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타임트레인-15화 (15/519)

15화

자신도 전생에 남에게 후하게는 베풀고 살지 못했다. 그러나 탐욕스럽게 남의 것을 탐하지는 않았다. 본래 성품이 그래서 그런지 남의 것을 유달리 탐하면 체질적으로 별로 좋게 보이질 않았다.

‘하긴 여길 떠나면 만나기 어려운 남인데 나무랄 이유도 없지.’

이런 복잡한 생각을 하는 동안 윤 진사와 박 초시가 방으로 들어왔다. 얼른 바둑알을 정리해 서랍에 넣고 구석에 밀쳐놓았다.

그러자 윤 진사는 아주 못마땅한 기색으로 아무 말이 없었다. 보아하니 ‘네가 무슨 바둑을 둘 줄 알겠냐?’하고 깔보는 표정이 역역했다.

그러나 박 초시는 정중하게 인사했다.

“최 진사님, 몸은 어떠세요?”

“아! 거의 다 나은 것 같아요. 이제 떠나도 될 것 같습니다.”

“그렇군요. 천만다행이옵니다. 시간이 있으면 한양 이야기를 듣고 싶었는데.”

“제가 한양에 대해 뭘 아나요. 저야 과거시험에 매달려서 그런지 한양에 올라가서도 별로 본 것이 없어요. 더구나 해가 지난 이야기인데 들어도 소용없지요.”

진사시를 보려면 한양으로 올라가야하니 나누는 대화다.

작년에 한양으로 가서 진사시에 합격했다. 그러나 자신은 가본 사실도 없는 한양이야기를 들으려고 하니 이렇게 대충 설렁설렁 답했다.

한양 소식이 너무 궁금한 박 초시가 다시 중종의 후비인 문정왕후에 대해 물었다.

“왕비마마 소식은?”

“예, 작년에는 아주 잘 계시고 윤씨 형제분들도 잘 지내고 있었어요. 하지만 윤씨 형제와 친하면 장차 화를 당하기 쉬우니 조심하는 분위기였었습니다.”

“왕비마마께서 있는데 그런 분위기라니 이상하군요.”

역사드라마에 자주 등장하는 왕비인 문정왕후에 대한 이야기는 윤원형의 첩인 정난정이라는 여자 때문에도 유명했다. 두 여인들이 세상을 좌지우지해 여인천하라는 이야기가 후세로 전해졌다.

역사에 관심이 많고 그쪽 방면으로 공부를 조금해본 처지다.

지금쯤은 왕위계승을 놓고 다투다가 어쩌면 윤원형 형제가 윤임 일당들에게 밀려 귀양을 가는 시점이라 막연하게 이렇게 말했다.

이런 대화에 윤 진사는 자신의 아들이 선을 댄다는 윤씨 집안사람들이라 호기심을 표하며 물었다.

“최 진사, 다른 한양 소식은 모르나?”

“글쎄요? 작년의 분위기로 봐서는 윤원형이나 윤원로가 모두 귀양을 갈 것 같던데요. 아무래도 심상치 않은 분위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게 작년의 일이니 지금은 잘 모르죠.”

이 역시 똑 떨어진 말은 아니고 뜬 구름 잡는 식에 불과했다. 뭘 알고 하는 응수가 아니고 그저 역사책에 나오던 내용을 가지고 대강 얼버무리는 답변이다.

그러나 이런 대답을 들은 윤 진사는 기겁하며 외쳤다.

“아까운 내 땅!”

보아하니 윤 진사는 윤원형 형제들에게 서울에 있다는 아들인 윤태길의 벼슬을 사기위해 많은 토지를 넘겨 준 것 같았다.

서로 이런 대화를 나누다 윤 진사는 바둑판을 끌어서 자신의 앞에 놓고 슬며시 물었다.

“자네, 바둑 둘 줄 아나?”

“두는 것은 아나 실력이 별로라 잘 두지 않습니다.”

“그래? 그럼 우리가 두는 것 보고 잘 배우게.”

이렇게 말하고 윤 진사는 박 초시와 같이 바둑을 두었다. 별로 할 말이나 또는 할 일이 없어 두 사람이 두는 바둑을 잠시 쳐다봤다.

두 사람은 빠르게 바둑을 두는 편이었다.

최인범의 바둑 실력은 기원바둑 급수로 2급 강이라고 볼 수 있다.

특히 그가 다니던 영주기원은 짜기로 소문난 기원이다. 다른 기원으로 가면 다들 1급 강이라고 하며 최고수라는 대접을 받았다. 그러니 하수에 해당하는 사람들이 두는 바둑을 보면 대충 몇 급 정도 되는지 알 정도다.

둘이 바둑 두는 모습을 처음 보니 정확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느낌으로 윤 진사는 9급 수준이고 박 초시는 7급 수준이다. 그러나 바둑은 맞바둑으로 오히려 윤 진사가 백을 잡고 있었다.

탁! 탁!

두 사람이 요란스럽게 소리를 내며 바둑을 두자 옆에서 물끄러미 바라봤다. 수는 자신이 잘아나 순장바둑에 대해서는 익숙하지 않아 지켜봤다.

‘아하! 저런 식으로 계가하는군.’

박 초시는 여유롭고 윤 진사는 골머리를 쓰며 두었다. 이런 두 사람의 모습만 봐도 누가 하수인지 금방 알 정도다.

‘박 초시가 완전히 가지고 노는군.’

그러나 접바둑을 두는 것이 익숙해 슬며시 물었다.

“혹시 상수와 하수가 둘 때의 접바둑은 어떻게 두지요?”

최인범의 말에 윤 진사는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다소 퉁명스럽게 답했다.

“그야 중앙의 흑돌 주변의 점에 까는 거지. 자네는 그것도 아직 모르나?”

“혹시 제가 배운 바둑과 다른 방식인가 해서요.”

포석하기가 곤란한 순장바둑은 전투형 바둑일 수밖에 없었다. 그런 이유로 의외로 대국이 빨리 끝나는 경우가 많았다. 상대방의 돌을 잡는 전투형 대국이라 상대방의 대마를 잡으면 바로 기권해 끝내는 방식으로 두는 경우도 있었다.

하수와 인터넷 바둑도 많이 두어 바둑을 두는 방식이 대부분 전투형이며 아주 빠른 속기다. 까맣게 깔아주는 접바둑을 두려다 보니 고수들 사이에서는 잘 안 쓰는 속수에 아주 능숙했다.

조선 중기시대인 지금은 서로 정보 교환이 힘드니 바둑 실력은 천태만상으로 지역마다 엄청난 차이를 보였다. 지역에 뛰어난 고수가 나타나면 주변의 바둑 실력이 급격하게 상승하게 된다.

그리고 고수가 없는 지역은 진짜 하수라고 보이는 사람이 고수 노릇하며 큰 소리 치는 경우도 있었다. 둘이 바둑을 두며 나누는 대화로 추측해보니 의외로 이 지역에는 진짜 고수가 전혀 없었다.

‘별로 재미가 없네.’

이렇게 판단하자 더 이상 바둑을 지켜봐야 지루하기만 했다. 그는 슬며시 사랑방에서 밖으로 나왔다.

윤 진사가 일방적으로 당하게 되어 있는 바둑이다. 그러니 순장바둑이라고 해서 처음에는 호기심을 표했으나 너무 지루하고 답답해 더 이상 보고 싶지 않았다.

마루에 앉아 심란한 표정으로 생각에 잠겼다.

새로운 세상에서 살게 되었으니 배워야 할 것이 너무 많았다. 전생에도 그리 고급학력은 지니지 못했다. 그렇다고 완전히 무식쟁이도 아니다. 남에게 내세울 고급 전문지식을 지니고 있지 못했다. 하지만 잡스럽게 살아서 그런지 조금씩 다방면에서 아는 것은 조금 있었다.

그나마 가진 지식들도 여기서는 별로 써먹을 거리가 없었다.

‘참으로 답답한 노릇이군.’

지니고 있는 논이 불과 500평도 되지 않다니 막막하기만 했다. 몸의 전 주인이 사찰에서 죽어라 공부에만 매달릴 수밖에 없었던 사정을 이해했다.

자신은 그가 지녔던 지식을 무의식중에서나 발휘한다. 정신을 집중해서 써먹으려면 심한 두통을 동반하는 고통만 생겼다.

이러니 한양의 과거장으로 가봐야 보나 마나 낙방하기가 십상이다. 이유는 비몽사몽으로 완전히 흐릿해진 정신으로 어려운 과거 시험을 볼 수는 없기 때문이다.

몸의 전 주인은 성균관에 입교할 생각으로 한양으로 가다가 길을 잘못 들어서 산속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목욕하던 중에 괴이한 일로 정신이 주입되어 주체가 교체된 것이다.

그의 괴나리봇짐에는 문방사우와 면포 그리고 서책들이 있어 다소 무거웠던 것이다.

조부는 문과급제자로 사헌부(司憲府) 지평(持平) 즉 정5품이었다. 지방 수령인 현령(종5품) 보다 한계위인 벼슬을 했고 청백리상을 받은 분이다.

선친은 진사를 했고 효자로 소문난 위인이나 자신이 아주 어려서 죽었다. 5대를 내리 독자로 이어져 주변에는 가까운 친인척이 전혀 없었다.

가문이 다소 명성은 있으나 너무 가난해 호구지책 해결도 어려운 처지다.

심란한 얼굴로 마루에 앉아 담장 밖으로 보이는 벌판을 바라봤다.

산골의 개울가에 있어 큰 벌판은 아니지만 그래도 한 사람이 차지하고 있다니 상당한 토지다. 더구나 풍기 쪽으로 가면 더 넓은 들판이 있고 그곳에도 토지가 많다니 큰 부자는 틀림없었다.

‘사노비도 20명이나 되고 노비나 다름없는 가솔들도 근처에 따로 사니 재물로 벼슬을 충분히 사게 생겼어.’

조선시대에 벼슬하는 방법이 과거제도만 있는 것이 아니다. 흔히 말하는 뒷구멍이라고 보는 특별채용 제도도 아주 많았다. 그러니 어떤 시대고 법이 있으면 또한 위법하는 방법이나 또는 법을 이용해 치부하려는 무리는 반드시 있었다.

‘나중에 윤원형이 정난정을 통해 어지간히 해먹겠어.’

이런 생각이 떠오르지만 그런 사실에 대항하거나 또는 자신이 나서서 고쳐볼 마음은 전혀 없었다.

아니 설사 있더라도 자신의 능력으로는 주상이 보지도 않을지 모르는 상소나 쓰는 정도에 불과하니 해보나 마나한 싸움이다.

사실 자신의 한문 실력으로는 상소 자체를 작성하지도 못한다.

‘내가 무슨 역사적 사명을 띠고 여기로 파견된 인물도 아니고.’

이렇게 판단하고 지금 당장 호구지책을 해결할 방법을 모색했다. 그래서 재물을 벌어볼 생각으로 고심하기 시작했다. 한참을 생각해도 좋은 생각이 전혀 떠오르지 않았다.

앞일이 걱정이라 입에서는 저절로 한숨이 튀어 나왔다.

“휴우! 진짜 답답한 노릇이군.”

막막하고 너무 답답해 벌떡증이 생겨 가만히 앉아 있을 수 없었다. 그래서 이곳 사람들이 사는 모습을 살펴서 익혀야겠다는 생각으로 슬며시 가죽신을 신고 집을 나섰다.

여기서는 그래도 표면적으로 대접을 받는 진사인 양반이니 촐싹거리는 걸음으로 다닐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배를 앞으로 쑥 내밀고 어슬렁거리는 팔자걸음이야 정말 어색했다.

그래서 팔자걸음을 약간 흉내 내서 천천히 걸어가는 방식으로 솟을대문을 나섰다.

바깥마당으로 나오자 아이들이 동그랗게 모여 제기를 차고 있었다. 구석에서는 나무로 만든 팽이치기를 하며 웃고 떠들며 놀고 있었다. 아무리 어려운 백성들의 삶이라고 해도 아이들은 그저 즐겁기만 했다.

“히히! 나는 스물인데 너는 열다섯 번이다.”

“에이, 다시 차자!”

서로 제기차기를 하며 뭔가 주고받았다. 가만히 보니 밤을 건네받고 있었다. 서로 찬 숫자의 차이만큼 밤을 건네주는 모습이다.

이런 모습을 보자 사랑방에서 내기바둑을 두고 있는 윤 진사와 박 초시가 떠올랐다.

‘나도 바둑판에 끼어서 내기바둑이나 둘까?’

전에 영주기원으로 자주 가서 기원을 찾아오는 손님들하고 점심내기 혹은 담배내기 하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담배를 떠올리자 지금은 담배가 도입되지 않은 시기라는 것이 생각났다.

담배는 나중에 도입된다. 조선은 임진왜란 이후에 많은 변화가 있었다.

여기에는 담배가 없으니 아주 잘 되었다고 생각했다. 각종 암이나 유발하는 백해무익한 담배를 뭐가 그리 좋다고 많이 피웠는지 모른다.

이때 여러 명의 아이들이 손에 홍시를 들고 서로 크기를 가지고 시시비비했다. 서로 자기의 감이 훨씬 더 크다고 주장했다.

“봐! 내 감이 크다.”

“아냐! 내 감이 더 커!”

최인범이 보기에 우열을 가리기 힘든 고만고만한 감이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