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화
<추운 겨울에 부는 춘심>
이윽고 마치 결론을 내듯이 백삼수는 상단운영에 대해 조심스럽게 설명했다.
“꼭두 형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상단의 자금은 모두 면포 2000필로 계산해 정산하겠사옵니다.”
“수익은 어떻게 나누고?”
최인범의 물음에 백삼수는 빠르게 설명했다.
“꼭두 형님, 판매수익은 모두 10등분으로 나누기로 하죠. 그중에 다섯은 여비나 필요한 경비로 사용하겠사옵니다. 둘은 꼭두 형님과 소인이 차지하고, 하나는 면포를 투자하신 최인범 진사님의 몫으로 하고 나머지 둘은 자금을 늘리는데 사용하기로 합죠.”
수익금 중에 5할은 상단운영비, 3할은 수익배분, 2할은 자본금으로 투자하자는 의견이다.
적당한 방법이라고 판단해 고개를 가볍게 끄덕였다.
“알았어. 그렇게 해.”
면포 2000필을 상단의 자본금으로 계산하겠다는 의견이다.
실제로는 최인범 진사가 투자해준 면포 800필, 백삼수의 면포 400필, 판돈 빌려준 이자로 받은 80필로 1280필이 전부다. 그러나 자본금으로 들어가지는 않지만 사노비가 3명이나 있으니 대략 그렇게 계산한 것이다.
자신이나 최인범 진사가 공짜로 넘겨준 면포는 모두 주변사람들의 겨울옷을 만드는데 사용했다.
다소 복잡할 것 같은 자본금의 계산방식이라 조용히 다른 의견을 말했다.
“앞으로 자본금으로 계산된 면포 중에 부족한 720필의 면포는 빌려온 800필의 면포가 1년간은 이자가 없으니 이득금을 나누지 말고 우선 채우도록 하지.”
이 말에 백삼수는 다소 이상하다는 표정으로 바라보며 물었다.
“꼭두 형님, 꼭 그래야 하나요?”
“그렇게 하는 것이 좋아. 나도 앞으로 면포가 생기면 그때그때 보태기로 하고. 그래서 면포 720필이 모두 채워진 이후부터 조금 전에 네가 말한 그대로 정산하도록 해.”
“알겠사옵니다. 꼭두 형님.”
백삼수는 자신을 꼭두인 우두머리로 대접해 주기위해 이득금을 많이 준다고 했다. 하지만 최인범의 입장에서는 몸으로만 때우기는 조금 꺼림칙했다. 세상사란 항상 미래를 철저하게 대비해 두는 것이 좋다고 판단했다.
‘지금은 저렇게 나오지만 나중에는 자신이 손해라고 생각할 거야.’
돈 문제란 아주 투명해야 되고 사소한 불만이라도 생기면 그것이 나중에는 큰 불씨가 된다. 그래서 자신도 별도로 벌어서 채워 넣겠다고 주장했다.
여기서 간접적으로 조우하게 되자 비록 내기바둑으로 쉽게 생겼지만 많은 면포를 투자해 주었다. 그래서 최인범 진사라는 인물에 대해 자세하게 알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직접 만나 볼까?’
잠시 윤 진사 댁으로 찾아가서 최인범 진사를 만나보고 싶었지만 이내 달리 생각했다. 그 사람은 현재 양반이고 자신은 평민으로 또 남의 호패를 지녔다. 그래서 지금 만나야 자신이 그에게 저자세로 대해야 하는 것이 별로 기분 좋은 일은 아니었다.
그가 자신을 꼭 아는 척 한다는 보장도 없었다.
‘나는 그 사내로부터 거액도 투자 받은 처지야.’
나중에 호패도 정식으로 만들고 자리를 잡으면 만나겠다고 결정했다.
자신은 이 시대의 물가에 대해 잘 모르고 유통구조에 대해 전혀 모른다. 그러니 장사할 수 없는 처지로 면포를 획득하는 방법은 남보다 우위에 있는 뛰어난 무력뿐이다. 그러나 그런 무력도 아직은 써먹기가 곤란한 점이 한둘이 아니었다.
한 사람이 여럿을 당할 수 없으니 산적을 만나면 전처럼 쉽게 제압할 수도 없었다. 검과 활 그리고 창 등이 주된 무기인 조선시대에서 과거의 무력은 별로 큰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 물론 자신의 특공무술이나 우수한 체력조건은 매우 유리하게 작용될 것이다.
잠시 이런 생각을 하며 어린 형제들에게 겨울옷을 지어주라고 했던 사실이 떠올라 넌지시 물었다.
“삼수, 애들의 겨울옷은 어떻게 됐나?”
“예, 웃돈을 줘서 내일 아침에는 모두 새로 만든 겨울옷으로 입힐 수 있사옵니다. 그리고 꼭두 형님과 월녀의 겨울옷도 준비될 것이고요.”
“알았어, 그렇다면 내일 여기를 떠나자.”
이렇게 말하고 나서 자신이 아직도 여자 옷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옆에서 눈치를 보는 월녀를 바라보며 부드럽게 권했다.
“월녀는 저 봇짐을 가져. 그 안에 옷이 있을 것이니 줄여서 입던지 해. 어서 풀어 봐.”
“예.”
자신에게 옷을 준다는 지시에 월녀는 괴나리봇짐을 집어 들고 급하게 풀었다. 곱게 만든 치마저고리 한 벌이 들어 있었다. 사내와 도망치려던 여자의 솜씨인지는 모르나 아주 곱게 만든 새 옷이었다.
‘어마? 예쁘다.’
예쁜 새 옷을 보자 월녀는 눈빛을 반짝이며 좋아했다. 그동안 살고 있던 죽죽이 주막에서 떠나게 되며 바로 새 옷을 받게 되자 너무 기뻤다.
그렇지만 영특한 월녀는 그냥 마냥 기쁘지 않았다. 소문에 어린 소녀들을 기생집에 팔거나 또는 멀리 북쪽으로 데리고 가서 오랑캐에게 파는 사람들도 있단다. 그래서 월녀의 환해지던 얼굴이 다시 시무룩해졌다.
옆에서 이런 월녀를 표정 변화를 바라보던 백삼수는 이내 눈치를 채고서 다독였다.
“월녀야. 너무 걱정하지 마. 너는 비록 노비지만 누구에게도 팔지는 않을 거야. 나중에 크면 여기로 와서 살고 싶으면 살아.”
“정말요?”
“그래, 그러니 공연히 걱정하지 마.”
이렇게 백삼수가 다독이자 월녀는 그제야 새 옷을 들어 자신이 입을 수 있는지 확인했다. 아직은 입기에는 다소 큰 옷이었다.
그래도 귀한 새 옷이라 월녀는 다시 곱게 접어 주모가 자기에게 건네준 옷가지와 같이 싸서 보따리를 만들었다.
그러자 최인범이 부드럽게 입을 열었다.
“월녀야. 앞으로 너도 보따리를 들지 말고 봇짐을 지고 다녀야 하니 괴나리봇짐으로 꾸려.”
“예, 꼭두 아저씨.”
월녀의 아저씨라는 호칭에 어색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즉시 호칭에 대해 정해줬다.
“월녀는 앞으로 나를 오라버니라고 불러.”
돌연 이렇게 말하자 노비인 자신을 여동생으로 대한다는 뜻이라 월녀는 너무 놀라 눈이 동그래졌다. 이게 뭐를 뜻하는 말인지 잘 이해되질 않는 것 같았다.
그러자 다시 부드럽게 재촉했다.
“어서, 오라버니라고 한 번 불러봐.”
독촉하는 말에 월녀는 부끄러운 몸짓으로 얼굴에 홍조를 띄우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예, 오라버니.”
월녀가 오라버니라고 부르자 얼굴에 환한 미소를 지으며 좋아했다.
“됐어, 월녀는 앞으로 나를 그렇게 부르고 다른 사람은 앞으로 꼭두 형님이라고 하지 말고 백두상단의 접장이라고 부르면 돼.”
본시 접장(接長)이란 호칭은 보부상(褓負商)이 잘 조직된 조선 후기에 나오는 상단의 우두머리에게 사용된다.
조선시대에 누가 이미 사용하고 있는지 모르지만 크게 어색하지 않다고 판단해 그리 정한 것이다.
행수라는 단어가 떠올랐지만 그보다는 접장이 마음이 들었다. 계속 상단이 유지되고 잘 이끌어 가게 될지는 모르지만 일단 보부상단을 참조해 호칭을 정할 계획이다.
백두(白頭)란 명칭이야 최고라는 의미로 사용해서 그렇게 정했다. 또한 백씨인 백삼수가 두목인 상단이란 뜻도 내포됐다.
나중에 자신과 이들이 살사 해어지는 사태가 벌어져도 상단이름을 그대로 사용하기 좋게 만들었다. 백두산이야 조선시대에도 최고로 높은 영산으로 널리 알려졌다. 흔하다면 흔한 이름이지만 한 번 결정하니 마음에 쏙 들었다.
‘아주 잘 정했어.’
장사할 상인은 한 명이고 자신은 호위무사 격이다. 하지만 처음부터 서로 부르게 될 호칭을 통일하기 위해 이렇게 정했다.
더구나 꼭두란 풍물패의 우두머리를 뜻해 굳이 천인(賤人)으로 분리되는 그들이 사용하는 칭호를 쓰고 싶지는 않았다. 물론 상인들도 별로 대접을 받지는 못하는 못하지만 풍물패들 보나는 훨씬 나았다.
호칭을 결정하자 백삼수도 만족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더니 눈을 반짝 빛내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접장님, 앞으로 저는 뭐라고 칭합죠?”
잠시 생각한 뒤에 백삼수가 재정을 담당하고 있어 그런 점을 고려해 정해 주었다.
“너는 앞으로 집사라고 해.”
“집사요?”
“칠복이 형제는 우선 그냥 따라 다니며 장사를 배우는 입장이니 견습 사원이라고 부르고. 나중에 조금 시간이 지나서 일을 잘하면 사원, 그 다음에는 다시 좋은 호칭이 생각나면 그때 바꾸도록 하자. 장부에 그렇게 기록해.”
“알겠사옵니다.”
최인범은 전생에서도 장사를 전혀 해보지 않았다. 하지만 어떤 조직이고 호칭이 정확해야 위계질서가 바로 선다는 점을 잘 안다. 그런 이유로 이렇게 호칭들을 명확하게 정해 주었다. 물론 호칭이 정해져야 자금 내역을 따지거나 이득금을 정산할 때 정확해 질수 있는 것이다.
노비인 칠복이 형제가 상술에 재능을 보이면 상인으로 양성하면 된다. 혹시 무술에 재주가 있다면 상단의 호위무사로키우면 된다. 이런 대화들을 나누다 보니 월녀의 역할이 불분명했다.
잠시 생각에 잠겼다. 조금 시간이 자나자 드디어 적당한 활용방법이 떠올랐다.
‘그래, 그게 좋겠어. 중요한 재정을 자신이 책임진다는 백삼수를 무조건 믿기는 어려워, 그러니 월녀를 회계장부정리를 돕게 되는 서기를 시키는 것도 좋겠어.’
아직은 월녀가 계산 능력이 없을 수 있으니 굳이 이 자리서 자신의 속셈을 말할 필요는 없었다. 그러나 만약의 사태는 항상 대비해 두는 것이 좋았다.
일단은 아주 기본적인 조직을 구상해 말해주고 나자 다시 물었다.
“백 집사, 우리가 상단을 만들기로 했지만 앞으로 다른 사람은 어떻게 끌어들일 생각이냐?”
“접장님, 그건 염려 마세요. 접장님의 무술이 뛰어나다고 벌써 소문이 파다하게 퍼졌사옵니다. 그래서 우리와 같이 다닌다는 상인들이 여럿이옵니다. 그들과 같이 다니면 됩죠.”
“그거야 그저 동행만 하는 거지. 그게 무슨 상단의 회원이야?”
최인범이 이렇게 지적하자 백삼수는 즉시 그에 대해 자세하게 설명했다.
“접장님, 그렇지 않사옵니다. 같이 다니게 되면 반드시 상단에 회비를 내야하고 또한 공동으로 기본적인 여비를 지출해야 되옵니다.”
“그런 것뿐인가?”
“접장님, 당연한 이야기지만 행선지도 접장님의 결정을 모두 따르게 되죠. 상단의 회원은 비록 투자는 같이하지 않았어도 행동은 같이 해요. 상단의 회원은 접장님께서 방금 말씀하신 오다가다 만나서 같이 다니는 그런 행인과는 전혀 다르옵니다.”
그런 정도라면 백두상단의 세를 불릴 길은 마련된 것 같아 쾌히 승낙했다.
“알았어. 그럼 상단 회원을 늘리는 문제는 네가 알아서 처리해. 너무 빨리 많은 사람을 끌어들이지 말고.”
“잘 알겠사옵니다.”
급하게 먹는 밥이 채한다고 너무 서두를 이유가 하나도 없었다. 더구나 전생에서도 장사해본 경험이 전혀 없었다. 그러니 우선은 백삼수가 하자는 그대로 시행해볼 계획이다.
백삼수는 돈을 버는데 신경을 쓸 것이고 자신은 주특기인 무술을 더욱 높은 경지로 끌어 올릴 결심이다.
‘이 시대에서 살기 위해 완전히 적응하려면 시간이 오래 걸릴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