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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임트레인-11화 (11/519)

11화

개가 흘린 피 냄새나 흔적 때문에 자신의 정체가 드러날 수 있다고 판단했다. 빨리 이 자리를 뜨는 것이 좋았다. 동네에 피 냄새를 잘 맡는 개가 없으라는 법이 없으니 피하는 것이 상책이다. 최대한 빨리 산속으로 들어가 개울물에 옷을 빨아야 죽령을 넘을 수 있다.

조심스럽게 개의 사체를 옆으로 밀쳤다. 피 뭍은 부엌칼을 짚으로 닦아 갈무리하고 밖으로 기어 나왔다.

초저녁부터 일찍 잠들어 몇 시간을 푹 자서 그런지 몸은 아주 개운했다. 짚더미 밖으로 나와 남녀가 정사를 벌인 장소를 확인했다.

자신이 그들에게 들키지 않은 이유를 조금은 알 수 있었다. 20미터 정도 길이인 짚더미의 양쪽 끝에서 서로 있었으니 신경을 쓰지 않으면 모를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 거리에 여자의 감창소리나 사내의 급한 호흡이 바로 옆에서 들린 것으로 알았으니 조금 이상했다.

‘내 귀가 전보다 좋아졌나?’

특수훈련을 오래 받았으니 후각이나 청각이 예민했다. 그러나 그건 과거의 일이고 지금은 전혀 다른 상황이다. 그때를 기준해서 판단해도 후각과 청각이 좋아진 느낌이다.

‘살아남기 위해서는 좋은 징조야.’

남보다 조금이라도 뛰어난 점이 있다면 위급한 상황에서 살아남을 확률이 그만큼 높아진다. 이렇게 생각하고 조심스럽게 아낙네가 숨긴 것을 찾기 시작했다.

부스럭부스럭.

볏짚을 10여단 옮기며 찾자 커다란 보따리 두 개가 보였다. 급하게 보따리를 풀자 그 안에는 남자의 무명바지저고리 버선등이 있었다. 그리고 면포 3필이 보였다. 또한 사내에게서 받아 챙긴 나무로 만든 투박한 호패가 들어있었다. 다른 보따리에는 여자 옷 한 벌과 면포 7필이 있었다.

‘좋았어. 의외로 쉽게 호패를 구했어.’

호패를 구하고 면포까지 생기자 신이 났다. 이제는 살아갈 수 있는 기본적인 여건이 생겼다. 보름달이고 별이 많아 흐릿하나 호패의 글씨를 대충은 읽어 볼 수 있었다.

호패 주인인 사내는 양인의 신분이라 그런지 소목방패다. 정축(丁丑)생이고 이름은 조갑중(趙甲中)이라고 적혀 있었다.

일단 자신에게 가장 절실한 호패를 구하기는 했다. 하지만 자신의 어려진 얼굴과 사내의 나이 차이를 정확하게 모르니 난감했다.

은근히 걱정거리가 생겼다.

‘내가 호패의 나이에 비해 너무 어려 보여도 안 되는데.’

하나의 문제를 해결하면 또 다른 문제가 계속해서 발생했다.

갑자, 을축, 병인하며 60갑자를 전부 외울 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것이 어떤 형식으로 만들어 진다는 것은 잘 안다. 그러니 올해가 무슨 해인지 정확하게 알기만 하면 다음 단계야 진행이 가능했다.

누군가에게 접근해 태세(太歲)를 알아보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면 지금과는 달리 사람들과 접촉해서 서로 어울려야 된다.

‘난제로군.’

참으로 답답한 노릇이다. 소심한 성격이 아니지만 상황이 상황인지라 매사 조심스러웠다. 옷에 묻은 피를 지우는 것이 우선이다. 서둘러 두 개의 보따리를 다시 여미고 서둘러 짚더미를 벗어났다.

어두운 숲속으로 들어가 풀숲에 숨겨놓은 지게를 찾았다. 지게를 지고 빠른 속도로 이동했다.

낮에는 오히려 나무꾼으로 위장하니 이동하기가 수월했다. 하지만 지금은 깊은 밤이라 지게를 지고 간다는 것이 참으로 어색했다. 그래서 더욱 조심하며 천천히 능선을 타고 이동했다.

이윽고 작은 개울이 있는 곳에 도착하게 됐다. 흔적지우기가 아주 적당한 곳 같아 멈추었다. 지게를 버리고 피 묻은 옷을 벗고 갈아입었다. 새로 만든 무명옷이라 자신이 입고 있던 낡은 무명옷보다 좋았다. 너무 깨끗해도 곤란한 문제가 있지만 밤에 이동하다가 보면 자연히 더러워 질 것이다.

파파파박.

서둘러 개울가의 물렁한 땅을 파고 나서 피 묻은 무명옷을 묻었다. 여자 옷은 일단 갈무리하기로 정하고 면포 10필도 챙겨 봇짐장수의 보따리처럼 만들었다.

‘면포가 있어도 가치를 정확하게 모르니 사용하기도 곤란해.’

휴대하게 되는 물품이 많아지자 아까는 걱정되지 않던 새로운 걱정거리가 생겼다. 아무리 성인의 두뇌와 지식을 지니고 있다지만 지금은 모두 써먹기 힘든 것들이다.

‘쌍! 졸지에 바보 수준으로 변했어.’

산속으로 들어가 화전을 일구거나 산적 질로 살아가려도 아주 기본적으로 물가들의 가치는 알아야 한다. 그래서 계속 고민에 빠져들었다.

‘호패를 챙겼으니 사람들 틈으로 숨어볼까?’

사회적 동물인 사람이라 아무래도 혼자서 산속에서 살기 힘들었다. 무술을 수련하거나 도를 터득한다고 산속에 사는 사람들도 모두 사회와 연결되어 살아간다.

일단은 무작정 살아남아야 한다. 하지만 그래도 어떤 삶을 사느냐가 중요했다.

워낙 막막한 상태라 강원도로 가서 산 도적이 되거나 혹은 화전을 일구며 산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여기 조선시대에서 적응이 가능하면 사람들과 같이 더불어 사는 것이 더욱 좋았다.

자신에게 닥친 큰 위기지만 어쩌면 이것이 새로운 삶을 살게 되는 좋은 기회가 될 수도 있었다.

이런 생각을 하며 드디어 ‘모 아니면 도.’라는 결심으로 사람들 틈에 잠입을 시도하기로 결정했다.

‘한번 시도해 보자고.’

산악 게릴라 훈련도 받았지만 도시 게릴라 훈련도 받았으니 그런 점을 잘 활용하면 적응도 가능하다고 판단했다.

결심이 서자 그에 따른 사전준비는 반드시 필요했다. 자신이 가진 면포를 최대한 활용해야 한다.

‘처음 접촉할 대상을 먼저 정해야 돼.’

자신이 처음 만날 대상을 두고 깊은 고민 속으로 빠져들었다.

과연 누가 가장 적당한 인물일까?

행인, 농부, 장사꾼, 걸인, 장애인 등 많은 부류의 사람들을 대상으로 나름 득실을 따져 판단했다. 불이익을 감수하더라도 안전만 확보된다면 면포를 모두 줘버려도 상관없었다.

한참 고민하던 그는 드디어 기발한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그래, 무당이 제일 적당해.’

자신에게 필요한 정보는 바로 호패에 적힌 인물의 정확한 나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올해가 무슨 해인지 알아야 한다. 면포의 가치를 모르니 면포로 필요한 것을 얻기가 쉽지 않았다.

무당은 때로 점(占)도 치고 사주팔자(四柱八字)를 풀이하는 경우가 있었다. 무당에게 주어야 하는 보수야 천태만상이다. 복채를 많이 준다고 해도 전혀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무당은 제일 하층민이니 다소 이상해 보이는 자신에 대해 관아로 가서 발설하지 않을 것이다. 또한 무당이 사는 당집은 일반인의 출입이 드문 외진 곳에 있다. 그러니 필요한 내용을 알아낼 시간만큼 숨어서 지내기도 적당했다.

대화중에 이상한 낌새를 챘다는 것을 느끼면 즉시 살해해 버려도 남들에게 당분간은 들키지 않을 수 있었다.

‘됐어! 당집부터 찾아보자고.’

무당을 만나서 어떤 식으로 말할 지는 움직이면서 결정하기로 했다.

산의 능선을 따라 이동해 조심스럽게 당집이 있어 보이는 산자락에 도착했다. 하지만 커다란 고목에 오색 천들만 걸려있고 근처에 당집은 보이지 않았다.

막상 사람들과 접촉하기로 결심은 했지만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두리번거리던 그의 눈에는 마을 건너편으로 당집이 희미하게 보였다. 처음 접촉할 사람으로 정한 무당을 만나기가 쉽지 않았다.

‘세상살이 쉬운 일은 없어.’

약간 짜증이 났지만 그래도 긍정적으로 생각했다.

당집으로 가는 이동로를 정하기 위해 조심스럽게 살폈다. 다행히 이곳 산자락과 마을 건너편의 당집까지는 길게 이어진 개울이 있었다.

개울은 주변의 밭이나 논보다 깊어 조금만 조심하면 마을에서 보이지 않을 정도다.

관찰을 끝내고 이동로를 정하자 산속하게 움직였다.

다다다다

바쁘게 움직였지만 어느새 시간이 흘러 새벽이 다가오니 꾸물거릴 여유가 없었다. 개를 죽였고 불륜을 저지른 아낙네가 숨긴 면포를 획득했으나 아직은 안전하다고 판단했다.

하지만 모든 것이 자신의 뜻대로 돌아간다고 볼 수 없었다.

빠르게 움직여 개울로 들어선 뒤 약간 허리를 낮추어 신속하게 이동했다. 움직이는 그의 동작은 아주 은밀할 수밖에 없었다.

컹! 컹!

이때 빠르고 은밀하게 움직이는 그의 행적을 발견한 개가 크게 짖었다. 한 마리가 먼저 소리치자 이어서 다른 개들도 따라서 짖어댔다.

컹! 컹! 왈! 왈!

많은 개들이 거의 동시에 미친 듯이 울어댔다.

마을의 초가에서는 하나둘 등잔불빛이 들어오고 있었다. 개들은 마치 호랑이라도 나타난 것 같이 행동해 사람들은 두려워서 불을 켠 것이다.

그런 마을의 모습을 바라보다 더욱 빠른 속도로 이동했다. 다행한 것은 울고 있는 개들 중에 단 한 마리도 자신에게 달려오는 놈이 없다는 것이다.

여기서 들키면 큰일이다. 그래서 이마에서 땀이 흐를 정도로 빠르게 달려갔다.

“홋! 홋!

뛰어가며 가쁜 숨을 토해냈다. 그러자 동네의 개들은 더욱 극성스럽게 짖어댔다.

왈왈! 컹컹! 컹컹!

다소 소란스러운 가운데에도 무사히 당집이 있는 산비탈까지 안전하게 도착할 수 있었다.

“헉! 헉!”

목적지에 무사히 도착해 가픈 숨을 몰아쉬며 사람이 보이지 않는지 조심스럽게 주변을 살폈다. 호랑이가 무섭기 때문인지 사람들이 전혀 보이지는 않았다.

그가 도착한 산비탈은 당집과는 50미터 정도 떨어진 곳이다. 바로 옆에 소로인 산길이 있고 주변에는 작은 소나무 숲이 있었다.

‘여기서 기다리다가 날이 새면 당집으로 들어가면 되겠어.’

이렇게 마음을 정하고 서둘러 등에 짊어진 면포 꾸러미를 내려놓았다. 그중에 한필만 따로 꺼내 놓았다. 면포 한필만 손에 들고 당집으로 갈 생각이다.

사람들 틈에 잠입하기로 결심한 처지다.

이제부터는 눈으로 보아 배워야 할 것들이 아주 많았다. 아주 사소한 것들이라도 그에게는 살아남기 위한 귀중한 공부다.

여기서 보낸 시간은 며칠간이라는 짧은 기간이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보낸 시간들을 뒤돌아보며 살아가기 위해 알고 있어야 할 점들을 떠올렸다.

가난한 백성인 산골마을에서의 장례 방법, 그들의 옷차림, 짧은 순간에 뒤진 부엌의 살림살이, 기찰하는 포교들의 행동이나 그에 응하는 사람들의 동작들·······.

그리고 몰래 숨어서 봤던 죽령을 넘어가는 선비의 모습들이나 장사꾼들. 이러 저런 생각을 떠올리며 역사드라마에서 보았던 사실과 연결해 다른 점이 있는지 비교했다.

‘임꺽정 드라마 내용과 약간 흡사하군.’

어찌 생각해보면 또 전혀 다르다는 느낌도 들었다. 특히 길을 지나가는 선비가 도포를 입고 있지 않다는 점이 유달리 눈에 들왔다.

‘양반하면 도포인데 이상해.’

대부분의 인생을 군인으로 살아서 애정드라마나 영화보다는 전투장면이 나오는 역사드라마 쪽에 흥미가 많았다. 전역한 후에도 주로 그런 역사드라마나 영화를 좋아했다.

덜컹!

잠시 이런 생각을 하던 그의 눈에 사람이 보였다. 당집에서 문을 열고 밖으로 나오는 건장한 사내다. 그 사내는 방에서 나와 주변을 두리번거리더니 아주 조심스럽게 산속으로 갔다.

‘꼭두새벽에 어딜 가지?’

사내의 등에는 식량이 들어 있어 보이는 커다란 자루를 짊어졌다. 당집을 떠나는 사내가 조금 이상해 보였다. 사내가 가는 산 쪽으로는 마을이 전혀 없었다.

이른 새벽에 일어나 산속으로 가고 있으니 뭔가 남모를 사연이 있는 놈이 분명했다. 상당히 조심스럽게 행동하고 수시로 주변을 살폈다.

두리번두리번

마치 자신의 행동을 남들이 본다면 꼭 저 사내와 같아 보일 것이라.

심상치 않을 거동을 보이니 호기심이 생겨 따라가 보고 싶은 충동이 생겼다. 산적이라면 같이 합류해서 사는 방법도 있다. 그리고 사내의 이런 이상한 행동은 호기심을 자극했다.

‘도대체 뭐하는 놈이지? 꼭두새벽에 산으로 올라가고?’

그러나 남의 개인 사정에 일일이 신경 쓸 처지가 아니다. 그는 필요 없는 잡념을 빠르게 버렸다. 당집으로 가서 무당을 만나 질문할 방법을 생각했다.

혹시 빠트릴 수 있어 꼼꼼하게 생각을 정리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서서히 날이 밝아올 무렵. 아직 해가 뜨지는 않았으나 주위가 조금 환해졌다.

덜컹!

당집의 문이 활짝 열리며 여자 무당이 부스스한 모습으로 밖으로 나왔다.

“아! 개운하니 너무 좋아.”

무당은 치마를 엉덩이를 흔들어 추스르며 크게 양팔을 벌리고 기지개를 켰다. 마치 허리운동을 하듯이 엉덩이를 몇 번 빙빙 돌려보더니 아침밥을 지으려는지 시커먼 부엌 안으로 슬며시 들어갔다.

그런 무당의 모습을 보자 이제 움직일 시간이 됐다고 판단했다.

‘됐어, 이제 접근해도 돼.’

은폐하고 있던 자리에서 슬며시 일어나 산길로 이동해 마을 쪽에서 당집으로 가는 길목에 들어섰다. 그는 허리춤에 날카로운 작은 부엌칼을 잘 갈무리했다.

최악의 상황을 항상 대비해야 한다.

“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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