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화
박 진사는 어음 2장이 600필, 성인노비의 노비문서 2장을 400필로 계산하고 마적을 면포 200필 계산해서 역시 1200필의 판돈으로 내기바둑을 두게 됐다.
판돈이 똑 같이 정해지자 박 진사는 슬며시 다른 제안을 했다.
“우리는 조금 다르게 두지. 집바둑이 아닌 방내기로 하지 한방에 면포 20필씩·······. 어떤가? 그것이 계산하기 좋지 않나?”
그러자 최인범은 슬그머니 밖을 바라보며 뜬금없이 중얼거렸다.
“행랑아범이 아직도 안 오네. 오면 바로 봉화로 돌아 가야되는데. 큰판이라 시간이 오래 걸릴 것이고····. 자칫하면 내기바둑을 두다가 말고 돌아가게 생겼어.”
이미 판돈으로 걸린 면포 1200필은 자신의 목구멍 속으로 넘어가는 중이라고 판단하던 박 진사는 마음이 조급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그는 다른 생각은 하나도 안 났다.
그저 빨리 먹고 싶은 조급함으로 급하게 제안했다.
“그럼, 한 방에 50필로 정하면 승부가 빠르지 않을까?”
“그건 그렇겠군요. 하지만 제가 시간이 너무 없으니 바둑 두다 말고 시간을 끌게 되면 아주 곤란합니다. 그러니 서로 시간을 정해서 두는 방법이 어떤가요.”
처음 듣는 바둑 두는 방식을 말하자 박 진사는 이상하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그게 무슨 소리인지?”
“여기 사랑방에 수를 세는 노비를 데려다 놓고 일정시간이 지나서 세는 수로 서른을 셀 때까지 두어야 하는 바둑을 두도록 하죠. 그런데 서른이 넘어도 두지 못하면 벌칙으로 그때마다 한 방씩 상대방에게 넘기는 것으로 하고요.”
“생각할 시간을 정하자고.”
“그렇습니다.”
조선시대의 바둑은 시간개념이 없는 아주 느린 바둑이 보편적이다. 그러니 전혀 새로운 방식이라 생소해 어리둥절한 표정이다. 그래도 이미 걸려 있는 재물이 욕심나서 물었다.
“일정한 시간이라면? 그건 얼마를 말하나?”
“큰 내기 바둑에 여자가 없으면 재미가 없으니 여기로 여자를 부르도록 하죠.”
최인범의 제안에 세 명의 진사들이 모두 이상하다는 표정으로 바라봤다.
그러자 느긋하게 설명했다.
“여기에 노래 부르는 기생은 없으니 주막의 주모라도 불러서 적당한 시조 한 구절 부르고 소주 한잔 마시고 수를 30까지 세는 그때까지 두는 것으로 하면 어떨까요. 그런 방식이 풍류도 즐기고 좋죠.”
“그런 방법이 있나?”
“이번에는 그렇게 하시고 다음에 만나 둘 때는 기생을 불러서 창이나 가야금 소리도 들으면서 두어도 좋고 때로는 먹으로 난초의 잎을 하나씩 치고 나면 두어도 좋지요.”
“허! 젊은 사람이 풍류를 아는군.”
시조 한 구절이라면 보통 2-3분 정도 걸린다. 주모가 길게 빼는 능숙한 창으로 시조를 할리 만무하니 그런 정도 시간이라고 판단했다. 노래가 끝나고 나서 수를 30까지 세는 동안 두기로 결정했다.
“시간이 지나면 벌칙으로 한 방인 10집씩을 제하게 됩니다.”
새로운 형태의 내기바둑을 두는 방식이라 다들 신기해하며 좋아했다.
“허어! 젊은 사람이 재미있게 바둑 두는 새로운 방법을 아는군. 어디서 배웠나?”
“그야 작년에 한양으로 올라가서 대감님들과 기생집에서 놀던 방식으로 한양에서도 최근에 대감님들이나 왕족들 사이에 매우 유행하는 풍류입니다.”
“그런가? 그럼 그렇게 하세.”
조선시대에서 호사가들이 제일 따르고 싶은 사람이나 부러운 사람이야 고관대작이나 또는 그냥 놀고먹어도 호사하는 왕족들이다. 이렇게 말하는 이유는 세 사람에게 허황된 만족감까지 부여해 줄 필요성이 있기 때문이다. 이들에게 한양에 최신으로 유행되는 풍류를 지방에 사는 자신들이 똑 같이 즐긴다는 자부심을 충족시켜주는 것이다.
‘이제 뒤에 탈이 생길 염려는 없어.’
또한 내기가 끝나고 엉뚱한 일이 벌어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자신이 한양에 고관대작의 배경이 있는 것을 은연중 내포했다. 자신에게 매우 유리할 수밖에 없는 바둑을 치밀하게 구상했다.
‘두 사람도 오랫동안 바둑의 급수를 속일 수 있어.’
만사불여튼튼이라고 안전한 대책을 하나 더 만들었다.
속칭 초속기인 바둑과 같이 내기바둑의 판을 짜고 있었다. 초읽기에 너무 익숙한 자신이야 상관없었다. 하지만 처음 초읽기를 당하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머리가 멍멍해져 악수를 만발한다는 치명적인 약점을 노리는 것이다.
매우 만족한 미소를 지으며 속으로 생각했다.
‘초읽기를 시작하면 혼들이 완전히 빠질 거야.’
많은 재물이 걸린 내기바둑은 그런 증상들이 더욱 심하게 나타난다. 고수야 그런 때에서 차선을 택해 최악의 악수는 피하면서 자중해서 두게 된다.
고수와 하수가 설사 수를 같은 정도까지 볼 수 있더라도 그런 마음 자세에서 차이가 났다. 그래서 바둑 두는 것은 마음을 다스리는 좋은 방법이라고 해 기도(棋道)라고도 한다.
모든 것은 완벽하게 최인범이 의도한 그대로 진행되었다. 그래서 속으로 좋아 죽을 판이다.
조금 시간이 지나 사랑방 문이 열리면서 갑자기 주위가 환해졌다. 기생 역할을 해야 하는 주모와 점순이가 사랑방으로 술상을 거하게 차려 들어왔다. 어차피 기생 대역이라 두 여자는 제일 고운 옷으로 갈아입고 얼굴에 분도 바르고 입술도 붉게 칠했다.
최인범은 몰라보게 달라진 두 여자의 모습에 매우 놀랐다.
‘어라! 생각보다 미모가 좀 되는데.’
화장을 하고 고운 옷으로 차리고 보니 인물이 별로로 보이던 주모나 점순이의 미모가 기생 못지않다. 여자의 이런 모습에 약간 놀랐다. 변신한 두 여자를 보며‘ 여자의 얼굴은 과연 고금을 막론하고 화장발.’이라는 생각을 해보았다.
두 여자에게 자신의 구상에 대해 자세하게 설명했다. 주모와 점순이는 동시에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선비님, 잘 알겠어요.”
애초에 정하기는 시조 한 구절이라고 했다. 하지만 주모나 점순이가 시조를 알리가 없었다. 여자들이 부르고 싶은 아무노래나 시간이 비슷한 것으로 정해 몇 개를 선택해 반복시키기로 했다.
최인범이 먹쇠에게 엄하게 지시했다.
“먹쇠야, 주모의 노래 한 구절이 끝나면 바로 이어서 네가 수를 일정하게 30까지 세. 잘 안 들릴 수 있으니 큰 목소리로.”
“예이.”
초읽기에 해당하는 수는 목청 좋은 먹쇠가 외치도록 정해졌다. 본시 초읽기 방식과는 약간 다른 형태지만 그래도 시간이 정해진 바둑이라 특이한 방식이다.
결국 이런 새로운 내기의 시작으로 윤 진사와 권 진사의 내기바둑은 중단됐다. 노름판이 항상 그러하듯이 큰 판을 구경하기 위해 작은 내기는 시들해 질 수밖에 없었다. 두 사람은 새로운 방식으로 두는 내기바둑에 호기심이 생겨 관전하고 있었다.
박 진사는 마른 침을 삼키며 다소 초조한 기색으로 가장 중요한 문제를 거론했다.
“서로 치수는 어떻게 하지?”
“윤 진사 어르신과 두던 것을 참고하면 되죠.”
“그러면 되나? 새로 정해야지.”
“제가 보기에 그게 적당해 보이는 데요.”
결국 조금 밀고 잡아당기는 대화 끝에 박진사가 두 점을 깔고 두는 접바둑으로 대국을 시작하게 됐다.
“청산~아~!”
주모는 무슨 시조를 부르려는지 모르나 입을 벌려 부르려고 하자마자 최인범이 바둑알을 놓았다.
이에 질세라 박 진사도 빠르게 바둑알을 판 위에 소리 내어 놓았다. 순장바둑이고 접바둑이라 이미 바둑알이야 많이 깔려 있는 상태다.
탁! 탁!
두 사람이 모두 빠르게 바둑알을 놓았다.
시간이 흘러도 주모는 노래 한자락 해보지 못했다. 졸지에 좋아하는 소주 한 잔을 목구멍으로 넘겨보지 못했다. 잘하면 술장사 편하게 하겠다고 판단해 요란하게 치장하고 급하게 달려왔더니 완전히 맹탕으로 실속이 전혀 없었다.
주모는 힘들게 분칠하고 새 옷으로 갈아입은 자신이 너무 한심했다.
‘입맛 당기는 소주도 못 마시고·······. 내가 돈벌이도 안 되는 양반 놈들에게 무슨 영화를 보자고 여기로 와서 이런 짓을 하나?’
그래도 일단 들어 왔으니 뭔가 챙겨서 나갈 생각이다. 최소한 분칠한 값과 술상을 차린 값은 챙겨서 나가야 한다. 주모는 이런 생각을 하며 ‘청산~!’만을 연거푸 토해냈다.
그런 와중에 내기바둑은 빠르게 진행됐다. 접바둑이 항상 그렇듯이 처음에는 하수가 매우 유리해 보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두 사람의 착점이 50여 수를 넘어가자 박진사가 두는 착점의 속도는 느려질 수밖에 없었다.
이윽고 위기에 몰린 것인지 최인범이 착수하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바둑알을 들고 두려고 하다가 멈추기를 반복했다.
드디어 주모는 청산으로 시작만 하고 끝내던 시조 한 자락을 기어이 끝까지 토해내고 목구멍으로 소주를 맛있게 털어 넘겼다.
이어서 먹쇠가 급하게 수를 큰 목소리로 세었다.
“하나! 둘! 셋! 넷!”
탁!
최인범이 그제야 바둑알을 판 위에 내리 찍듯이 올려놓았다. 판이 너무 어려워서가 아니라 속칭 초읽기 방법에 대한 점검이다. 그리고 술을 보고 입맛을 쩍쩍 당기는 주모에 대한 배려다.
‘이제 초읽기가 뭔지를 알았겠군.’
누구 말처럼 노름하는 방법을 알려주고 재물을 살살 빼먹는 방식이다. 초읽기의 내기바둑을 알려주고 진을 쏙 빼버릴 요량이다.
바둑을 두던 최인범이 눈만 멀뚱거리는 먹쇠에게 명령했다.
“먹쇠야. 너 나가서 곶감 10줄만 가져와, 아주 맛있는 것으로.”
“예? 곶감은 안채로 가서 마님께 말씀을······.”
“가서 가져오라면 가져와!”
“예이!”
밖으로 나갔던 먹쇠가 돌아오자 그가 가지고 온 곶감을 나누었다. 한 방당 50필의 면포라 자신의 자리에 24개를 놓았다. 박 진사에게도 24개를 넘겨주고 나서 나머지는 먹쇠에게 맡기며 엄중히 경고했다.
“먹쇠야! 그 곶감은 한 개에 면포가 50필 짜리니 먹으면 큰일 난다.”
“소인, 잘 알겠사옵니다.”
“먹으면 너는 죽은 목숨인 줄 알아. 호랑이 보다 무서운 곶감이야.”
이후 내기바둑인 대국은 계속되었다. 드디어 대국이 끝나자 박진사가 11집으로 2방을 이겨 곶감 두 개를 가져가게 됐다.
최인범은 너무 아깝다는 듯이 투덜거렸다.
“에이! 끝내기 잘했으면 곶감 하나는 버는데.”
이제는 판은 커질 대로 커졌다. 이미 판을 정상적으로 진행되어 상대방이 따고 있다. 그러니 그들에게 판돈이 그저 먹기 좋은 곶감이라는 인식을 심어줄 필요성이 있었다.
계속 바둑을 두게 되자 초읽기라는 특성 때문에 대국은 상당한 속기로 두게 됐다. 연달아 최인범이 지게 되자 곶감은 자꾸만 상대방에게 넘어갔다.
그러자 최인범이 자신의 옆에 있는 곶감을 들어 입에 한 입 가득 물어 먹으며 투덜거렸다.
“에이, 먹고 죽는 귀신은 때깔이라도 좋다니 먹어야겠네.”
“아니? 그 곶감을 먹으면 어떻게 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