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타임트레인-14화 (14/519)

14화

다부지게 마음먹었지만 새로운 난제가 자신의 앞에 닥친 것이다.

‘미치겠군. 한학자 수준인 진사시를 통과한 사람이라니.’

제일 큰 문제는 한문 실력이다. 자신은 천자문 정도만 겨우 아는 한자 실력이다. 그런데 최소한 한학을 하는 대학의 전임강사 이상은 된다고 생각되는 진사시 합격자라니 적응하기가 어렵게 생겼다.

너무 놀라 기절한 이후 꿈을 꾸고 나서 일어나 멍하니 앉아 고심했다.

‘이를 어쩌지? 윤 진사가 나보고 봉화현의 집으로 보낼 서찰을 써달라고 하던데.’

자신에게 닥친 큰 위기라고 직감했다.

‘어린 몸인데 벌써 진사라니 미쳐!’

붓글씨 솜씨야 서예학원을 다녀 아주 맹탕은 아니다. 하지만 한문으로 무슨 서찰을 쓸 한문 실력은 절대로 아니다. 훈민정음인 언문 편지도 표기법이 전혀 다르니 쉽지 않았다.

‘쌍! 이 상황을 어찌 모면하지?’

이렇게 생각하고 난감해 있다가 벽에 길게 걸린 족자를 봤다. 일필휘지라고 볼 수 있는 휘갈기는 초서체로 써진 글귀가 눈에 확 들어왔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자신이 그런 어려운 초서를 저절로 알아볼 수 있었다.

“헉!”

믿어지지 않는 사태가 또 벌어지자 받아들이기 정말 어려웠다.

‘이런 경우가 다 있다니.’

의문이 꼬리를 물기 시작하자 생각이 많아졌다.

다시 머릿속에서 벌레가 기어 다니는 느낌이 들고 현기증이 심해졌다. 상황이 상황인지라 이런 사실을 과학적인 기준보다는 달리 이해하기로 마음먹었다.

‘아하! 내가 다른 사람 몸으로 정신만 들어와 지금 두 정신체가 뒤엉키는 중이야.’

사람이란 속이 편하고 단순하게 생각하면 두통이 사라진다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심하게 아프던 머릿속의 고통이 슬며시 사라졌다.

자신의 신체적인 반응에 속으로 ‘그나마 천만다행이다.’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편하게 마음먹는다고 만사가 끝난 것은 아니다.

엉덩이에 점이 있던 점박이 아낙네가 “선비님! 정신 드셨어요?”하며 먹과 벼루 그리고 붓과 종이를 가져왔다. 한문으로 서찰을 써달라는 뜻이다.

이러니 온전하게 정신을 차렸다고 하기가 정말 어려웠다. 그래서 머리를 손으로 만지며 기절하는 척 옆으로 그냥 벌러덩 누워버렸다.

그런데 하필 쓰러진 곳이 점박이 아낙네의 무릎 위의 허벅지다.

부드러운 허벅지의 감촉이 너무 좋았다.

‘훗훗! 너무 푹신하고 좋아.’

이런 긴급한 상황에도 요상한 잡념이 들었다.

이것으로 보아 아직도 정신을 온전히 차리려면 먼 것 같았다.

아무리 호색하는 성품이라지만 전생에서도 이런 정도는 아니었다. 자신이 이러는 것으로 보아 몸의 전 주인이 여자를 심하게 탐하던 놈이거나 무슨 깊은 사연이 있는 것 같았다.

“어마나! 선비님! 정신 차리세요.”

점박이 아낙네가 놀라 소리치며 흔들어도 두 눈을 꼭 감고 있었다. 살자고 하는 연기다 보니 저절로 아주 실감나게 했다.

이때부터 배가 고프면 깨어난 척 부스스 일어났다.

힘없이 앉아 점박이 아낙네가 은수저로 떠주는 미음을 잘도 받아먹었다. 먹고 나서 다시 기절하는 척 연기를 계속하는 수밖에 없었다.

점박이 아낙네는 윤 진사의 사노비로 이제 20살 되는 오점순이란 청상과부다. 그녀는 아파서 누워 있는 최인범의 수발을 전담했다.

그녀는 수시로 최인범에게 미묘한 추파를 던졌다.

“선비님, 힘드시면 여기에 편하게 기대서 드세요.”

미묘한 웃음과 함께 머리를 자신의 품에 기대도록 젖무덤을 들이밀었다. 때로는 치마를 슬쩍 올려 허벅지가 보이도록 해 은근히 유혹했다.

느낌이지만 오점순은 분명히 자신을 폭포에서 봤던 것이 틀림없었다.

‘나를 음흉한 사내라고 보는군.’

전혀 틀리지 않은 판단이지만 그래도 오점순의 야릇한 시선이 매우 곤욕스럽다. 일단 당장의 위기는 기절하는 연기로 모면했다.

윤 진사가 봉화현으로 길손을 통해 소식을 전했다는 소리를 들었다. 이제 기절하는 연기를 그만해도 된다.

그런 이유도 있었지만 먹으면 배설하는 것이 자연의 이치다. 계속해서 먹고 기절하기를 반복하기가 어려웠다. 배가 부글거리고 울렁거려 미칠 노릇이다.

결국 이곳으로 온지 나흘 만에 온전히 정신이 든 척 행동하는 수밖에 없었다. 이유는 더 이상은 배가 터질 것 같아 참기 힘든 상황에 처했기 때문이다.

행랑채 옆에 있는 뒷간으로 가서 참았던 용변을 보게 됐다. 다행한 것은 화장실 문이 거적때기가 아닌 판자로 잘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쪼그리고 앉아 급한 용무를 보며 세상살이가 너무 어렵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나를 해결하면 또 하나의 난감한 문제가 대두됐다.

‘끙! 어휴! 배 아파 죽을 뻔했어.’

남의 눈을 속이려니 속이 타들어가서 그런지 없었던 변비가 생긴 것 같았다. 엉덩이에 힘을 줘도 목적대로 잘 진행이 안 됐다.

아무래도 앞으로 미음 대신 거친 음식을 먹어야 해결될 문제다.

대충 용변을 마치고 나자 휴지를 찾다가 아차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랑방의 서책을 한 장 찢어서라도 올 걸.’

대충 옆에 널려있는 짚으로 해결하는 수밖에 없었다. 양반의 체모가 정말 말이 아니라는 느낌이 들었다. 환갑을 훌쩍 넘어 수염이 허연 윤 진사는 처음에는 아주 호의적이더니 냉소로 변했다.

자신이 기절하길 반복하자 그 후로는 시선이 곱지 않았다.

‘왜 저 지랄이지?’

윤 진사의 차가운 시선으로 보아 이제 이곳을 떠나야 할 때가 된 것이다. 그러나 처음에는 알랑거리던 윤 진사의 태도변화가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자신을 구해준 은인은 분명하지만 수시로 변하는 태도가 괘씸했다.

‘초시도 못한 늙은이가 진사를 사칭하고.’

불만이 생긴 진짜 이유는 다른 곳에 있었다.

그래도 양반이니 자신의 집이 조금은 사는 가문으로 판단해 횡재했다고 판단했다. 그런데 밖에서 종년이나 종놈들이 수군거리는 소리를 들어보니 그게 아니었다.

자신은 봉화현에 논만 두어 마지기가 있는 정도고 선산이 있으며 부모도 죽고 없는 고아다. 당연히 집에서 부리는 노비도 없으며 별도의 재산도 없는 가난뱅이다. 있다면 최복동이라는 오래전에 선친이 노비에서 면천시켜준 행랑아범 부부가 있을 뿐이다.

‘가난뱅이 양반이야.’

그 부부가 은혜를 갚겠다고 죽은 부모노릇을 대신하며 농사지어서 자신의 뒤를 돌봐주고 있는 처지다. 이런 정보를 알고 나니 재력으로 진사 노릇하며 사는 윤 진사가 매우 못 마땅했다.

‘아고야. 오나가나 그놈의 재물이 문제야.’

전생에서도 큰 부자는 아니던 터라 재물이 없는 가문의 외톨이가 정말 싫었다. 여기에 비하면 전생은 그래도 큰 부자에 속했다.

영주시에 상가건물도 있고 풍기읍에 작은 인삼밭과 사과밭도 있었다. 물론 선산도 있어 약간 풍족한 편이었다.

여기로 올 당시에는 실업자인 백수였다. 그러나 마냥 놀은 것은 아니고 이것저것 해보아 다양한 사회경험이야 아주 많았다.

역사를 좋아해 영주문화원의 회원이고 이사다. 한때는 직장생활도 했었다. 똥 폼을 잡아 보자는 생각으로 서예학원도 몇 년을 다녔다.

어려서 배운 바둑 실력은 영주기원에서 한다하는 최고수에 속했다. 그리고 지방선거에서 선거운동에 참여도 해보고 아무튼 잡스럽게 살았다. 잔머리는 조금 잘 돌아가서 남에게 이용당하는 경우야 전혀 없었다.

배포가 너무 작아서 그런지 부동산 투기나 큰 사업은 벌여 보지 못하고 살았다.

남들이 주변에서 많이 재배하니 따라서 조그만 밭에 인삼과 사과나무를 심은 과수원을 조금 운영하는 정도다.

여기에서 써먹기는 뭔가 부족해 보였다.

‘에효. 여기서 써먹게 생긴 재주가 별로 없어.’

이제 여기를 떠나 봉화현에 있다는 집으로 돌아가 뭔가 새로 시작해야 하는 처지다. 특별한 재주가 없어 앞으로 살 생각을 해보니 아득하기만 했다.

어찌 생각하면 무기력하게 사는 꼬락서니가 너무 보기 싫어 조상님들께 벌주기 위해 여기로 보냈는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이란 특별한 사건이 자신의 신변에서 벌어지면 삶을 되돌아보는 경우가 많았다.

보통의 경우가 이런데 온전한 정신으로는 도저히 이해되지 않는 황당한 상황이다. 대충대충 살았던 과거를 깊이 반성하며 되돌아봤다.

뒷간에서 볼일을 보고 사랑방으로 들어와 앉았다.

막막한 표정이다가 바둑판이 보이자 무심코 앞으로 끌어다 놓았다. 바둑판은 상자와 같이 만들어졌고 양쪽 서랍에는 자연석으로 정성스럽게 다듬어진 바둑돌이 있었다.

바둑판의 여러 곳에 작은 꽃들이 새겨져 있었다. 이런 바둑판을 보자 화점(花點)이란 단어가 이런 것 때문에 생긴 것이라는 것이 떠올랐다. 아울러 조선시대에는 순장바둑을 두었다는 것도 또릿하게 떠올랐다.

‘순장바둑을 내가 잘 두게 될까? 계가하는 방식도 많이 다른데.’

순장바둑은 화점에 순서대로 대칭이 되도록 먼저 놓고 대국하는 방식이다. 그러니 화점 정석을 잘 알면 그런대로 적응이 가능했다.

윤 진사는 바둑을 좋아하는지 고급스러운 바둑판이 둘이나 있었다. 양쪽 서랍에서 흑백 돌을 한주먹씩 꺼내놓았다. 그리고 달달 외우고 있던 화점 정석에서 파생되는 묘수풀이를 해봤다.

똑! 똑!

사랑방에서는 조용히 바둑돌을 놓는 소리가 길게 이어졌다. 이어서 바둑돌을 흐트러트리는 소리도 계속해서 들렸다. 정신이 산만하고 어수선해서 뭐든 세상일을 잊고 시간을 보내볼 생각이다.

‘행랑아범이 찾아오면 같이 떠나는 것이 좋아.’

행랑아범인 최복동은 자신의 선친이 사노비에서 면천과 동시 혼인시켜줬다. 평생 은혜를 갚아야할 은인이라고 해서 자길 돌본 사람이라니 반드시 여기로 찾아올 것이 분명했다.

몸 주인의 삶에 대한 정보는 무심결에 떠올랐다. 그러나 더 자세하게 과거에 대해 억지로 알아내려고 신경을 쓰면 심한 두통과 함께 흐릿해졌다.

바둑판에 돌을 놓으면서 한참 동안 화점 정석의 묘수풀이를 하고 있는데 밖에서 두런두런하는 소리가 들렸다.

“한판 하세.”

“그러죠.”

윤 진사와 박 초시라는 노인이다. 그들은 아주 친하게 지내는 편이다. 자신이 지내는 사랑방에서 같이 바둑을 두길 좋아했다.

최인범은 자주 기절하는 척해서 아직은 두 사람이 바둑 두는 모습을 직접 보지는 못했다. 그래서 그들의 정확한 바둑 실력은 잘 모르지만 별 볼일 없는 것이 분명했다. 때로 사활을 놓고 말다툼을 벌였다.

두 사람의 바둑대결은 어김없이 내기로 두었다. 나중에 보면 박 초시가 쌀 한 두 되 정도를 따는 정도로 끝났다. 그런 식으로 박 초시의 어려운 생활을 돕는다면 좋게 보일 것이다.

그러나 박 초시가 나가면 윤 진사는 식식거리며 화를 냈다. 그런 행동으로 보아 사소한 것도 지길 싫어하는 승부욕이 강하고 욕심이 지나친 성품이 분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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