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화
다부진 마음으로 아랫배에 힘을 주었다. 거의 뻣뻣하게 걷는 걸음걸이를 약간 변경했다. 지쳐서 허우적거리는 모양새로 당집으로 향했다. 배우는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닌 듯 뭔가 어색한 걸음걸이다.
당집 가까이로 가며 입을 벌리고 혀를 약간 내밀며 헉헉거렸다.
“아이고! 나 죽네. 핵! 핵!”
마치 먼 길을 달려와 너무 힘들다는 표정을 지으며 엄살을 토했다. 그러자 당집의 작은 부엌에서 솔가지를 때서 아침밥을 지으려던 무당이 얼굴을 밖으로 내밀며 바라봤다.
약간 놀란 표정인 무당은 호기심이 가득한 얼굴로 물었다.
“무슨 일이냐?”
가까이 다가서서 보게 된 무당은 나이가 의외로 젊어 보였다. 30대 중반으로 보이는 무당이다. 그러나 이곳 사람들의 나이는 종잡을 수 없었다.
사내는 너나 할 것 없이 수염을 기르고 있었다. 여자들은 어려도 쪽진 머리를 하고 있으니 보기보다 의외로 나이가 어린 경우도 있었다.
자신이 나이가 많은 행색을 하면 경계할 지도 모른다. 그래서 덩치만 커다란 바보 행세가 적당하다고 판단해 급하게 입을 열었다.
“신녀님, 빨리 나오세요. 저 급해요.”
난대 없이 꼭두새벽에 찾아온 얼굴이 희멀건 한 총각 놈이 숨을 헐떡이며 급하다고 했다. 무당은 무슨 생각을 했는지 빙그레 웃었다.
분칠은 안했는데도 화사하게 웃으니 고와보이는 얼굴이다. 더구나 눈가에 웃음을 지으니 요염해 보였다.
그녀는 새벽에 사라진 사내의 모습이 떠올랐기 때문에 웃고 있었다.
그 사내는 산에서 사는 놈으로 산적이다. 오래전에 식량을 조달하려고 마을로 숨어들어와 자신을 겁탈한 놈이다.
참으로 요상한 것이 남녀 간에 벌어지는 밤일.
양민출신으로 신병이 걸려 무당 짓하는 자신은 이제까지 여러 사내를 접해 봤다. 하지만 운우의 기쁨을 전혀 느끼지 못하고 살았다. 그러나 자신을 겁탈하려는 사내와 접하게 되자 놀라운 사태가 벌어졌다.
난생 처음으로 극락이 바로 이런 곳이라는 큰 기쁨을 느끼게 됐다. 그래서 자신을 강제로 접한 사내에게 당집에 있던 식량을 모조리 털어주어 곱게 돌려보냈다.
그 후로 가끔 식량이 필요하면 자신을 찾아오는 도적놈이다.
그놈은 찾아오면 항상 하는 말이 ‘나 급해!’하면서 자신을 우악스럽게 범했다. 그 때마다 거절하는 몸짓으로 반항하면서 접하게 되는 운우지정은 참으로 놀라운 효과가 있었다. 그놈과 접할 때마다 자신은 극락과 지옥을 수도 없이 넘나들었다.
사람이란 요상해 습관인지 모르나 ‘저 급해요.’하는 말에 아래 입술이 금방 벌렁됐다. 어리게 보이는 총각 놈과 어울려 한 판 흐드러지게 요분질을 해보고 싶은 충동이 불숙 치밀었다.
무당이 자신을 보며 빙그레 웃기만하며 점점 얼굴에 홍조를 띄웠다.
그러자 최인범은 매우 난감했다.
자신이 한마디 하면 열 마디를 상대방이 해야 자신에게 꼭 필요한 정보를 얻을 수 있다. 그것이 바로 적진에서 민간인과 접해 자신의 정체를 들키지 않고 정보를 수집하는 방법이다.
‘어라, 요상하게 돌아가네.’
이렇게 생각하고 이번에는 두 번째로 한마디를 던졌다.
“사람 좀 살려 주세요.”
다급하게 애원하듯이 사정했다.
손에 면포 한 필을 들고 서서 사정하는 모습을 바라보던 무당은 그제야 움직였다. 그녀는 빠르게 부엌에서 나와 당집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며 물었다.
“무슨 일인지 들어와서 자세히 말해 봐!”
무당의 물음에 자신을 다른 사람이 보게 되면 좋지 않다고 판단해 빠르게 안으로 따라 들어갔다.
당집 안에는 부처님을 모시고 그 옆에는 이상한 모습의 장군상이 모셔져 있었다. 자세히 보니 남이장군라고 적혀 있는 것으로 보아 장군 신을 모시는 무당이다.
장군 신으로는 무력이 뛰어나고 유명한 최영장군이나 남이장군을 모시는 경우가 많았다. 이시애의 난을 평정하고 여진을 정벌한 남이장군은 세조와 예종 시절의 뛰어난 젊은 무장이다. 20대의 나이에 병조판서를 지냈으나 젊은 나이에 결국 역적으로 몰려 비참하게 생을 끝냈다.
당집에 남이장군을 모셨으니 알아낸 사실이 있었다. 살아 있는 사람을 장군 신으로 모시는 경우는 없으니 조선 초기는 아니라고 판단됐다. 그렇다면 다음 단계를 물어서 추측해내야 한다.
슬며시 입을 열었다.
“이순신 장군이 더 훌륭한데.”
뜬금없이 당집으로 찾아와 살려달라고 하더니 들어 보지 못한 사람을 장군이라고 했다.
무당은 ‘이순신?’하며 생각해 보았지만 전혀 모르는 이름이다. 어디서 들어보지도 못한 이름을 말하며 장군이라니 무당은 너무 어이가 없었다.
그래서 까랑까랑한 목소리로 호통 쳤다.
“이놈아! 네놈은 진짜로 죽을 때가 된 모양이구나. 감히 어디서 빌어먹는 놈인지 모르는 놈을 들먹이며 고매하신 남이 장군님을 욕보이려고 하다니·······. 네 이놈!”
최인범이 생각한 것은 바로 지금 사용하는 격장지계(激將之計)다. 상대방의 미묘한 곳을 찔러 말을 많이 하게해 표시 나지 않도록 필요한 정보를 수집할 요량이다.
분명 이순신 장군을 모른다니 임진왜란 전 시대가 분명했다. 그래도 실수가 있으면 안 되니 다시 한마디 던졌다.
“조선 강토를 유린한 왜놈들을 물리친 이순신 장군인데.”
“허! 왜놈들이 강토를 유린하다니. 왜놈들이야 수시로 쳐들어오지만 별 볼일 없는 해적들이라 모조리 우리 수군에게 패해 수장되는데 무슨 소린가?”
이런 식의 답변을 듣자 조금 분석하기가 난해했다. 더 이상의 시대를 알기 위한 정보 수집을 진행하기가 어렵다. 그래서 약간 위험성이 있는 극약 처방인 말을 던졌다.
“광해군이 살았으면 좋았을 거야.”
“광해군?”
“예! 광해군요.”
무당은 전혀 모르는 소리라는 표정을 지었다.
‘이놈이 실성했나?’
꼭두새벽에 찾아와 헛소리하는 놈은 무당 짓 10년 만에 처음이다. 무당은 황당하고 별 미친놈을 다 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순발력 좋게 다른 말로 바꾸었다.
“아하! 연산군인가?”
이 소리에 무당은 기겁하며 크게 외쳤다.
“주상께서 폐주 연산군을 몰아내고 나라를 다스린 지 벌써 30년이 지나갔는데 연산군이라니········. 네 놈이 정녕 죽으려고 환장했구나.”
이런 무당의 호통에 더 이상의 시대 알아내기 수작은 필요 없었다. 중종반정(中宗反正) 이후로 아직은 중종이 죽기 전이라는 것을 확실하게 알았다.
목적을 반은 이룬 뒤라 여유롭게 입을 열었다.
“저······. 우리 도련님이 정축(丁丑)년 정월 초하루 오시 생인데 점쟁이 말에 올해 호환으로 돌아가신다고 하니 한번 어떤지 봐주세요.”
최인범이 이렇게 말하자 무당은 손가락을 집어서 뭔지 모르지만 나름 계산해보는 것이다. 그리고 한참 시간이 지나자 조용히 입을 열었다.
“올해가 정유라 이제 약관의 나이인데 호환이 있을 액운이로군. 내가 부적을 써서 줄 것이니 항상 지니고 다니면 장군님의 영험으로 피할 수 있어.”
무당은 점괘가 그리 나온 것인지 아니면 상대방의 말에 따라 적당하게 응수해주는지 모르나 호환의 염려가 있다고 풀이했다.
무당의 말에 놀란 표정을 지으며 급하게 요구했다.
“그렇군요. 부적을 써주세요. 저 도련님께 빨리 돌아가야 합니다.”
무당의 말로 필요한 부분에 대해 쉽게 알게 됐다. 그래서 빨리 떠날 생각으로 부적을 써달라고 재촉했다. 목적을 달성하고 보니 면포 1필을 그대로 넘겨주기 뭐해 슬며시 말했다.
“저, 부적 값을 제하고 나머지는 주세요.”
“알았어!”
무당이 알아서 복채나 부적 값을 받으라고 칼자루를 넘기는 방법을 사용했다. 언젠가 본 역사드라마에서 이런 식의 거래하는 장면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부적을 써서 넘겨준 무당은 자신에게 밀쳐진 면포를 들고 잠시 고민했다. 생각 같아서는 한 필 모두를 꿀꺽 삼키고 싶지만 그래도 그건 과욕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사악! 찌직!
슬며시 가위를 가지고 반 필을 싹둑 잘라서 챙겼다. 꼭두새벽에 나타난 요상한 녀석 때문에 당분간 먹을 식량은 벌었다. 요즈음 단양 장에서는 면포 한 필에 쌀 2말을 살 수 있으니 오늘 쉽게 큰 수익이 생겼다. 보아하니 총각 놈이 다소 어수룩해 보여 무당은 남은 면포 반 필도 욕심이 났다.
“너 쌀이 필요 없냐? 필요하면 면포와 바꾸자. 내가 여덟 되 주마.”
반 필이면 10되인데 2할을 삼켜볼 생각으로 이런 제안을 했다. 무당이 면포가 필요한 이유는 산적인 사내가 추운 겨울에 산에서 춥게 지낼지 모른다는 걱정 때문이다. 그 사내에게 솜을 넣어 만든 누비바지저고리를 만들어 줄 생각이라 면포가 많이 필요했다.
“그러죠.”
무당의 제안에 이의를 달지 않았다. 면포를 넘겨주고 쌀을 받아 등에 짊어졌다. 그리고 무당이 써준 부적은 아주 소중하다는 듯이 갈무리했다.
뭔가 이득이 있으니 무당이 이런 거래를 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의외로 장물에 해당하는 면포의 시세를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었다. 조선시대에 화폐가 어느 정도 유통된 시기는 임진왜란 이후다. 그러니 지금 시대는 면포나 미곡이 화폐 구실을 한다.
다음 행보가 결정되지 않아 마루에 앉아 뭉그적거렸다. 그런 모습을 보던 무당이 부엌으로 들어가며 슬며시 제안했다.
“너 쌀 한 되만 내놔라. 그럼 밥 지어 줄게.”
무당의 말에 마치 큰 횡재라도 생긴 반가운 표정으로 쌀자루를 넘겨주었다. 그러자 8되를 넘겨 줄때는 됫박을 야박하게 깎아서 담더니 이번에는 됫박을 고봉으로 만들어 퍼갔다.
‘약은 수작 부리네.’
그러나 알고도 모른 척 다른 쪽으로 시선을 돌리고 있었다. 탐욕스러운 사람은 재물에만 눈이 어두워 다른 것을 볼 수 없다. 그러니 자신의 정체가 드러날 리 없어 좋은 상대를 만났다.
이윽고 얼마 시간이 지나자 아침 밥상이 차려졌다. 큰 사발에 흰쌀밥이 수북하게 담기고 반찬으로는 산나물 무침이 있었다. 짜디 짠 장아찌도 내어 놓고 구수한 된장도 보였다.
지금까지 깡 보리밥만 겨우 먹어본 처지다. 이게 무슨 호사냐 싶었다. 눈이 휘둥그레져 급하게 나물과 된장을 밥과 같이 비벼서 퍼먹었다. 허겁지겁 밥을 먹으며 또 다른 제안을 무당에게 슬며시 했다.
“주먹밥 만들어 줘요.”
“알았어!”
무당으로는 조금 모자라는 총각 놈이 아주 만만해 보여 최대한 우릴 좋은 기회다. 그에 반해 최인범은 자신이 필요한 부분을 쉽게 해결해 주는 탐욕스런 무당이 만만했다.
“다른 것은?”
등에 진 짐이 욕심난 무당을 슬며시 아주 기묘한 신호를 보냈다. 슬며시 검은 무명치마를 걷어 허연 허벅지가 약간 드러나도록 했다.
그러나 최인범은 별로 이런 수작에 감응이 없어 다른 곳으로만 눈길이 갔다.
“저기 밧줄도 파나요?”
“밧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