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화
백삼수는 약간 긴장된 표정으로 답했다.
“선비님, 제가 아까 노비를 사느라 판돈을 많이 대드리지 못하고 면포 200필 어음은 두 장까지는 빌려드릴 수 있사옵니다.”
“그 정도면 충분해.”
아까 노비 거래를 어음으로 계산하는 것을 보아 면포 200필 어음 두 장이면 충분하다고 판단했다. 노비의 시세가 면포 200필이니 계산하기도 쉬워 보였다.
노름이고 뭐고 내기에서 면포와 같은 부피가 큰 물건으로 오가면 쉽게 중간에서 포기하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어음이나 또는 종이로 작성된 서류는 같은 재물이지만 조금은 실감하지 못해 재물이란 느낌이 적어진다. 아주 단순한 시각적인 착각을 일으키는 것이다.
도시마다에 있는 많은 기원의 경우도 큰 내기바둑의 경우 대부분 다른 대체물로 계산하고 있다. 그래서 대부분 판돈은 따로 놓고 바둑알로 정산하게 된다. 그러면 나중에는 큰돈이 오가도 하잘 것 없는 바둑알이 오가는 정도의 느낌만 있는 것이다. 물론 경찰의 도박 단속을 피하는 효과가 있어 그렇게 하는 경향도 있었다.
내기바둑의 특성을 너무도 잘 안다. 그런 그가 굳이 부피가 큰 면포를 이동시키는 방법을 사용한 것은 윤 진사의 호승심과 욕심을 부추기기 위해서다.
윤 진사 이외에 덤으로 두 진사들도 견물생심으로 면포를 욕심내니 목적한 그대로 쉽게 판은 커지게 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이렇게 판단하고 더 판을 키우자는 계획으로 백삼수에게 제안했다.
“자네 아까 산 노비 둘의 문서도 잠시만 빌려주게. 그러면 더 쉽게 판을 끝낼 수 있으니까.”
그러자 잠시 생각하던 백삼수가 고개를 끄덕이면서 쉽게 노비 문서를 넘겨줬다. 노비는 본래 윤 진사 소유이니 그 노비를 놓고 윤 진사의 욕심을 부추기기 위해 이런다고 판단한 것이다.
백삼수는 빌려달라는 어음을 꺼내더니 넘기지는 않고 조심스럽게 말했다.
“선비님, 부탁이 있사옵니다. 꼭두 형님께서 지시해 선비님께 전하는 말인데 주막에서 사는 소녀인 월녀를 사실 수 있게 해달랍니다.”
“뭐? 자네에게 꼭두가 있어?”
“예, 꼭두 형님 말씀에 선비님께서는 분명 내기바둑에서 큰 재물을 따니 판돈을 빌려 드리라고 하셨사옵니다.”
“그렇군.”
순간 백삼수의 꼭두라는 사람을 만나보고 싶었다.
하지만 자신은 지금 아주 중요한 부업을 벌이는 중이다. 여러 사람을 만나면 자칫 일이 틀어질 수 있다고 판단해 포기했다. 더구나 사랑방에서 내기바둑의 판이 깨지면 안 되니 서두를 필요가 있었다. 도박은 분위기라는 것이 있어 반드시 열기가 달아올랐을 때 해야 되기 때문이다.
백삼수가 들고 있는 어음을 받아들며 말했다.
“되도록 월녀를 사보도록 노력하지. 그 대신 이자는 없네.”
“알겠사옵니다.”
두둑하게 판돈을 준비해 사랑방으로 들어왔다. 다소 떨어진 구석에 앉아 윤 진사와 권진사가 두는 내기바둑을 바라봤다. 두 사람은 무슨 생각인지 판을 엄청나게 키워 놓았다. 한 집에 면포 10필을 계산하는 집 바둑을 두고 있었다.
바둑판 옆에 어음 두 장이 있고 바둑알이 20개씩 따로 놓여 있었다. 그것으로 보아 바둑알 하나에 면포 10장으로 계산하는 것이 틀림없었다. 그들은 자신이 밖에 있는 동안 뭔가 모의하고 판을 크게 키워놓고 자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오라, 약게 생긴 박 진사가 이런 구상을 했군.’
어음 두 장은 분명 윤 진사의 재물이 틀림없었다. 그러나 판돈을 완전히 빌려준 것인지 그저 바람만 잡기로 했는지는 알 도리가 없었다.
일단 3명이 모두 짰다고 판단하고 내기바둑을 두어야 될 상황이다. 우선 상대방의 실력을 정확하게 알아야 한다.
처음 만나는 사람의 바둑실력을 알아내는 것이 결코 쉽지 않았다. 그들도 자신과 같이 진짜 실력을 숨길 수 있기 때문이다. 다소 떨어져 앉아 바둑을 두는 두 사람의 표정과 행동만 살폈다. 조금 지나서 예천의 두 진사들이 짜고 내기바둑을 둔다는 느낌을 받았다.
‘오라, 교모하게 수신호를 하는군.’
마치 윤 진사를 돕고 싶어 편을 들겠다는 듯이 그의 옆에 앉은 박 진사는 이상한 행동을 보였다. 자연스럽게 양손으로 머리나 귀를 만졌다.
‘아주 초보 수준인 수신호야.’
이마를 좌우로 쓰다듬는 것은 두지마라는 뜻이다. 그리고 오른 쪽 귀를 한번 만지는 것은 착점을 오른쪽으로 한 칸 이동하라는 뜻이다.
두 번은 두 칸 이동이다. 왼쪽 귀는 왼쪽으로 이동, 코는 위로. 입술은 아래로. 턱수염은 손을 빼 다른 곳에 두라는 뜻이다. 야구장의 감독들 사인하는 동작과 아주 흡사한 방법으로 수신호를 보냈다. 가까이에서는 모르지만 다소 떨어져 예리하게 살피니 알 수 있었다.
흔히 노름꾼들만 이런 식의 수신호를 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내기바둑에서도 서로 짜기만 하면 얼마든지 가능하다. 그렇다고 매번 착점마다 신호를 보내지는 않았다.
중요한 대목인 사활에 걸릴 경우에서만 그리 신호를 보내서 훈수했다. 그래서 자신의 판단이 사실인지 확인할 필요성이 있었다. 확증을 잡자면 물증이 반드시 필요했다. 그래서 슬며시 입을 열었다.
“어디 어음인지 볼까?”
바둑판에 끼어 있는 두 장의 어음을 슬며시 빼서 살폈다. 한문 실력이 미천하기는 하지만 기본적인 어음의 서식이야 너무 잘 안다. 한 장의 발행처는 풍기군이다. 그리고 한 장은 예천군에서 발행했다. 그렇다면 두 진사는 오늘 작심하고 윤 진사를 노리고 찾아온 셈이다.
이거야 말로 두 마리 여우가 만만한 토끼를 잡으러 왔다가 무서운 범을 만난 형국이다.
‘윤 진사가 재복이 있기는 해.’
젊은 진사에게 당하면 윤 진사가 독기를 품을 것은 자명한 일이다. 그나마 상처도 치료해 주고 자신을 사위 삼겠다며 혼인도 고려하던 윤 진사라 일단 봐주기로 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내기바둑의 판을 아주 멋지게 깨는 구상을 결정했다.
‘좋았어! 노비를 사달라는 부탁도 있고 뒷돈도 두둑하니 크게 한 판 벌여 보자고.’
아무 때나 판에 끼어들면 안 된다. 그러니 적당한 시점을 기다렸다. 더구나 상대방의 실력을 정확하게 알아야 한다.
특히 신호로 훈수를 두는 박진사의 실력을 정확하게 알아야 된다. 이렇게 생각한 뒤에 한 참을 지켜보다가 슬며시 박 진사에게 작업을 걸었다.
“박 진사 어르신, 우리 옆에서 구경만 할 것이 아니라 따로 한번 두죠.”
이렇게 말하고 나서 면포 200필짜리 어음 2장을 방바닥에 펼쳐 놓았다. 그렇지 않아도 남의 훈수나 두어 손이 근질근질하던 박 진사는 눈빛이 반짝 빛났다. 탐욕스러운 눈빛은 면포 400필이 눈앞에서 어른거렸다.
없다던 판돈이 생겼다고 하면 이상하게 생각할 것을 염려해 슬며시 어음의 출처에 대해 설명했다.
“제가 한양의 성균관에 입교해 사용할 생활비로 가지고 나온 것입니다.”
이런 설명에 박 진사의 입에서는 비릿한 조소가 흘러 나왔다. 그의 입가에 나타난 미소나 표정으로 보아 분명 성균관으로 입교한다는 자체가 싫다는 뜻이 분명했다.
이것으로 보아 이놈도 진짜 진사는 분명 아니다.
‘표정으로 보아 시기심이 많은 놈이군. 기회에 어음을 차지해 버려 나를 성균관으로 들어가지 못하게 해서 영영 벼슬길 못하게 막고 싶다는 음흉한 표정이야.’
박 진사는 아주 좋은 생각이 있다는 듯이 제안했다.
“자네, 성균관으로 가려고 했다면 수중에 백패도 있겠군.”
“그렇습니다만.”
“그것을 담보로 하면 내가 면포 200필을 쳐주지.”
“좋습니다.”
백패란 일종에 합격증명서다. 생원·진사과의 복시에서 각각 1등 5인, 2등 25인, 3등 70인으로 각 100인을 합격시켰다. 합격자를 성적순으로 써서 국왕에게 올린 뒤 이를 발급해 주었다.
괴나리봇짐을 끌러 그 안에 들어 있는 백색 종이에 써진 진사 합격증을 보여 주었다.
백패에는 진사과에서 1등으로 합격한 내용이 적혀 있었다. 전에 향시인 초시에 합격한 경력이 있는 박중식 초시가 유별나게 저자세로 일관한 이유는 바로 백패에 적힌 1등이라는 성적 때문이다. 백패를 꺼내주면서 그런 사실을 이제야 알고 박 초시의 행동이 이해되었다.
‘아하, 진사를 합격한 성적이 너무 좋으니 그랬어.’
합격의 순위가 최상위로 높으니 어쩌면 한양에서 매파들이 주변으로 모였을 수 있다고 판단됐다. 그러나 그런 사실을 일부러 떠올리려니 머리가 지끈 거리고 너무 아파왔다.
‘아휴! 머리야.’
백패를 내놓고 머리를 만지자 박 진사는 이렇게 추측했다.
‘백패를 담보물로 내 놓기가 너무 아까운 모양이지. 좋아 그럼 내가 좀 더 쓰지.’
이렇게 판단한 박진사는 슬며시 백패를 잡아당기며 호기롭게 제안했다.
“좋네, 내가 백패를 가지고 대신 면포 400필로 계산해주도록 하지.”
“좋습니다. 그렇다면 노비문서를 판돈으로 내놓아야 되겠군요.”
박 진사는 분명 자신은 못하고 남이 하게 되면 배가 아파서 못사는 그런 치졸한 성품이 틀림없었다. 양반이란 사람들이 짜고 내기바둑을 시도하니 좋은 놈들은 절대로 아니었다. 그런 면에서 자신과 비슷하지만 자신이야 워낙 다급한 입장이라고 정당성을 부여했다.
최인범이 조금 머뭇거리자 탐욕으로 가득한 박 진사는 품에서 면포 300필의 어음을 꺼내 놓으면서 격장지계를 발휘했다.
“하려면 이런 정도는 재물을 가지고 시작해야지. 나는 말을 타고 왔고 노비도 둘을 데리고 왔으니 판돈은 그 정도는 되어야지.”
“노비문서가 있나요?”
“당연하지. 타고 온 말의 마적도 가지고 왔네.”
마적(馬籍)이란 말의 호적을 말한다. 즉 이 서류가 있어야 소유권 이전이 가능했다. 결국 움직이는 판돈이라는 설명이었다.
이런 어처구니없는 응수에 박 진사나 권 진사가 우연히 이곳을 찾아온 것이 절대로 아니라는 것을 정확하게 알았다.
‘단단히 벼르고 왔군.’
말을 타고 급하게 왔다면 목적이야 확실했다. 아마도 내기바둑을 두어 윤 진사의 재물을 우리려고 오랜 기간을 노렸음이 분명하다. 어제 사랑방에서 하루 종일 큰 내기바둑을 두었으니 분명 예천까지 누구든 간에 연락하자 급하게 말을 타고 왔다.
‘주변에 첩자를 심어 놓고 항상 노렸어.’
아마도 윤 진사 댁의 주변에 정보원을 심어둔 것이 틀림없었다.
아주 치밀하게 설계해서 윤 진사의 재물을 노리는 것이 분명했다. 자신이 노리던 윤 진사를 다른 사람들이 와서 노리자 너무 괘씸했다.
‘감히 내 밥그릇을 노려?’
더구나 후유증을 생각해 아직 뜸만 들이고 있는 상황이다. 이제 밥이 다 익어가자 엉뚱한 사람들이 숟가락을 들고 덤비는 꼴이라 은근히 화가 치밀었다.
‘너희들 잘 걸렸어!’
공격의 목표를 내기바둑판으로 뛰어든 두 진사에게 돌렸다. 그들이야 언제 만날지 모르니 오늘 완전히 털어버릴 구상을 했다.
작업 대상을 결정하자 주저하지 않고 답했다.
“좋습니다. 판돈이 같아야 하니 저도 노비문서와 백패를 내놓지요.”
최인범이 노비문서와 백패를 내어 놓자 그것을 슬쩍 바라보던 박 진사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건 애들이 아닌가? 시세가 얼마 안 되는데.”
“둘이니 300필로 계산하면 되죠.”
“그래도 판돈으로 부족해 보이는데.”
결국 면포 100필, 노비문서 300필, 어음 2장이 400필, 백패 400필로 즉 면포 1200필을 판돈으로 내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