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화
너무 놀라는 표정에 백삼수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꼭두 형님, 혹시 전부터 아시는 분인가요?”
“아니, 노비에게 면포 10필을 줬다니 너무 놀라서.”
“꼭두 형님, 저도 상당히 놀랐사옵니다. 살다보니 세상에는 이런 후한 인심을 지닌 양반도 있는 것을 오늘에야 처음으로 알았네요.”
“그러냐? 내기바둑으로 공돈 생기니 그냥 선심 쓰는 모양이지.”
평을 이렇게 하지만 진사인 최인범을 좋은 사람으로 여겨졌다. 팔려가는 노비인 형제에게 겨울옷을 해서 입으라고 면포를 줬다니 인정머리가 전혀 없는 사람은 아님이 분명했다. 객차 안에서 이것저것 자랑 질이 심하더니 마냥 허세만은 아닌 것 같았다.
이렇게 판단하고 즉시 백삼수에게 지시했다.
“애들에게 솜을 넣은 누비옷으로 잘 만들어 줘! 공연히 길에서 얼어 죽게 하지 말고.”
“예!”
일단 대답한 백삼수는 자신이나 최인범도 겨울을 지낼 옷이 필요하다고 판단해 즉시 물었다.
“꼭두 형님, 기왕에 생긴 면포이니 우리도 겨울옷을 만들죠.”
“그렇게 해.”
지시를 받자 백삼수는 면포 10필을 들고 급하게 아래골방에서 밖으로 나갔다.
최인범은 어린 형제의 모습을 바라보니 한심했다. 덩치는 또래보다 조금 큰 편이지만 아직은 너무 어려서 뭐에 써먹어야 할지 막막했다. 그러나 자신도 어린 몸으로 변했으니 지금부터 잘만 키우면 나중에는 쓸모가 있을 수 있다고 판단했다. 형제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처음부터 군기를 단단히 잡을 요량으로 엄하게 물었다.
“너희들 제일 잘하는 것이 뭐냐? 숨기지 말고 말해.”
이런 물음에 두 녀석이 잠시 생각을 하더니 칠복이가 대답했다.
“우린 작대기 놀이를 제일 좋아하고 잘해요.”
“작대기 놀이?”
처음 듣는 놀이라 이상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자 칠복이가 나서며 다시 설명했다.
다소 복잡하게 설명했지만 결국 지게 작대기를 가지고 노는 방법이다. 작대기를 멀리 던지기 놀이를 하거나 때로는 그것을 봉으로 사용해 서로 칼싸움 놀이를 잘한다는 것이다.
“그것 말고는 없어?”
“우린 근동의 애들 중에서는 달리기를 제일 잘해요.”
동생인 팔복이가 나서며 답하자 어쩌면 백삼수가 ‘이 애들의 달리기 솜씨 때문에 산 것이 아닌가?’ 하는 기분이 들었다. 조금 전 심부름시키기 위해서 샀다고 했다.
잠시 생각에 잠기다가 두 녀석을 측근인 경호원으로 써먹어도 된다고 판단했다. 모든 운동의 기본인 달리기를 잘 한다니 운동 신경은 분명히 맹탕은 아니다. 지금부터 격투기를 비롯해 특공무술을 비롯해 모든 군사훈련을 체계적으로 수련시키면 앞으로 매우 유용해질 것이다.
하루아침에 익힐 수 없는 전투력이라 지금부터 체계격인 훈련이 필요했다. 막상 달리 할 일도 없는 상태라 칠복이 형제에게 지시했다.
“너희들 나가서 운동이나 해.”
“운동요?”
지시를 내렸지만 녀석들은 운동이라는 자체를 모른다. 처음부터 일일이 알려 줘야 되니 아득했다. 그래서 자신이 써먹는 몽둥이 두 개를 바라보며 다시 지시했다.
“저 몽둥이 가지고 밖으로 나와!”
“예.”
세 사람은 뒷마당으로 나와 남들이 보면 다소 이상해 보이는 무술 수련을 시작했다. 제일 처음 몽둥이를 양손으로 잡는 법부터 알려주기 시작했다. 몽둥이 잡는 법을 알려주고 아주 쉬운 사선 베기도 알려주었다.
자신은 아래골방 문턱에 앉아 수를 세었다.
“하나! 자세 잘 잡고. 둘! 셋! 넷!·······열! 다시 시작! 하나·····.”
이곳에서 산 노비들이니 이런 교육이 다소 이른 감은 있었다. 하지만 남들이 뒷마당에 오지 않는 다는 점 때문에 검법 훈련을 시작한 것이다.
형제에게 검법과 태권도의 아주 기본자세를 알려 줬다. 그러다 보니 지루하던 시간은 의외로 빠르게 흘러갔다. 칠복이 형제는 처음 해보는 놀이라 그런지 그런대로 지루해하지 않고 곧잘 따라했다.
이때 밖으로 나갔던 백삼수가 긴 대나무를 하나 가지고 왔다. 그것을 슬며시 최인범에게 넘겨주면서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꼭두 형님, 그 안에 검신이 들었사옵니다.”
“그래? 그런데 좀 기네.”
“겉은 더 길어졌지만 검신의 끝을 조금 잘라내고 넣는 바람에 검신은 오히려 짧아요.”
다른 사람이 볼 수도 있어 대나무를 들고 방안으로 들어왔다.
손잡이 부분을 잡고 빼려고 하자 잘 빠지지 않았다. 가만히 보니 비틀어서 빼야 되도록 아주 정교하게 만들었다. 그러니 평소에는 긴 대나무 지팡이와 같은 형태다.
‘평소에는 지팡이나 봉으로 써먹어도 되겠어.’
이후 최인범은 방안에서 비틀어서 장검을 빼는 연습을 반복했다. 뒷마당에서는 어린 형제가 검법 수련이나 기마자세를 취해 정권지르기를 연습했다.
또다시 밖으로 나갔던 백삼수가 돌아오며 이번에는 먹쇠와 같이 왔다.
“이놈도 샀냐?”
최인범의 다그치는 물음에 백삼수가 이내 답했다.
“아뇨. 이놈은 최 진사라는 선비님께 자길 사달라고 한다며 저에게 내기바둑의 판돈을 빌려 달라고 왔사옵니다.”
“뭐라? 노비인 놈이 판돈을 빌려?”
먹쇠는 사랑방에서 벌어진 내기바둑에 대해 간단하게 설명하고 판돈을 선비에게 빌려 달라고 사정했다. 설명을 모두 들은 백삼수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꼭두 형님, 어떻게 하죠? 내기바둑판이 아주 커질 것 같은데.”
설명을 들으며 생각에 잠겼다.
‘과연 바둑 실격이 그렇게 좋을까?’
분명 그 사내도 지금 자신과 같이 위기에 처한 입장이다. 그런데 승산이 없는 짓을 벌일 하등에 이유가 없었다. 믿는 구석이 있으니 판을 키우려는 것으로 보였다.
먹쇠라는 놈의 설명이 사실이고 기차 안에서 하던 말들이 모두 사실이면 지금 벌이고 있는 내기바둑에서 절대로 재물을 잃지 않을 것이다.
‘잘하면 서로 좋은 일이야.’
좋은 일 하는 셈 치고 판돈을 건네주기로 결정해 지시했다.
“삼수야, 네가 가진 재물을 모두 털어서 판돈으로 빌려줘. 그 대신 주막에서 지내는 월녀를 사도록 주선해달라고 부탁하고.”
“꼭두 형님, 재물을 모두 투자하라고요?”
“그래, 그렇게 하면 좋은 일 생긴다.”
“잘 알겠사옵니다.”
대화를 끝내고 나자 먹쇠와 백삼수는 급하게 밖으로 나갔다.
최인범이 월녀를 사려는 이유는 전생의 아픈 기억 때문이다.
어린 월녀를 보자 자신의 이웃에서 살던 어린 여자 애가 떠올랐다. 가정이 너무 어려워 몸을 파는 싸구려 유흥업소로 전전하면서 살았다.
노비인 월녀도 주막에서 지내다 보면 얼마 지나지 않아 사내들의 노리개 신세가 될 것 같아 매우 안타까웠다.
‘이것도 인연이니 데리고 다녀 봐야지.’
세상의 노비들이나 모든 사람을 도와줄 수 없었다. 그러나 사람들 틈에 숨어들어 처음 만난 셈인 어린 월녀만이라도 그런 짓은 면하게 해주고 싶었다. 그리고 탐욕스럽게 월녀를 노려보던 백삼수의 표정도 많이 참고해 내린 결정이다.
‘삼수 녀석이 정상적으로 혼인해 살도록 해주는 방법일 수 있어.’
윤 진사 댁 담장을 바라보며 나름 최인범이 벌인 일들이 아주 잘 진행되길 기대했다. 그래야 월녀를 데리고 떠날 수 있었다.
두 사람은 서로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어느새 돕고 있었다. 막상 비슷한 처지인 사람이 지척에 있었지만 처음 생각과는 달리 지금 그를 만나기가 싫었다.
‘그 사람은 이미 양반으로 어느 정도 자리를 잡아 가는데 나는 아직도 호패도 내 것이 아니니 굳이 지금 만날 필요까지는 없어.’
미묘한 자존심도 있어 그런지 아무튼 만나고 싶지 않았다. 그는 그대로 살게 놔두고 나는 나대로 살아가야 한다. 인연이 깊으면 이번처럼 우연한 기회에 만나게 될 것이라고 판단했다.
자신이 너무 백삼수에게 의존하는 기분이 들어 슬며시 괴나리봇짐을 끌렀다. 그 안에 들어 있는 물건을 살피고 있었다.
봇짐 안에서 여자 옷이 보이자 월녀를 떠올렸다.
지금 생각해 보면 아무 쓸모가 없어 보이는 여자의 옷이다. 그런데 굳이 가지고 다녔으니 월녀가 자신과 인연이 많은 것 같았다.
이때 백삼수가 다가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꼭두 형님, 우리 하루나 이틀을 여기에서 머물러야 되겠사옵니다. 판돈도 회수하고 저도 여기서 장사할 일도 생겼고요.”
“알았어. 그렇게 하지.”
어차피 자신에게 어디로 오라는 사람도 없고 따로 정한 목적지도 없었다. 새로 일행에 합류된 칠복이 형제를 데리고 무술이나 지도해볼 계획이다. 그래서 위 골방에서 쉬고 있는 형제를 큰 소리로 불렀다.
“칠복아! 몽둥이 가지고 나와.”
“예이.”
밖으로 나온 칠복이 형제에게 몽둥이를 목검처럼 사용하는 기초적인 검술을 지도하고 있었다. 그리고 다른 기본적인 격투기 자세들도 알려주었다.
“앞으로 별도의 지시가 없어도 시간이 나면 틈틈이 계속해서 수련해.”
“넷!”
최인범은 수시로 밖으로 들락거리는 백삼수와는 달랐다. 주막의 뒷마당에서 칠복이 형제에게 무술 지도에 여념이 없었다. 그리고 그는 하루 종일 무술 수련을 하느라 외부에서 어떤 사건이 벌어지고 있는지에 대해 전혀 관심이 없었다.
한편 진사인 최인범은 윤 진사 댁의 앞마당에서 혹시 하는 기대감으로 서성였다.
탁! 탁! 탁!
간간히 사랑방에서 바둑을 두는 소리가 들렸다. 내기바둑의 분위기가 조성되자 다들 참지 못하고 바둑을 두고 있었다.
과연 백삼수라는 사람이 자신에게 판돈을 빌려줄 것인지 약간은 초조했다.
판돈을 빌려주면 의외로 아주 손쉽게 많은 것을 이룰 수 있다고 판단됐다. 그것이 아니면 시간이 오래 걸릴지도 모르고 자신 생각과 다른 결론이 날 공산이 매우 커보였다.
잠시 시간이 흐르자 번개 같이 밖으로 튀어나갔던 먹쇠가 백삼수와 같이 안마당으로 들어왔다.
백삼수가 다가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선비님, 내기바둑의 판돈이 필요하시다고요?”
“그렇다. 네가 바둑을 두던지 아니면 내기에 뒷돈을 대.”
“알겠사옵니다. 하지만 소인은 바둑을 둘 줄 모르니 뒷돈만 빌려드리겠사옵니다. 다만 아실지 모르지만 그런 판돈은 이자가 아주 비쌉니다. 하루에 1할이옵니다.”
“알았어. 판돈을 얼마나 대줄 수 있느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