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화
<어떤 삶이고 치열하다>
“어머나, 삼수가 왔어. 그럼 오늘 너는 내방으로 와서 자야겠다.”
“알았어요.”
점순이는 뒷문을 바라보며 부러운 시선으로 투덜거렸다.
“휴우! 언년은 늙어도 젊은 사내의 단단한 뼈 맛을 자주 보는데 젊디젊은 나는 늙은이의 삶아서 축 늘어져버린 가지 맛도 보기가 힘드니 살맛이 안 나는군.”
그러면서도 뭔가 생각이 나서 그런지 배시시 웃고 있었다. 다소 몽롱한 시선으로 보아 뭔가를 달콤하게 상상하며 혼자서 좋아했다.
부엌에서 뒷문을 통해 골방 앞으로 온 주모는 한손으로 연신 머리를 다듬으며 망설였다. 정인인 백삼수가 오랜 만에 찾아왔지만 일행이 같이 있으니 조금 신경이 써졌다.
‘누구지. 허우대는 멀쩡한데 삼수하고 같이 다니고.’
속으로 이렇게 중얼거리고 문 앞에서 작은 목소리로 불렀다.
“삼수, 나야.”
“들어와.”
주모는 그 소리에 얼른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두 사내가 마주 앉아 술을 마시고 있었다. 자신이 정성들여 만든 삶은 닭은 반쯤 사라져 있었다.
주모는 들고 온 술병을 소반위에 올려놓으며 있던 술병을 살며시 들어봤다. 의외로 술병이 별로 비워지지 않은 느낌에 이상하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삼수가 웬일이야 소주를 안마시고.”
“혼자 마시려니 술 맛이 안 나서.”
백삼수가 이렇게 응수하자 주모는 앞에 앉아 있는 사내의 얼굴을 봤다. 어째 조금 이상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분명 덩치는 어른이고 눈빛도 매우 날카로워 예사 놈은 아니지만 의외로 나이가 어린 것 같았다.
‘이런 놈이 애꾸눈을 처치하다니 이상하네. 애꾸가 벌써 죽을병이 들었나?’
은근히 앞날이 걱정됐다.
주모는 주막으로 몰려온 상인들이 나누는 대화를 통해 청년의 오늘 행보를 알았다. 한양으로 가던 박 초시가 애꾸를 만났으나 앞에 있는 청년에게 당해 도망쳤다.
주모는 죽령의 산적인 애꾸눈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그렇다고 아주 농밀한 남녀 사이는 아니다. 그가 턴 장물을 가끔 처리해 주고 식량을 공급해 주기도 한다. 직거래는 아니고 중간에서 거래하는 나무꾼이 있었다.
주로 먼 산으로 나무하러 다니는 나무꾼은 쌀을 산적에게 가져다주고 장물을 가져와 주모에게 넘겼다. 그러면 그 장물들은 주막에 들리는 상인들에게서 매입한 것으로 위장되어 윤 진사에게 판매됐다.
많은 물건들이 거래되는 윤 진사의 곡간에서 또다시 상인들에 의해 다른 물건들과 같이 거래됐다. 윤 진사는 그런 사실에 전혀 모르는 것인지 알고도 모른 척 하는지는 알 수 없으나 그럭저럭 거래는 잘됐다.
주모가 이득금이 별로 없는 죽죽이 주막을 굳이 잡고 있는 이유는 산적들과 은밀하게 벌어지는 이런 뒷거래가 있었기 때문이다. 주모는 애꾸눈과 당분간 거래가 힘들 것 같다고 판단했다.
그러나 주모는 이내 달리 생각했다.
‘그래도 겨울에 필요한 식량을 가지러 반드시 연락할 거야.’
애꾸눈이 두목인 산적 무리는 죽죽이 주막과 밀통해 장물을 처리하고 주로 쌀이나 보리를 가져갔다. 그들도 산속에서 짐승들만 잡아서 먹고 살수가 없으니 식량을 이런 식으로 조달해 먹고는 살아야 한다.
주모는 괴나리봇짐에 끼어있는 장검을 보며 놀란 표정을 지었다.
‘저건 내가 팔아먹은 장검인데. 애꾸가 저걸 빼앗길 정도면 크게 당했다는 것이 사실이군.’
주모는 뭔가 일이 묘하게 꼬이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자칫 곤란한 상황으로 처하게 될지 모르니 어쩌면 여길 떠날 때라는 생각도 들었다.
아래골방에서 소주를 마시며 앉아 있는 주모는 잠시 애꾸눈에 대해 생각하다가 서둘러 빈 잔에 술을 따랐다.
“총각! 한잔 들지!”
“나는 됐소! 삼수나 따라 주시오.”
“그래도 한잔만 들어.”
주모가 작은 술잔에 소주를 가득 붓자 최인범은 마지못해 술잔을 들었다. 술잔을 입에 가져가고 그저 입술만 약간 축이고 슬며시 소반 위에 내려놓았다.
주모는 이런 조심하는 모습을 세밀하게 살폈다.
‘너무 조심성이 많은 사내야.’
표정으로 보아 술을 못 마시는 사람은 아닌데 상당히 조심하는 것이다. 그러자 주모는 백삼수의 잔에 소주를 따르며 중얼거렸다.
“삼수! 왜 이리 오랜 만이야?”
“강원도 쪽으로 장사를 다니느라고.”
백삼수의 대답에 주모는 호기심을 표하며 즉시 반문했다.
“그쪽에도 주막을 차렸나?”
“아니. 그냥 그쪽 형편 좀 돌아보고 싶어서.”
대답을 들은 주모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슬쩍 최인범을 곁눈으로 살피고 나서 다시 입을 열었다.
“내가 살 것도 여럿 있고 팔 것도 여러 가지가 많이 있는데.”
“알았어. 오늘은 너무 피곤하니까 내일 아침에 윤 진사 댁에 다녀오고 흥정해 보자고.”
두 사람은 이런 대화를 나누고 나서 계속해서 그동안 각자 지냈던 이야기를 나누며 술잔을 주고받았다.
최인범은 두 사람의 대화를 들으며 조금 이상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서로 흥정하자는 이야기가 어째 은밀한 뒷거래를 하자는 뜻으로 들렸다.
‘이상하군. 무슨 거래인데 이렇게 말하지?’
주모와 백삼수가 주거니 받거니 한참 술잔을 기울이는 가운데 밖에서 소녀가 주모를 불렀다.
“아줌마, 바깥채 손님들이 계속해서 아줌마를 찾아요. 빨리 나와 보세요.”
“알았어.”
주모는 들고 있던 술잔을 단숨에 목구멍으로 털어 넣고 ‘카아아 좋다!’하더니 입맛을 당겼다. 슬며시 일어나 밖으로 나가며 백삼수에게 말했다.
“점순이 보낼 거니 그리 알아.”
“알았어.”
주모는 곱게 눈을 흘겨 추파를 던지면서도 따끔하게 당부했다.
“삼수, 그년이 옆에서 젖퉁이 드밀며 꼬리쳐도 허튼 수작은 걸지 말아········. 만약 그러면 생목숨 여럿 죽어나는 줄 알아.”
“알았다고.”
다짐을 단단히 받은 주모는 묘한 웃음을 풀풀 흘리며 밖으로 나갔다.
그러자 최인범은 백삼수에게 조용히 물었다.
“밥은 언제?”
“조금 있으면 점순이가 가져 올 거야.”
이런 말이 끝나기도 전에 문이 덜컹 열리며 다소 큰 소반에 차려진 밥상을 들고 점순이가 방안으로 들어왔다.
“에이! 따분해.”
투덜거리며 점순이는 밥상을 방바닥에 털썩 소리 내며 내려놓고 털퍼덕 앉았다. 그녀는 다짜고짜 술병을 들어 잔에 술을 따르고 있었다. 점순이의 앞가슴은 제법 불룩하게 올라와 풍만해 보였다.
최인범은 점순이를 바라보며 너무 이상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유는 뭔지 모르지만 불만이 가득하고 식식거리는 모습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배가 고프던 참이라 밥상에 오른 보리밥을 퍼먹었다.
마구 퍼먹는 방식이 아니라 아주 천천히 꼭꼭 씹어 먹었다. 이런 식습관은 군대에서 버릇되어 아직도 이런 식으로 밥을 먹었다. 이런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백삼수도 보리밥을 먹기 시작했다.
옆에서 점순이는 독한 소주를 계속해서 자작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소주를 마셔 매상을 올리는가 싶었다. 아니면 뭔가 불만을 이런 식으로 표출하는 것 같았다.
“후! 세상 참 재미없어.”
계속해서 투덜거리고 있었다. 다소 지켜보기에 거북하게 행동을 해도 나무란 생각이 전혀 없으니 그저 묵묵히 보리밥만 퍼먹었다. 밥상에 둘러 앉아 단한마디 없는 세 사람이다.
“잡았다!”
탁!
이때 최인범의 귀에 누군가 크게 외치고 뭔가 강하게 내리치는 소리가 들렸다. 사실 그리 큰 소리는 아닌데 주위가 조용하고 귀가 좋아진 최인범이라 들은 것이다.
‘분명 바둑 두는 소리인데.’
바둑을 떠올리자 기차에서 만났던 최인범라는 사내가 저절로 떠올랐다.
그 사람은 자신은 포병대대에서 군대 생활을 했는데 본래 바둑을 잘 두어 사단장이나 영관급인 고급 장교들에게 자주 불려갔었다고 했다. 졸병시절부터 특별휴가도 자주 나오고 아주 편하게 군대 생활을 했었다고 늘어지게 자랑했었다. 준사관 출신인 자신은 그런 날라리 병사들이 제일 꼴 보기 싫었다.
‘군대 생활을 개판으로 한 것도 자랑이라고.’
그런 뺀질이 같고 불손한 병사를 한 대 팼더니 문제되어 전역해 실업자가 된 처지다. 그러니 그런 날라리 같은 병사출신이라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런 생각이 떠올라 슬며시 물었다.
“누가 바둑을 두나?”
앞에서 소주만 들입다 퍼마시던 점순이가 눈을 반짝이면서 빠르게 응수했다.
“손님도 바둑 둘 줄 아세요? 저쪽 진사 어르신의 사랑채에서 지금 큰 내기바둑을 두고 있어요.”
“큰 내기?”
“예, 한판에 면포 10필이 왔다 갔다 하는 큰 내기로 두고 있어요.”
그러자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응수했다.
“바둑이 아니고 완전히 노름판이군. 한 판에 면포 10필이라니. 누군가 살림을 거덜 내는 멍청한 짓거리를 하고 있네.”
“어머, 내기바둑을 잘 아시나 보네요. 저쪽 사랑채에서 지금 면포 40필씩을 양쪽에 쌓아놓고 왔다 갔다 하고 있어요. 젊은 선비님이 많이 땄어요.”
“선비님?”
점순이는 손님이 호기심을 보이자 신이 난 표정으로 자세하게 설명했다.
“예. 며칠 전에 산에서 만난 분인데 진사이신 젊은 선비님이에요. 진사 어르신과 넉 점을 깔고 두는데 이기고 지고 그러는데 점점 내기가 커져요.”
“누가 백이고?”
“젊은 선비님요.”
점순이와 이런 대화를 나누며 느낌이지만 지금 바둑을 둔다는 젊은 선비가 ‘혹시 최인범라는 사내가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참으로 불공평한 세상이다. 언놈은 몰래 도둑질도 하고 산적에게 머리통 터지면서 면포 몇 필 챙겼다. 그런데 언놈은 내기바둑으로 편하게 큰 재물을 챙기고 있다. 그러나 그거야 혼자만의 추측이고 본시 세상이란 불공평한 것이다.
‘본래 세상이야 그렇고 그런 거지.’
아무리 남의 재물이 커 보여도 자신이 가진 쌀 한 톨이 더 소중하다는 거야 오래전에 터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