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화
창락골을 떠나는 길고긴 소달구지 행렬을 마을사람들이 우르르 몰려나와 구경했다. 처음으로 일시에 많은 소달구지가 동원되자 신기해 보인 것이다.
웅성웅성
마을사람들은 새벽에 호환도 있었지만 날이 환하게 밝아오자 모조리 잊어버린 표정들이다. 윤 진사 댁에서 많은 물건이 밖으로 나가는 모습이 신기해 보였다.
“진사 어르신께서 내기바둑을 두어 재물을 땄다고 하던데 왜 면포가 밖으로 실려 나가지?”
“그런 내막을 우리가 어찌 아나?”
많은 면포나 미곡을 보유한다는 자체는 부를 상징한다. 그래서 윤 진사 댁에는 면포와 미곡이 항상 곡간에 가득했다.
오늘따라 마을의 어린아이들의 손에는 곶감이 많이 들려 있었다. 개중에 곶감을 줄로 매서 목에 걸고 있는 녀석들도 보였다.
‘곶감이 호랑이를 물리쳐 주나? 다들 조금 이상하군.’
아이들이 귀한 곶감이라 아껴서 먹느라 이런 다는 사실을 잘 몰랐다.
죽죽이 주막을 떠나는 최인범 일행들을 바라보며 주모가 아쉬운 표정으로 배웅했다. 주모는 먼저 월녀에게 다가가 신신당부했다.
“월녀야. 객지로 떠도니 항상 몸가짐을 정숙하게 잘하고 살아.”
“예, 아주머니.”
주모의 이런 충고에 최인범은 속으로 ‘너나 잘하세요.’하며 빙그레 웃고 말았다.
주모는 월녀에게 어울리지 않는 충고를 하고 나자 이어서 백삼수를 바라보며 묘한 웃음을 흘리며 은근하게 물었다.
“삼수, 언제 오는 거야?”
“그야 모르지. 이제는 나도 접장님의 명령대로 움직이니까.”
“그래도 기회가 있으면 가끔은 들려야해.”
“당연하지.”
서로 아쉬운 표정을 띠우기는 하지만 부평초처럼 만난 그저 그런 사이라 이내 잊게 될 것이다. 그러나 둘 사이는 남녀관계 말고 또 다른 은밀한 거래관계가 있는 깊은 사이다. 풍기로 가서 자신의 방물을 보여준다고 말한 것도 다 이유가 있었기 때문이다.
창락골을 떠난 소달구지들은 냇가에 있는 도로를 따라 천천히 갔다.
눈이 내린 길이라 그런지 질척거려 이동하기가 무척 힘들었다. 소들의 코에서는 ‘푸! 푸!’ 하며 거친 콧김이 품어져 나왔다.
품삯을 받고 소달구지를 몰고 가는 농부가 크게 소리쳤다.
“이려! 이려!”
길게 이어지는 소달구지를 뒤에서 따라가며 백삼수는 설명했다.
“접장님, 자본금인 어음으로 면포 1000필을 인수했지만 나머지는 모두 사과나 잡곡들로 바꾸어 가지고 가느라 소달구지가 많사옵니다.”
백삼수가 뭔가 자세하게 설명하려고 하자 다소 짜증난 표정으로 내뱉었다.
“일일이 설명할 필요 없어. 나중에 장부로 기록해서 보고 해.”
“알겠사옵니다.”
윤 진사 댁을 떠나며 아쉬운 점이 있었다.
그래도 목숨을 구해준 처녀인데 다시 한 번 만나보고 싶었다. 그러나 듣기에는 아직도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니 인연은 이것으로 끝났다고 판단했다.
너무 빠르게 떠나게 되어 노리개의 주인인지 확인을 못해서 약간 아쉬웠다. 노리개를 핑계로 수작을 부리려한다고 오해할까 염려해서 그냥 떠났다.
하얀 눈빛으로 보였던 고운 얼굴이 눈앞에 어른거렸다.
‘흠! 얼굴이 상당히 미인이던데.’
그만한 미모를 접하기가 쉽지 않아서 그런지 약간의 미련이 남았다. 어찌 되었건 예쁜 여자를 보면 관심이 가는 거야 사내라면 자연스러운 반응이다.
한편으로는 최인범라는 사내와 마주치는 것이 어째 조금 거북해 서둘러 떠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저런 잡스러운 생각을 버리고 상단의 사업이 궁금해 백삼수에게 물었다.
“백 집사, 백두상단의 회원으로 같이 간다는 사람들은 왜 안보이나?”
“아, 그들은 먼저 풍기로 갔사옵니다. 장터와 주막에 자리를 잡으러 먼저 떠났사옵니다.”
그들의 수가 궁금해 즉시 물었다.
“백 집사, 몇 명이나 포섭한 거야?”
“접장님, 지금은 5명입니다.”
“무슨 장사들인데?”
“접장님, 3명은 면포와 삼베를 거래하는 상인들이옵니다. 1명은 잡곡상이고 나머지 1명은 어물상이고요. 풍기로 가서 주막에서 만나게 될 것이옵니다. 그곳에서 소개해 올리겠사옵니다.”
5일장이 자신이 아는 상식과 같이 돌아가는지가 궁금해 슬며시 백삼수에게 물었다.
“백 집사, 내일이 풍기 장인가?”
“예, 내일이 11월3일이라 풍기 장이옵니다. 접장님 그러니 그리 바쁘지는 않사옵니다.”
여기서 10리 길이라니 그리 멀지 않아 내일 장사에는 지장이 없었다.
본시 5일장은 하루저녁에 이동이 가능한 지역을 연결해 떠돌며 장사하게 된다. 오후에 파장하고 이동해 저녁 무렵 다음 날 서는 장터에 도착해 숙박하고 아침 일찍부터 영업을 시작하는 것이다. 대상인은 이런 방법으로 영업하고 소상인은 새벽 일찍 이동해 장터에 도착해 장사하게 된다.
풍기로 가는 10리 길이 가깝기는 했다. 하지만 걸어서 이동해야 하기 때문에 멀기만 했다. 걸어가는 아이들을 바라보며 은근히 걱정해보지만 걷는 것이 익숙해서 그런지 다들 힘들어 하지 않았다.
이제는 까마득하게 멀리보이는 윤 진사 댁을 응시했다. 그의 품에는 작은 은장도가 달린 노리개를 지니고 있었다. 슬며시 손을 들어 품에든 노리개를 만지며 중얼거렸다.
“다음에 인연이 있으면 또 만나겠지.”
윤 진사 댁의 아가씨를 대상으로 하는 말인지 아니면 최인범라는 사내를 두고 하는지 스스로도 잘 모른다. 하지만 이곳을 다시 오게 될 것이라는 기분이 들었다.
구불구불한 길을 따라 가다가 지나치는 마을에서는 남녀노소가 모두 나와 구경했다. 일시에 많은 소달구지가 지나가자 다들 큰 구경거리가 생겼다는 표정들이다.
작은 마을들을 지나서 다소 곧게 뻗은 길로 접어들자 멀리에 다소 큰 마을이 보였다.
상단의 인솔자인 백삼수가 크게 외쳤다.
“풍기를 거의 다 왔으니 잠시 쉬어갑시다.”
“예이!”
힘들게 가던 소달구지는 모두 멈추고 일부는 여물을 소에게 먹였다.
다각다각. 우르르 우르르.
쉬고 있는 동안 그들의 옆으로 군사들이 이동했다. 창을 든 포졸과 말을 탄 포장 그리고 군사와 같은 창과 활로 무장한 사람들이 바쁘게 지나치고 있었다.
무장한 군사들이 지나가자 소달구지를 모는 농부들이 대화를 나누었다.
“어디로 가는 거지?”
“창락골로 가는 거야. 근래 들어 두 번이나 호환이 있었잖아.”
“착호갑사도 있나?”
“있겠지. 내가 보기에는 활을 든 사람이 착호갑사로 보이는데.”
그들이 지나가는 모습을 바라보며 문뜩 걱정됐다. 검에 베어져 부상당한 호랑이 때문에 창락골에서 더 큰 피해가 없기를 바라고 있었다.
한편 창락골의 윤 진사 댁은 호랑이에게 물려갔다가 구해진 윤봉화 때문에 집안이 매우 어수선했다. 집안의 종들은 다들 불안한 표정들이다. 자칫 불똥이 자신들에게 떨어질까 너무 두려웠다. 그래서 틈만 나면 삼삼오오 만나 수군거렸다.
최인범은 사랑방에서 행랑아범인 최복동과 마주 앉아 대화를 나누었다.
50대인 최복동은 얼굴만 척 봐도 너무 착하게 생겼다. 평범한 체구에 평범한 얼굴, 순박해 보이는 태도까지 여전히 주인에게 충성심을 발휘하는 전형적인 농부의 모습이다.
무릎을 꿇고 앉은 최복동은 조심스럽게 자신의 의견을 말했다.
“진사님, 한양의 성균관으로 올라가시지 않으려면 빨리 봉화의 댁으로 돌아가셔야죠. 언제까지 여기에서 머물 수 없지요.”
“그야 그렇지. 하지만 윤 진사가 떠나지 말고 며칠 더 머물러 달라고 매달리니 쉽게 떠나기가 어렵군.”
“진사님, 그래도 떠나셔야 되옵니다.”
호환을 당한 윤 진사 댁 분위기로 보아 식객으로 머물기가 거북해져 좌불안석이었다. 그래서 떠나기로 결정해 최복동에게 준비하라고 지시했다.
“알았어. 바로 떠날 것이니 떠날 차비를 해.”
지시를 받은 최복동이 급하게 사랑방을 나가자 자신의 행랑을 챙겼다. 노비문서, 우적과 마적 그리고 면포 200필 짜리 어음을 다시 한 번 살펴서 점검했다.
‘이만하면 두둑하게 챙겼어. 비자금도 충분히 만들고.’
서류들을 챙겨 품에 간직하고 매우 만족한 미소를 지었다. 속으로 너무 신이나 춤이라고 추고 싶었다.
조선시대로 떨어진 이후 머리가 터져 죽다가 살았던 기분이었다. 하지만 전혀 쓸모가 없다고 생각하던 바둑실력으로 한 밑천을 단단히 잡게 됐다.
‘윤 진사가 조금 서운해 하겠어.’
윤 진사의 표정으로 보아 자신이 계속해서 머물기를 간절히 원하는 것 같았다. 그 이유는 최인범의 바둑실력이 워낙 고수라 한수 배워보고 싶은 충동 때문이다.
딸이 사라졌다가 주막에서 구함을 받자 처음에는 부상당한 딸에게 매달렸다. 조금 시간이 지나자 사랑방으로 돌아와 자신에게 더 머물기를 권했다.
떠나려니 윤 진사의 딸이 떠올랐다. 아름다운 미색으로 보아서는 마음에 들었지만 하는 행동으로 보아서는 별로 좋아 보이지 않았다.
호랑이가 아무리 영물이라고 하지만 방안에 있는 사람을 물고 가지는 못한다. 그런데 양반집 규수가 속옷 바람에 호랑이에게 물려갔었다는 사실은 참으로 이상했다.
‘양반집 규수가 백주대낮에 폭포에서 벌거벗고 목욕을 안 하나, 한밤중에 속옷 차림으로 밖으로 나돌다니······. 생긴 것이 요염하더니 볼만하군.’
잠시 이런 생각을 하며 최복동이 준비를 끝내고 떠나자며 보고하길 기다렸다.
이때 밖에서 점순이와 다른 노비들이 나누는 목소리가 들렸다. 큰 목소리는 아니고 작게 수군거리는 그들은 윤봉화가 호랑이에게 물려간 과정을 추측했다.
가만히 귀를 기울여 들어보니 윤봉화와 자신의 이야기다.
윤봉화가 어미에게 자기와 혼인을 시켜달라고 한밤중에 야로를 부렸다는 내용이다. 그것도 모자라 속옷 차림으로 뒷마당으로 나와 짖고 있는 멍멍이를 발로 차고 심통을 부렸다고 했다. 그러다가 호랑이에게 개와 같이 물려갔었다는 이야기다.
이런 대화를 듣자 속으로 비웃었다.
‘후후! 누구 말처럼 개처럼 끌려갔었군.’
이미 윤봉화의 행실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무척 방종한 여자라는 느낌이 들었다. 자신과 혼사 문제가 거론되어 꺼림칙하던 차에 이런 대화를 듣자 이곳에서 더 이상 머물 하등에 이유가 없다고 판단했다.
분명 자신과 윤봉화는 인연이야 있었다.
하지만 그저 스치는 인연일 뿐이지 더 이상은 아니다. 윤 진사 댁에서 빨리 떠나자고 결심하자 마음이 다소 급해졌다. 그래서 밖을 향해 외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