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화
그래서 마당에서 두 소년을 배웅하고 있는 먹쇠를 급하게 불렀다.
“먹쇠야!”
“예이! 선비님!”
면포 1필을 날로 먹은 일 때문인지 먹쇠는 그 후로 틈만 나면 사랑방 주변에서 어슬렁거렸다. 이유는 너무 고맙기도 하고 행여나 좋은 일이 또 생길까 하는 은근한 기대감 때문이다.
“먹쇠야, 여기에 있는 면포 10필만 가져다 저기 팔려가는 형제들에게 넘겨줘라. 조금 있으면 겨울이 되어 무척 추울 것 같아 보이니 누비옷과 겉옷을 해 입고 다니도록 해.”
“10필이나요?”
“그래, 빨리 가져 다 줘!”
“예이!”
먹쇠는 같은 노비라는 처지라 자신을 무척 따르던 칠복이 형제가 느닷없이 떠나게 되어 너무 섭섭했다. 그러던 차에 이런 좋은 일이 생기자 먹쇠는 자신에게 좋은 일 생긴 것 같이 기뻤다.
“히이잇!”
그저 입이 귀에 걸리도록 크게 벌어지며 웃음이 절로 나오고 신이 났다.
먹쇠는 신이 나서 벙글거리며 급하게 사랑방으로 들어와 면포 10필을 잽싸게 들고 밖으로 내달렸다.
사랑방으로 들어온 윤 진사는 또 다시 면포 10필이 사라지는 것을 보자 또다시 속이 쓰릴 수밖에 없었다. 자신의 재물을 가지고 펑펑 선심을 쓰니 속에서 천불이 났다.
‘저 녀석이 돌았나? 왜 면포는 10필이나 상관도 없는 노비에게 거저주고 저래.’
어제 두게 된 내기바둑은 처음에는 그냥 면포 1필로 시작했다. 치수 고치기로 시작됐다.
최인범이 자신이 조금 고수 같다는 말에 열이 나서 치수 고치기로 내기바둑을 두기 시작했었다.
처음에는 자신이 연장자라고 주장해 백을 잡고 가볍게 두었다. 치수 변동 규칙은 내리 3판을 이기면 한 점씩 내려가는 방식이다. 작은 내기라고 보는 치수 고치기에서 윤 진사는 내리 12판을 지게 되어 단숨에 4점을 깔게 됐다.
그러자 윤 진사는 어린 녀석에게 지고 있으니 속에서 열불이 났다.
‘그래, 너는 바둑으로 날 이기고 나는 재물로 너를 이겨주지.’
그래서 면포 12필을 잃은 상태서 4점 접바둑으로 이기고 지기를 반복했다. 그러나 면포는 여전히 50필 정도가 항상 최인범 차지로 남아 있었다.
그래서 다시 한 판당 면포 2필로 올리자고 스스로 말했다.
“한판에 면포 2필로 하세.”
“그러죠.”
그러나 대국을 시작해 내리 10판을 두어 이기고 지기를 반복했으나 면포 10필이 최인범에게 더 넘어갔다.
자신이 이길 때는 엄청난 차이로 이기고 상대방이 이기면 겨우 몇 집 차이로 이겼다. 그러자 윤 진사는 나름 꾀를 내서 집수내기를 하자고 강하게 주장했다. 한 집 차이에 면포 1필로 계산하자는 것이다. 그러자 면포는 항상 10필에서 15필이 서로 오가도록 승부가 났다. 그리고 밤늦은 시간이 되자 결국 이래저래 사랑방에 가져다 놓은 면포는 모조리 최인범이 차지했다.
윤 진사의 면포를 야금야금 빼먹기 위해 지고 이기기를 반복했었다. 너무 급수 차이가 나는 상수라 하수를 이런 식으로 얼마든지 가지고 놀 수 있었다.
막상 이렇게 되자 윤 진사는 아무리 생각해도 4점으로는 불리해 보였다.
치수를 놓고 옥신각신하다가 결국 5점 접바둑을 두기로 자기 전에 결정했다. 다음 날도 계속 내기바둑을 두자고 주장했다.
아직은 이른 아침이라 내기바둑을 한판도 두지 않았다. 하지만 이제부터 작심해서 잃은 면포를 회수해볼 요량이다. 그런 상황에서 자신의 면포 10필이 눈앞에서 사라졌다. 그것도 하잘 것 없는 팔려가는 노비에게 그냥 줘버리자 열불이 안날 수 없었다.
윤 진사는 자신의 면포가 사라지자 너무 아까웠다.
‘조상이 청백리라더니 귀한 면포를 마구 남에게 주네.’
윤 진사는 최 진사가 또 어떤 핑계로 면포를 밖으로 내보낼지 모른다는 다급함이 생겼다. 그래서 조심스럽게 새롭게 제안했다.
“최 진사! 우리 계속 바둑만 둘 수는 없으니 한 집 당 면포 2필로 하지.”
“진사 어르신. 그건 너무 판이 커서 곤란합니다.”
최인범의 말에 윤 진사는 허세를 부렸다.
“크다니 무슨 소리인가? 그런 정도가 판이 크다니.”
“어르신이야 재물이 많아 별것 아니죠. 하지만 저야 자칫 아까처럼 진사 어르신께 만방으로 지면 한판으로 끝날 수 있어요.”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나?”
“어르신께 제가 만방으로 지면 저기 면포를 다 주고 모자라 채무자가 될 염려도 있으니 그것은 판이 너무 커서 곤란합니다.”
만방이란 90집 이상 차이나면 모두 그렇게 칭한다. 최악의 경우 한 판에 200필의 면포를 잃을 수도 있다는 의미다.
두 사람의 내기바둑에서 이런 정도라도 유지한 것은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바로 윤 진사가 이길 때는 집수 차이가 많이 나게 이겨서 그렇다. ‘된다. 안 된다.’하고 말씨름 하다가 드디어 합의점에 도달했다.
“최 진사, 그럼 어떤 결말이 나도 남은 면포까지만 넘기는 정도로 셈을 끝내는 것은 어떻소. 내가 면포를 70필을 가져와 둘 것이니 그렇게 합시다.”
“좋습니다. 저도 그렇다면 부담이 없으니 두도록 하죠.”
두 사람의 합의가 끝나고 나서 바둑을 두려다가 말고 최인범이 슬며시 제안했다.
“진사 어르신, 어차피 서로 수담(手談)으로 두는 바둑이니 옆에서 대국을 구경하는 사람들이 있으면 더 좋지 않나요?”
“구경꾼이라면?”
“어제 진사 어르신께서 예천군에서 사시는 박 진사께서 여기로 오신다고 하지 않았나요? 더구나 그분이 바둑도 잘 두신다고 하니 같이 두는 것도 좋고요.”
마음이 너무 급한 윤 진사는 그때까지 기다릴 여유가 없었다. 그래서 고개를 가로 저었다.
“그야 그렇지만 그 사람들이 언제 도착할지 모르니 우선 우리끼리 둡시다.”
“그러죠.”
최인범이 내기바둑을 더 이상 하려는 생각이 없다는 듯이 태도를 취했다. 마음이 더 급해진 윤 진사는 황급하게 바둑판을 끌어다 놓고 착점했다. 그러자 바둑 두기가 싫다는 듯이 뭉그적거리며 천천히 바둑판 앞에 앉았다. 그리고 성의가 없는 것인지 대책이 없는 것인지 다소 애매모호한 태도로 바둑을 두었다.
아니다 다를까 수세에 몰린 최인범의 바둑돌들이 죽음으로 몰렸다. 그리고 이리저리 쫓기다 결국 대마가 모조리 죽어 버렸다.
바둑이 끝나고 계가를 해보니 무려 30집이란 차이가 났다. 단 한번에 30집 즉 면포 60필을 찾은 윤 진사는 신이 났다. 한판만 더 잘 두면 면포를 완전히 회수하게 된다.
“허! 허! 자네가 실수를 다 하고.”
“제가 실수한 것이 아니라 너무 잘 두신 거죠.”
최인범에게 위기가 닥친 것이다. 물론 의도된 위기지만 이제 실수라도 하면 끝장이 난다.
바둑알을 정리하며 최인범이 억울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엄살을 부렸다.
“에이, 진사어르신 너무 하시네요. 그렇게 많이 이기시다니.”
“규칙은 규칙이니까 섭섭해도 할 수 없지.”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요.”
어제 수많은 내기바둑을 두었다. 하지만 이번의 승부로 완전히 만회해 버렸다는 승리감으로 윤 진사는 너무 기분이 좋았다. 신이 나서 입을 크게 벌리고 벙글거렸다.
그런 모습을 바라보며 곤욕스러운 표정을 지으려니 너무 어려웠다. 속으로야 윤 진사를 가지고 노는 재미가 쏠쏠하고 내기바둑의 판돈이 불어나니 좋았다.
‘어휴! 배우는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야. 웃음 터져 나오는 것이 제일 참기가 힘들군.’
이때 행랑아범이 사랑방 앞으로 다가와 크게 외쳤다.
“진사 어르신, 예천에서 박 진사와 권 진사 어르신들께서 찾아 왔사옵니다.”
“오! 그래, 어서 모셔.”
예천의 박 진사 역시 진짜 진사는 아니고 조상이 진사출신으로 거부다. 그는 자신보다 조금 나은 향시인 초시합격자지만 진사라고 호칭했다. 그는 자신보다 고수로 3점을 깔아야 대적이 가능했다.
박 진사는 가끔 이곳으로 찾아와 바둑을 두었다. 내기바둑은 너무 차이가 나는 고수라고 판단해 잘 두지는 않았다.
권 진사는 자신과 바둑실력이 흑백을 교대로 쥐고 둘 정도로 비슷한 호적수다.
아주 작은 내기는 여러 차례 두던 사이다. 자신과 아주 친한 그들이 오게 되면 아무래도 눈짓이나 신호로 자신에게 훈수를 두지 않을까 판단했다.
지금 막 한판에 그동안의 패배를 어느 정도 만회한 상황이라 자랑하고 싶었다.
이윽고 키가 작고 약게 생긴 박 진사와 다소 뚱뚱한 체구인 권 진사가 사랑방으로 들어왔다. 서로 통성명을 하고 바둑판을 중심으로 둘러앉았다.
드디어 5점 접바둑을 두게 되고 몇 점을 착점하던 최인범이 옆에 쌓인 면포를 보며 제안했다.
“먹쇠를 불러서 면포를 저쪽으로 나르죠. 계산은 계산이니.”
“그렇게 하고 싶다면 하지.”
그러자 최인범이 큰 소리로 밖에 소리쳤다.
“먹쇠야! 들어와 면포 옮겨라.”
“에이!”
사랑방 구석에 면포가 산처럼 쌓여 있었다.
다소 이상하게 생각한 두 진사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윤 진사를 바라봤다. 그러자 윤 진사는 신이 나서 어제의 일은 말하지 않고 오늘 방금 끝난 승부만 이야기 했다. 서로 면포 70필씩 놓고 한 집 차이에 면포 2필씩을 계산해 방금 60필을 따게 되었다고 설명을 겸해 자랑했다.
윤 진사의 이런 말에 두 진사는 슬쩍 눈빛을 교환하며 탐욕스럽게 변했다.
바둑이 계속 진행되고 드디어 끝나게 됐다.
집수를 계산하니 최인범이 겨우 5집을 이겼다. 그래서 면포 10필이 이동되고 그제야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면서 너무 힘들게 이겼다는 듯이 엄살을 부렸다.
“진사 어르신, 5점 접바둑으로는 도저히 힘들어서 더는 못 두겠네요.”
“무슨 소리인가? 더구나 이기고 나서 엄살은.”
다시 내기바둑을 새로 두게 됐다.
대국이 진행되자 최인범이 이길 때는 어렵게 몇 집 차이로 이겼다. 윤 진사가 이길 때는 십 여집 차이로 이겼다. 그렇게 되자 자연히 판은 길어졌다.
그러다가 윤 진사가 무리수를 두다가 결정적인 실수로 바둑의 승부는 빨리 끝나버리고 말았다. 윤 진사의 30개나 되는 돌인 대마가 모조리 죽어버린 것이다.
“진사 어르신, 대마가 모조리 죽어 버렸네요.”
“어구야. 내가 눈이 멀었나? 이런 큰 실수를 다하고.”
후회는 아무리 빨라도 소용없었다. 하지만 어떤 내기든 잃은 사람은 모두 아주 사소한 실수로 재물을 잃게 되었다고 아쉬워하는 법이다.
윤 진사역시 전혀 다르지 않았다.
‘어휴! 그때 한수만 그쪽으로 두었으면 되는데.’
판돈이라고 보는 면포가 모두 140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