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화
앞으로 이동은 체력 훈련 정도로 결정하고 숙박할 때는 무술을 수련하면 된다. 또한 칠복이 형제에게 무술지도를 해볼 구상이다.
주막에서 지내게 되는 밤은 틈틈이 월녀에게 산수를 알려줘야 한다. 새로운 공부를 시켜야 되니 다소 늦은 감은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늦은 것은 아니라고 판단했다. 자신은 앞으로 살아가기 위해 여기서 사용하는 언어나 한자 그리고 언문도 배워야 된다.
‘한문 배우기가 녹녹치 않겠어.’
최소한 상단의 장부는 알아 봐야한다. 어음이나 각종계약서는 한문으로 작성할 정도는 되어야 생활할 수 있었다. 그나마 한자는 어려서 배워 조금 많이 아는 편이다.
잠시 이런 생각을 하며 내일 떠날 때 뭐를 가져가야 하는지가 궁금해 물었다.
“백집사, 내일 떠날 때 뭐를 사가지고 갈 거지?”
“접장님, 당연히 어음에 기재된 면포를 모조리 가지고 가야죠. 윤 진사께서 나중에 공연히 딴 마음을 먹지 못하게 면포를 모조리 풍기 장이나 예천 장으로 가져가 팔아야죠.”
부피가 너무 많다고 판단되어 즉시 물었다.
“그것을 어찌 나르고?”
“그건 마을에 있는 소달구지를 모조리 빌리면 되옵니다.”
이런 응수에 다소 이상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전에 백삼수는 귀중품을 파는 방물장사를 한다더니 너무 변해서 그에 대해 물었다.
“너는 본래 방물장사가 아니냐? 그건 안하고?”
“접장님, 그거야 소인이 따로 하는 봇짐하나만 들고 다니는 개인적인 장사고. 규모가 큰 백두상단이야 부피가 많은 품목을 집중적으로 거래해야죠.”
“알았어,”
상단 자금과 자신의 개인 자금을 구분한다는 의도다. 그렇게 운영하다 보면 문제점이 생길 여지가 많지만 아직은 그것을 따지거나 염려할 필요가 없었다.
그래도 다소 궁금해서 슬며시 그에 대해 말했다.
“네가 하는 방물장사의 물건들 나도 구경 좀 하자.”
“알겠사옵니다. 다음에 가는 풍기에서 보여 드리죠. 지금은 물건이 없어 접장님이 보셔도 별 볼일 없는 것뿐이옵니다.”
이런 대답에 약간 이상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저 짐작이지만 뭔가 자신에게 감추고 싶어 한다는 느낌이 들었다.
‘이상하군.’
조금 이상하다는 느낌이 들었으나 일단 모든 것이 결정된 것 같아 명령했다.
“그만 나가 봐.”
“예, 접장님.”
백삼수가 방에서 나가자 옆에서 눈치를 보는 월녀에게 부드럽게 말했다.
“너는 아랫목에서 자도록 해. 나는 문 앞에서 잘 거니까.”
“예? 제가 아랫목에서 자요?”
최인범 접장은 너무 뜨거운 아랫목 보다는 조금 덜 더운 곳이 좋았다. 그리고 유사시 문 앞이 움직이기가 좋다고 판단했다.
괴나리봇짐도 없으니 새로 개인이 지니는 휴대용 장비를 만들 계획이다. 등산용이나 군용 배낭처럼 잘 고안해 만들면 아주 유용할 것 같았다.
‘만들어서 내가 먼저 사용해 보고 나중에는 다른 놈들에게도 만들어 주기로 해야지.’
이렇게 구상하는 중에 월녀가 슬며시 눈치를 봤다. 그러자 최인범은 앉아 있던 아랫목에서 이동해 문 쪽으로 이부자리를 펴고 누웠다. 머리 쪽 벽에는 언제고 대나무 지팡이를 손에 쥘 수 있도록 해놓았다.
쪼그리고 앉아 눈치를 보는 월녀에게 부드럽게 권했다.
“월녀야, 오라비도 자야하고 너도 내일 먼 길을 가게 되니 빨리 불 끄고 자.”
“예. 오라버니.”
자리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며 개인장비를 만들 방법을 생각하다 스르르 눈을 감았다. 그제야 월녀가 슬며시 아랫목에 가지런히 누었다.
월녀는 잠을 자려고 눈을 감아도 잠이 오질 않았다.
뒤척뒤척.
자신을 산 이 사람들이 어디로 데리고 가는지 전혀 모른다. 그리고 뭐로 써먹으려는 것인지 알 수 없으니 너무 불안했다.
조용하게 누워서 천장을 바라보며 월녀는 자신을 산 사람들이 좋은 사람들이길 성황당의 신령님께 속으로 빌고 또 빌었다.
‘접장 오라버니가 좋은 분이면 좋겠어.’
그러나 깊이 생각에 잠기던 월녀도 너무 피곤해 어느새 깊은 잠속으로 빠져들었다.
월녀가 피곤한 이유는 저녁에 백삼수에게 인계되어 나름 신경을 너무 많이 썼기 때문이다. 낮에는 계속 죽죽이 주막에서 너무 힘들게 일했다.
새로 상단을 만들어 이동하려는 최인범이나 새로운 처지로 변한 월녀는 점점 깊은 잠속으로 빠져 버렸다. 그들이 곤하게 잠든 아래골방과는 달리 위골방에서는 전혀 다른 사건이 벌어졌다.
칠복이 형제들이 쪼그리고 앉아서 두 손을 번쩍 들어 벌을 서고 있었다. 매우 두려운 눈빛으로 슬슬 눈치를 보고 있었다.
백삼수는 자신이 산 노비들인 칠복이 형제에게 주인이 누군지 인식시키기 위해 기합을 주고 있다. 방으로 들어와 보니 형제가 잠들어 있어 깨운 뒤에 벌을 주는 것이다.
접장님의 명령으로 형제들은 틈만 나면 항상 해야 하는 무술 수련으로 무척 피곤했다.
백삼수는 옆방이 은근히 의식되어 다소 낮은 목소리로 엄하게 나무랬다.
“이 녀석들이 감히 주인인 나도 잠을 안자고 있는데 종놈들이 벌써 자다니. 이 녀석들이 벌써부터 정신머리가 하나도 없어.”
“죽을죄를 졌어요. 한 번만 용서해 주세요.”
두 놈이 거의 동시에 빌자 백삼수는 다시 엄하게 경고했다.
“앞으로 요령피우지 말고 잘해.”
“예, 주인님.”
녀석들이 호칭을 정확하게 부르지 못하자 백삼수는 약간 큰 목소리로 호통 쳤다.
“이 녀석들이 아직도 정신이 없군. 집사님이라고 불러.”
“예, 집사님.”
백삼수는 이어서 두 형제에게 내일부터 해야 할 일들을 지시했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서 접장님과 내 세숫물부터 대령하고. 그전에 짚신을 부엌으로 가져가서 따뜻하게 해놓고, 그렇다고 태워먹으면 죽는 줄 알아.”
“예.”
이런 식의 새로운 지시는 오래 진행됐다.
백삼수는 그동안 벼르고 벼르던 노비를 사고 나자 아이들을 철저하게 부려먹을 궁리를 했다. 그래서 이렇게 단단히 교육시키고 있었다. 그러나 부려 먹으려 해도 잠은 재워야 한다.
잠시 시간이 지나자 두 아이를 문 앞에 재우고 자신은 따뜻한 아랫목에서 잠들었다. 울창한 왕대나무 밭의 옆에 있는 죽죽이 주막은 어느새 깊은 침묵 속으로 빠져들어 갔다.
이때 주막의 부엌 뒤쪽인 왕대나무 숲에서 괴이한 소리가 들렸다. 다소 음산한 바람 소리와 함께 들리는 소음은 아주 은밀했다.
사사삭, 사사삭.
그러나 깊은 밤이라 누구하나 그런 소리에 귀를 기울이지는 않았다. 그런 소리가 점점 멀어지는 가운데 바로 옆의 윗방에서 작고 은근한 목소리가 들렸다.
“삼수! 자?”
윗방에서 매우 은밀하게 자길 부르지만 이미 깊이 잠든 백삼수는 누가 자기를 부르는지 전혀 모르고 코만 골았다.
드르릉 드르릉.
“삼수! 자나? 나야.”
깊이 잠든 백삼수의 코고는 소리가 들리자 그를 부르던 은근한 목소리도 그쳤다.
조금 시간이 지나서 안방에서 공연히 베개를 두들기며 투덜거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퍽! 퍽!
“아휴! 미쳐. 이 노릇을 어쩌나 잠도 안 오는데.”
연일 밤에 진득하게 벌인 정사로 하초 부분이 화끈거리고 약간 문제가 있었다. 하지만 끓어오르는 정염은 그것과는 무관하게 활활 타올랐다.
내일은 백삼수가 멀리 떠난다니 더욱 마음이 조급해졌다. 그래서 한참을 투덜거리던 여자는 드디어 지친 것인지 조용해졌다.
뻐꾹! 뻐꾹!
갑자기 뻐꾸기가 우는 소리가 멀리서 들렸다. 아무리 흉내를 잘 내더라도 약간은 소리가 달랐다. 누군가 사람을 부르기 위해 내는 소리가 분명했다.
삐거덕!
안방의 문이 살며시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이어서 소리죽인 발자국도 들리고 그런 소리는 점점 멀어졌다.
주모가 뜨겁게 달아오른 몸을 재가 되도록 활활 태우려고 바깥채의 사내를 만나려는 나가는 것 같았다. 아니면 다른 중요한 볼일이라도 있는 것 같았다. 다소 은밀하게 작은 소음들이 어지럽게 들리던 창락골의 죽죽이 주막도 이제 잠잠해졌다.
밖에서는 눈발이 점점 굵어졌다. 첫눈이지만 산악 지역이라 많은 눈이 소복소복 쌓였다. 대지는 온통 하얀 눈꽃 밭으로 변했다.
한편 산골마을 허름한 초가들에서는 사람들이 바쁘게 움직였다.
갑자기 여러 명의 노비가 타지로 팔려나가고 산골마을에 많은 면포가 일시에 풀렸다.
백삼수가 주문한 겨울옷을 만드느라 마을의 아낙네들은 모두 어제부터 밤을 지새우고 있었다. 더구나 동네의 처녀가 혼인하게 되어 아래 저래 아낙네들은 부산할 수밖에 없었다.
늦은 가을이고 비가 내린 뒤 겨울이 성큼 다가와서 그런지 밤의 날씨가 급격하게 떨어졌다. 그 때문에 청락골 마을사람들은 동네 사랑방에서 모여 새끼를 꼬며 걱정했다.
“너무 빨리 추워지면 걱정이야. 겨울에 쓸 나무도 장만하지 못했는데.”
“그러게·······. 호랑이가 나타나서 먼 산으로 나무도 못하러 가는데.”
이들이 겨울에 사용할 나무를 걱정하는 이유는 마을과 붙어 있는 야산들은 모두 윤 진사의 개인소유라 나무하러 갈 수 없기 때문이다.
윤 진사는 조상들의 묘소가 있는 산이라고 해서 그곳의 소나무를 애지중지한다. 그래서 마을사람들이 야산에 있는 소나무나 혹은 삭정이나 솔잎 한 줌이라도 줍다가 걸리면 용서가 없었다. 소작은 바로 그만 둬야하고 벌금 형식으로 미곡 한 말을 물어내야 된다.
그러니 마을 뒷산의 울창한 소나무 숲에 흔하디흔하게 널려 있는 마른 솔잎은 그저 그림에 떡이다. 마을사람들만 그런 것이 아니라 윤 진사 댁에서 필요한 땔감도 인근 산에서는 구하지 못한다.
“앞으로 먹쇠가 없으니 진사어르신 댁에서 사용할 땔감을 누가 장만하지?”
“그러게. 그놈이 먹기는 많이 먹어도 힘이 장사라 우리들 나뭇짐보다 세 배는 항상 지고 왔잖아.”
“윤 진사 어르신께서는 그런 힘이 장사인 놈을 왜 남에게 파나 모르겠어. 더구나 돌쇠도 쟁기질이라면 당할 사람이 없어 그 놈도 아주 쓸 만한 농사꾼인데.”
윤 진사 댁도 주로 먹쇠가 먼 산으로 가서 나무를 해오거나 산 같이 높이 쌓인 볏짚 더미를 주된 연료로 사용했다. 마을사람들은 모두 호랑이가 나타났다가 사라진 먼 산으로 나무하러 가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