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화
“박 진사 어르신도 먹고 싶으면 드세요.”
이렇게 말하지만 박 진사는 곶감을 입에 넣고 싶어도 도저히 먹을 수가 없었다. 늙을수록 단것을 좋아하는 것이 사람이다. 바로 앞에서 곶감을 맛있게 먹으니 침이 꼴까닥 넘어갔다.
‘저 아까운 곶감을 먹다니. 면포가 몇 필인데.’
예비로 가져온 곶감이 많으니 먹고 싶으면 먹어도 될 것이다.
그러나 박 진사는 최인범이 곶감 하나에 면포 50필로 정했다는 인식만 뇌리에 가득했다. 맛나 보이는 곶감을 먹고 싶어도 먹질 못하고 침만 꼴깍꼴깍 삼켰다. 모든 것은 이렇게 탐욕으로 물들어 집중되면 아주 간단한 이치도 요상하게 인식하게 된다.
계속해서 대국은 진행되었다. 판수가 늘어날수록 최인범의 곶감은 점점 사라졌다. 그러나 분명히 곶감은 최인범이 먹는데 박진사의 곶감이 줄어들었다.
드디어 최인범이 박 진사에게 곶감을 회수해 맛있게 먹기 시작한 것이다.
“감이 좋아서 그런지 여기 곶감은 아주 맛나군요.”
너무 맛이 있어서 바둑을 둘 생각이 전혀 없다는 듯이 계속해서 곶감을 먹었다.
이것도 모두 치밀한 계산에서 나온 행동이다. 자신이 너무 많은 곶감을 지니고 있으면 속았다는 느낌과 많이 잃고 있다는 감각으로 상대방이 신중해질 수 있었다. 그러니 대등하게 판이 진행된다는 착시 현상을 주기 위한 고도의 심리전을 펼치는 방법이다.
이런 행동은 화투나 카드를 여럿이 칠 때 딴 돈을 판에서 치워 조금씩 호주머니에 넣는 방법과 같았다.
시간이 지날수록 주모와 점순이의 노래 자락이 점점 길어졌다. 이어지는 먹쇠가 외치는 수도 서른이 가까워졌다. 그러자 초조해진 박 진사의 이마에는 진땀이 흘렀다.
박 진사는 자꾸만 사라지는 곶감을 보자 신경이 써졌다. 면포가 사라지고 있어 너무 아깝다는 느낌이 들었다. 또한 먹쇠가 토해내는 낭랑한 목소리가 천둥소리와 같이 들렸다.
“스물여섯! 스물일곱!”
탁!
박 진사는 숫자를 세는 먹쇠의 큰 목소리가 크게 머리를 강타하니 그만 치열한 전투바둑에서 덜컥 수를 놓고 말았다.
순간 방안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비명처럼 외쳤다.
“앗! 다 죽었어!”
“어머나, 이를 어째!”
“허어! 만방으로 끝나 버리다니.”
처참하게 패한 박 진사의 얼굴은 사색으로 변했다. 바둑돌이 무려 40개는 되는 대마가 모조리 죽어 버린 것이다. 그 대마가 살아 있어도 이길지 말지 어상반한데 엄청난 대마가 죽었으니 보나 마나 만방이다. 그동안 사라진 곶감도 있으니 이번 판으로 내기바둑은 끝나 버렸다. 만방이면 면포가 무려 500필이나 되니 정나미가 뚝 떨어져 더 이상 둘 의사가 없는 것이다.
대국이 끝나자 최인범은 별로 대단한 것이 아니라는 듯이 태연하게 바둑판 밑에 있는 어음들이나 노비문서를 챙겼다. 속으로 기분이 너무 좋았다.
‘등신들 속는 줄도 모르고.’
여유롭게 서류를 두루마기의 넓은 소매 속에 집어넣으면서 옆에 있는 먹쇠에게 말했다.
“먹쇠야, 먹고 싶으면 곶감 다 먹어.”
“예이!”
그러자 세 명의 진사들이 모두다 자신들도 모르게 크게 외쳤다.
“저런, 저 귀한 곶감을······.”
“허! 면포가 몇인데 저걸 먹다니.”
이런 탄식의 소리에 속으로 웃음을 토했다.
‘후후! 다들 제 정신들이 아니군.’
참으로 한심한 인사들이 아닐 수 없었다. 내기바둑에 정신이 팔려 뭐가 똥인지 된장인지 아직도 구분을 못했다.
일단 다음 작업에 필요한 노비문서를 챙기자 눈만 멀뚱거리는 윤 진사를 보며 슬며시 제안했다.
“진사 어르신, 우리 노비문서 놓고 한판만 할까요?”
“방내기가 아니고 판 내기?”
“예, 그것이 쉽게 승부가 나죠.”
자신이 다소 불리한 대국이라고 판단했는지 윤 진사가 머뭇거리는 기색을 보였다. 그러자 고민하는 척 하다가 꼬이는 달콤한 유혹의 제안을 했다.
“제가 5점을 접어주고 계가할 때 다섯 집을 더 쳐드리죠. 6점으로 까는 것은 무리고 그런 정도면 대등하지 않나요?”
“정말 그렇게 두려나?”
“한판 해보고 안 되면 종전처럼 두도록 해야죠.”
“좋네. 그럼 두지.”
자신에게 매우 유리하게 치수를 정해주자 윤 진사는 결국 바둑을 두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최인범의 대마가 죽어 버리자 기권을 해버리고 말았다.
“어이구! 제가 졌네요. 윤 진사 어르신은 바둑이 금방 늘었네요. 이렇게 큰 대마를 잡으시고.”
“허허! 그런가?”
한판을 이겨 노비를 따자 윤 진사는 기분이 너무 좋아 너털웃음을 토했다. 더구나 기분 좋게 상대방의 큰 대마를 시원스럽게 잡고 이겼으니 신명이 났다. 그러자 옆에 있던 권 진사도 욕심이 생기고 말았다. 자신도 최인범과 바둑을 두면 쉽게 이길 것으로 판단한 것이다.
“자네, 나하고도 한판 두세. 서로 노비 문서를 걸고 한판으로 끝내기로 하지.”
“그러죠. 그런데 치수는 어찌하죠.”
“윤 진사와 같이 치수로.”
“좋습니다. 그렇게 두시죠.”
후하게 윤 진사의 치수와 같도록 두게 됐다. 그러나 몇 판을 두지 않아서 최인범이 결국 권 진사의 노비문서 2장을 따게 됐다.
만방으로 져 전의를 상실했던 박 진사가 잃은 재물을 찾아보려는지 다시 노비 문서를 내놓고 판에 끼어들어 내기를 두게 됐다.
“나하고 다시 두세.”
“좋습니다.”
이것을 시작으로 박 진사는 최인범과 내기바둑을 두게 됐다. 옆에서는 윤 진사가 권 진사와 대국을 시작했다.
탁! 탁!
사랑방의 내기바둑판은 혼잡스럽게 이 사람 저 사람이 서로 어울려 양쪽에서 바둑을 두었다.
서로 대국 상대를 바꾸면서 두는 바둑이다. 그러니 누가 따는지 정확하게 알기가 약간 힘들게 돌아가고 있었다. 따고 잃기를 반복하는 혼전 상황으로 대국은 진행됐다.
“청산~아!”
“다섯! 여섯!”
탁! 탁!
두 곳에서 동시에 초읽기 바둑이 진행되니 그때부터는 점순이도 어설프게 노래를 불렀다. 그녀는 다소 빠른 노래를 선택해 불렀다.
다소 경박스럽게 요도 방정을 떨며 소리를 질렀다.
“달아달아~! 이.”
탁! 탁!
옆에서 간간히 노래가 들리고 때로는 먹쇠와 집사가 급하게 큰 목소리로 숫자를 세고 있다. 그 바람에 사랑방은 상당히 어수선하게 대국들이 진행됐다.
나중에는 죽죽이 주점에 들린 안동에서 산다는 선비 두 명도 와서 구경했다.
“와! 큰 판이군요.”
“어서 오세요. 구경이나 하세요.”
새로 오게 된 선비들도 내기바둑 판에 끼고 싶어 미치겠다는 눈치다. 하지만 판돈이 워낙 커져서 끼지 못하고 옆에서 침만 꼴깍 꼴깍 삼키고 있었다. 누가 재물을 빌려 주기만 하면 부인이나 딸이라도 저당 잡혀 한판 벌이고 싶다는 표정들이다. 많은 사람이 사랑방으로 모여들자 더욱 혼란스러웠다.
최인범은 남몰래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어수선해서 더 좋아졌어.’
혼란을 일으키는 것이 좋다고 판단해 두 선비들에게 권했다.
“제가 면포를 빌려드리죠.”
“좋습니다. 차용증을 써드리죠.”
결국 안동의 두 선비도 내기 바둑판에 끼게 되어 판은 더욱 어수선해졌다.
모두들 자신이 두고 있는 대국에만 정신이 팔려 있다. 냉정하게 관망하면서 대국하는 최인범만 재물의 이동 상황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다.
이제는 사랑방에서 두는 내기바둑 판은 노비문서 여러 장과 면포 200필의 어음들만 어지럽게 돌아다녔다. 집사는 빠르게 어음이나 차용증을 작성해 수결을 받았다. 노비에 이어 말과 농우도 판돈으로 걸렸다. 내기바둑에 걸린 판돈의 규모는 점점 커지고 있었다.
안동의 선비들은 빌린 면포들을 거의 대부분 잃었었다. 하지만 다행히 후일을 기약하는 최인범의 배려로 본전하고 떠나게 되었다.
두 선비가 본전을 하게 된 이유는 최인범이 본전을 찾고 일어날 수 있도록 적당히 패배해 줬기 때문이다.
“최 진사, 덕분에 잘 놀다 갑니다. 우리 다음에 만나 즐겨 봅시다.”
“그러죠. 다음에는 반드시 기생을 불러 놀아 보죠.”
“그럽시다.”
안동의 선비들에게 후하게 해준 이유야 당장 그들은 목표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들은 나중에 필요해면 써먹기 위해 밑밥을 던진 것이다.
‘저 사람들은 다음에 만나면 내가 만만해 보일거야.’
안동의 선비들이 떠나고 난 이후에도 다른 선비들이 찾아와 대국을 구경하거나 간혹 끼어들기도 했다.
큰 도박판으로 변한 윤 진사 댁의 사랑방은 매우 어수선해지고 있었다.
예천의 두 진사는 눈이 벌게서 내기대국에만 정신이 팔려 있었다.
그들은 이곳으로 오기 전에 풍기에서 수신호해주는 방식으로 거액의 내기바둑을 두었다. 여기에 걸린 판돈의 일부로 변한 면포 400씩을 챙겼었다.
자꾸 재물이 나가게 되자 ‘어! 이게 아닌데.’하며 그만둬야 한다고 판단했다. 하지만 이미 승부욕이 뜨겁게 불타올라 도저히 멈추어지질 않았다.
이윽고 점심때가 되자 간단하게 요기하고 있는 가운데 밖에서 행랑아범이 크게 외쳤다.
“선비님, 봉화에서 최복동이라는 사람이 찾아 왔어요.”
“알았소.”
처음 계획한 그대로 면포 30필만 먹쇠를 시켜 밖으로 내갔다. 그가 밖으로 나가려고 하자 당황한 윤 진사는 황급하게 만류했다.
“자네 어딜 가려고? 더 있다가 가지.”
“저 봉화로 가서 땅에 구덩이를 파서 큰 항아리도 묻어야 하고 할 일들이 너무 많습니다.”
잘 되어가서 많은 면포를 따는 중이니 윤 진사는 그대로 보낼 수 없었다. 그래서 다급하게 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