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화
지금 내기바둑을 둔다는 선비가 누구든 자신과 아무 상관없다고 판단해 이내 떨쳐버렸다. 그가 자신에 비해 너무 잘 적응하고 있다고 생각하니 애써 지워버렸다. 미묘한 자존심이 생겨 그를 만나 도움을 청하거나 같이 협조해서 살 생각이 사라져 버렸다.
‘에고, 잠이나 자야지.’
먹던 보리밥을 마저 먹고 나자 그대로 누워 버렸다. 자신의 처지는 상황이 아주 묘해서 언제 어떻게 변해 이런 따끈따끈한 온돌방에서 지낼지 모른다. 그래서 편하게 쉴 때 푹 쉬고 정신이나 체력 상태를 최대한 좋게 해두는 것이 최선이라고 판단했다. 그래서 항상 위기에 대처할 준비는 했다.
‘언제 도망자 신세가 될지 몰라.’
최인범이 벌러덩 누워버리자 점순이도 밥상을 들고 밖으로 나가며 백삼수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삼수, 새로 술상 봐올까?”
“아니! 호리병에 소주나 가득 채워 놔.”
“알았어.”
점순이가 밖으로 나가자 백삼수는 뜬금없이 괴나리봇짐에 끼여 있는 장검을 보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자네, 저 장검을 가지고 다니려고 하나?”
“아니, 험한 세상이라 항상 가지고 다니고 싶지만 관원이나 다른 사람들이 보면 이상하게 생각하니 나중에 적당한 곳에서 팔아야지.”
두 사람은 이제 서로 자연스럽게 말을 트고 있었다. 그러자 백삼수는 잠시 생각하더니 제안했다.
“그럼, 잘 위장만 하면 가지고 다닐 생각인가?”
“위장?”
“내게 좋은 생각이 있으니 나에게 맡길 건가?”
“알았어, 자네가 알아서 해봐.”
어차피 여기까지 동행한 처지라 믿어 보기로 했다. 또한 장검이야 그저 공짜로 생긴 것이니 어찌 되어도 별로 관심이 없었다. 적당한 가격을 받고 팔아 치우던 상관이야 없었다. 자신이 직접 만든 몽둥이 두 개가 더 애착이 갔다.
최인범이 장검을 어찌 처리해도 좋다고 말하자 백삼수는 슬며시 괴나리봇짐에서 장검을 빼어들고 밖으로 나갔다. 그러면서 조용히 말했다.
“나 어디 좀 다녀오지.”
“알았어.”
“볼일이 많아 늦을 거니까 먼저 자.”
백삼수가 나가고 나자 갑자기 들고 간 칼로 ‘살인이나 하러 가지 않나?’ 하는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그리 되면 자칫 자신이 살인범으로 몰려 쫓길 수 있었다. 산적에게 빼앗은 장검을 자신이 내내 지니고 있었다.
‘그런 짓을 저지를 정도로 간덩이가 큰 놈은 아니야.’
자신이 처한 상황이 아주 미묘하다 보니 수시로 별 잡스런 생각들이 머릿속을 어지럽히고 있었다. 호패를 남의 것으로 가지고 다니니 관원에게 들킬까 항상 불안했다. 뭐하나 안심하고 행동하기 어려웠다. 어떤 식으로라도 정상적으로 호패를 만들어야 되겠다는 결심이 생겼다.
‘양자로 입적하면 되려나?’
아까 백삼수가 성이 다르다고 해서 ‘아비가 둘이냐?’고 할 때 떠오른 생각이 다시 반복해 뇌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그러나 연고가 전혀 없으니 누구에게 양자로 입적한다는 것이 쉬워 보이지 않았다.
주막 옆에 있는 기와집 쪽에서는 여전히 바둑 두는 소리가 간간히 들렸다. 누군가 무척 화가 난 상태에서 힘차게 바둑판 위에 바둑알을 찍듯이 내려놓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누가 계속해서 지는 것 같군.’
딱! 딱! 딱!
자리에 누워 자신의 귀에 들려오는 힘차게 바둑 두는 소리를 들었다.
이윽고 바둑알이 내는 소리를 자장가 삼아 점점 깊은 잠속으로 빠져들었다.
아직은 이른 초저녁인데 일찍 잠을 자는 것이다. 조용한 늦가을의 깊은 밤에 어둠을 뚫고 ‘탁! 탁! 탁!’ 하는 바둑알을 내리치는 소리가 간간히 퍼졌다. 그 소리는 아주 깊어진 밤까지 지속됐다.
주막에서 자고 있는 최인범은 나름 독하게 마음먹고 적응했다. 졸지에 진사가 되어버린 최인범 역시 독한 마음으로 인정사정없이 일을 크게 벌이 있었다.
죽령 남쪽 산자락에 있는 창락골의 늦은 가을밤은 점점 깊어만 갔다.
주막에서 일찍 잠이든 최인범은 밤이 깊어 부스스 잠에서 깨어났다. 보리밥을 많이 먹고 나서 바로 잠들어 그런지 갈증이 나서 깬 것이다.
몸이 둔해지면 그만큼 거동이 불편하다. 그래서 은근히 걱정되었다.
‘끙! 밥 먹고 바로 잠자면 살찌는데.’
앞으로 식사량을 잘 조절해야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조선시대 사람들의 식사량은 아주 많았다. 그래서 왜인들이나 또는 중국인 그리고 멀리 유구 사람들까지 조선 사람들이 밥을 너무 많이 먹어 못사는 나라라고 평할 정도다. 그리고 중국은 돼지고기를 즐겨 먹고 있지만 조선 사람들의 경우 돼지고기 보다는 쇠고기를 좋아하고 특히 육회를 제일로 여겼다.
이런 차이로 중국 사람들은 조선 사람의 육회 먹는 습성을 이상하게 생각했다.
야설이지만 공자가 육회를 아주 좋아한 기록이 남아 있다. 그래서 공자가 한민족(동이족)이라는 연구 자료도 있었다. 아무튼 조선 사람들은 밥을 많이 먹는 대신 주변국에 비해 힘이나 지구력이 좋았다.
일단 먹고 사는 문제가 시급해‘앞으로 뭐해서 먹고 사나?’하고 생각하다가 갑자기 육회가 떠오르자 먹고 싶었다. 농업을 중시하는 조선에서는 소의 도축을 엄격하게 통제했다. 그러나 소고기를 좋아하는 특성 때문에 그것은 잘 지켜지지 않았다.
잠시 이런 생각을 하며 어두운 방안을 조심스럽게 살폈다.
달빛이 창호지를 뚫고 들어와 방문 옆에 놓인 작은 호리병을 환하게 비추었다. 전날 호리병에 들어있는 독한 소주를 물로 알고 먹었었다. 그래서 슬며시 호리병을 들어 냄새를 맡아 봤다.
“물인데? 조금 이상하네.”
항상 몸조심을 해야 하니 ‘혹시 이상한 마취약이 타진 것인가?’ 하고 조심스럽게 입에 물을 물었다. 그러자 입에서는 아주 달콤한 맛이 느껴졌다.
다소 약하지만 벌꿀을 탄 꿀물이었다.
“오호!”
주막의 숙박 손님 접대 방식이 제법 고급이다.
뜨거운 온돌방에서 자고 나니 몸이 아주 개운했다. 조금은 뼈마디가 욱신거리던 것이 시원하게 풀리고 금방이라도 날아갈 것 같이 몸 상태는 최고조에 달했다.
목이 타서 일어난 처지라 허리가 홀쭉한 호리병에 들어 있는 꿀물을 단숨에 모두 마셨다.
‘시원하군.’
달콤한 꿀물이 들어가자 속까지 완전히 최상의 상태라는 기분이 느껴졌다.
여전히 밖이 어두워 시각을 잘 모른다.
방안을 두리번거리며 살펴 등잔을 찾았다. 막상 등잔을 찾았으나 성냥이 없으니 매우 난감했다.
두리번거리다가 방안 구석에 있는 작은 화로를 봤다. 그 안의 불씨에 지푸라기를 넣어 호호 불어 불을 붙여 등잔불을 켰다.
팟!
작은 등잔이 켜지자 방안은 환하게 밝아졌다. 그와 동시에 방안에 있다고 생각한 백삼수가 보이지 않자 본능적으로 괴나리봇짐을 살폈다.
뒤적뒤적
아무이상 없이 면포도 있고 방의 구석에 세워놓은 몽둥이 2개와 백삼수의 봇짐도 그대로다.
‘어라! 이 자식이 어딜 간 거야? 혹시 뒷간을 갔나?’
이런 생각이 떠오르자 자신이 너무 오래 용변을 보지 않았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동안 별로 먹은 것도 없고 어제부터야 조금 정상적으로 음식을 입안으로 넣었다. 그래서 아직은 급하지 않은 것 같았다.
하지만 군대 생활을 오래해 시간의 여유가 있을 때 볼일을 봐두는 것이 좋다고 판단했다. 슬며시 밖으로 나와 뒷마당 구석에 있는 헛간으로 향했다.
가마니를 걸쳐 앞을 막은 커다란 헛간으로 들어갔다.
너무 어두운 곳이라 안으로 들어가 눈에 힘을 주었다. 헛간 구석에는 검은 재가 가득했다. 헛간은 소위 잿간과 뒷간으로 사용하는 곳이다.
너무 어두워서 조심스럽게 살피니 큰 항아리를 묻고 그 위에 판자를 올려놓은 형태가 어렴프시 보였다. 조심스럽게 바지춤을 내리고 쪼그리고 앉아 두어 번 힘을 주자 아주 요란한 소리가 들렸다.
푸다닥! 푸다닥!
보리밥을 먹고 산나물 등 거친 음식을 먹어서 그런지 용변은 아주 시원하게 나왔다. 용변을 마치고 나서 짚으로 뒤처리를 대충했다. 시원한 배설 역시 지금 몸 상태가 아주 좋다는 것을 의미했다.
문뜩 맹장수술을 했을 때 생각이 떠올랐다.
‘내 맹장이 있을까?’
몸이 전과 많이 달라졌다는 것을 잘 아니 해보는 생각이다.
최인범은 뒷마당에 서서 바지춤을 추스르며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장검을 가지고 방에서 나간 백삼수가 보이지 않으니 은근히 걱정이다.
순간 괴이한 행동을 보이는 백삼수라 별 잡스러운 생각이 다 들었다.
‘장검 들고 강도짓이라도 하러 갔나? 왜 안보이지?’
이런 생각을 하며 두리번거리다가 기와집 쪽으로 눈길을 돌렸다. 이제 밤이 너무 깊어 그런지 옆집인 윤 진사의 사랑채에서 두던 내기바둑 소리는 전혀 들리지 않았다.
주막의 안채 뒷담은 기와집의 사랑채 옆 담과 거의 붙어 있었다. 두 담장 사이에 아주 좁은 골목길이 나있었다. 북쪽으로 가면 바로 왕대나무 밭이다.
황토흑담 위에는 볏짚으로 만든 이엉을 올려놓았다. 그곳에는 마른 호박넝쿨이 보이고 거두어들이지 않은 늙은 호박이 여러 개가 보였다.
‘여긴 먹을 것이 흔한가?’
먹을 것이 부족한 조선시대에 좋은 먹을거리인 늙은 호박들이 방치됐다. 그런 모습으로 보아 이 마을은 그런 대로 먹고 살기에 풍족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사람들의 하는 말로는 대부분의 농토는 윤 진사의 소유라고 하는데 조금 이상했다.
‘소작으로는 살기가 어려울 것인데 도대체 뭐로 먹고 살지? 너무 이상하군.’
뭔가 확실하지는 않지만 이상하다는 느낌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잠시 이런 생각을 떠올리며 다시 아래골방으로 들어와 자리에 누웠다.
누워서 앞으로의 행보를 나름 이리저리 구상했다. 이미 동행하기 시작한 백삼수와 당분간은 같이 움직이기로 했다. 조금 이상한 놈이지만 그러는 것이 좋다고 판단됐다. 이제 날이 밝아오면 여기서 면포를 팔고 다른 물건을 지니고 떠날 생각이다.
‘뭘 사서 가지고 가지?’
자신은 장사하는 봇짐장수로 위장해 돌아다니는 중이니 뭐든 사서 들고 다녀야 한다. 그러나 아직도 아무런 연고가 없으니 앞날이 그저 막막하기만 했다.
이때 바로 옆 안방에서 가느다란 신음 소리가 들렸다.
“아흐흐윽!”
아주 작지만 여자가 괴로워 미치겠다는 듯이 토해내는 소리가 분명했다. 그 신음소리는 아픔의 소리라기보다 너무 좋아서 내는 감창이라는 것을 이내 알 수 있었다.
귀가 전보다 더 좋아진 최인범이라 더욱 또릿하게 들렸다.
‘쩝! 한판 신나게 벌이는군.’
생긴 것이 매우 요염하더니 주모가 사내와 밤일을 하는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