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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임트레인-13화 (13/519)

13화

<가난한 양반이 택한 길>

밧줄을 팔라는 소리에 무당은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최인범은 다시 빠르게 은수했다.

“저기 색깔이 고운 긴 밧줄.”

“필요하다면 팔지.”

그래서 두 사람의 흥정은 다시 이루어졌다.

소금도 조금 얻고 또한 집신도 두 개를 더 챙겼다. 산나물 반찬과 된장도 쌀을 넘겨주고 바꾸게 됐다. 무당이 쓰는 천을 꼬아 만든 밧줄도 쌀과 바꾸었다. 필요할지 몰라 무당들이 사용하는 굵은 색실도 2뭉치나 바꾸었다.

“또 필요한 것 없냐?”

“없어요.”

천으로 꼬아 단단한 밧줄을 많이 바꾸자 무당은 은근히 걱정됐다. 혹시라도 이놈이 나무에 목을 매달아 죽으려고 이런 것들을 챙기는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설마 그러지는 않겠지.’

거래를 끝내고 나니 면포 반 필과 바꾼 쌀은 모조리 무당에게 다시 넘어가 버렸다. 무당으로도 아주 성공한 거래요. 최인범 역시 만족할 만한 거래다.

“저 갑니다.”

“총각! 또 보자고.”

무당은 수월하게 거래가 이루어져 만족했다. 하지만 조금 아쉬움은 있었다. 잘만 꼬이면 다소 멍청하게 생긴 총각 놈의 아주 튼실해 보이는 하초 맛을 볼 수도 있었는데 급하게 떠나보내는 것이 섭섭했다.

사실은 덩치만 크지 아직 어려서 하초가 단단히 여물지 않은 것을 전혀 모르니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다. 무당은 멀어지고 있는 총각을 보며 아쉬움으로 다시 크게 외쳤다.

“총각! 꼭 다시 만나!”

그 소리를 들으며 무당의 의미 삼삼한 눈빛이 떠올라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나중에 커지면 보자고.”

자신의 목적을 이루고 당집을 나서자 발걸음이 조금 가벼워졌다. 처음 접한 무당을 통해 자신이 사람들 틈으로 숨어들어 살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겼다.

호패 주인이 20살인 약관이라니 조금만 위장하면 남의 눈을 속일 수 있었다.

당집에서 무당과 거래를 끝내고 헤어진 뒤·····.

숨겨 놓은 면포를 챙기고 나자 슬며시 개울로 가서 시커먼 진흙을 얼굴에 대고 박박 문지르고 대충 씻었다. 얼굴이 조금 검어 보이게 되며 조금은 나이가 많아보였다.

‘됐어! 이런 정도면 포졸이 이상하게 보지 않을 거야.’

일단 범죄 현장인 이곳 충청도만 무사히 벗어나면 생각보다 수월하게 녹아들어가 살 수 있다고 판단했다. 그런 자신감을 가지고 죽령으로 올라가는 길목에 들어섰다.

웅성웅성. 와글와글.

마침 단양을 떠난 등짐을 진 상인들이 떼로 모여 소란스럽게 길을 갔다. 그래서 슬며시 상인들의 틈에 끼어서 죽령으로 가게 됐다.

다행이 누구하나 자신을 보고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등이나 이마에서 땅방울이 나도록 매우 긴장했다. 그러자 상인들 중에 한 사람이 안타까운 표정으로 바라봤다. 상인이 보기에 아직 힘든 고갯길은 멀었는데 저러면 죽령을 넘기 힘들어 보였다.

이윽고 포졸 3명이 기찰하는 장소에 도착했다. 길게 늘어선 상인들이나 행인들은 각기 호패를 허리춤에서 꺼내 손에 들고 순서를 기다렸다.

자신의 순서가 되자 호패를 넘겨주며 말했다.

“풍기로 면포 팔러 가요.”

“그래?”

포졸은 별로 관심이 없다는 듯이 호패를 이내 돌려주었다. 호패에 적힌 글씨를 볼 생각도 하지 않고 그냥 건성으로 검문하는 것이다.

그러자 포졸이 혹시 ‘한자의 천자문도 잘 모르는 놈이 아닌가?’ 하는 느낌이 들었다.

조선시대의 경찰에 해당하는 포졸은 최하층으로 천대 받던 신분이다. 그러니 어려운 한문 공부를 했을 리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포졸들의 기찰을 통과하자 안심이다. 주변의 자연 경관을 살피는 여유가 생겼다. 아름드리나무가 가득한 주변은 가을의 아름다운 풍경을 자랑스럽게 뽐냈다.

금수강산이란 단어는 아마도 ‘한반도의 가을 풍경을 칭하는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었다.

고갯길로 오르자 끝없이 이어지는 산자락이 굽이굽이 펼쳐졌다. 산에 보이는 단풍나무들이 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노랗게 변한 나뭇잎들은 정말 비단결 같이 아름다웠다. 계곡에 흐르는 맑은 물소리는 저절로 지친 가슴을 시원하게 해주었다.

이제 두려움도 사라지고 여유까지 생겼다. 그는 상인들 옆에서 그들이 나누는 사소한 대화를 유심히 들으며 걸어갔다.

“호랑이가 사람들을 해치는 일이 많아 큰일이야.”

“이게 무슨 변고인지 모르겠어.”

장사하기 위한 대화가 주로 많았다. 어디로 가야 벌이가 좋다는 정보를 주고받고 있었다. 40대인 상인 두 명은 다른 사람들과 달리 끝없이 대화를 나누었다.

하는 말을 들어보니 20년 정도를 같이 장사를 다닌 친구 같았다. 그래서 그들은 서로 농밀한 농담을 했다.

“자네 풍기로 가면 죽죽이 주막집으로 갈 거지?”

“왜? 주모가 자네의 첩이라도 되나? 자네는 항상 그 주막으로 가려고 하나?”

“이 사람아! 주모가 어디 내 여자인가? 자네 여자지. 지난번에 옆방에서 듣고 있는 사람들 생각은 안하고 흐드러지게 재미 보던데.”

“자네도 알았나? 그 여자는 주모가 아니야. 다른 여자지.”

“나는 주모인 줄 알았는데.”

이런 대화를 나누면서 그들은 죽죽이 주막이 다른 주막보다 인심이 후해 여비가 덜 든다고 했다. 이런 저런 대화를 나누던 그들은 다시 호환에 대해 말했다.

“호환 때문에 황해도와 전라도에서는 도적이 많아 졌다는군.”

“그런가? 전라도의 남쪽 지역에 도적이 많은 것은 금소초문인데.”

“쌀이 필요한 왜놈들이 자꾸 쳐들어오니 먹고살기 힘들어 도적이 늘어난 모양이야. 더구나 그쪽 지리산 자락에 호랑이가 더 많이 나타나서 살기가 더 힘들고.”

“그런가? 그쪽은 논이 많은데 살기가 힘들다는 것이 나는 이해가 안 돼.”

호랑이가 많이 출몰해 사람을 공격하면 상인들은 장사하기가 힘들어진다. 그들은 대부분 험한 길을 이동해 각 지방의 물가들의 시세 차익을 노리고 장사한다. 그 때문에 이동이 어려워지면 생활하기가 무척 힘이 든다. 주로 건어물을 취급하는 상인들이 대화를 나누었다.

“전라도로 가서 건어물을 가져와 장사하려 했더니 후일로 미뤄야 되겠어.”

“왜놈들이 자주 나타나는 위험한 전라도의 남쪽으로 가지 말고 충청도의 강경이나 광천 장으로 가서 새우젓과 건어물을 사다가 장사해보지.”

“그럴까?”

이곳 생활에 대한 정보가 절실하게 필요해 상인들이 나누는 사소한 대화에도 귀를 기울여 듣고 있었다. 대화를 들어보니 왜놈들이 이 무렵에도 전라도 남쪽 섬 지역을 자주 침범하는 것 같았다.

올해가 정유년이라니 앞으로 60년 후에 임진왜란 이후 왜가 다시 침입한 정유재란이 일어나게 된다.

‘나와는 무관하군.’

군인출신이라 아무래도 왜의 침범으로 벌어진 전쟁에 관심이 많았다. 하지만 임진왜란은 아직도 먼 훗날에 벌어질 전쟁이다.

상인들이 나누는 이런 저런 대화를 들으며 문뜩 경상도 사내를 떠올렸다. 어쩌면 경상도로 넘어가서 다른 최인범을 만날지 모른다는 생각으로 조금은 초조해졌다. 그저 예감일 뿐이지만 그 사내를 만나면 서로 도와가며 잘 지낼 수 있을 것 같았다.

‘만나면 서로 알아보려나?’

이런 생각도 들지만 때로는 자신의 정체를 잘 아는 그를 ‘죽여야 하지 않나?’ 하는 냉혹한 계획도 떠올랐다.

살기 위해서는 걸림돌은 무조건 무력을 통해 제거해 버릴 각오다. 잡다하게 생각하면서 죽령을 넘어가는 최인범의 발걸음은 그래도 처음보다 무척 가벼워졌다.

처음에는 힘들어하며 진땀을 흘리더니 이제는 오히려 펄펄 날고 있었다. 그런 최인범의 모습을 바라보던 상인들이 감탄했다.

“허! 힘이 장사군. 힘든 고개를 저렇게 수월하게 걷다니.”

“나도 소싯적에는 저랬다고.”

“헛소리 하네, 내가 자네의 과거를 모르나? 처음에 여길 넘으며 너무 힘들어 숨넘어가겠다고 등짐을 버리려던 사람이······.”

새로운 곳으로 떨어진 후 어찌된 일인지는 모르나 조금 변했다. 이곳 사람들 보다는 덩치도 크고 힘도 좋은 것은 사실이었다. 그리고 눈과 귀도 조금은 좋았다.

본시 체구가 크고 체력이 아주 좋았다. 그런 본래의 신체적 조건보다 약간 더 좋아졌으니 앞으로 살아가기에는 조금 수월할 것이다.

충청도에 떨어진 또 다른 최인범이 죽령을 넘어 경상도로 향하고 있는 가운데····.

이미 경상도의 풍기에서 사람들과 접한 최인범은 그 나름대로 살아가기 위한 부단한 노력을 남몰래 했다.

세상살이란 그저 저절로 생기는 것은 전혀 없었다. 어떤 것이던 그만한 대가를 반드시 치러야 얻을 수 있다. 두 사람은 살아남기 위해 각자의 방식으로 노력하며 배워가고 있었다.

한편 경상도 풍기의 윤 진사 댁 사랑채에서 누워있는 최인범은 참으로 난감한 상황에 봉착됐다. 뭐가 잘 못 되어도 크게 잘못 됐다.

자신에게 벌어진 황당한 사태가 그저 꿈속인 줄만 알았다.

호랑이에 놀라 기절했다가 깨어나 보니 뒷머리가 깨져있었다. 그거야 뒤통수에 가벼운 통증만 오는 정도라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문제는 외부의 상처가 아니다.

머릿속이 마구 뒤엉키는 느낌이 들었다. 뇌 속에서 벌레가 기어 다니는 괴이한 고통이 생겼다.

‘아이고 머리야!’

깨어나서 바로 시작된 고통은 아니다.

집주인인 윤 진사와 이런 저런 대화를 나누고 뒤에 생긴 두통이다.

최인범은 윤 진사와 대화를 나누는 과정에 자신이 처한 상황에 대해 정확하게 알게 됐다. 자신이 꿈이 아닌 현실로 요상하게 조선의 중종 말기시대로 왔다는 사실을 알고 나자 생긴 혼란이다.

시대를 정확하게 알게 된 것은 윤 진사의 자랑 때문이다.

윤 진사는 파평 윤씨로 왕비와 친척이라며 장차 아들이 크게 출세할 것이라고 호언장담했다. 윤 진사와 대화를 나누다 보니 자신이 처한 현실을 정확하게 알았다.

자신이 진짜로 조선시대 속으로 왔다는 것을 알자 너무 큰 충격을 받았다. 그것을 느낀 순간 머리가 띵하면서 어지럽더니 그만 쓰러지고 말았다.

충격이 너무 커서 졸도해 버렸다. 기절한 상태에서 전혀 경험해 보지 못한 또 다른 세상의 모습을 봤다. 어린소년이 사찰에 처박혀 공부하는 모습이 생생하게 나타났다.

일찍 부모를 잃고 가난을 면하고자 절에 들어가 죽어라 학문에 매진하는 광경이다. 꿈속이지만 너무도 생생한 고난의 연속인 삶이다.

‘후우! 모두 현실이야.’

아주 긴 잠에서 깨어난 그는 지금 처한 현실을 조금씩 받아들였다. 그러나 그렇게 생각한다고 해서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은 아니다.

‘적응해서 살면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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