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화
<인연은 다시 멀어지고>
퍽! 쫘르륵!
문 앞에서 요란하게 뭔가 떨어지며 물소리가 들렸다. 동시에 빠르게 후다닥 도망치는 발자국 소리도 들렸다. 누군가 백삼수의 커다란 물건을 보고 너무 놀라 도망친 것이 분명했다.
순간 월녀가 세숫물을 떠오다가 놀라는 소리라고 짐작했다.
‘월녀군.’
백삼수의 흉측한 물건 말고는 월녀가 놀랄 일은 전혀 없었다. 분명 월녀가 백삼수의 흉측한 물건을 직접 목격한 모양이다.
그런 생각이 떠오르자 백삼수를 가둘 비장의 방법이 떠올랐다.
‘됐어, 여차하면 오늘 일로 백삼수의 코뚜레를 뚫어 버리는 거야.’
잘 교육시켜서 둘이 맺어 주는 것도 좋을 것 같았다. 세상일이란 어찌 변할지 모르지만 지금으로는 그렇다. 또한 백삼수가 아니어도 다른 남자를 잘 골라서 시집을 보낼 생각이다. 이렇게 생각하고 나자 자신의 다음 행보가 결정됐다.
자신은 남의 양자로 들어가 본래 이름인 최인범으로 살아 볼 계획이다. 너무 달라진 몸이지만 이름만이라도 그대로 간직하고 싶었다. 그때 여동생인 월녀도 면천시켜 자신과 같이 양녀로 들어가면 된다고 판단했다.
슬며시 다른 쪽으로 말머리를 돌렸다.
“전에 주모와 네가 흐드러지게 했던 거냐?”
“예, 그럼 그때 다른 남자가 방에 같이 있었다고 생각하신 겁니까?”
그때가 떠올라 실소를 토하며 고개를 끄덕이며 다소 멋쩍게 입을 열었다.
“그래, 나야 잠결에 들었으니 꼭 세 사람이 신나게 어울리는 줄 알았다.”
“아하! 그랬군요.”
음양인이라고 판단했던 백삼수는 그저 여자와 같이 곱상하게 생긴 남자일 뿐이다. 그러나 그렇더라도 백삼수에 대한 의문은 아직도 많이 남아 있었다.
백삼수는 자신의 중대한 비밀을 속속들이 보여 줬으니 그동안 궁금했던 점을 물어볼 좋은 기회다. 그래서 아주 조심스럽게 눈치를 보며 물었다.
“접장님, 그런데 접장님은 여자 속옷을 입는 것이 취미세요?”
“뭐? 여자 속옷?”
“예, 지금 입고 있잖아요.”
백삼수의 이런 물음에 자신이 이제까지 여자의 속옷인 고쟁이를 겹으로 입고 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갈아입을 기회가 없었던 것이다. 참으로 황감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사실을 그대로 설명하기도 그렇고 다른 식으로 변명할 뾰족한 방법도 없었다. 수시로 터지는 난형난제에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당황한 모습에 백삼수는 조심스럽게 최인범의 하초를 슬쩍 살피며 입을 열었다.
“접장님, 물건 적은 것은 얼마든지 고칠 방법이 있어요.”
“뭐?”
졸지에 나이가 어려져서 아직 여물지 않은 풋고추 같은 물건이다. 그런데 그것을 지목하며 이렇게 말하자 더욱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이 자식이 다 아네.’
얼굴이야 그저 동안이라고 변명이 가능했다. 그러나 하초가 아직 부실이니 그건 누구에게도 변명이 안 되는 명백한 증거다. 잠시 고심하다가 번뜩 떠오르는 좋은 생각이 있었다.
그래서 다소 심각한 얼굴로 말했다.
“내 하초가 아직 부실한 것은 조상님들 탓이야. 옷도 그렇고.”
“조상님들요?”
“그래, 우리 집안은 본시 백두산의 천지연 폭포 근처에서 무술을 닦으며 고고하게 사는 혈통이야.”
“와! 대단한 가문이네요.”
막연하게 설명을 했는데 백삼수는 감탄사를 연발했다. 거짓말도 하다보면 느는 법이라 이제는 능숙하며 실감나게 설명했다.
“우리 집안사람들은 오랜 조상들 때부터 동자공을 반드시 익혀야 해.”
“접장님, 동자공이라면 젊어지는 무술이 아닙니까?”
“그렇지, 그러다 보니 후손들까지 어려서는 하초가 매우 부실하고 나중에 커지는 체질로 변했어.”
“세상에는 그런 일도 다 있군요.”
“그래서 하초를 가리는 여자의 고쟁이를 일부러 입고 다니고. 이제 백두산에서 내려와 평범한 사람들과 같이 살게 되었으니 고쟁이는 벗고 바꾸어 입어야지.”
최인범의 설명에 고개를 끄덕이던 백삼수가 이해한 표정으로 응수했다.
“아하! 그래서 고쟁이도 그렇게 입으시고 매우 젊어 보이시며 이상한 무술을 많이 아시는군요. 백두산에서 호랑이를 자주 사냥해 별로 놀라지도 않는 것이고요.”
“그렇지.”
살아남기 위해 끼워 맞추기를 자주하다가 보니 거짓말도 무척 늘었다.
이제 돌멩이 하나로 두 마리 새를 잡는 일석이조(一石二鳥)의 경지에 이르게 됐다. 아니 그에 더해 일석오조의 효과를 거두고 있었다. 고쟁이. 동안, 무술, 하초, 호랑이까지 한 번에 해결해 버린 것이다.
그러나 이런 변명도 너무 허술한 점은 많았다. 분명 경상도에서 살다가 충청도로 양자를 갔다고 했었기 때문이다. 그거야 나중에 적당히 해명하면 된다.
아직은 시간이 조금 남아 있다고 판단해 급하게 지시했다.
“백집사, 나도 개인적으로 짐은 지고 다녀야 하니 바느질 잘하는 여자들 4명만 빨리 불러와.”
“4명이나요?”
“그래, 가죽을 잘 다루는 사람이 있으면 그런 사람도 두엇 불러다 주고. 눈도 오고했으니 가죽 신발도 새로 만들어야 하니까.”
최인범의 지시에 백삼수는 잠시 생각하더니 답했다.
“접장님, 그건 곤란해요. 여기는 갖바치가 근처에 없어요. 풍기로 가야 만나기가 쉽사옵니다. 그러니 일단 풍기까지 가서 며칠 묵어가면서 접장님이 필요한 물건을 만드세요.”
“알았어. 그곳으로 가면 대나무로 물건을 만드는 사람도 만나게 되겠지?”
“그렇사옵니다.”
자신이 휴대할 물건을 만들기 위해서는 대장장이도 필요했다. 그러니 큰 마을이 있는 풍기로 가서 휴대 장비일체를 만들기로 결정했다.
‘만들려면 시간이 오래 걸리게 생겼으니 지금부터 그림으로 그려는 놔야 돼.’
이렇게 판단하고 백삼수에게 지시했다.
“너, 화선지나 창호지를 10장 구해오고 아주 잘 탄 목탄을 부엌에서 찾아 와.”
“알겠사옵니다. 그것 말고는 없나요?”
고쟁이부터 벗어야하니 이내 지시했다.
“나도 이제 속옷도 새로 갈아입어야 하니 남자 속옷으로 세 벌만 만들어 와!”
“예.”
지시를 받자 백삼수는 골방에서 급하게 나갔다.
그가 사라지고 나자 그제야 칠복이가 골방으로 세숫물을 떠왔다. 어린 애들을 힘들게 한다는 생각이 들어 조용히 물었다.
“백집사가 시키더냐?”
“예, 집사님이 아침마다 이렇게 하라고.”
“알았어.”
형제에게 다부지게 명령했다.
“이런 심부름도 중요하지만 틈틈이 무술을 계속해서 익혀. 내가 백집사에게 너희들에게 심부름 시키는 일은 자제하라고 지시할 것이니까. 너무 염려하지 말고.”
“넷!”
방에서 세면을 마치자 부엌으로 갔던 월녀가 10개의 호리병을 가지고 왔다. 호리병에는 붓글씨로 주(酒), 수(水), 약주(藥酒)라고 쓰여 있었다.
아마도 주는 농주고 약주는 소주를 나타내는 것 같았다. 월녀는 전과 달리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상당히 부끄러워 어쩔 줄을 몰랐다. 그런 월녀를 보며 ‘이 애가 이미 알건 다 아는군.’하며 앞으로 조심해야겠다는 다짐했다.
조금 시간이 지나자 백삼수가 지시했던 물건들을 가지고 들어 왔다.
“접장님, 이 정도면 되나요?”
“됐어, 충분해.”
준비한 창호지와 목탄을 가지고 여러 가지 물건을 그려봤다. 미적인 필요에 의하여 아닌 기능성을 중요한 그림이라 솜씨가 별로라도 상관없었다. 그림은 따로 잘 접어 임시로 월녀의 괴나리봇짐에 보관하게 됐다.
잠시 뒤에 아침식사를 마치고 최인범은 서둘러 떠날 준비를 했다.
남들이 이상한 시선으로 볼 수 있는 여자용 속옷인 고쟁이를 벗고 새로운 속옷이나 누비옷으로 갈아입었다.
월이와 백삼수 그리고 칠복이 형제도 누비옷을 입었다. 겨울에 입는 누비옷은 아주 촘촘히 꿰매야 하기 때문에 품이 많이 드는 옷이다.
쉽게 많은 누비옷을 만들어 오자 이상해서 물었다.
“백 집사, 어떻게 누비옷으로 만들었냐? 시간도 없는데?”
“접장님, 다른 사람의 옷을 만들려던 누비 천을 품삯을 후하게 주고 우리 옷을 먼저 만들어 달라고 했사옵니다.”
“그랬군.”
짧은 머리를 감추기 위해 대를 잘게 자른 대오리로 만든 삿갓이 준비됐다. 각자 2개씩의 호리병을 차고 주먹밥도 가지고 다니게 됐다. 괴나리봇짐을 하나씩 등에 짊어졌다.
설사 이런 준비가 모조리 끝났다고 바로 떠날 수는 없었다. 윤 진사가 발행한 면포 800필의 어음을 현물로 바꾸어야 하기 때문이다.
슬며시 눈치를 보던 백삼수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접장님, 여기서 더 기다리고 계세요. 제가 면포를 인수하면 그때 떠나시면 되옵니다.”
“알았어, 나는 애들과 여기서 무술 수련이나 하지.”
백두상단을 만들었지만 아직은 남과 함부로 접촉하기 곤란해 모든 일은 백삼수에게 떠넘겼다. 그래서 칠복이 형제에게 무술을 지도하며 시간을 보냈다.
누비옷을 입고 무술을 수련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한 해가 지나서도 입을 수 있게 다소 풍덩하게 만든 옷이라 그런대로 수련에는 지장이 없었다.
한창 무술지도를 하는 중에 백삼수가 급하게 달려와서 숨을 약간 헐떡이며 보고했다.
“접장님, 떠날 수 있게 준비가 모두 끝났사옵니다.”
“어음은 모두 면포로 받았나?”
“예, 어음은 모두 면포로 바꾸었사옵니다.”
“그럼 떠나자고.”
드디어 많은 사건을 겪었던 죽령 지역을 떠나 풍기로 향하게 됐다. 여러 대의 소달구지에 면포를 싣고 또한 이곳에서 많이 나는 사과를 싣고 있었다.
소달구지는 느리게 이동하기 때문에 최인범과 백삼수 그리고 세 아이들은 다소 뒤에 떨어져 갔다.
웅성웅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