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화
<서로를 위한 절묘한 협조>
무려 60집 차이로 이겨 버렸다. 최인범이 30필을 가지고 있었고 윤 진사가 110필을 지니고 있었으나 내기바둑은 완전히 끝나버린 것이다.
판을 끝낼 때가 되었다고 생각되는 시점이다. 그래서 상대방의 작은 실수를 기화로 단칼에 목을 쳐버렸다.
윤 진사 쪽에 수북하게 쌓여 있던 110필의 면포가 모조리 최인범 쪽으로 옮겨졌다.
옆에서 구경하고 있던 박 진사나 권 진사의 마음속에서는 자신들도 모르게 강력한 욕심이 생겼다. 매우 탐욕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한 판으로 면포를 100필이나 넘기다니·······. 드디어 윤 진사가 내기바둑에 재미가 단단히 들렸어.’
본래 바둑 대국이란 옆에서 지켜보면 무념인 상태라 양쪽의 수를 생각하며 바라보니 더 잘 보일 수밖에 없었다. 자신들이 보기에 훤한 수를 못보고 박살이 나자 이렇게 판단했다.
‘저런 정도인 실력인 사람에게 5점 접바둑이면 나는 매번 만방으로 이기겠어.’
두 진사는 속으로 애송이 최 진사가 자신들과도 내기바둑을 두자고 청하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최 진사는 매우 피곤한 표정으로 더 이상 바둑을 두지 않을 태세다.
사랑방 문을 열고 밖을 바라보면서 두리번거렸다. 그리고 슬며시 자리에서 일어나며 중얼거렸다.
“허! 아직도 온다던 행랑아범이 보이지 않네. 나가서 기다려 볼까?”
판돈인 윤 진사의 면포가 사랑방에 없으니 더 이상 바둑을 둘 필요가 없다는 듯이 슬며시 밖으로 나갔다. 아무튼 노비 한 명의 값이 내기바둑으로 사라진 윤 진사는 열불이 났다.
“허! 고약하군.”
여전히 윤 진사는 마지막 수를 자신이 잘 못 보아서 졌다고 판단했다. 그런 실수를 안했으면 면포는 모두 자신의 것이 되었다는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
실제로는 시간의 차이가 있다 뿐이다.
내기바둑 시작과 동시에 판돈인 면포 140필은 최인범의 것이었다. 언제고 최인범이 마음만 먹으면 이길 수 있을 정도로 실력의 차이가 있었다.
일발필살이라고 단 한판으로 끝장을 내버리고 사랑채에서 나왔다. 그는 마당에서 서성이며 깊은 생각에 잠겼다.
‘됐어, 이제 기본적인 사업자금은 장만했어.’
고심 끝에 부업으로 사업할 자금을 만들었다는 느낌이 들어 신이 났다. 그러나 면포를 지니고 무사히 여길 떠나야 성공하게 된다.
투전노름판이고 내기바둑판이고 판을 깨는 방법이 절묘해야 한다.
그래야 남의 원한도 안사고 또 비난을 받지 않게 된다. 그래서 다른 두 진사를 이용해 앞으로 판을 깨는 작업을 시도해볼 구상을 해보고 있었다.
그게 어려우면 자신만 슬며시 판에서 발을 빼는 방법을 써볼 요량이다.
‘손을 털긴 털어야 하는데 언제 털지?’
무리하게 모든 면포를 자신의 집인 봉화현으로 보낼 욕심은 없었다. 내기바둑은 엄연히 부업이고 본업인 해결사 보수만 보낼 생각이다.
‘그 면포야 정당하게 번 면포니 그것이 제일 적당해.’
판을 깨고 빠질 방법을 고심하며 서성였다.
겉으로 보기에는 봉화현에서 찾아올 행랑아범을 초조하게 기다리는 모습이다. 그러나 속으로는 이제 손을 털고 떠날 궁리로 가득했다.
그는 계속해서 봉화로 가서 새로 시작할 사업에 대해 구상했다. 가난하다니 막상 어디부터 시작해야 할지 난감하기만 했다.
‘눈 딱 감고 면포를 모조리 챙겨?’
그러나 그런 일을 자신이 벌이면 뒤탈이 생길 수 있었다. 새로운 사업을 하기 위해서는 최소한의 여건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그것이 전혀 충족되지 않으니 머리만 어수선했다.
머릿속에 아무리 많은 좋은 사업 구상이 있어도 자금이 전혀 없으니 그거 헛된 망상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기왕에 시작된 내기 바둑으로 한 밑천 잡아야겠다는 강한 유혹이 생겼다.
사랑방에서 두던 내기바둑이 모두 끝났다.
면포를 이리저리 나르던 먹쇠는 할 일이 없었다. 더구나 면포를 모두 잃은 윤 진사가 자신을 매섭게 노려보자 은근히 불안했다.
‘진사 어르신께서 열이 단단히 나셨어.’
약간 풍기가 있는 윤 진사는 화가 나면 두툼한 볼 살이 부들부들 떨리는 증상이 나타난다. 뒷머리를 만지는 것을 보니 화가 상당히 났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윤 진사의 얼굴에서 풍기가 나타나는 징후가 나타나면 종놈들이야 죽어나게 생겼다. 저런 증상이 보일 때 노비가 조금만 거스르는 행동을 하면 무슨 트집을 잡아서라도 멍석말이다.
그러니 먹쇠는 겁이 날 수밖에 없었다.
‘아이구! 오줌도 마려오고 죽겠네.’
슬며시 윤 진사의 눈치를 보던 먹쇠는 소리 없이 나갈 궁리를 했다. 마침 윤 진사가 다른 쪽을 바라보자 때는 이때다 하고 정신없이 밖으로 나왔다.
먹쇠는 안마당으로 나와 조심스럽게 최인범에게 다가왔다. 뭔가 이야기하려다가 말기를 반복하다가 드디어 작은 목소리로 소곤거렸다.
“선비님, 아까 그 애들은 아마 금방 떠나지 않을 겁니다. 선비님 말씀대로 누비 솜옷도 만들고 그 애들 주인도 겨울옷이 필요해 솜옷이 만들어진 내일이나 혹은 모래 떠날 모양이옵니다.”
“그러냐? 다행이다.”
조선시대의 겨울은 매우 혹독하게 춥고 눈도 많이 내렸다.
조선시대는 추은 겨울에 몸을 보호해줄 옷들이 너무 허접했다. 그러다 보니 피부로 느끼는 체감온도가 더욱 낮았다. 물론 가난한 서민들의 이야기다.
양반들이야 보온할 옷들이 많았다. 두툼한 솜을 넣은 누비옷도 있고 짐승가죽의 털을 이용한 겉옷들도 있었다. 사노비나 혹은 가난한 백성들 경우 헐벗고 굶주려 겨울은 더욱 혹독하게 추울 수밖에 없었다.
다소 모자라 보이지만 먹쇠도 사노비로 산지 오래되니 기본적인 눈치는 있었다. 보아하니 윤 진사의 노비로 사는 것 보다 후해 보이는 최 진사의 노비로 사는 것이 훨씬 좋아 보였다.
더구나 윤 진사는 면포를 이동시킬 때 열불이 나서 자신을 매섭게 노려봤다. 자칫하면 최 진사가 떠나고 나서 자신이 보복당할 염려가 많았다.
욕심이 많은 윤 진사는 그런 아주 고약한 성품의 소유자다.
그래서 먹쇠는 아주 조심스럽게 주변을 살피다가 낮은 목소리로 다시 입을 열었다.
“선비님, 혹시 소인을 사주시면 안 되나요?”
갑작스럽게 종놈인 먹쇠의 이런 황당한 제안에 이상하다는 표정으로 바라보며 넌지시 물었다.
“왜? 너 여기서 살기 싫으냐?”
매우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먹쇠가 다시 말했다.
“선비님, 아까 소인이 면포를 선비님 쪽으로 옮길 때 윤 진사 어르신께서 저를 매섭게 노려보시더라고요. 겁이 나서 여기서 더 이상 살기 싫어요.”
“그러냐?”
두려운 표정을 짓는 먹쇠의 말을 듣자 충분히 그렇게 될 소지가 많다고 판단했다. 주인에게 찍힌 노비야 그야 말로 죽은 목숨이나 다름이 없었다. 그러니 먹쇠는 앞으로 살아가기가 정황상 힘들게 생겼다. 그러나 자신에게는 노비를 살 재력도 없고 그런 큰 내기를 벌일 만한 재물도 없었다.
그래서 조용하게 먹쇠를 타일렀다.
“너 이 집에서 떠나려다 떠나지 못하면 더 어려운 삶을 살게 돼. 지금부터는 다른 사람 불러서 면포를 이동시키게 할 것이니 그렇게 알아.”
이렇게 좋게 타이르자 먹쇠는 정말 큰일이 났다. 먹쇠는 이미 윤 진사 댁을 떠나고 작심했던 터라 여기 있으면 맞아 죽게 생긴 기분이다.
그렇지 않아도 산에 무서운 호랑이가 출몰하니 자신의 주된 일인 먼 산으로 나무하러가는 것도 힘들게 됐다. 더구나 이제 농사철도 아니라 많이 먹는 자신은 겨울만 되면 구박을 아주 심하게 당하게 된다.
그래서 사력을 다해 사정했다.
“선비님, 소인이 판돈을 구해오면 선비님이 소인을 사 주시겠어요?”
황당한 소리를 듣자 너무 어이가 없었다. 노비 주제에 재물이 있을 턱이 없으니 약간 언성을 높여 나무랬다.
“뭐라? 네가 무슨 돈이 있어 판돈을 가져와?”
“선비님, 아까 칠복이 형제를 산 백삼수라는 분은 그렇게 보여도 재물이 아주 많아요. 귀한 물건을 파는 분이라. 그러니 소인이 찾아가서 그분에게 재물을 빌려 달라고 부탁하면 어쩜 빌려줄지 몰라요.”
“뭐라? 그게 사실인가?”
“예, 소인을 한번만 믿어 주세요. 선비님께서 소인을 사주시면 평생 은혜를 잊지 않겠나이다.”
노비 녀석이 이런 기발한 수단을 생각해 내다니 보기보다는 그리 멍청하지 않았다. 물론 자신의 안위문제가 걸렸으니 별 궁리를 다하다가 보니 고안해낸 생각이겠지만 바보는 분명 아니었다.
사랑방에는 새로운 먹잇감인 예천의 진사들이 찾아왔다. 판을 더 키우고 그렇게 해서 적당한 기회에 판을 깨려면 다른 방법을 찾아야 한다.
‘어떤 식이 제일 무난하지?’
잠시 골몰히 생각하다가 노비를 비싸게 사던 백삼수라는 평민을 내기바둑판으로 끌어들이기로 했다. 그렇게 되면 내기바둑판은 누가 딴 상황인지 잘 모르는 판으로 변한다.
“알았어, 네가 알아서 백삼수를 바둑판으로 불러오고 직접 바둑을 두던가? 아니면 내 물주가 되라고 해. 그리고 그 사람 하나로는 곤란하니 바둑을 둘 줄 아는 양반인 과객이 있으면 같이 불러오도록 하고.”
“알겠사옵니다. 소인 즉시 그렇게 하겠사옵니다.”
먹쇠는 최인범이 결국 자신을 사주겠다며 내기바둑 판을 키우기로 결심하자 신이 났다. 좋은 주인을 만나서 팔자 좋아질 희망으로 번개같이 솟을대문 밖으로 튀어나갔다.
후다다닥.
먹쇠가 정신없이 밖으로 뛰어나가는 것을 보며 여전히 생각에 잠겼다. 혼란한 바둑판으로 만들려면 1대1 대결로는 힘들다고 판단했다.
적당한 기회에 4명이 2명씩 조를 짜서 두는 복식바둑이 좋았다. 그러나 그건 내기바둑에서 진행되기가 어렵다는 생각이 들었다. 홀라당 껍질을 벗기듯이 털어 버리기로 작정했으니 치밀하게 계획을 세워야한다.
‘어떻게 요리하고 판을 뒤탈이 전혀 없이 깔끔하게 마무리 하지?’
바둑은 양반들이나 기생들 사이에도 유행하는 놀이다. 일반 백성들은 보통 바둑 보다는 장기를 많이 둔다.
조선시대에 군왕도 바둑을 신하들과 즐긴 경우가 많았다. 바둑에 깊이 빠지면 그건 도박 증세와 비슷할 정도로 강한 중독성이 있었다. 특히 내기바둑은 그 정도가 아주 심했다. 그런 점을 잘 아니 그 점을 집중적으로 노릴 계획이다.
한편 손님이 전혀 없어 아주 한산해 보이는 죽죽이 주막의 안채 골방으로 칠복이 형제가 들어왔다. 칠복이 형제를 데리고 온 백삼수는 최인범에게 인사를 시켰다.
“인사 올려라. 너희들의 진짜 주인이신 꼭두 형님이시다.”
칠복이 형제는 두려워서 그런지 아무 말 없이 앉아 있는 최인범에게 넙죽 절을 올렸다. 인사를 받고 어린 노비를 사왔다는 사실에 다소 황당한 표정으로 물었다.
“삼수, 어린 애들을 뭐에 써먹으려고?”
“꼭두 형님, 이 애들은 그저 심부름 시킬 애들이옵니다.”
날씨가 쌀쌀해져서 그런지 꺼칠해 보이는 아이들의 모습에 지시했다.
“옷이라도 사서 입혀! 추워서 얼어 죽겠다.”
“꼭두 형님, 그건 걱정 안 해도 되옵니다. 윤 진사 댁 사랑방에 계신 최인범라는 진사 어르신께서 이 애들이 너무 추워 보인다고 면포 10필을 공짜로 주셨사옵니다.”
“뭐? 최인범?”
최인범라는 대답에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바둑 두는 소리를 듣고 조금은 가능성이 있다고 기대했다. 설사 그렇더라도 실제로 그라는 사실에 놀랄 수밖에 없었다. 더구나 양반인 진사라니 너무도 황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