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화
<독해야 살 수 있다>
윤태길을 살리기 위해서는 마치 예언서와 비슷한 형태로 뜬 구름을 잡는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박 초시에게 뭔가 계속 다소애매모호하게 말해주었다.
듣고 있던 박 초시는 간간히 고개를 끄덕이거나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박 초시로는 참으로 알 수 없는 오리무중인 내용들이 아주 많았다.
‘이거야 원······. 알 것도 같고 이게 아닌 것도 같고 정말 이상해.’
도통 한양의 소식을 전혀 모르니 박 초시는 자신보다 학식이 높은 최인범 진사의 말이라 무조건 믿어 보기로 했다.
서찰을 쓴 사람 이름도 없고 한문과 언문으로 쓰게 했다.
그런 준비가 끝날 무렵.
윤 진사가 재물을 준비해서 사랑방으로 돌아왔다. 죽게 생긴 아들의 구명을 위해 뇌물로 보낼 물품들을 상당히 빨리 준비해온 것이다.
“이런 정도면 되나?”
“예, 그런 정도면 충분합니다.”
준비한 재물들은 금이나 은이다. 판매나 뇌물 증여로 가능한 패물 형태들이다. 보아하니 어디로 가서 준비한 것이 아니라 집에 보관하던 것들을 꺼내 온 것 같았다.
한양으로 보낼 사람들의 여비나 기타 잡비도 필요해 그에 대해 요구했다.
“여비도 필요하니 면포도 있어야 합니다.”
“알았네. 그거야 창고에 많으니 얼마든지 쓰시게.”
“진사 어르신, 재물이 아무리 많고 또 일이 급하다고 해도 재물을 그런 식으로 관리하시면 안 됩니다. 그러니 귀찮더라도 면포 100필만 사랑방으로 가지고 오세요.”
“그렇게 함세.”
윤 진사의 명령으로 곡간에 들어 있는 면포 100필이 사랑방으로 이동됐다. 면포 100필은 부피가 많아 사랑방의 한쪽 벽에 가득 찼다.
윤지사의 아들을 살리기 위한 준비는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이번 사건을 해결할 사람을 한양으로 보낼 준비를 했다. 마음이 급한 윤 진사는 급하게 지시했다.
“내일 떠나야 하니 짐들을 챙기게.”
“예이!”
최인범은 면포와 많은 재물을 넘겨받자 그것을 여러 뭉치로 나누었다. 또한 나눈 재물을 모두 박 초시에 넘겨주며 뇌물을 쓰는 방법이나 사용처에 대해 자세하게 설명해 주었다.
말을 타고 먼저 떠나는 임영팔에게 서찰 두통을 넘겨줘 우선 조치할 요량이다. 서찰은 정윤겸과 그에 딸인 정난정에게 보내게 된다.
박 초시는 재물을 가지고 걸어서 한양으로 올라가 뇌물을 써서 마무리하는 방식이다. 많은 재물을 가지고 움직이는 구명운동이라 정난정이 아니라 다른 사람도 얼마든지 손을 쓸 여지는 많았다.
‘그래도 이름 정도라도 아는 사람을 통하는 것이 좋아.’
정난정의 권세는 권불 10년이 아니라 20년은 되니 그런 점도 고려했다.
한양으로 떠날 사람들은 나름 정해져서 개인적으로 준비하기에 바빴다. 내일 이른 아침에 모든 사람이 같이 출발할 예정이었다.
다음날 하늘은 맑고 청명해 먼 길을 떠나기가 아주 좋은 날씨다.
아침 일찍 창락골의 윤 진사 댁 솟을대문 앞에 많은 사람들이 웅성거렸다. 윤 진사의 아들인 윤태길을 구하기 위해 움직일 사람들이 배웅을 받고 있었다.
윤 진사는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임영팔에게 신신당부했다.
“자네, 한양으로 올라가서 잘 해야 하네.”
“진사 어르신 염려 놓으세요. 한양의 포청에는 제가 따라다니던 착호갑사 출신들이 있으니 잘 될 겁니다.”
“남들의 시선을 조심하고.”
“예.”
정난정에게 서찰을 가져다 줄 임영팔이 한양으로 떠날 준비를 마치고 있었다.
그는 한양으로 빨리 가기위해 말을 타고 있었다. 그에게는 면포 10필과 은가락지 뭉치가 넘겨졌다. 빨리 올라가기 위해 역참으로 가서 은가락지를 뇌물로 주어 말을 갈아타고 내달리라는 뜻이다. 면포야 가면서 주막에서 사용하게 되는 여비다.
최인범은 말에 올라 출발하려는 임영팔에게 다시 한 번 당부했다.
“한양으로 올라가서 부총관인 정윤겸을 찾아가 서찰을 넘겨주고 정난정의 거처를 물어 찾아가면 될 거야. 그리고 언문 서찰은 정난정에게 넘겨주면 될 것이고.”
“알겠사옵니다.”
마지막으로 지시를 받은 임영팔이 말을 타고 빠르게 떠났다. 그가 떠나고 나자 이번에는 면포 40필을 나누어 짊어진 사노비 4명과 패물을 지닌 박 초시가 떠날 준비를 마치고 기다리고 있었다.
떠날 준비를 마치고 기다리는 박 초시에게 당부했다.
“도착해서 윤태길이 포도청에서 이미 풀렸으면 가지고간 재물의 반만 정난정에게 전달하면 됩니다. 나머지는 윤태길에게 넘겨주고 돌아오시면 되고요. 윤태길은 재물을 정윤겸에게 전하여 벼슬자리를 부탁하라고 전하세요. 하지만 한양으로 가봐서 아직 포도청에서 윤태길이 풀리지 않았으면 박 초시께서 직접 정윤겸에게 재물의 반을 넘겨주어 윤태길의 방면을 부탁하시고 나머지 재물은 정난정에게 넘겨주시면 됩니다.”
“알았소. 내 실수 없이 전하리다.”
“꼭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서찰을 제가 쓰거나 이번 계책을 제가 구상한 사실을 발설하시면 안 됩니다.”
“그렇게 하리다.”
준비를 마친 박 초시가 면포를 짊어진 사노비들과 같이 떠나게 됐다. 먼 길을 가야 하기 때문에 마음이야 다소 급하지만 느린 걸음으로 갔다.
한양으로 올라갈 사람들이 모두 떠나고 나자 윤 진사와 최인범은 사랑방으로 들어왔다. 이어서 부인인 임여녀 그리고 딸인 윤봉화가 사랑방으로 들어와 초조한 기색으로 최인범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최인범은 폭포에서 보았던 윤봉화의 봉긋한 젖무덤이 저절로 떠올랐다.
더 이상의 야릇한 벗은 내밀한 모습도 떠오르고 있지만 그건 별로 좋은 느낌이 안 들어 그저 미묘한 웃음을 지었다.
‘풋! 아직 어린 애군.’
30대 후반의 정신을 가진 눈으로 바라보니 윤봉화가 그저 어린 애로만 보일 수밖에 없었다. 처음 마주한 폭포의 일이 떠올라 입가에서는 엷은 미소가 피워 오르고 있었다.
그러자 윤봉화도 따라서 아주 미묘한 미소를 입가에 띠우고 있었다. 그러나 웃고 있던 윤봉화는 무슨 생각을 했는지 얼굴이 벌게지며 고개를 푹 수그렸다. 그녀는 두 손을 모아 손톱만 만지작거렸다. 그녀는 오빠의 안위보다는 젊은 선비에 빠져 나름의 아름다운 꿈을 꾸고 있었다.
‘어머나! 가까이서 보니 더 잘생긴 선비님이야.’
재산만 축내는 망나니 같은 오빠야 이번 기회에 사라지는 것이 더 좋다는 생각이 문뜩 떠올랐다. 그러면 많은 재산은 자신과 앞에 보이는 선비와 같이 독차지해 호사스럽게 살 것 같았다. 그런 생각이 떠올라서 그런지 윤봉화의 표정은 금방 표독스럽게 변했다.
딸이 어떤 생각을 하는지 전혀 모르는 윤 진사는 그저 아들 살리기 위해 고심하는 표정이 역역했다. 자신의 남편의 안위가 걸린 일인데 이집 며느리가 보이지 않자 다소 이상했다.
‘이상하군. 며느리는 전혀 보이지 않다니. 내가 외간 남자라고 해서 나타나지 않나?’
양반 가문에서는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다. 그렇다면 이 시대를 기준해 장성한 딸은 왜 나타난 것인지 너무 의아했다.
‘의도적으로 딸의 모습을 선보이려고 이러나?’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며 다시 윤봉화를 바라봤다. 어미의 미모가 좀 되어서 그런지 모르지만 윤봉화는 미모로는 뛰어난 처녀가 분명했다. 하지만 너무 가벼워 보이고 약간 표독스러워 보이는 눈길을 보자 별로라는 느낌이 들었다.
윤 진사는 너무 급한 마음에 최인범에게 매달리기는 했다.
하지만 면포 50필이 사랑방에 그대로 남아있으니 조금 이상했다. 일단 아들을 구할 사람들이 한양으로 보낸 뒤라 조금은 여유가 생기니 재물에 신경이 써졌다.
‘저건 왜 남긴 거지?’
이런 생각이 든 윤 진사는 앞에서 묘한 웃음만 흘리는 최인범에게 슬며시 물었다.
“자네, 저 면포는 어디에 쓰려고 남긴 것인가?”
그러자 윤봉화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윤 진사를 바라보며 태연하게 응수했다.
“그거야 당연히 저와 박 초시의 보수로 남긴 것이지요. 왜 보수가 많아 보이나요?”
이런 응수에 윤 진사를 비롯한 다른 두 여자들이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날 도둑놈 같아’
세상에나? 자신은 직접 한양으로 가지도 않고 남을 보냈다. 더구나 서찰마저 박 초시가 썼다. 그런데 계책만 내고 이대로 앉아서 면포 50필이나 꿀꺽한다니 너무 기가 막혔다. 아무래도 너무 많은 재물을 쉽게 챙긴다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는 가족들이다.
윤봉화는 부모와는 전혀 다른 이유로 놀라고 있었다.
그녀의 생각에는 진사라더니 머리가 좋아서인지 쉽게 재물을 챙겼다. 젊은 선비와 혼인을 꿈꾸는 윤봉화는 자신의 미래가 아주 순탄하다고 판단했다.
‘어머나! 쉽게 재물을 버네.’
이래서 딸은 다들 도적이라고 노인들이 했는지도 모른다.
윤 진사는 이미 재산의 반이라도 내놓겠다고 토해낸 말이 있으니 속이 쓰렸지만 침묵했다. 그는 맹랑하게 행동하는 최 진사의 강단에 조금 생각을 달리했다.
‘보통 영악한 놈이 아니야. 남의 위기를 이용해 큰 재물을 챙기다니.’
생긴 것은 아주 곱상하니 너무 순진해 보였다. 그런데 뱃속에는 커다란 능구렁이가 10마리는 들어 있는 것처럼 아주 느물거린다는 느낌이 들었다.
세상에는 이런 놈들이 제일 무섭다. 지금은 어려서 그렇지 나중에 벼슬이라도 하면 반드시 자신에게 불리하게 행동하던 사람에게 보복하는 성격이다.
‘골치 아픈 놈과 거래하게 됐어.’
그런 생각이 들자 윤 진사는 속이 쓰려도 참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얼굴은 소태 씹는 표정이다.
옆에 앉아 있는 그의 부인인 임여녀는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백주대낮에 날강도도 아니고 너무 큰 재물을 쉽게 차지하는 것이 못마땅해 한마디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니? 저 많은 면포를 말 몇 마디하고 그냥 가지시면 안 되죠.”
이런 불평에 최인범은 다소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부인께서는 아드님의 목숨이 별로 중하지 않은 모양이군요. 그렇다면 면포를 다시 곡간으로 가져가시고 저는 이만 떠나겠습니다.”
이렇게 말하며 떠나겠다는 동작으로 자신의 물건인 괴나리봇짐을 펼쳤다. 그 안에 들어 있는 문방사우를 꺼내고 이어서 면포를 꺼냈다.
이어서 밖을 향해 크게 외쳤다.
“점순이 있냐?”
“예이!”
그동안 자신을 돌보던 점순이가 급하게 방안으로 들어오자 면포 2필을 풀쩍 던져주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나를 돌보느라 네가 그동안 너무 고생 많았다. 이 면포로 겨울을 지낼 따뜻한 옷이나 지어 입어.”
“예? 제 옷을 지어 입으라고요?”
“그래, 나는 떠나니 그리 알고.”
점순이는 이게 웬 황재다 싶었다. 그녀는 누가 면포를 가져갈 세라 솔개가 병아리 채듯이 면포를 잽싸게 챙겨 후다닥 밖으로 튀어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