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계속해서 두리번거리던 청년은 드디어 뭔가를 발견하고 급하게 집어 들었다.
청년이 풀숲에서 발견한 물건은 조선시대의 16세 이상의 남자라면 누구나 휴대하고 다녀야 하는 호패(號牌)다. 손에 든 호패는 황양목패로 생원이나 진사가 휴대하는 것이다.
조선시대의 신분증인 호패는 신분의 차이에 따라 만든 재질이나 기재내용이 달랐다.
2품 이상 벼슬아치는 아패를 관아에서 지급 받아 착용한다. 3품 이하 벼슬아치인 양반들 또는 잡과 입격자는 각패를 만들어 관인을 받아 지녔다.
생원이나 진사는 황양목패(黃楊木牌)로 만들어 휴대하고 다녔다. 잡직, 서인, 서리는 소목방패를 차고, 노비에 해당하는 공천, 사천의 경우는 대목방패를 사용했다. 또 개인은 자신의 지위 상승에 따라 다른 재질의 호패를 착용한다. 청년은 황양호패를 바라보며 자신이 알고 있는 역사지식으로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옷 주인인 배우는 벼슬하지 못한 선비 역할이군.”
전통 옷과 호패를 습득하자 여전히 자신은 지금 꿈속에서 영화 촬영하는 근처를 배회한다고 착각했다.
민속박물관에서 몇 번 본적이 있는 황양목으로 만든 호패를 들고 청년은 호기심이 생겨 자세하게 살폈다.
“어라! 내 이름이야!”
황양목(회양목)으로 만든 호패에는 분명히 자신의 이름인 최인범(崔仁汎)가 또릿하게 적혀 있었다. 물론 다른 내용들도 적혀 있었다.
‘별 일도 다 있어!’
계속해서 괴이한 일들이 자꾸 벌어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너무 기이한 일들이라 현실에서 벌어지는 사건이라고 생각하기 보다는 꿈속이라고 느꼈다. 그 때문에 더 이상 깊이 생각하지 않았다.
꿈이란 괴이하고 비논리적인 사건들이 마구 뒤엉켜 꾸어지는 경우가 많으니 그리 생각한 것이다.
최인범은 일단 손에 들려 있던 호패를 허리춤에 찼다.
자신이 입은 전통한복이나 다소 묵직한 괴나리봇짐은 모두 동명이인(同名異人)인 남의 것이 분명하다고 판단했다. 일단 산에서 내려가 그 사람을 만나야 한다.
‘한복을 돌려주고 허름한 옷이라도 얻어 입는 것이 좋겠어.’
이렇게 다짐하며 다시 주변을 살폈다.
옷의 주인인 남자배우가 근처에 있을 수 있다. 옆에 물웅덩이가 있으니 혹시 목욕하기 위해 벗어 놓은 옷일 수 있다고 생각했다.
양손을 입으로 모아 크게 외쳤다.
“누구 있어요?”
“누구 안계세요?”
우렁찬 목소리로 여러 번 소리쳐 봤다. 하지만 큰 목소리에 놀란 작은 날짐승들만 하늘 높이 날아올라 멀리 멀리 달아났다.
작은 새들이 ‘푸드덕 푸드덕.’하며 계속해서 날아가는 소리를 들으며 혹시 사람이 있을지 모르는 주변의 풀숲을 조심스럽게 기웃거렸다. 한참을 두리번거리며 찾아도 주변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이상하네···.’
시간이 흐를수록 깊은 숲속에 혼자 떨어져 있다는 사실이 조금씩 두려워졌다. 점점 섬뜩하고 무서운 느낌이 전신으로 퍼졌다. 두렵다는 느낌이 치밀자 머리카락이 바짝 곤두섰다.
아무리 꿈속이라지만 이런 경우를 처음 당해보니 무척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인적이 전혀 없는 깊은 산속에 혼자 있다는 두려움을 느낀 최인범.
그는 괴이한 사건이 벌어진 계곡의 작은 물웅덩이를 조심스럽게 벗어났다. 정신이 다소 몽롱해진 상태지만 살기 위해서는 빨리 산에서 내려가야 한다는 본능에 따라 서서히 움직였다. 윙윙거리는 심한 두통을 느낄 때는 심하게 현기증까지 생겼다.
후들후들 어찔어찔.
허기가 너무 지고 온몸은 힘이 하나도 없어 흐느적거렸다. 계속되는 심한 두통과 더불어 띵한 머릿속, 후들거리는 다리로 험한 산의 계곡을 내려가려니 너무 힘이 들었다.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바위투성인 계곡 옆을 걸었다. 허기진 상태로 계속 걷다가 보니 가끔은 쓰러질 듯이 심하게 휘청거렸다.
터벅터벅 걷다가 지치면 편편한 바위에 걸터앉아 쉬다 걷기를 반복했다.
무작정 비탈이 심한 계곡을 따라 한참을 내려가다 보니 어느새 해가 서쪽 산마루에 걸쳐 있었다. 노랗고 빨간 단풍이 짖게 물든 늦은 가을이라 해가 빨리 졌다.
밤이 되어 산속에서 혼자 지내게 되면 큰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늦가을이라 밤에 얼어 죽을 수도 있어.’
이런 끔찍한 생각이 들자 마음이 너무 급해져 발걸음을 빨리했다. 이윽고 계곡을 따라서 갈 수가 없는 곳에 도착하자 별수 없이 산을 오르게 됐다. 기력이 쇠진해서 산에 오르려니 숨이 턱까지 차올랐다.
“헉! 헉! 나죽네.”
계속 앞으로 가야한다는 일념으로 고개를 푹 숙이고 무작정 걸었다. 그러다 보니 작은 산등성이 하나를 훌쩍 넘어버렸다.
이미 산길을 잃어버려 도무지 어디가 어딘지 알 도리가 없었다. 이러다 진짜 산에서 실종될 위기에 놓였다.
머리는 어지럽고 여전히 마구 엉키어 뒤숭숭하기만 했다. 이성적으로 뭘 판단해볼 상황이 전혀 아니었다. 생각을 조금 집중하려면 이상하게 현기증과 더불어 두통이 심해졌다.
기력이 전혀 없는 상태에서 급하게 산길을 걸어가자니 무척이나 버거웠다. 하지만 빨리 사람들을 만날 생각으로 발걸음을 더욱 재촉했다.
점점 다리가 풀리고 호흡은 매우 거칠어졌다.
“헉! 헉! 어휴! 힘들어!”
이마에 굵은 땀방울이 송송 밴 상태로 드디어 멀리 산골마을이 보이는 산중턱에 힘들게 도착했다. 이제는 살았다는 기분이 들어 크게 환호성을 토했다.
“살았다!”
높은 산으로 시작되어 이어진 낮은 산자락의 남쪽에 위치한 마을.
계곡을 이루며 흐른 맑은 냇물이 작은 들판으로 흐르고 있었다.
몇 미터 폭의 냇물 주변으로 곧게 뻗은 나무들이 있고 초가집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마을의 중앙에는 크고 작은 초가집들 사이로 제법 잘 지어진 오래되어 보이는 기와집 한 채가 보였다.
산골마을의 이곳저곳에는 짚더미가 높이 쌓여 있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짚더미는 큰 기와집 주변에 높고 크게 쌓여 있었다.
산골마을 변두리에 위치한 산자락에는 커다란 물레방아가 보이고. 다소 한적해 보이는 다른 산자락에는 상여집도 보였다.
들판에는 소들이 한가하게 풀을 뜯고. 소를 끌고 다니는 어린 소년들도 보였다.
무질서하게 들어선 초가집들이나 기와집의 굴뚝에서는 하얀 연기가 피워 올랐다. 남향으로 지어진 커다란 기와집 앞에 있는 넓은 바깥마당에는 어린 소년들이 뛰어놀고 있었다.
‘어라? 애들이 보이다니?’
산골마을이니 아이들이 있는 것은 당연했다. 그러나 한복을 입은 아이들이 돌아다니니 조금 이상했다. 신골마을을 영화나 드라마의 세트장으로 판단되니 이렇게 생각했다.
‘아하! 뭔가 리얼하게 찍느라고 저렇게 하나 보군.’
산골마을의 곳곳에 서 있는 커다란 감나무 주변에는 장대를 든 사람들이 빨갛게 익은 감을 따고 있었다. 감을 따는 사람들 주변에는 어린 소녀들이 아스라이 보였다.
아담하고 평화로워 보이는 산골마을의 풍경.
최인범은 여전히 꿈을 꾸고 있다고 생각하며 저곳이 꿈속에서 나타난 드라마나 영화를 촬영하기 위해 만든 세트장이라고 판단했다.
그렇지만 신나게 이곳저곳으로 내달리면 뛰어노는 아이들이 보여 조금 이상했다. 그러나 머리도 아프고 배가 너무 고프다 보니 깊이 생각하지 않았다.
‘아! 배고파.’
빨리 산을 내려가 작은 들판을 지나 산골마을로 가서 사람들을 만나 허기진 배를 채우고 싶었다. 그러나 아직도 가야할 길은 너무 멀었다.
눈짐작이지만 뛰어서 간다면 그리 멀지 않은 거리다. 하지만 기력이 거의 소진된 지금으론 너무 멀었다. 험한 산비탈에서는 벗어났으나 여전히 산속이다.
위험에서 약간은 벗어났다는 생각이 들자 주린 배에서 심하게 요동치는 소리가 들렸다. 허기진 배에서 ‘꼬로록 꼬로록’하는 소리가 요란했다.
다소 온전하던 정신이 다시 심하게 어지러워졌다.
순간‘꿈속에서도 배가 고픈 것을 아는가?’생각했다.
이때 갑자기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호호호!”
“어머나! 아기씨.”
주변에서 젊은 여자들이 토해내는 간드러진 목소리가 들리자 바쁜 걸음을 멈추었다.
산속에서 들리는 여자들의 목소리는 ‘혹시 처녀귀신인가?’하는 생각이 들었다.
‘찰랑찰랑.’ ‘풍덩! 풍덩!’하는 물소리와 같이 간간히 들리는 젊은 여자들의 간드러진 목소리에 귀가 쫑긋했다.
다시 주변을 자세하게 살펴봤다.
젊은 여자들이 토해내는 목소리는 분명 바로 아래쪽으로 흐르는 개울의 물가에서 났다. 여자 목소리가 들리는 곳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그곳 역시 자신이 서있는 곳과 같이 인적이 전혀 없는 깊은 숲속이다.
개울 주변에는 큰 나무들이나 풀들이 가득하고 큰 바위가 있었다. 자신이 내려온 계곡에 비하면 아주 따스한 느낌이 드는 곳이다.
쏴아! 쏴아!
산비탈을 급하게 흐르던 개울물이 다소 낮은 곳으로 떨어지는 폭포소리가 들렸다. 아마도 작은 폭포가 있는 곳에서 젊은 여자들이 목욕하는 것 같았다.
여자들의 간드러진 목소리에 강하게 호기심이 생기고. 부드럽고 뽀얀 살결도 저절로 떠올리자. 그런 모습을 보고 싶다는 충동이 강하게 일어났다.
자신도 모르게 잘하면 여배우들의 알몸을 볼 수 있다는 강한 호기심이 생겼다. 그래서 여자들의 작은 목소리가 들이는 곳을 향해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숨어서 남의 알몸을 본다는 호기심인 관음증은 무서움과 더불어 심한 배고픔마저 잊어버리게 했다.
살금살금
발걸음의 작은 소음까지도 아주 조심스럽게 죽여 가며 가까이 다가갔다.
작은 폭포가 있는 곳으로 조심스럽게 향하고 있었다. 여자들의 목소리가 들리는 곳에 점점 가까워질수록 가슴이 두근두근하며 심장박동이 점점 빨라졌다.
벌떡
귀신은 아니라는 생각이 떠오름과 동시에 아래가 다소 묵직해 지는 느낌이 들었다.
아래에 달린 물건이 심하게 요동쳤다. 주책없이 젊은 여자들의 목소리만으로 빠르게 반응했다. 몸의 적극적인 놀라운 반응에 순간적으로 이렇게 생각했다.
‘얼굴이 어려지더니 몸이 너무 좋아졌어.’
이제는 돌아갈 길이 없는 과거의 어리고 젊은 몸. 물론 아직 너무 늙지는 않았더라도 20대 청년 시절과는 조금 변하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의 몸은 여자들이 내는 인기척에도 빠르게 반응했다.
최인범은 당황하기보다 우선 기분이 너무 좋았다.
‘꿈이라도 너무 좋아.’
사내는 기본적으로 아래 힘이 좋아야 한다는 지론을 지녀서 더욱 그렇다. 물론 경제적인 능력도 중요하지만 최종적으로 기본이 튼실해야 만사형통이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