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화
박 진사는 뭔가 확신하기가 어렵지만 이상한 느낌이야 있었다. 그러나 젊은 선비에게 당했다는 것을 인정하고 싶지 않아 투덜거렸다.
“머리를 다쳐서 아프다는 젊은 선비 놈이 바둑은 잘 둬.”
“나는 옆에서 요상하게 생긴 주모의 늘어지는 노래 자락만 나오면 덜컥 수를 두어 망했소. 아무래도 돌아가서 그런 대국에 익숙하도록 바둑을 두어 보도록 해야겠소.”
“나는 때려죽일 못된 종놈이 큰 소리로 급하게 수를 세기를 시작하면 그만 정신이 혼미해 지더군. 뭔가 좋은 방법을 찾아야 되겠소.”
“뭔가 잘 준비하면 될 거요.”
두 사람은 오늘의 치욕을 설욕할 생각으로 나름 연구했다.
이길 때는 초읽기가 도와주었다. 하지만 질 때는 그야 말로 절벽으로 떠미는 것 같이 아득해졌다. 그러니 그런 대국방식에 철저히 대비해야 후일을 기약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한편 창락골의 윤 진사 댁 앞마당에서 최인범이 서성이고 있었다.
그는 예천으로 돌아가는 두 진사들의 배웅을 겸해 솟을대문 밖으로 나왔다. 그들이 멀리 떠나고 나자 월녀를 사게 된 백삼수가 슬며시 다가와 조심스럽게 물었다.
“선비님, 월녀를 얼마에 소인에게 넘겨주시는 겁죠?”
매매가격도 정하지 않고 그냥 노비매매중서를 넘겨주었던 것이다.
백삼수의 이런 물음에 별로 깊이 생각하지도 않고 쉽게 답했다.
“얼마라니? 그냥 잘 데리고 다니다가 마누라를 삼던가 아니면 좋은 남자에게 시집 보내줘. 자네가 판돈을 빌려 줘서 생긴 노비이니 자네가 알아서 해.”
“소인 잘 알겠사옵니다. 꼭 하시라면 선비님 말씀대로 하겠지만 소인이 장사하느라 정처 없어 떠도니 이런 방법이 어떨까 하옵니다.”
“무슨 방법?”
백삼수는 이미 꼭두 형님인 최인범에게 지시를 받았기 때문에 다소 복잡하게 설명했다.
“선비님, 월녀는 소인 앞으로 된 노비니 일단 소인이 데리고는 가겠사옵니다. 하지만 월녀의 몫으로 면포 150필을 자본금으로 계산해 이득금을 줄 생각이옵니다.”
“노비인데 어떻게 이득금을 준다는 건가?”
“선비님, 저희 일행이 근동을 지날 경우는 선비님 집으로 이득금을 보내기로 합죠.”
“월녀는 어찌하고?”
“나중에 월녀가 장성해 여기로 와서 산다고 하면 선비님에게 노비문서를 돌려드릴 것이옵니다. 그 애 몫으로 보내 드린 재물로 시집을 보내시던 어떻게 하시던 선비님 마음대로 하오시면 되옵니다. 이것은 저희 꼭두 형님의 지시이옵니다.”
이런 제안에 다소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백삼수에게 이런 지시를 한 꼭두라는 인물이 궁금했다. 그래서 슬며시 물었다.
“자네가 말한 꼭두라는 사람은 정확하게 뭐하는 사람인가?”
“저와 같이 장사를 다니는 분입죠. 성함은 조갑중이라고 하옵니다.”
“조갑중이라고?”
“예. 진사님.”
“무슨 장사를 하나?”
“저희 꼭두 형님께서는 면포 장사를 하옵니다.”
이곳으로 와서 만난 사람도 많지 않지만 조갑중은 처음 들어보는 이름이다. 공짜로 생긴 면포라 자신을 믿고 판돈을 대준 백삼수 무리를 믿어 보기로 했다.
‘조갑중이라? 뭐 평범한 이름이군.’
이번 기회에 남들이 전혀 모르는 비자금을 만들어 두는 것도 좋다고 판단했다. 자신이 요상한 상태로 사니 언제고 탈출할 비상구는 있어야 한다. 그에 소요되는 비자금도 은밀하게 숨겨 두는 것이 좋았다.
‘좋아! 그냥 날리면 말고 한번 투자해 보자고. 잘되면 쉽게 자금이 불고 아니면 그만이지.’
상대방이 자신을 믿어 주었으니 자신도 상대방을 믿어 보기로 했다. 그리고 많은 재물을 그대로 가지고 봉화현으로 돌아가면 아무래도 쓰게 되어 남들의 구설수에 올릴 수 있었다.
‘몸조심 하자고.’
재물이 많아진 최인범 진사는 새로운 걱정거리가 생겼다.
‘없으면 없는 대로 머리 아프고. 재물이 있으니 또 그 때문에 골이 쑤시네.’
가난한 선비로 면포 1600필, 노비 2명 그리고 농우 2마리에 말이 1필이나 생겼다.
그러니 그것들이 갑자기 생긴 이유에 대해 봉화현으로 돌아가 주변사람들에게 설명할 일도 벌써부터 걱정이다. 쉽게 번 돈은 쉽게 버리는 법이다. 특히나 이런 방식으로 돈을 벌게 되면 언제고 한방에 망할 수 있었다.
‘노름 돈은 본시 집에서 살림에 보태도 안 되는 거야. 그러니 일부만 가지고 돌아가는 것이 좋아.’
이렇게 결심하자 과감하게 제안했다.
“자네가 하는 말을 충분히 알아들었네. 내가 면포 200필짜리 어음 4장을 줄거니 월녀 몫과 합쳐 투자금으로 면포 1000필로 계산하면 어떤가?”
“선비님께서 투자하시려고요?”
“그렇다네. 물론 투자금이 1000필에 조금 모자라지만 1년간의 이자나 수익금은 받지 않는 조건으로······.”
“정말 그렇게 해주겠사옵니까?”
“내가 보기에 연간 최저 수익은 면포 200필로 정하면 별로 손해는 안 볼 것 같은데.”
이런 제안에 백삼수는 즉시 답했다.
“알겠사옵니다. 그렇게 하겠사옵니다. 말씀하신 그대로 투자금의 이득금은 최하 연간 면포 200필로 정하겠사옵니다. 더 버는 것은 또 보내 드리기로 하고요.”
이렇게 말하자 두말도 하지 않고 승낙했다.
“좋네, 그렇게 하지.”
조선시대의 금융체계는 아주 고리(高利)다.
춘궁기인 봄에 미곡을 1가마 빌리면 가을에 1가마 반을 갚아야 하는 고리의 장려 쌀이 흔한 세상이다.
봄에 1가마를 빌리고 가을에 2가마를 갚아야 하는 경우도 흔했다. 조정 즉 관아에서 빌려주는 미곡도 모두 연간 3할 이상의 고리로 빌려주고 있는 실정이다.
그런 고리대금업의 최대 규모는 조선왕실의 비자금이다. 왕실에서 보유한 막대한 내탕금은 대부분 고리대금업으로 부를 축척하고 있었다. 그러니 연간 2할인 최저 수익보장 조건은 그리 나쁘지 않은 좋은 거래다.
전생의 투자 회사들처럼 적당하게 투자금의 수익이 많다고 선전하고 나중에는 수익이 없다고 수익금을 전혀 안주는 형식은 절대로 아니다. 확실하게 최저수익을 보장하는 그런 약정이다.
상단에서 사업하기가 어려우면 고리대금업을 하든가 또는 자금이 급하게 필요한 관가에 면포를 빌려 주어도 최저수익 이상은 벌어들일 수 있었다.
진사인 최인범이나 상인인 백삼수는 그런 점을 잘 알고 있었다.
백삼수 입장에서는 다소 무리하게 2명의 어린 노비를 매입했다. 그 때문에 자금이 필요해 투자를 받아들이기로 했다. 장사 즉 사업하려면 자금이야 많을수록 좋으니 쉽게 결정을 내린 것이다.
서류 작성이 필요한 두 사람은 윤 진사의 사랑방으로 들어왔다. 문방사우를 꺼내 백삼수에게 투자약정서를 쓰게 하고 별도로 차용증 형식의 증서를 받았다.
투자 약정서와 면포 800필의 어음을 챙긴 백삼수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선비님, 먹쇠가 아주 좋은 인연을 만들어 줬으니 그 놈에게 겨울옷을 해주고 싶사옵니다. 그리고 돌쇠에게도 만들어 주고요.”
“알았네. 그거야 자네가 알아서 해주면 되지. 나는 금방 떠날지 모르니 해주려면 빨리 해줘야 해.”
“알겠사옵니다.”
다부지게 답한 백삼수는 조용히 사랑방에서 나갔다.
그런 백삼수를 바라보며 최인범 진사는 이상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중얼거렸다.
“꼭두라고 칭하는 우두머리도 특이하군. 어째 꼭 여자 같이 생긴 놈과 같이 다니는 거지? 너무 이상해.”
이런 생각을 하며 ‘너무 쉽게 남을 믿는 것 아닌가?’하는 잡념이 뇌리를 스쳤다.
이미 자신의 수중을 떠난 재물이라는 판단으로 과감하게 미련을 버렸다. 자본주의에 익숙하니 면포 800필로 너무 쉽게 상단에서 지분이 많은 주주가 된 셈으로 판단했다. 빼도 박도 못하게 차용증까지 챙겼으니 별 이상은 없었다.
‘꼭 내가 운영할 필요는 없어. 부지런한 사람들 써먹으면 되니까.’
본래 성품이 낙천적이고 또 다른 정신은 재물에 관심이 별로이던 터라 빠르게 잊어버렸다.
최인범 진사는 자신에게 찾아온 좋은 기회를 이용해 일단은 기본은 충분하게 갖추었다고 판단했다.
이제부터는 여유를 가지고 앞날의 계획을 여유롭게 세워볼 수 있다. 모두 잘된 것으로 판단하며 편안한 마음으로 잠이 들었다.
한편 큰 내기바둑으로 혼란스럽던 윤 진사 댁과 담장을 사이로 있는 죽죽이 주막.
죽령을 오가는 행인들을 대상으로 운영하는 죽죽이 주막은 바깥채가 있고 안채가 따로 있다. 그래서 손님들은 대부분 바깥채에서 숙식했다.
주모는 특별한 손님의 경우만 안채로 끌어 들였다. 안채는 아랫방과 윗방으로 나누어지고 두 개의 방에는 모두 골방이 있다.
최인범은 힘들게 죽령을 넘어 주막에서 머물며 최인범 진사와 은연중에 서로 돕게 됐다. 그는 새로운 일로 다소 늦게까지 백삼수와 진솔하게 대화를 나누었다.
아래골방에 머무는 최인범은 면포 200필짜리 어음을 4장이나 가져온 백삼수와 대화를 나누었다. 원하던 그대로 월녀의 노비문서도 가지고 왔다.
두 사람의 옆에는 월녀가 약간 두려운 눈빛으로 눈치를 슬금슬금 보며 쪼그리고 앉아 있었다. 두려우면서도 뭔가 기대하는 눈빛으로 조심스럽게 눈치를 살폈다.
그러자 백삼수는 진지한 표정으로 월녀를 바라보며 최인범에게 넌지시 말을 건넸다.
“꼭두 형님, 앞으로는 같이 한방에서 자기는 어려우니 방을 두 개씩 얻어 묵어야 되겠사옵니다.”
“누가 누구랑 자고?”
굳이 이렇게 물어보는 이유는 월녀를 탐욕스럽게 바라보던 백삼수의 시선을 목격했기 때문이다. 다른 속셈이 있는지 몰라 유심히 살폈다.
약간 추궁하듯이 묻는 말에 백삼수는 재빨리 답했다.
“월녀는 꼭두 형님과 한 방을 쓰고 저는 칠봉이 형제와 자겠사옵니다.”
월녀를 자신과 같은 방에서 재운다는 의견이라 즉시 승낙해 주었다.
“알았어. 그렇게 하지.”
두 사람은 앞으로 천지사방으로 떠돌며 장사하게 된다. 그 때문에 숙박에 대한 기본방침을 정했다. 항상 방을 두 개를 사용하기로 했다.
부득이한 경우에 월녀는 주모 방에서 재우고 4명이 같이 자자는 방침도 정해졌다. 소요 경비를 대략 정한 것이다.
백삼수가 조심스럽게 앞으로의 계획을 말했다.
“꼭두 형님, 앞으로 상단을 구성해 운영해야죠?”
“그렇게 하자, 충분한 자본금도 생겼으니까.”
최인범 진사가 많은 면포를 투자까지 해주었으니 기본적으로 상단과 같이 운영해야 한다. 두 사람은 자본금을 얼마로 정할지 진지하게 오랫동안 대화를 나누었다.
최인범 진사가 풀썩 던져버린 불씨 때문에 이곳 죽령의 창락골에서는 뜨거운 불길로 이글거렸다.
산골마을인 창락골의 겨울밤은 하얀 눈이 내리는 가운데 점점 깊어졌다. 죽죽이 주막의 아래골방에서는 중요한 일 때문에 밤이 깊어지도록 등잔불이 꺼지지 않았다.
최인범과 백삼수는 한동안 상단구성을 놓고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