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화
이윽고 어느 정도 시간이 흘러 많은 물고기를 잡았다. 잡은 물고기를 가져갈 방법이 없어 작은 붕어는 놓아주었다. 큰 붕어만 불에 구워 먹으며 다시 두 녀석에게 지시했다.
“앞으로 길을 가면서도 천자문을 계속해서 외워 봐.”
“예.”
검게 구워진 붕어를 맛나게 먹고 나서 개울에서 얼굴을 닦고 네 사람은 다시 길을 걸었다. 길을 가면서 준비된 음식들을 먹게 되었다.
이미 지시를 받은 두 녀석은 번갈아 가면서 천자문을 외우고 있었다.
구성진 노랫가락처럼 부르는 소리를 들으며 새로운 구상을 했다. 다음에 초읽기 하는 내기바둑을 두게 되면 이놈들을 유용하게 써먹을 수 있다고 판단했다.
‘그래, 천자문을 외우는 시간으로 계시하는 것도 효율적이야.’
드디어 살아 움직이는 도서관도 만들고 움직이는 녹음기에 계측기를 휴대하고 다니는 기분이 들었다.
‘좋았어, 이런 식이면 천자문도 자주 들으니 빨리 외우게 될 거야.’
온통 머리에 천자문 외우는 문제로 가득하다 보니 발걸음은 늦어질 수밖에 없었다.
눈이 내린 길은 걷기에 무척 힘들었다. 사람들의 발길이 드물어 길에 쌓인 눈으로 무릎까지 푹푹 빠졌다.
몸의 전 주인이 본시 운동을 안 해서 그런지 모르지만 얼마 가지 못하고 다리가 심하게 아파왔다. 다리에 쥐가 나는 근육통이 생겨 버렸다.
다리가 너무 아파서 길을 가다가 주저앉으며 엄살을 토해 냈다.
“아이고 다리야. 너무 아파 죽겠네.”
아무리 운동을 안 해도 그렇지 이건 너무 허약체질이다.
그러나 큰 착각을 했다. 걸어서 이동해야 하는 조선시대에 이런 정도 거리를 걸어 다니는 정도야 누구도 쉬운 일이다. 전혀 엉뚱한 곳에 원인이 있었다.
꼬박 삼일간이나 내기바둑을 두르라 책상다리를 하고 주구장창 앉아 있었다. 그러다 보니 다리에 약간 문제가 생긴 것이다.
물론 기본적으로 몸의 상태가 약간 허약해서 벌어진 사태지만 아무튼 그 영향이 컸다.
잠시 이런 저런 생각을 해서 자신의 상태가 왜 이런지 느끼자 한숨이 절로 나왔다. 이런 몸으로 앞으로 험한 세상을 어찌 살아야 할지 아득했다.
‘세상에는 공짜가 없는 법이야.’
내기바둑으로 많은 재물을 챙겼지만 당장에 보약이라도 먹어야 몸을 지탱하게 생겼다. 아무래도 이곳에서 많이 난다는 산삼을 구해 먹어야 될 것 같았다.
봉화현으로 빨리 가야할 하등에 이유가 없다고 판단하고 큰 마을이 보이자 최복동에게 지시했다.
“최서방, 우리 저 집에서 하룻밤 머물다 가지. 도저히 다리가 아파서 가기가 힘들어.”
“진사님, 소를 타고 가시죠.”
안장도 없는 소를 타기가 겁이 났지만 슬며시 다른 식으로 돌려 말했다.
“최서방, 양반 체모에 소를 타고 가다니. 사람들이 보면 고매하신 황희 정승님을 젊은 애송이 선비가 흉내 낸다고 다들 비웃어.”
“알겠사옵니다. 소인이 마을로 먼저 들어가 가능한지 알아보겠사옵니다.”
잠시 뒤에 마을로 급하게 달려갔던 최복동이 헉헉 거리며 돌아와 숨을 고르고 나자 보고했다.
“진사님, 마을로 들어가시면 되옵니다. 집주인은 농사를 짓는 양민인데 주인어른께서 멀리 출타 중이라 사랑방이 비었다고 하룻밤 정도는 재워드릴 수 있답니다.”
“소나 말은 어쩌지?”
“외양간이 커서 임시로 넣어들 정도는 되옵니다.”
내기바둑으로 생긴 농우는 황소와 암소이고 말은 수놈이었다.
창락골을 떠난 최인범 일행은 불과 5리도 이동하지 못하고 마을로 들어갔다.
마을로 들어가 제법 큰 초가로 가니 젊은 집주인이 대문에서 반갑게 맞이했다.
“귀하신 분을 모시게 되어 영광이옵니다.”
“하루만 신세 좀 지겠습니다.”
가장인 노인은 출타 중이고 지금 맞이하는 사람은 주인의 아들 같았다. 그의 안내를 받아 사랑방으로 들어가자 농가지만 몇 가지 서책도 있고 아주 정갈한 모습이다.
양민이고 농가다 보니 윗목에는 짚신이나 삼태기를 만들다만 짚이 수북하게 쌓여 있었다.
최인범은 사랑방에서 앉아 방안을 천천히 둘러봤다.
방안에는 장기판이 보이고 소나무로 투박하게 만든 장기알들이 보였다.
순간 눈에서 빛이 났다.
‘오라, 장기가 있군.’
잡기에 능해 장기도 상당한 고수에 속한다. 바둑처럼 아마추어 최고수급에 해당하지는 않지만 그런대로 세다는 소리는 듣는 막강한 실력이다.
사실 바둑을 잘 두는 사람들은 장기를 아주 쉽게 배운다. 잘 두게 되는 이유는 머릿속으로 수를 계산하는데 너무 익숙하기 때문이다.
무료해서 슬며시 윗목에 있는 장기판을 아래로 끌어다 놓았다. 바둑의 묘수풀이처럼 풀어야 하는 박보장기를 늘어놓고 천천히 반복해 두었다.
툭! 툭! 스윽!
이때 먹쇠가 밖에서 볏짚을 잘 다듬어 한 아름이나 가지고 들어왔다. 그리고 조용히 윗목에 앉아 새끼줄을 꼬았다. 그래서 먹쇠에게 슬며시 물었다.
“뭐 하러 그렇게 가는 새끼줄은 꼬냐?”
“진사님, 새끼줄을 꼬아야 짚신과 바꾸죠. 소인은 새끼줄이야 아주 잘 꼬는데 뭘 만들지는 못해요. 그러니 새끼줄을 꼬아서 짚신으로 바꾸어야 신고 다니죠.”
아주 간단한 대답이지만 노비의 삶이 어떤지 짐작됐다.
먹쇠는 손으로 짚을 보지도 않으며 아주 익숙하게 새끼줄을 길게 꼬고 있었다. 양손을 비벼서 꼬는 새끼줄은 아주 빠르게 길어졌다.
‘완전히 기계적으로 손이 저절로 움직이네.’
밖에서는 최복동이 돌쇠와 같이 소나 말에게 여물을 주며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아마도 소나 말의 먹이 주는 방법이 서로 달라 약간의 의견 다툼이 있는 것 같았다. 물론 큰소리를 내는 심한 다툼은 아니다. 가축을 많이 키워 본 돌쇠의 주장이 옳게 들렸다.
그런 소리를 들으며 자신이 산 노비들이 스스로 밥벌이 정도는 충분하게 하겠다고 판단됐다.
‘데리고 오길 잘했어.’
밖에서 주인과 최복동이 밥을 먹는 문제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최복동은 면포를 밥값으로 넘겨준다고 하고 주인은 정중하게 거절했다. 결국 최복동이 밥값으로 면포를 잘라서 주는 형식으로 대화는 끝났다. 이런 행동으로 보아 최복동이 아주 고지식한 성품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
‘행랑아범은 성품이 깐깐하네.’
하나하나 주변 사람들에 대해 남모르게 파악하며 조용히 박보장기를 두고 있었다.
이때 윗목에서 새끼줄을 꼬며 박보장기를 두는 최인범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먹쇠가 약간 놀라는 표정을 지으며 슬며시 물었다.
“진사님, 장기도 잘 두세요?”
“아니, 그냥 가는 길만 알아서 장기 알을 겨우 잡아먹는 정도야.”
“그런데 그런 어려운 박보장기를 두세요?”
“그거야 그냥 달달 외워서 두는 거지.”
조금 이른 시간에 남의 집 사랑방으로 들어와 박보장기를 두고 있으니 너무 답답했다.
최인범은 사랑방에서 나와 운동할 요량으로 천천히 마을을 돌아다니고 있었다.
가까운 마을에서 호환이 발생해 그런지 이곳 마을도 분위기가 조금은 어수선해 보였다. 행동반경이 넓은 호랑이라 언제 마을로 올지 모르니 다들 부지런히 움직였다.
해가 떨어지려면 아직 멀었지만 아낙네들의 아이들을 부르는 소리가 소란스럽게 마을에는 가득했다.
“옥녀야! 쇠동이 못 봤냐?”
“저쪽 산에서 애들하고 놀아요.”
“에그머니나. 해 떨어지면 산에는 호랑이가 오는데.”
많은 아낙네들이 애가타서 아이들을 부르는 소리로 보아 동네의 아이들이 떼 지어 산에 놀러간 것 같았다.
마을의 모습은 창락골과 아주 비슷했다. 그러나 이곳에는 짚더미가 초가가 있는 곳곳에 높이 쌓여 있었다. 창락골은 대부분 윤 진사 댁 주변에 쌓여 있었다.
이상한 것은 창락골 사람들은 이 마을보다 여유로운 삶을 누리고 있다는 점이다.
조금 시간이 지나자 무명옷에 검불이 잔뜩 묻은 아이들이 아낙네들의 손에 귀를 잡혀 질질 끌려왔다.
“아야야!”
아낙네는 찾느라 애가 탔기 때문인지 아이를 다소 거칠게 다뤘다. 아이들을 데리고 가다가 뭉쳐 있는 참깨 대를 보자 뽑아들어 마구 패고 있었다.
퍽! 퍽!
“이놈의 자식! 또 산에 갈 거야?”
그러자 깡쭝깡쭝 뛰면서 요리저리 피하던 아이놈이 번개 같은 동작으로 멀리 달아났다.
산으로 도망가는 아이를 보던 아낙네는 얼굴이 파랗게 질려 크게 외쳤다.
“이놈아! 어디로 가! 어미 죽는 꼴 보고 싶냐?”
그러나 아이 놈은 더욱 빠르게 산속을 향해 뛰어갔다. 그러자 아낙네도 아들이 사라진 산속으로 뛰어가며 애타게 소리쳤다.
“가지마! 호랑이 나와!”
이런 모습을 바라보며 빙그레 웃었다. 그가 웃는 이유는 도망가는 녀석이 혀를 쏙 내밀었기 때문이다.
‘녀석, 어미가 속 타는 줄도 모르고.’
한가하게 마을을 돌아다녔다. 마을사람들은 호랑이 때문에 곳곳에 죽창을 만들어 세워 놓거나 들고 다녔다.
한동안 마을 구경을 하며 기웃거리다 이윽고 배가 출출해지자 묶고 있는 농가로 돌아왔다.
사랑방으로 들어가 잠시 기다리다 저녁을 먹었다. 보리와 쌀을 섞은 잡곡밥은 먹을 만했다. 자신이 머무는 집들은 모두 풍요로운 편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그럭저럭 지낼 만한 마을이군.’
긴긴 밤을 그저 먹쇠와 돌쇠가 새끼줄을 꼬면서 장기를 두는 모습만 비스듬히 누워 물끄러미 바라봤다. 그러다가 잠깐 조는 사이 큰소리가 들려 정신이 번쩍 들었다.
“장이야!”
“에이, 또 졌네.”
생긴 것과 다르게 장기는 매번 먹쇠가 이겼다.
이런 모습을 바라보며 깊은 생각 속으로 빠져들었다. 어쩌면 미련하게 생긴 것과 달리 ‘먹쇠의 머리가 좋은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가득해졌다.
크아아앙! 크아아앙!
아주 멀리서 우는 호랑이 울음소리가 들렸다. 조금 시간이 지나자 호랑이 울음소리는 아주 가까운 곳에서 들렸다. 그와 동시에 마을의 개들이 일제히 짖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