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화
“허어! 양반 체모에 항아리를 직접 묻다니, 그러지 말고 자네가 가진 노비 문서를 나에게 넘기고 우리 집에 있는 노비와 바꾸세. 그 노비를 봉화현으로 보내 구덩이를 파라면 될 것 아닌가?”
“아하! 그런 좋은 방법도 있군요.”
“자네가 필요한 노비를 말하게 얼마든지 판돈으로 걸지.”
“좋습니다. 그럼 그렇게 해보죠.”
윤 진사는 최 진사가 다른 사람과 두어 재물을 따서 자신에게 매번 지는 식으로 재물을 벌게 해주니 기분이 너무 좋아 후하게 말했다.
결국 권 진사나 박 진사 손에서 나온 노비문서를 윤 진사에게 넘기게 됐다. 그 대신 백삼수에게 약속한 그대로 주막에서 일하는 월녀를 넘겨받게 됐다.
“행랑아범의 아내가 허리가 다쳐서.”
“그럼, 주막에서 일하는 월녀를 보내면 되겠네. 그 애가 밥은 아주 잘하니까.”
“좋습니다. 어려서 어쩔지 모르지만 그렇게 하죠.”
또한 얼마 지나지 않아 먹쇠를 자신의 소유로 만드는 노비문서도 챙기게 됐다.
너무 오래 앉아서 내기바둑을 두니 소피가 마려워 잠깐 밖으로 나왔다. 그러자 먹쇠가 따라 나오며 급하게 속삭였다.
“선비님, 소인의 친구 녀석도 사주시면 안 되나요? 그놈도 선비님께 팔리고 싶답니다.”
“그놈은 뭘 잘하는데.”
“특별히 잘하는 것은 없고 그저 소나 말을 아주 잘 다루는 녀석이옵니다. 쟁기질 솜씨가 아주 좋사옵니다. 다른 사람보다 빨리 갈고 깔끔하게 가는 것은 그 놈이 제일이옵니다.”
먹쇠가 장황하게 친구인 돌쇠에 대해 설명하자 흥미가 생겨 물었다.
“어떻게 생긴 놈인지 봐야지.”
“선비님, 저기 마방에 보이는 놈이옵니다.”
“알았어.”
덩치가 다소 왜소한 돌쇠는 마침 마방에서 말에게 여물을 주고 있었다. 기왕에 노비가 생겼으니 한 놈 더 거두는 것이 좋다고 판단했다. 내기바둑 판이 커지자 상대적으로 배포가 점점 늘었다.
‘그래, 기회는 아무 때 오는 것이 아니야. 조금 무리해서라도 한 놈만 더 챙기자고. 본시 만고의 진리는 물들어 올 때 배질하는 법이야.’
내기바둑을 두어 사노비를 따게 되어 조금은 찜찜했다. 하지만 일단 노비를 옆에 두기로 했으니 돌쇠라는 놈도 자신의 노비로 챙길 결심을 했다. 그러자면 판을 더 키워서 노비문서를 거는 방내기로 해야 된다.
이렇게 결심하고 천천히 사랑방으로 들어갔다.
윤 진사 댁의 사랑방에서 벌어지는 거액이 걸린 내기바둑인 대국들은 오후의 밤이 깊어지도록 계속됐다. 날이 꼬박 세도록 내기바둑은 진행되었다.
그것도 모자라 다음날 낮에도 계속 두었다. 판이 길어질수록 판돈의 행방은 아주 오리무중 해졌다.
탁! 탁!
내기바둑 대국은 더욱 커져 판 내기도 하지만 때로는 방내기로 두었다. 한방에 노비 한명이나 또는 면포 200필이 오가는 어마어마한 내기로 판들의 규모가 커져 버린 것이다.
봉화현에서 찾아온 행랑아범인 최복동은 이틀이나 내기바둑이 벌어지자 사랑방을 기웃거리며 안절부절못했다.
“허어! 이거 큰일 났네.”
내기바둑에 정신이 없는 최인범을 바라보며 너무 초조하기도 하고 속이 바싹바싹 타들어갔다.
‘도련님께서 머리를 다치셔서 그런 가? 한양으로 갈 생각은 전혀 안하고 바둑만 두시다니 큰일이야. 한양가기를 포기하고 있으니 어떻게 하지?’
걱정이 너무 되어 서성이며 사랑방을 기웃거렸다. 분위기로 보아 도련님이 쉽게 봉화현으로 갈 생각도 없어 보였다. 신기한 것은 도련님이 언제 바둑을 배웠는지 도통 알 도리가 없었다.
‘절에서 스님들에게 배웠나?’
바둑은 스님들도 아주 많이 두기 때문이다. 다행인 것은 내기바둑을 두어 잃고 있지는 않았다.
‘이상해.’
사랑방에서 벌이는 바둑은 이제는 단순한 내기바둑이 아니었다. 시원치 않은 살림이면 단 한 판에 완전히 거덜 나게 생긴 큰 재물이 오가는 거액의 노름판으로 변했다.
방내기를 두는 대국이 시작되자 상황은 완전히 변했다.
점점 시간이 흐르게 되자 승부의 흐름은 한쪽으로 쏠렸다. 박 진사와 권 진사는 자신들이 타고 왔다는 말을 물론 노비 둘씩의 증서까지 모조리 털리게 됐다.
그런 와중에 사랑방에 있던 면포 100필도 밖으로 보내졌다.
면포는 모두 주모와 점순이 그리고 백삼수에게 넘겨졌다. 판돈을 빌린 이자와 초읽기의 노래 부르느라 수고했다는 삯으로 넘겨진 것들이다. 물론 술값까지 포함한 대금 정산이다.
어젯밤부터 판돈인 모든 재물은 윤 진사의 품속으로 점차 흘러갔다. 그 방법이야 윤 진사와 방내기를 두면 최인범이 여러 방씩을 지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그런 와중에도 최인범도 별도로 챙긴 것은 있었다. 윤 진사의 말 1필, 농우 2마리, 그리고 윤 진사가 발행한 면포 200필짜리 어음 8장을 자신이 차지하고 더 이상 바둑을 둘 수가 없게 됐다.
많은 재물을 챙겼다고 판단한 윤 진사가 판을 깨기로 작심하고 머리를 만지며 울상을 지었다.
“어이구! 머리야. 연속해서 며칠간이나 바둑을 두었더니 머리에서 쥐가 나려고 하네.”
그러자 최인범도 따라서 엄살을 부렸다.
“저도 다친 뒷머리가 욱신거리고 뼈가 노곤 거려서 더 이상은 못 두겠어요. 다음에 만나서 또 두도록 하고 오늘은 이만 끝내죠.”
네 명이 두다가 두 명이 끝내자고 주장하니 더 이상 바둑을 둘 수 없었다. 더구나 판돈을 대주는 격인 윤 진사가 안하겠다니 차용증을 써주고 더 이상 면포를 빌릴 수 없었다. 판이 완전히 깨지자 예천의 두 진사는 돌아가야 해 새롭게 정산했다.
“자, 판이 끝났으니 서로 필요한 것을 교환합시다.”
“그럽시다.”
예천에서 오게 된 진사들은 이미 써준 차용증을 포함해 윤 진사에게 면포 1600필 씩을 빌리는 차용증서를 써주게 됐다.
그 대신 자신들이 타고 왔던 말 2필을 돌려받았다. 노비 4명도 다시 돌려받는 정도로 서로가 지닌 매매증서나 마적이나 우적 등의 문서 그리고 차용증서를 교환해 정산하고 끝났다.
결국 예천의 두 진사는 판돈으로 가져온 면포 800필과 더불어 차용증서에 면포 1600필씩을 써주어 면포 2400필씩을 잃은 것이다.
윤 진사는 노비 3명과 말 1필 그리고 농우 2마리를 내놓게 됐다. 대신 면포 4800필의 증서를 차지하게 되었으니 엄청난 면포를 딴 셈이다. 겉보기에는 그렇지만 윤 진사가 발행한 면포 200필 짜리 어음 8장을 최인범이 소지했다. 최종적으로 윤 진사도 따고 최인범도 많은 재물을 챙긴 것이다.
‘됐어, 마무리까지 깔끔하게 끝난 거야.’
최인범은 많은 재물을 챙기자 매우 흐뭇했다. 이제는 새로 생긴 재물로 뭐든 시작할 여건은 충분히 구비되었다고 판단했다.
과정이야 어찌 되었건 윤 진사는 자신을 구해주고 숙식을 제공해준 사람이다. 그리고 가깝게 사는 처지니 마음만 먹으면 그를 박살낼 기회야 얼마든지 있었다. 그래서 이번에 벌인 판은 윤 진사와 사이좋게 따먹는 정도로 대국을 이끈 것이다.
‘이제 윤 진사의 재물은 내 개인 금고야.’하고 흐뭇하게 생각했다. 언제든지 재물이 필요하면 찾아와 대국을 몇 번하고 꺼내서 쓰면 되는 것이다.
아주 튼튼한 자금 줄이 생겼다.
‘좋았어. 이제야 뭐 좀 해볼 수 있겠어.’
새로운 삶을 사니 해보고 싶은 일들을 마음대로 해보고 싶었다.
당연한 결과지만 윤 진사는 최인범을 아주 상대하기 좋은 먹잇감 정도로 이해했다. 지금처럼 까는 접바둑이라면 얼마든지 큰 내기를 해도 자신 있다고 판단했다.
최인범과 대국해 매번 이긴 윤 진사는 ‘본래 바둑이란 상대적이야. 내가 두는 방식을 최 진사가 당하지 못하는 거야.’라며 만만하게 보았다.
최인범이 너무 만만하게 보인 윤 진사는 판이 끝나자 슬며시 유혹했다.
“자네 어차피 한양으로 가지 않으려면 나와 바둑이나 두면서 여기서 편하게 지내지.”
“아닙니다. 바로 떠나야죠. 행랑아범이 왔으니 같이 돌아가야 합니다.”
자신을 조금 허수로 보고 덤비려는 윤 진사를 보며 속으로 마구 비웃었다.
‘욕심이 너무 많아 재물만 보이니 아직도 뭘 모르는군.’
윤 진사와 서로 돕는 형태로 각자가 목적한 바를 이루고 끝나게 됐다. 이제는 윤 진사 댁에서 떠날 때가 된 것이다.
이제 막 해가 떨어지려고 서쪽 하늘이 붉게 물들었다.
마을의 아주 큰 감나무 위에서는 까치가 ‘카악! 카악!’ 울었다. 감나무에 꼭대기에 달린 자신의 몫인 까치밥을 맛있게 쪼아 먹고 있었다.
창락골의 윤 진사 댁 솟을대문 앞 바깥마당이 다소 부산해졌다.
웅성웅성
바깥마당에는 마을의 남녀노소가 나와 웅성거리며 구경했다. 큰 내기를 벌인 사실을 알고 누가 그런 내기를 벌였나 궁금해 모여든 것이다.
예천에서 찾아온 두 진사가 떠나려고 서성였다.
두 사람은 멀리 예천에서 말을 타고 이곳으로 일부러 찾아와 윤 진사의 재물을 쉽게 먹어 보려했다. 그러나 오히려 엄청난 재물을 잃고 나서 서둘러 윤 진사 댁을 떠나고 있었다.
많은 재물을 잃었지만 그래도 살림이 완전히 절단 날 정도는 아니다. 두 진사는 예천에 전답이 많은 갑부들이라 후유증은 있지만 파산할 정도로 영향을 받지는 않았다.
많은 재물을 잃어 속이야 너무 쓰리지만 양반이란 체면 때문에 박 진사는 부드럽게 작별 인사를 했다.
“윤 진사, 재미있게 잘 놀다가 가네. 우리 다음에 또 오늘처럼 새로운 방법으로 수담을 즐겨 보세. 그때는 창을 잘하는 기생을 불러 놀아 봅시다.”
“그럽시다. 조심해서 가시오.”
두 진사는 어두워지는 초저녁이지만 풍기로 가서 잔다고 하며 서둘러 떠난 것이다. 모든 판이 끝나고 나서야 젊은 최 진사를 자신들이 도저히 어찌해 볼 상대가 아닌 고수라는 것을 느꼈다.
그런 판단들은 그저 잠시 지나가는 이성적인 생각일 뿐이다.
내기바둑이 늘 그러하듯이 한 수만 잘 두었으면 자신이 이겼을 것이라는 아쉬움이 있다. 그래서 나중을 기약하고 어제와 오늘은 일진이 사납다는 식으로 위안하고 떠나는 것이다.
젊은 최 진사가 자신들의 면포를 딴 입장이 아니라 나무랄 상황도 아니다. 면포를 빌렸다는 차용등서나 자신들이 가져온 어음은 모조리 윤 진사의 손에 들어가 있으니 실제로 그가 많은 재물을 땄다고 인식했다.
말을 타고 풍기로 향하던 중에 박 진사는 아쉬움에서 권 진사와 대화를 나누었다.
“자네, 다음에 언제 바둑을 두려나?”
먼저 고수인 박 진사가 이렇게 입을 열자 권 진사는 잠시 골몰하게 생각에 참기더니 입을 열어 답했다.
“아무래도 안동의 고수를 불러 판에 끼워야 되겠소.”
“왜? 바둑에 자신이 없나?”
“바둑이야 자신이 있지만 그래도 고수가 옆에서 있는 것이 든든해 보여 그렇소.”
“그렇게 합시다.”
두 사람은 뭔가 꺼림칙한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판내기와 방내기를 둘 때의 최인범의 바둑 실력이 상당히 다르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러나 또 깊이 생각하면 항상 그런 것은 아니다.
대국 상대가 수시로 바뀌고 대국 방법도 그때마다 달랐다. 그러니 어떻게 바둑을 지고 또 정확하게 누가 재물을 제일 많이 차지한 것이지 애매모호했다.
쉽다고 생각한 새로운 대국 방식은 재미는 있지만 처음 배우는 대가를 아주 단단히 치르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