심산이다.
‘장날이라 물건들의 시세를 알아보기로는 아주 적당해.’
이윽고 풍기가 가까워질수록 장으로 가는 사람들이 많이 보였다.
바쁜 걸음으로 길을 가는 사람들의 손에는 뭔가 들어 있는 보따리를 들고 있었다. 또는 지게에 짐들을 가득 담아서 졌다.
첫눈이 내려 이제는 완연한 겨울이다. 하지만 흐리던 날씨는 다시 청명해지며 따스해졌다. 양반의 고장이라는 충청도에서 죽령을 넘어 경상도로 들어오면 제일 먼저 도착하게 되는 고을인 풍기.
오늘은 3일과 8일에 서는 풍기의 5일 장이다.
장터에는 많은 잡상인들이 장사했다. 대상인들은 차일을 치고 소상인들은 그저 작은 좌판이나 또는 거적때기를 펼쳐놓고 그 위에 물건을 늘어놓아 손님을 맞이했다.
“손님, 구경하고 가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