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화
그녀가 밖으로 나가자 최인범은 문방사우를 펼치고 아주 간단하게 글씨를 쓰고 있었다. 미천한 한문 실력이니 길게는 쓸 수가 없었다.
‘간단하게 쓰는 것이 좋지.’
-만사 무효(萬事 無效)-
한지에 크게 붓글씨를 쓰고 나자 다시 밖을 향해 크게 외쳤다.
“먹쇠야! 들어와!”
“에이!”
먹쇠가 급하게 들어오자 붓글씨를 쓴 한지를 넘겨주며 지시했다.
“너는 이 서찰 가지고 빨리 달려가서 박 초시께 전해. 모두 다 없던 일로 되었으니 다시 돌아오시라고.”
“예? 초시어르신을 여기로 돌아오라고 전해요?”
즉시 먹쇠에게 호통 쳤다.
“그래 이놈아!”
“서방님은 어찌 되고요?”
“그거야 내가 알바 모르지. 아들 목숨보다 재물이 더 귀하다니까 의금부에서 고문당해 죽든지 살든지 나도 모르는 일이니 빨리 돌아와서 나하고 내기바둑이나 두면서 편하게 지내라고 전해.”
이렇게 지시를 받자 먹쇠는 윤 진사의 눈치를 조심스럽게 살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아무리 조금 모자라 보이는 종놈이지만 귓구멍은 뚫려 있으니 집안에 무슨 변고가 생긴 것인지는 잘 안다. 뭔가 일이 크게 틀어지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이내 떠나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머뭇거리는 먹쇠의 머리통으로 면포를 집어던졌다.
퍽!
“아이고!”
“네 이놈! 종놈이 감히········. 빨리 안가? 이거 처먹고 심부름 해.”
호통을 치며 지니고 있던 면포를 너무도 쉽게 모조리 처리해 버렸다. 더 이상 머물 이유가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문방사우를 주섬주섬 싸고 있었다.
분명히 아들을 구하는 계책에는 순서가 있었다.
우선 급하니 큰 마름인 임영팔이 말을 타고 한양으로 가고 있다. 그는 정윤겸을 통해 정난정에게 서찰을 전해 아들을 포도청에서 풀리게 해달라는 청탁을 넣게 된다.
서찰의 내용은 보지 못했으나 분명히 그 대가를 바로 가지고 간다는 적혔을 것이다. 그런데 청탁 대가인 뇌물을 가지고 가는 박 초시를 돌아오라고 하니 문제가 더 커질 공산이 많았다.
임여녀는 아무리 아녀자지만 이런 이치도 모르지는 않았다.
재물이 아까워 불평 한마디 했다가 졸지에 아들이 진짜로 죽은 목숨이 될 위기라는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그녀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임여녀는 속으로 불만을 마구 토해냈다.
‘어린놈이 싸가지 없이.’
옆에 앉아있는 윤 진사도 부인과 같이 재물이 아깝다고 느끼던 중이다.
‘저 많은 면포를 그냥 줘야 하다니.’
하지만 사태가 이리 돌아가자 윤 진사는 또다시 다급해졌다. 그러나 이미 서찰을 가지고 임영팔이 떠났으니 시간의 여유가 있다고 판단해 다소 느긋하게 지켜봤다. 더구나 여전히 자신의 눈치를 보며 먹쇠가 밖으로 나가지 않고 있었다.
‘박 초시만 돌아오지 않으면 돼.’
먹쇠만 밖으로 내보내지 않으면 된다고 생각했다. 그리되면 면포 50필은 벌게 된다. 사람은 아주 단순해서 때로는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를 때가 있다.
먹쇠가 자신의 명령을 듣고도 아무런 행동을 안 하자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종놈의 배가 너무 부른 모양이군. 달리기 한번 하고 면포 한 필이 생기는데, 네 놈이 면포를 벌기 싫다면 다른 놈 시키지.”
이런 중얼거림에 먹보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윤 진사나 다른 두 여자도 알아들었다.
심부름을 시킬 사람이 먹쇠만 있는 것이 아니다. 마을사람들도 있고 길을 지나가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니 심부름은 얼마든지 시킬 수 있다는 것을 느낀 것이다.
그제야 윤 진사는 다소 부드럽게 말했다.
“최 진사, 아녀자가 한 말로 뭐 그리 노여워하나? 우리 이러지 말고 한양의 일은 박 초시가 알아서 할 것이니 내기바둑이나 둠세.”
윤 진사의 생각에는 최인범이 나이가 어리니 바둑 실력이 자신보다 한참 하수라고 판단했다. 그래서 내기바둑을 두어 사랑방에 남아 있은 면포를 모조리 회수할 생각이다.
윤 진사가 내기 바둑이나 두자는 말에 최인범은 괴나리못짐을 슬그머니 옆으로 밀치고 반가운 표정으로 응수했다.
“좋아요. 그렇게 하죠. 저도 봉화에서 행랑아범이 찾아오면 같이 떠날 참이었으니 그때까지 내기 바둑이나 두죠.”
이렇게 부드럽게 답하고 나서 먹쇠를 보며 지시했다.
“먹쇠는 기절해 쓰러진 나를 업고 와준 구해준 공이 있으니 그 면포는 네가 가져.”
“예이! 감사하옵니다. 선비님.”
먹쇠는 심부름도 하지 않고 귀한 면포 한 필이 생겼다. 그는 너무 신이 나서 급하게 면포를 집어 들어 품에 꼭 끼고 있었다.
그러자 다시 입을 열었다.
“저기 면포 10필을 박 초시 집으로 가져다 줘. 박 초시가 한양에서 돌아오기 전에 먹고는 살아야 하니까.”
“예이!”
먹쇠는 슬며시 윤 진사의 눈치를 봤다. 윤 진사가 아무런 의사 표시를 안 하자 재빨리 면포 10필 들고 사랑방에서 나갔다. 밖으로 나가자 번개 같이 어디론가 뛰어갔다.
그의 생각에는 늦으면 공짜로 생기게 된 면포 한필이 달아날 것 같아 서두른 것이다.
사랑방에서 나간 먹쇠가 대문 밖으로 나가는 소리를 들으며 속으로 만세를 불렀다. 이유는 자신의 생각대로 모든 것이 술술 잘 풀리고 있기 때문이다.
‘됐어, 윤 진사가 드디어 덧에 결렸어.’
사실 아주 치밀한 계산속에서 이런 짓을 벌였다.
자신의 면포 3필과 윤 진사에게서 받은 면포 50필 중 10필로 후하게 인심을 썼다. 남은 면포 40필로 드디어 큰 내기바둑을 둘 계획이다.
‘한 번에 따면 속았다고 할 거니 천천히 요리해주지.’
기원바둑으로 기준해 2급 강이면 9급 수준인 사람과 바둑을 둘 경우 얼마든지 가지고 논다. 미리 집수를 계산해서 몇 집 정도 이기고 지고를 마음대로 조절할 수 있는 실력 차이다.
순장바둑은 처음부터 전투형이라 고수들이 하수를 농락하기가 아주 수월했다.
아무리 바보라도 맞바둑으로 두어 계속해서 지면 나중에 속은 것을 알고 파토를 낼 수 있다. 그러니 조금 자신이 어느 정도 고수라는 표시를 해서 나중을 대비해야 한다.
물론 순장바둑에 익숙해지기 위해서도 급수를 한참 내려서 둬야 한다.
최인범이 지금 두려는 내기바둑이야 별업이고 본업은 이미 시작됐다.
조선시대의 가난한 양반으로 선택할 길이 별로 없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드디어 사건을 해결해 주는 해결사로 직업을 선택한 것이다.
‘역사가 내가 아는 그대로 돌아가면 큰 재물을 쉽게 얻을 수 있어.’
나쁜 의미로 쓰여 지는 해결사다. 한편으로 좋게 생각하면 자신은 조선 최초로 민형사 소송의 변호사 업무를 한다고 판단했다.
‘진사는 됐으니 이런 식의 사건 해결이나 남의 송사를 대신 해주는 일을 해보자고.’
자신이 직접 나서지 않아도 된다.
가난한 박 초시를 사무장처럼 써먹으면 충분히 잘 운영될 것으로 판단했다. 박 초시는 내기바둑을 두어 생활비를 버는 사람이다. 그런 모습으로 보아 능력도 되고 성품도 아주 적당해 보였다.
‘너무 고지식한 사람도 곤란해.’
그와 더불어 기왕에 우리기로 결정된 윤 진사의 재물을 더 많이 챙길 심산으로 내기바둑을 두기로 했다.
‘아직 나이도 있으니 서두르지 말자고.’
여기서 사업을 벌이기에는 아직 모르는 것도 많고 배워야 할 지식들도 많았다. 그래서 자신의 주특기인 잔머리 굴리기로 ‘허가 난 도둑.’이라는 변호사 업무를 구상한 것이다.
‘진사 정도면 대략 그런 일을 하는 자격 여건으로는 충분해.’
무허가지만 상관없었다.
주로 무식한 부자들의 애로사항을 해주며 돈을 벌어 볼 요량이다. 가끔은 어려운 백성의 일을 도와주면 조부의 청백리라는 명성에도 별로 금이 가지는 않을 것 같았다.
무슨 정이나 가문에 대한 사명감이 있어서는 아니다. 그저 남의 몸을 차지하고 사는 처지니 그런 정도는 조금 고려해 가면서 사는 것이 좋아 보였다.
‘기본적인 양심을 지켜야지.’
한편 최인범이 자신의 생존 수단을 결정해 실행에 옮기고 있는 동안. 가까운 죽령에서 경상도로 이동 중인 최인범은 여전히 순탄하지 않은 사건을 겪고 있었다.
죽령 고갯길 주변에는 단풍이 아름답게 물들고 개울에서는 맑은 물이 흐르고 있었다.
높은 산비탈을 올라가는 30여명의 사람들이 보였다.
“후! 후! 어휴 힘들다.”
높고 험한 죽령을 넘으려니 많은 짐을 진 상인들은 버거워했다. 죽령을 통해 경상도로 가는 선비 또는 등짐장수나 봇짐장수들이다.
일행 중에는 풍기로 심부름을 떠나는 젊은 노비도 보였다.
이들은 무리를 지어 떼로 고갯길을 갔다. 근처에 발생한 호환도 무섭지만 요즈음 들어 늘어난 흉악한 산적들 때문에도 뭉쳐서 가는 것이다.
힘든 고갯길을 가다가 보니 이들은 점심때가 거의 되자 개울가에서 잠시 쉬고 있었다.
“자! 쉬어가지!”
“그럽시다.”
무리의 반 이상을 차지하는 장사꾼들이 가지고 가는 짐이 무거워 쉬니 같이 쉴 수밖에 없었다. 다른 사람들도 힘이 들어 다들 같이 쉬고 있었다.
졸졸졸
맑은 시냇물이 흐르는 개울가에 모여 있는 사람들은 얼굴을 씻거나 시원한 물에 발을 담그고 있었다. 또는 편하게 바위 위에 누워서 쉬는 사람도 보였다.
탁! 탁! 탁!
개울가에서 다들 쉬고 있는 중에 제일 앞장서서 가던 최인범은 아까부터 나무를 낫으로 찍고 있었다. 그는 나무꾼으로 위장했을 때 들고 다니던 작대기를 버리고 나자 너무 허전했다. 뭔가 몸을 보호할 무기가 절실한 그는 다른 것은 버렸지만 낫은 지니고 있었다.
사람들이 낫을 지닌 자신을 다소 이상하게 생각하는 표정들이자 다른 대체 무기를 휴대하기로 결정했다.
죽령을 올라오며 길가에 보이는 나무를 유심히 살폈다. 하지만 적당한 나무가 보이지 않았다. 길손들이 쉬어가는 개울가에 도착하자 마음에 드는 나무를 발견해 잘랐다.
큰 참나무의 가지가 아주 곧게 뻗어 있어 잘라서 지팡이를 만들면 적당해 보였다. 하나의 가지를 자르고 나자 이어서 다른 가지도 자르고 있었다. 하나 보다는 둘을 만들어 지닐 생각이다.
‘양손으로 집고 다니면 좋겠어.’
등산을 다녀서 지팡이가 얼마나 큰 위력을 발휘하는지 잘 안다. 물론 바위 길에서는 오히려 위험하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곳에서는 아주 유용하다. 오를 때는 물론 내려올 경우에도 다리에 충격을 완화시켜주는 효과가 있었다. 그래서 적당한 참나무가 보이자 잘라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