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화
“돌쇠 밖에 있냐?”
“예이!”
“너나 먹쇠는 모두 떠날 준비는 다 되어 가냐?”
“예, 떠날 준비가 모두 끝났사옵니다.”
돌쇠도 이곳을 빨리 떠나고 싶어서 그런지 대답하는 목소리가 아주 가벼웠다.
즉시 지시했다.
“너 안채로 연락해서 윤 진사 어르신께 내가 떠난다고 여쭈어라.”
“예이!”
윤 진사에게 인사는 드리고 떠나야 도리다 싶어 이렇게 지시했다.
떠나기로 결정하고 자신이 머물던 사랑방을 자세하게 살폈다. 본시 가지고 있던 것이 없었으니 남아 있을 턱이 없으나 그래도 혹시 해서 살피는 것이다. 빠트린 것이 있는 것 같은데 그게 뭔지 잘 떠오르지 않았다.
잠시 뒤에 최복동이 와서 떠날 준비가 되었다고 보고했다.
“진사님, 떠날 준비가 끝났사옵니다.”
“알았어.”
이어서 안채에 있던 윤 진사가 사랑방으로 들어왔다. 아쉬운 표정으로 다가와 말했다.
“최 진사, 벌써 떠나려고?”
“예, 그동안 신세 많이 지고 떠나게 됐습니다. 언제 다시 찾아와 목숨을 구해준 은혜를 갚겠습니다.”
“목숨을 구해 주다니. 잘 돌아가게. 기회가 되면 자주 연락하거나 틈나면 놀러와 바둑 한수 지도해 주고.”
“예, 그렇게 하죠.”
일단 사랑방에서 서로 맞절로 인사를 마치고 나자 밖으로 나와 발걸음을 빨리해 솟을대문 앞의 바깥마당으로 나왔다.
솟을대문 밖에는 농우 2마리와 말 1필을 데리고 최복동 천먹쇠 양돌쇠가 자신이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다들 등에는 괴나리봇짐을 짊어졌다.
말의 고삐를 잡고 있는 양돌쇠가 조심스럽게 다가와 물었다.
“진사님, 말에 오르시죠.”
“아니야, 그냥 걸어서 가지.”
말을 탈줄 모르기 때문에 이렇게 답했다.
바둑을 조금이라도 더 배우고 싶은 아쉬움이 많아서 그런지 윤 진사가 솟을대문 밖까지 나와 배웅했다.
“최 진사, 봉화까지 조심해서 가시게. 호랑이가 근처에서 많이 돌아다니니까.”
“예, 조심해서 가도록 하죠. 어르신께서도 조심하시기 바랍니다. 제가 보기에 호랑이가 사라진 왕대나무 밭이 매우 위험해 보이더군요. 간벌이라도 자주 하시는 것이 좋아 보입니다.”
“알았네, 내년에 해보도록 하지.”
작별의 인사를 나누고 서둘러 떠났다.
“가자!”
빠른 걸음으로 앞장서서 갔다. 그의 뒤에서 무슨 내용인지는 모르나 큰 목소리로 여자가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기절해 있다는 윤봉화가 깨어나서 뭐라 크게 외치는 것 같았다.
“안 돼!”
신경질을 부리며 외치는 윤봉화의 목소리를 들으며 속으로 생각했다.
‘너도 참 팔자가 어지간하다. 호랑이에게 끌려가 똥통에서 겨우 살아나다니.’
자신이야 더욱 황당할 상황으로 변해 졸지에 이곳 조선시대에서 깨어나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어느 정도 적응해 여유가 생긴 것이다.
솟을 대문 앞에서 떠나가는 최인범을 바라보며 윤 진사는 의미 삼삼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나름 중요한 물건을 수중에 가지고 있어 여유롭다.
최인범이 많은 재물을 따서 떠나고 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반드시 자신의 집으로 다시 찾아 올 것을 확신했다.
‘네가 아무리 바둑이야 나보다 고수지만 이건 미처 생각을 못했겠지.’
그의 품에는 최인범에게 아주 중요한 물건이 보관되어 있으니 이렇게 장담하는 것이다.
물론 윤 진사는 이렇게 생각하지만 최인범은 별로 중요하지 않을 수 있는 물건이다. 그러나 윤 진사는 뭔가 중요한 것을 담보물로 챙겼다고 판단했다.
윤 진사는 야로를 부리던 딸이 있는 안방으로 갔다. 자신이 지닌 물건을 딸에게 넘겨주면 조금은 진정될까 싶었다.
많은 눈으로 길을 걷기에는 조금 힘이 들었다. 그러나 많은 재물을 챙겨 떠나게 되자 발걸음이 무척 가벼웠다. 그래서 자신도 모르게 겅중겅중 걷고 있었다.
‘룰룰 랄라야!’
윤 진사 댁을 떠난 최인범은의 발걸음은 가볍고 아주 빠르게 움직였다. 그러자 뒤에서 따라오는 최복동이 다소 이상하다는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정말 이상하시네. 진사님이 걸으시는 모습을 뒤에서 보니 전혀 딴 사람 같이 걸으셔.”
이제는 어느 정도 적응이 되었다고 안심하다가 이런 최복동의 중얼거림을 듣게 되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이곳 창락골은 자신을 잘 아는 사람이 전혀 없으니 다소 이상해도 그냥 넘어 갔다. 하지만 지금 가고 있는 봉화에는 자신의 성장 과정을 잘 아는 주변 사람들이 무수하게 많은 곳이다. 그러니 그들의 의심하는 눈초리가 더욱 심해질 수도 있었다.
‘후! 앞날이 그야말로 첩첩산중으로 구만리군.’
많은 재물을 쉽게 챙겼지만 그것도 이상하고 자신의 행동거지도 이상해 보일 것이니 은근히 걱정이다. 그러니 재물만 생겼다고 해서 만사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었다.
적응하기 위해 뭔가 새로운 정보를 많이 알아야 했다.
최복동에게는 직접 묻지를 못하고 뒤에서 따라오는 먹쇠를 돌아보며 지시했다.
“먹쇠야, 너 기억나는 그대로 네가 그동안 살아온 이야기를 해 봐. 내가 너를 알아야 되니까.”
“예이!”
지시를 받은 먹쇠가 두서가 없는 형식으로 자신이 살아왔던 지난날을 이야기했다. 그러자 같이 윤 진사의 노비였던 돌쇠도 가끔 끼어들어 대화를 이어갔다.
걸어서 가는 길이 지루해진 최복동도 간간히 자신이나 최인범이 그동안 같이 지낸 이야기를 나누며 가게 됐다. 최인범을 돌보며 살던 처지라 자연스럽게 최인범에 관한 이야기가 많을 수밖에 없었다.
흔히 있을 수 있는 어려서 최인범이 다친 이야기, 먹을 것이 없어 고생한 일, 병이 들어 생명이 위험했던 사건들이 최복동의 입을 통해 자연스럽게 흘러나왔다.
‘됐어, 이런 식이면 많이 알아낼 수 있어.’
이런 점을 노리고 먹쇠에게 과거 살아온 행적을 말해 보라고 지시했던 것이다.
과거의 자신을 일부러 알려고 신경을 쓰면 상당히 심한 두통과 현기증이 생긴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서서히 기억을 접합시키는 식은 별 무리가 없이 습득되거나 합체됐다.
‘오라, 이런 방법으로 적응해야 되는군.’
쉽게 말해서 두뇌로만 살기는 힘들고 몸으로 때워야 적응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앞으로 진사시에 합격한 사람으로 살려면 죽으나 사나 한문 공부를 하기는 해야 될 것 같았다.
‘후우! 팔자에 없는 어려운 한문 공부를 시작해야 하다니. 더구나 오랜 시간을 절에 가서 공부했으니 나도 부석사로 가서 한동안 지내야 되겠어.’
세 사람이 계속해서 자신들의 살았던 과거행적을 말했다. 그러다 보니 이 시대의 생활 모습을 조금씩 간접적으로 습득했다. 그의 입장에서는 이들이 모두 살아서 움직이는 도서관인 셈이다.
새로운 정보를 많이 알게 되자 지루한 줄 모르고 걸어갔다. 그러나 너무 먼 거리를 이동하려다 보니 다리도 아파 잠시 냇가에서 쉬고 있었다.
이때 먹쇠가 배가 고픈지 배를 어루만지면서 말했다.
“진사님, 잠시 개울에서 물고기를 잡으면 안 되나요?”
“왜 배가 고프냐?”
“예, 저기에 물고기가 많이 보이는데 잡아서 구어 먹죠.”
“알았어.”
윤 진사 댁에서 준비해온 주먹밥이나 밤, 사과, 배, 떡도 많았다. 하지만 물고기를 잡아먹는 모습도 보아 두는 것이 좋다고 판단해 승낙했다.
아주 사소한 것이라도 많이 보고 부지런히 배워야 한다. 빨리 최대한 많은 조선 시대의 생활모습을 몸으로나 혹은 눈으로 직접 체험해야 두통이나 현기증이 사라진다.
눈이 내린 터라 써늘한 느낌이 들었다. 더구나 벌판의 모퉁이라 그런지 찬바람이 약간 거세게 불었다.
몸을 부르르 떨며 최복동에게 지시했다.
“약간 춥군. 최 서방은 불을 피우지.”
“예이!”
먹쇠의 제안으로 돌쇠도 같이 길가에 있는 개울에서 물고기를 잡았다. 약간 넓은 개물에서 작은 도랑으로 통하는 곳이라 고기가 모여드는 장소다. 이곳은 모두 천수답일 수밖에 없고 주변은 논보다 밭들이 많았다.
춥다며 불을 피우라는 지시를 받은 최복동은 근처의 갈대나 기타 나뭇가지들을 주어모아 부싯돌을 익숙하게 마찰해 불을 피우고 있었다.
그런 모습을 바라보며 성냥이 있으면 좋다는 생각을 해본다. 그리고 성냥을 만들 구상까지 생각이 이어졌다.
‘유황만 있으면 만드나?’
쉽게 성냥을 만들 것 같으면서도 또 어렵다는 느낌도 들었다. 유황을 구하려면 왜인들과 접촉해야 되니 어렵다고 판단 됐다.
아무리 사소한 물건도 쉽게 만들어지지는 않는다. 그러니 더 이상 성냥제조를 두고 고심하지 않았다. 지금 당장 할수 있는 일부터 해봐야 한다.
개울가에 쪼그리고 앉아 불을 쪼이며 고민에 빠져 들었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아무래도 알고 있다고 판단하는 천자문부터 새로 배워야 될 것 같았다.
‘천자문의 쉬운 문구도 정확하게 모르면 그게 무슨 개망신이야.’
활활 타오르고 있는 불꽃을 바라보며 자신도 모르게 천자문을 작게 흥얼거렸다.
“하늘천 따지 검은현 누를황, 집우 집주······.”
그러나 몇 대목 웅얼거리지도 못하고 그만 멈추고 말았다.
참으로 당황할 수밖에 없는 사태가 벌어졌다. 진사시에 합격한 진사라는 놈이 어린아이들도 외우는 천자문을 끝까지 외우지 못하니 정말 큰일이다.
그래서 잠시 골몰하게 생각하다 좋은 꾀가 생각났다.
“먹쇠야? 너 천자문 외우냐?”
“예, 한양으로 올라가신 서방님이 서당엘 다니실 때 따라 다니며 들어서 알아요.”
“그래, 그럼 한번 외워 봐.”
한자야 아는지 모르는지 알 수 없지만 먹쇠는 물론 돌쇠도 천자문은 능숙하게 외웠다. 그리고 최복동도 천자문을 아주 능숙하게 외우고 있으니 이제 한문 실력으로 보면 이들보다 무식쟁이로 판명이 났다.
난감한 상황이지만 잔머리는 조금 잘 돌아가니 방법은 있다.
“먹쇠야! 지난 이야기도 대부분 했으니 조용히 물고기 잡는 것 보다 지루하지 않게 천자문이라도 외우며 잡는 것이 좋겠다.”
“알았어요. 그럼 계속 불러 보죠.”
물고기를 잡으며 천자문을 외우라니 다소 이상하다. 하지만 두 놈은 개울에서 춥지도 않은지 바지를 훌러덩 벗고 첨벙거리면서 은밀하게 숨어 있는 물고기를 잡으며 천자문을 크게 외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