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화
최인범은 잠시 눈알을 굴리며 생각하다가 꼭두라는 칭호가 어디서 사용하는 말인지 기억하고 조용히 물었다.
“너 혹시 전에 광대패를 따라 다녔냐?”
“예, 어려서 한동안 따라다녔어요.”
광대패는 크게 남사당패, 사당패, 걸립패로 구분되나 그것은 조선 후기의 일이다.
중기인 지금은 보통 광대패라고 불리고 크게 구분하지 않았다.
구성원의 주축이 남자인 남사당패는 대부분 우두머리를 꼭두쇠라고 부른다. 꼭두란 여러 가지 의미로도 쓰인다. 특히 경상도에서는 산봉우리 즉 우두머리라는 뜻으로 사용됐다.
남자들이 주축인 사당패를 따라 다녔다면 여자처럼 곱상하게 생긴 백삼수의 신변에 무슨 사단이 있었는지 가히 짐작이 갔다.
속으로 ‘그동안 고생이 심했겠어. 남모를 깊은 사연이 있어 이렇게 변했군.’하며 불쌍하다는 생각이 더욱 강해졌다.
허약한 백삼수는 어차피 무력이 강한 최인범에게 몸을 의탁하기로 결심했다.
그래서 나름 깊이 생각해 결정한 꼭두라는 호칭이다. 그가 내린 결론은 최인범을 정점으로 큰 무리를 이루는 상단을 만들어 볼 크나큰 야심이 있었다.
보아하니 최인범은 재물에 그리 욕심을 부리는 성품은 아닌 것 같았다. 그러니 최인범을 우두머리로 해서 자신이 ‘무리의 재정을 담당하면 아주 잘 유지되고 성장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그 외에는 자신의 비정상적인 성적 문제와도 많이 고려된 결심이다.
또한 가장 중요한 것은 어쩌면 최인범도 성적으로 조금은 자신과 동질성이 있는 것 같았다. 그렇게 생각한 이유는 그가 여자용 속옷인 고쟁이를 입고 있기 때문이다.
백삼수는 최인범의 아랫도리를 떠올려 보며 속으로 웃었다.
‘풋! 저런 외향에 여자 속옷이라니 아주 취미가 독특해.’
어젯밤 자면서 무심결에 더듬다가 최인범의 하초를 만지게 되어 알았다. 더구나 덩치에 비해 손으로 잡아본 하초가 다소 부실해 보이니 그렇게 판단했다.
백삼수는 무력이 매우 뛰어난 최인범이 괴이한 현상으로 이곳 조선시대에 벌거벗고 떨어지고 아주 어려진 것을 전혀 알 리가 없었다. 또한 살아남기 위해 우여곡절을 겪으며 여자의 속옷인 고쟁이를 챙겨 입고 있다는 것을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다.
두 사람 모두 자신이 살아온 인생경험이나 습득하고 있는 짧은 지식으로 남을 판단했다. 그래서 비슷하지만 매우 다른 결론을 내렸다.
‘나에게 제일 좋은 상대를 만나거야.’
보호 받아야 할 필요성과 성적 징후의 남과는 다른 이질성에 의해 백삼수는 이미 결심을 섰기에 망설이지 않았다. 결심을 뒤로 미루면 안 된다는 판단으로 바로 실행에 옮겼다.
백삼수는 개인적인 무력은 강하지 못했다. 하지만 조직 운영이나 장사에 대해서는 너무 잘 안다. 처음부터 위계질서를 바로 하자는 생각으로 최인범에게 물을 떠다주고 있는 것이다.
“꼭두 형님, 어서 일어나서 세수하세요.”
“알았어!”
완전히 잠에서 깨어난 최인범은 지금 벌이는 백삼수의 돌발적인 행동이 전혀 이상하지 않았다. 그는 졸병이 세숫물을 떠다 주는 것이 그리 낯설지 않았다.
상급기관에서 알면 질책을 받는 행위지만 하부의 군 조직에서야 가끔 있었던 일이다.
어제부터 백삼수의 눈치가 조금 이상했었다. 어떻게 해서라도 자신과 친해보려고 했다. 결국 이것이었다는 생각이 들자 빠르게 지금 상황을 받아들였다.
‘어차피 졸병을 하겠다고 자청하니 일단 받아 주자고.’
이렇게 마음먹고 나서 방안에서 세면을 했다. 이만한 정성이라면 잘 둔 부하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때 백삼수가 흘려가는 말처럼 중얼거렸다.
“주모의 말에 죽령에서 애꾸 패거리들이 상인들을 죽였다고 하네요. 그것도 2명씩이나.”
“뭐? 그 허접한 산적이 사람을 죽여?”
“예, 앞으로 너무 험악해서 함부로 장사하러 다니기 어려워졌어요.”
“그건 그렇겠어.”
잠시 시간이 흐른 뒤 주모가 가져온 아침상을 받아먹었다.
아침상에는 삶은 닭과 돼지고기 그리고 쇠고기 육회까지 올라왔다. 무척이나 먹고 싶었던 육회를 보자 최인범은 눈빛을 반짝였다.
“귀한 육회도 있군. 너무 과하지 않나?”
“옆 마을의 양반 댁에서 마침 혼인과 회갑 잔치가 있어 소를 잡았다고 해 주모에게 특별히 부탁했사옵니다.”
푸짐한 아침상을 받고 나자 배도 빵빵해지니 마음까지 여유로워졌다.
비록 생선이 없으니 산해진미라고 볼 수는 없었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대접만 받는다면 호강이야 차고 넘쳤다.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분명 정신세계는 어떨지 모른다.
하지만 지금 현재 몸으로 보아 백삼수는 자신보다 나이가 훨씬 많은 사람이다. 그래서 백삼수의 진짜 의도를 정확하게 알아낼 요량으로 물었다.
“삼수! 앞으로 네가 부릴 졸병을 따로 만들 생각이냐?”
최인범의 물음에 당연하다는 표정으로 이내 답했다.
“꼭두 형님, 그래야죠. 앞으로 뭐를 하던 반드시 제 졸병은 10명 이상은 둬야죠.”
“10명을 부하로?”
“그렇사옵니다. 요즈음 산적들도 많아지고 호환도 많으니 기회에 부하들을 아주 많이 모아 볼 생각이옵니다. 그래서 남들이 잘 안가는 다소 험악한 지방으로 장사를 다니면 벌이가 더 좋을 수 있어요.”
“알았어!”
백삼수의 계획은 결국 위험하다고 해서 다른 상인들이 꺼리는 곳을 집중해서 다니자는 것이다. 그것이 오히려 큰 돈벌이가 된다는 발상을 했다.
눈빛을 초롱초롱하게 빛내며 말하는 것으로 보아 진심이라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진짜 내면 깊이 들어 있는 진심이야 어떤지 모르나 표면적으로 심복부하가 생겼다.
우두머리인 두목으로 전생의 경험을 살려 빠르게 뭔가를 결정해야 된다고 판단했다. 그러나 모든 것은 순서가 있다고 생각해 즉시 지시했다.
“삼수! 너는 앞으로 모든 재물에 대해 책임져. 물론 네가 가진 재물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가진 재물이나 앞으로 버는 재물만 별도로 관리하면 된다.”
“넷! 그렇게 하겠사옵니다. 꼭두 형님.”
당분간은 큰 돈벌이가 될 리는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백삼수와 같이 잘만하면 가능성은 있다고 판단됐다. 일단 머리 아픈 재정이나 여비 정산 문제를 백삼수에게 완전히 떠넘겼다. 그래야 자신은 백삼수 뒤에서 사회의 돌아가는 모습을 살펴서 쉽게 적응하게 된다.
사람이 살다보면 아주 좋은 기회가 생길 경우가 있다.
자신에게 백삼수라는 인물이 다가온 것은 분명 기회라고 판단됐다. 녀석이 뒷구멍으로 딴 생각을 해서 의도적으로 접근했다면 언제든지 처치할 수 있다.
‘믿기는 해보지만 조심해야 해. 이런 놈이 배신하면 큰일이지.’
자신의 위치를 생각해 함부로 남을 믿기가 정말 어렵다.
다만 지금 말한 그대로 자신의 무력이 너무 약하니 장사하는데 뒤를 봐달라는 정도면 충분히 같이 다닐 사람으로 판단했다. 여차하면 탈탈 털고 헤어지면 그만이다.
이제 우두머리인 두목이 되었으니 새로운 명령을 내려야 한다.
일단 믿고 당분간은 같이 다닐 요량이라 즉시 지시했다.
“삼수! 뭐하냐? 면포 가지고 가서 팔고 새로운 물건으로 바꾸어 와.”
“예. 꼭두 형님, 형님은 여기서 푹 쉬세요. 제가 팔 것이 많고 준비해야 할 것이 너무 많아요. 옆의 윤 진사 댁으로 가서 흥정해야 하니 조금 오래 걸릴 겁니다. 심심하시면 천천히 마을 구경을 하시고요.”
“알았어.”
고난 끝에 낙이라더니 고생을 며칠 하고 나니 설설 기는 졸병이 생겨 일단 기분이 너무 좋았다.
‘됐어, 저 놈을 잘 이용해 보자고.’
백삼수는 지시를 받자 면포를 챙겨서 서둘러 골방에서 나갔다.
방안에서 앉아 있으려니 무료하기만 했다.
멀뚱거리고 벽만 바라보다가 혹시 백삼수가 엉뚱한 짓을 하는지 궁금했다. 벽에 기대 놓은 몽둥이 두 개를 들고 슬며시 뒷마당으로 나왔다.
뒷마당으로 나와 계단식인 장독대의 제일 높은 곳에 올라섰다. 이곳을 통하면 윤 진사 댁의 안마당이 일부가 훤하게 보였다.
높은 담장 너머로 윤 진사 댁을 조심스럽게 살폈다.
‘저기 있군.’
백삼수가 행랑채 앞에서 누군가와 진지한 표정으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하는 행동으로 보아 뭔가 흥정을 하는데 중년인 사내가 고개를 흔들면서 거절하는 의사를 표했다.
중년사내에게 백삼수는 계속해서 작은 물건을 드밀며 설득했다. 힘든 흥정을 하는 것인지 중년사내는 난감한 표정이고 백삼수는 집요할 정도로 사정했다.
이윽고 설득이 되었는지 중년사내가 사랑방 앞으로 가서 큰 소리로 외쳤다.
“진사 어르신, 백삼수가 노비를 산다니 어찌 하죠.”
그러자 사랑채에서 노인이 나왔다.
아마도 노비를 사러 왔다니 관심이 있어 윤 진사가 직접 밖으로 나오는 것 같았다.
윤 진사와 백삼수가 대화를 나누지만 목소리가 작아서 잘 들리지 않았다.
조선시대의 노예제도인 노비는 공노비와 사노비로 나뉜다. 그래서 평민들도 얼마든지 사노비를 구입할 수 있었다. 사고파는 노예에 해당되니 대략 시세는 있었다.
사내노비의 경우 성인으로 기준해 대략 말 1필에 해당된다. 하지만 노비 시세란 지방이나 시대 상황 그리고 계절에 따라 너무 달라 지금으로는 정확한 시세를 알 길이 없었다.
최소한 면포 200필은 줘야 노비(奴婢)를 사게 된다는 것을 떠올리고 깜짝 놀랐다. 생각보다 백삼수의 재력이 만만치 않았다.
‘저 녀석 보기보다 제법 부자야.’
조금 전에 아래골방에서 졸병을 10명은 둔다고 했다. 그러니 어쩌면 노비 10명을 살 충분한 재력이 있는지도 모른다. 이렇게 판단하고 장독대 위에서 슬며시 내려왔다.
더 이상 거래 광경을 보고 싶지 않았다.
이유는 부하로 삼은 지 얼마 되지 않아 의심부터 한다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또한 그만한 재력을 가진 놈이 면포 몇 필을 가지고 도망치지는 않는 다고 판단한 것이다.
‘부자가 부하면 좋은 거야? 아니면 나쁜 거야?’
부하를 무조건 믿는 것도 위험하다. 하지만 공연히 의심하면 그것이 오히려 배신의 불씨가 된다. 그러니 자신이 몰래 거래 장면을 살피는 것을 백삼수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윤 진사 댁의 넓은 안마당에 서있는 커다란 감나무의 끝에 있는 나뭇가지에 까치가 앉아 ‘까악! 까악!’ 하며 울고 있었다.
‘까치가 울면 좋은 일이 생긴 다는데.’
실없는 생각을 해보며 뒷마당에서 어슬렁거리다 보니 너무 심심했다. 지루함을 면하려고 방안에서 가지고 나온 몽둥이 하나를 들고 검법을 수련했다.
“탓! 타닷! 탓!”
호흡을 토해내며 몽둥이를 두 손으로 잡고 가볍게 검법을 수련했다.
어제야 워낙 급해서 허접한 막무가내의 쌍검술을 펼쳤지만 그가 전생에 익힌 검술은 양손을 사용했었다. 참나무로 만든 몽둥이의 무게는 전에 사용해 보던 진검과 아주 비슷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