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2. Happily Ever After
르샤베의 28대 국왕, 아스터 시엘라 라베인이 즉위한 지도 벌써 7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아스터가 즉위한 이래 르샤베 왕국은 평화로웠다. 아스터의 왕위 계승을 두고 잠시 동안 여러 가지 말과 억측이 나오긴 했었다.
그러나 전대 국왕이 건강 악화를 이유로 양위를 하고 물러나면서 아스터를 전폭적으로 지지하자 상황이 달라졌다.
지금까지 클로타르를 지지하던 귀족들은 모두 새로운 국왕의 발치에 엎드리지 않을 수 없었다.
곧이어 새로운 왕비의 임신 소식이 알려졌다. 왕가의 후계자가 하루빨리 태어나기만을 고대하고 있던 르샤베 왕국의 백성들은 그 소식에 열광했다.
그 기쁨이 사그라들 무렵에는 겨울이 되면서 화려하고 아름답기 짝이 없던 대관식이 열렸고, 대관식이 끝나자마자 왕궁에서 오랜만에 아기 울음소리가 들렸다.
이 모든 일들이 아스터가 즉위 후 1년 동안 정권을 휘어잡는 데 크나큰 도움이 되었다.
더욱이 왕실에는 마리안이 소원했던 대로 한 번에 두 왕손이 태어났다. 건강한 남자아이와 여자아이였다.
혹시라도 젊은 왕비의 몸에 무리가 갈까 봐 사람들이 우려했던 것과 달리 마리안은 비교적 수월하게 쌍둥이를 순산했다.
왕비가 두 아이를 출산한 뒤, 왕비와 아이들 모두 건강하다는 새로운 어의 베르트 랭스의 진단이 내려지자 왕비궁에서 일하는 시녀들은 크게 안도했다.
‘사실 왕비님보다는 밖에서 기다리던 국왕 전하께서 심장 마비로 돌아가실까 봐 그게 더 무서웠어. 얼굴이 정말 죽은 사람처럼 창백해져서…….’
‘그거 알아? 왕비 전하께서 진통을 겪으시는 동안 국왕 전하께서 신성력을 불어 넣어주겠다고 현장에 계셨는데 쫓겨나신 이야기?’
‘아, 그거! 나도 그 이야기를 들었어. 마법사 위르나 님이 국왕 전하에게 소리를 지르며 내쫓으셨다며. 오히려 방해만 된다고.’
‘내가 그때 시르안 님이 국왕 전하를 방 밖으로 끌고 나오는 모습을 봤는데, 거의 연행하다시피 전하를 질질 끌고 나와서 기절하는 줄 알았지 뭐야.’
그리고 이날 왕비궁의 시녀들이 목격했던 이야기가 르샤베 전역에 퍼져 나가는 데는 그리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이 소문을 전해 들은 사람들은 새로운 국왕이 통치자다운 위엄이 없다며 못마땅해하기도 했지만, 대부분의 백성들은 그토록 살뜰하게 왕비와 자신의 아이들을 사랑하는 국왕에게 열광했다.
또한 새로운 국왕의 넘치는 신성력 덕분에 지난 7년 동안 르샤베 왕국에는 풍년이 계속되었고, 전염병 한번 돌지 않았다. 나라는 자연히 부강해지고 있었다.
그렇게 평화로운 나날이 계속되던 어느 날.
아스터가 귀족들과 함께 정무를 돌보는 중앙궁의 정원에서 한바탕 대소동이 일어났다.
여러 사람의 비명과 함께 무언가가 와장창 부서지는 소리가 난 것이다. 마치 투석기로 성벽을 부쉈을 때나 들릴 법한 엄청난 굉음이었다.
회의실에서 몇몇 고위 귀족과 대화를 나누고 있던 아스터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이게 무슨 소리지?”
놀란 것은 아스터만이 아니었다. 밖에서 즉시 왕궁 기사단의 기사들이 뛰어 들어왔다.
“전하, 괜찮으십니까?”
“나는 아무렇지도 않다. 그런데 대체 무슨 소리였지?”
“아직 원인은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부기사단장님이 방금 기사들과 함께 소리가 난 쪽으로 달려가셨습니다. 중앙궁의 정원 남쪽에서 들려온 소리였습니다.”
기사가 침착하게 보고를 하고 있을 때였다. 다시 한번 쿵 하고 울리는 소리가 들렸다.
“가봐야겠군.”
아스터는 살짝 미간을 찌푸리고는 직접 굉음이 들려온 정원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그러자 한 무리의 기사들이 즉시 왕의 앞뒤 좌우를 호위하기 시작했다.
기사들은 어차피 만류해 봤자 그들의 왕이 듣지도 않을뿐더러, 사실상 이 왕궁에서 국왕보다 강한 사람은 대마법사 시르안 정도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중앙궁의 남쪽 정원에는 아름드리 정원수로 만들어진 산책로가 있었고, 그 한가운데에는 제법 커다란 분수가 있었다.
아스터는 그 분수의 한쪽이 무너져 내렸고, 궁전의 벽 하나가 무너지기 직전인 상황을 목격했다. 바로 옆에는 성인 남자 두 사람이 함께 끌어안으려고 해도 불가능할 정도로 굵은 나무 두 그루가 무참하게 꺾여있었다.
그리고 아스터의 눈에는 한낮의 왕궁에서 이런 대담한 짓을 벌인 범인들의 모습이 들어왔다. 그들은 부기사단장이 이끄는 십여 명의 기사들에게 둘러싸여 자신들의 무고함을 항변하고 있는 중이었다.
“엘다, 레이널.”
평소 아스터에게서는 들어볼 수 없는 엄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이지?”
그러자 범인들이 흠칫 굳어져서는 이쪽을 돌아보았다. 그들의 아름다운 황금빛 머리카락이 햇빛에 반짝였다.
“아, 아바마마!”
“앗, 아바마마다!”
범인들의 반응은 극명하게 달랐다. 그들은 바로 아스터와 마리안의 여섯 살 난 쌍둥이인 엘다 공주와 레이널 왕자였다.
레이널 왕자가 목을 움츠리며 굳어진 것에 반해 엘다 공주는 함박웃음을 지으며 아스터에게 달려왔다.
하지만 아스터는 속지 않았다. 두 아이에게서 이런 반응이 나왔을 때, 보통 진범은 엘다였다.
“엘다,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이지?”
공주는 아버지의 다리에 매달리며 어리광을 부리듯 말했다.
“죄송해요, 아바마마. 하지만 절대로 일부러 그런 건 아니었어요.”
어깨까지 내려오는 엘다의 황금빛 머리카락이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어린아이다운 희고 부드러운 뺨과 커다랗고 맑은 황금빛 눈망울, 그리고 천진난만한 미소는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절로 미소를 짓게 했지만 아스터는 표정을 풀지 않았다.
“그럼 설명해 보아라.”
“아바마마, 그게요.”
그러자 여태 쭈뼛거리며 다가오지 못하던 레이널이 주춤거리며 엘다의 옆에 다가와서 머뭇머뭇 입을 열었다.
“엘다랑 정원에서 놀다가 둥지에서 떨어진 새끼 새를 발견해서요.”
실제로 레이널은 어린아이의 손바닥 안에 들어가는 매우 작은 새를 내밀었다. 깃도 아직 다 자라지 못한 어린 새였다.
“아기 새가 죽어가고 있어서 레이널이 살려줬어요.”
엘다는 자랑스럽다는 듯이 레이널을 끌어안으며 말했다.
그 순간, 당장에라도 무너질 듯 위태로웠던 왕궁의 건물 벽면이 다시금 엄청난 굉음과 함께 우르르 무너졌다.
“…….”
아스터는 당장 마법을 불러일으켜 자욱한 먼지를 날려 보내며 긴 한숨을 쉬었다.
레이널은 어려서부터 아스터의 뒤를 이을 만한 막강한 신성력을 가지고 태어났다.
아스터만 해도 막상 갓 태어났을 때는 눈에 뜨일 만큼 강력한 신성력을 가지고 있지 않아 탑에 유폐되는 불행한 어린 시절을 겪어야 했다.
그러나 레이널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범상치 않은 신성력을 지니고 있어 주변을 놀라게 했었다.
방금 전에도 레이널은 나무에서 떨어지는 충격으로 날개 뼈가 부러져 거의 죽어가던 작은 새를 신성력을 불어넣어 되살렸다. 아마 아스터도 그 나이 때는 하지 못했을 일이었다.
“그래, 레이널이 아기 새를 살렸다는 건 알겠다. 그런데 정원과 왕궁 벽은 왜 부서졌지?”
그러자 엘다가 환하게 웃었다. 그녀는 곤란할 때 이렇게 웃는 버릇이 있었다.
“그게요.”
엘다가 눈을 깜빡이자 아스터는 가만히 숨을 삼켰다. 저렇게 엘다가 눈을 깜빡이는 모습이 마리안을 쏙 빼닮아 있는 탓이었다.
그리고 엘다는 아버지가 어머니를 닮은 자신의 모습에 마음이 약해진다는 사실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새를 둥지에 올려주고 싶었는데…….”
엘다는 말끝을 흐리며 말했다.
“힘 조절에 실패해서요.”
엘다는 신성력을 거의 가지고 있지 않았지만 대신에 엄청난 마력을 지니고 태어났다. 아스터의 마력을 보고 감탄했던 시르안이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그래서 레이널이 커가면서 자연스럽게 신성력을 사용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엘다 역시 아무런 거리낌 없이 마력을 사용했다.
문제는 치유의 힘을 보여주는 신성력과 달리 마력은 제대로 쓰지 않으면 이런 사고를 숱하게 일으킨다는 점에 있었다.
아스터 역시 자신의 강력한 마력을 다스리기 위해 오늘날까지도 시르안에게서 지도를 받고 있었다.
선천적으로 마력을 통제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는 것과 별개로 마법을 제대로 부리기 위해서는 마법에 대한 이론을 알아야 했다.
아직 어린 엘다는 그러한 이론과 공식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감으로 마력을 썼고, 그러다 보니 심심치 않게 대형 사고를 쳤다.
“엘다, 내가 너에게 뭐라고 했었지? 마법을 쓰고 싶어질 때는…….”
“시르안 님이나 아바마마께 먼저 이야기를 하라고 하셨어요.”
“그런데 넌 어떻게 했지?”
“그냥 제 마음대로 행동했어요. 잘못했어요, 아바마마.”
엘다는 얼른 아스터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잘못했어요, 아바마마. 제가 엘다를 부추겨서 그렇게 됐어요. 새를 빨리 새집에 올려주고 싶었거든요.”
그리고 옆에서 정말로 잘못했다는 얼굴로 레이널이 고개를 숙였다.
아스터는 한숨을 쉬었다. 이럴 때 엄하게 야단쳐야 한다는 사실은 잘 알고 있었지만, 매달리는 쌍둥이들을 보자 차마 그렇게 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는 결국 이렇게 말했다.
“그래, 알았다. 하지만 이 일은 너희 어마마마께 말하지 않을 수 없구나.”
그러자 쌍둥이들의 얼굴이 동시에 일그러졌다.
“아바마마, 그건 한 번만 봐주시면 안 될까요?”
“정말 잘못했어요. 다시는 안 그럴게요.”
“안 돼. 궁전의 벽이 무너진 걸 보렴. 그저 건물이 일부 파손되었으니 천만다행이지 너희 때문에 지나가던 사람이 다치기라도 했으면 어쩔 뻔했지?”
이번에야말로 아스터가 엄한 얼굴을 하자 쌍둥이는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마리안에게 말한다는 이야기에 그들은 정말 심각한 얼굴로 서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얼굴에 아스터는 하마터면 웃음이 터질 뻔한 것을 간신히 참으며 부기사단장에게 물었다.
“눈에 보이는 것 외에 별다른 피해는 없는가?”
“예, 전하. 더 이상은 없습니다. 보시는 대로 벽의 일부가 파손되었지만 다행히 유리창도 깨지지 않았습니다.”
쌍둥이 왕자와 공주가 이 이상 혼나기를 바라지 않은 부기사단장은 최대한 부드럽게 말했다.
그러자 아스터는 고개를 끄덕여 보이고는 쌍둥이들에게 손짓했다.
“이리 오렴.”
그 말에 쌍둥이는 얼른 아스터에게 다시 매달렸다.
“이 새가 어느 나무에서 떨어진 거지?”
그러자 레이널이 한 곳을 가리켰다.
“저 나무예요. 가지 안쪽에 가려져서 잘 안 보이지만 새 둥지가 있어요.”
방금 전의 소란에도 불구하고 새집은 무사했다. 아스터는 요란하게 쓰러진 나무가 새집이 있는 나무를 덮치지 않아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자, 그럼 레이널. 네가 새를 도로 새집에 올려주거라.”
말이 끝나는 것과 동시에 아스터가 손을 들어 올리자 레이널의 작은 몸이 공중으로 둥실 떠올랐다.
“아!”
레이널은 탄성을 내질렀지만 이내 곧 진지한 얼굴로 조금씩 가까워져 가는 새집을 바라보았다.
바로 눈앞에 새집이 다가오자 레이널은 무척이나 조심스러운 손길로 아기 새를 새집에 넣어주었다.
“레이널, 아기 새에게 신성력을 한 번 더 써주렴.”
레이널의 일이 끝나는 것을 확인한 아스터가 아들을 내려주기 전에 말했다.
“새는 이미 멀쩡한데요?”
엘다가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야생의 새들은 사람의 흔적을 좋아하지 않는단다. 자칫 잘못하면 어미 새가 아기 새를 내쫓을 수도 있어.”
그러자 엘다는 충격을 받은 표정이 되었다.
“아바마마 말씀 들었지, 레이널? 얼른 신성력을 써줘.”
엘다의 외침에 레이널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즉시 새를 향해 손을 펼쳤다. 그의 고사리 같은 손에서 아스터가 신성력을 발휘할 때와 똑같은 은은한 햇살 같은 힘이 쏟아져 나왔다.
그는 하는 김에 어미가 온 줄 알고 삐악거리며 울고 있는 다른 아기 새들에게도 똑같이 신성력을 써주었다. 이것으로 이 둥지에 사는 아기 새들은 아마 건강하게 오래오래 살 수 있게 될 것이다.
“다 됐어요!”
레이널이 외치자 아스터는 다시 마력을 써서 아들을 천천히 아래로 내려주었다.
“감사합니다, 아바마마.”
두 발이 안전하게 땅에 닿자 레이널은 아버지를 향해 고개를 꾸벅 숙였다. 그러자 엘다가 투덜거렸다.
“좋겠다. 나도 레이널처럼 높이 올라가 보고 싶은데.”
엘다는 진심으로 부러운 표정으로 레이널이 아기 새를 올려놓은 새집을 바라보다가 아스터를 바라보았다.
“저도 새들이 둥지에 잘 들어갔는지 확인해 보면 안 되나요?”
그러자 아스터는 눈을 가늘게 떴다.
“엘다, 지금 네 눈앞에 뭐가 보이지?”
“…제가 부순 건물이요.”
엘다가 조금 풀 죽은 기색으로 말하자 아스터는 다시금 엄한 목소리로 말했다.
“넌 지금부터 저것들을 치워야지.”
“…저걸, 제가요?”
“조금이라도 도와야 두 번 다시 이런 일을 안 하지 않겠니?”
이번에야말로 엘다는 울상이 되었다. 그러자 옆에서 레이널이 얼른 끼어들었다.
“아바마마, 저도 잘못했으니 엘다를 도와서 함께 치우도록 할게요.”
아스터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둘이 같이하는 게 좋을 거다.”
하지만 막상 아스터에게서 그런 말을 듣자 쌍둥이는 난감한 얼굴이 되었다.
치우는 것까지는 좋은데 그들의 힘으로 처리하기에는 벌어진 일이 너무나 어마어마했기 때문이다.
물론 아스터는 처음부터 쌍둥이에게 무너진 건물의 파편 따위를 치우게 할 생각은 없었다.
“일단 기다리렴.”
아스터는 품 안에서 종이를 꺼내 마법진을 그렸다. 그는 먼저 복구의 능력을 발휘하는 마법진으로 분수대를 고친 뒤, 건물 벽의 일부를 보수했다.
건물에서 떨어져서 엉망으로 깨진 벽돌들이 공중에 떠올라 자력으로 원래의 모습으로 되돌아가는 광경은 경이로웠다.
쌍둥이뿐만이 아니라 부기사단장과 기사들까지도 감탄을 금치 못하는 가운데 아스터는 빠르게 건물 복구를 끝내버렸다.
그러고는 중간에서 뚝 부러진 불운한 두 그루의 거대한 나무도 일으켜 세워 신성력으로 복원했다.
“와아.”
“아바마마, 진짜 대단하세요.”
쌍둥이들은 입을 딱 벌린 채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러나 아스터는 웃어주는 대신 다시 품에서 마법진을 그려서 엘다에게 건네주었다.
“이게 뭔가요?”
“손에 쥐고 마력을 불어넣으면 회복할 수 있게 하는 마법진이야. 엘다는 마법진을 가지고, 그리고 레이널은 신성력으로 이곳의 망가진 잔디를 모두 복구시키도록.”
“…아바마마, 이건 오늘 안에는 도저히 다 못 할 것 같은데요.”
엘다가 당황한 듯이 대꾸했다. 아닌 게 아니라 쌍둥이의 힘만으로 이곳의 망가진 잔디를 복구한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너희에게 열흘을 주겠다. 앞으로 열흘 동안 매일매일 와서 잔디를 복구시키는 거다.”
“…….”
쌍둥이들이 그 말에 서로를 쳐다보기만 하자 아스터가 다시 물었다.
“대답해야지?”
“네, 알겠습니다.”
아이들의 힘없는 목소리를 들으며 아스터는 고개를 끄덕였다.
“저어, 아바마마. 그럼 잔디를 다 복구시키면 어마마마께는 이 일에 대해 말씀 안 해주시면 안 돼요?”
이번에도 꿋꿋하게 매달린 것은 엘다였다. 그 필사적인 얼굴을 보며 아스터는 빙그레 미소 지었다.
“엘다, 내가 무슨 말을 할지 영리한 너라면 이미 알고 있겠지? 자아, 가서 얼른 잔디를 복구시키렴.”
“네에.”
이번에야말로 어깨를 축 늘어뜨린 두 쌍둥이가 짓밟힌 잔디 위에 쪼그려 앉는 것을 확인한 아스터는 왕궁 기사들에게 눈짓을 하고 그 자리를 벗어났다.
그리고 몇 시간 뒤. 마리안은 아스터의 전갈을 받고 중앙궁으로 발을 옮기고 있었다.
마침 마리안은 아침부터 찾아온 몇몇 귀부인에게 둘러싸여 그들과 차를 마시며 이야기를 들어주고 있었다.
슬슬 그 모임이 지겨워졌던 마리안은 아스터의 전갈을 핑계로 귀부인들을 돌려보내고 중앙궁으로 향했다.
르샤베에서 국왕 부처가 금실이 좋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기 때문에, 귀부인들은 아스터에게 가봐야겠다는 마리안의 말에 아쉬워하면서도 그녀를 붙잡지는 않았다.
한 무리의 시녀들을 데리고 중앙궁으로 향하던 마리안의 눈에 이상한 광경이 들어왔다. 그것도 무심코 창밖으로 시선을 줬다가 발견하게 된 광경이었다.
그녀의 쌍둥이 아이들이 잔디밭에 쪼그려 앉아 뭔가를 하고 있었다. 거리가 상당히 먼 탓에 마리안은 아이들이 굉장히 심각한 표정을 하고 있다는 사실까지는 알지 못했다.
하지만 쌍둥이들의 손에서 무언가 번쩍번쩍하는 빛이 퍼져 나오는 것을 보면서 아이들이 각기 신성력과 마력을 사용한다는 점은 알 수 있었다.
그녀는 의아한 기분이 들었지만 멈춰 서서 아이들을 부르는 대신에 일단은 계속 걸었다. 중앙궁에서 일어나는 일은 모두 아스터의 소관이었으니 아마 그가 시킨 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였다.
“아스터.”
마리안의 도착이 전해지자 시종은 그녀를 서둘러 집무실 옆의 아늑한 왕의 거실로 인도했다. 이곳은 아스터가 일을 하다가 휴식을 취하러 오는 공간이었다.
“어서 와, 마리. 좋은 하루 보내고 있었어?”
오늘은 일이 있어서 오찬을 함께하지는 못했지만, 아침에 눈을 떠서 아침 식사를 할 때까지도 곁에 있었던 아스터는 마치 며칠 만에 보는 사람처럼 마리안을 반겼다.
“불러줘서 너무 기뻤어요. 오늘 카디아나 백작 부인이 친구들을 데리고 찾아오셨는데, 티타임이 두 시간이 넘어가니까 솔직히 좀 힘들었거든요.”
다정하게 포옹하는 아스터를 마주 끌어안고 그의 뺨에 입을 맞추며 마리안은 대답했다.
“고생했어.”
“고생이랄 게 뭐가 있겠어요. 그나저나 아스터는 오후 내내 회의가 있다고 하지 않았어요?”
“중요한 건 끝낸 참이야. 이미 두 시간이나 티타임을 했지만 그래도 나와 함께 차 한잔은 해줄 수 있겠지?”
그 말에 마리안은 웃음을 터뜨렸다.
“물론이죠. 전 기꺼이 국왕 전하와 차를 마시고 싶은걸요.”
아스터는 빙그레 웃으며 손수 마리안을 위해 차를 가져왔다. 시종장이 준비해 둔 것이긴 했지만, 마리안이 오는 시간에 맞춰 차를 우린 사람은 아스터 본인이었다.
마리안은 아스터가 건네주는 찻잔을 받아들며 그 향기로운 차를 한 모금 마셨다.
“갑자기 라카인 차가 생각나네.”
“그러고 보니 그걸 마셔본 지도 꽤 오래됐네요.”
한때는 매일 같이 나눠 마시던 차에 대한 이야기를 하다가 마리안은 궁금했던 것을 물었다.
“그런데 애들이 지금 정원에서 뭘 하는 건가요?”
“아, 봤어?”
“오면서 보니 잔디밭에 쪼그리고 앉아서 땀을 뻘뻘 흘리며 뭔가 열심히 하고 있던데요.”
그 말에 아스터는 쓴웃음을 지었다.
“왕비궁에서는 아마 소리가 안 들렸겠지만…….”
아스터가 간략하게 아까 일어났던 소동에 대해 이야기해 주었다.
마리안은 그 말에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눈을 깜빡였다.
아스터는 그런 마리안을 바라보면서 피식 웃고 말았다. 지금 마리안의 행동이 아까의 엘다와 너무나 똑같아서 자기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애들이 이제 겨우 여섯 살인데 벌써 감당이 안 되네요. 엘다가 정원수를 두 그루나 부러뜨렸다고요?”
마리안은 한숨을 쉬었다.
“시르안이 엘다를 보고 당신보다 천재라고 했을 때는 믿을 수가 없었는데……. 하긴 마법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제가 시르안을 믿지 못한다고 하는 게 말도 안 되는 이야기이긴 하지만요.”
하지만 고작 여섯 살배기 어린아이에게 천재라고 하는 시르안의 이야기는 아무래도 과장을 섞어 칭찬한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고 여긴 마리안이었다.
부모란 대체로 자기 아이가 천재가 아닐까 하고 생각하기 마련이지만 뜻밖에도 마리안은 자신의 아이들에게 비교적 냉정했다.
마리안도 엘다가 마법에 꽤 출중한 재능을 가지고 있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긴 했지만, 성장할 때까지는 지켜봐야 한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리고 강력한 신성력을 보여준 레이널에 대해서도 똑같이 생각하고 있었다.
아스터와 클로타르의 운명이 엇갈린 계기 자체가 클로타르가 갑자기 신성력을 잃었기 때문이지 않았던가.
마리안이 가장 경계하는 것은 천재라든가, 엄청난 재능을 지녔다는 찬사를 듣던 아이들이 어느 날 갑자기 힘을 잃어 삐뚤어질 수도 있다는 점이었다.
그녀와 아스터는 두 아이를 그 어떤 차별 없이 사랑으로 키웠지만, 마리안은 아이들이란 부모가 마음먹은 대로 크지 않는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것은 마리안이 힘겨웠던 시절, 아이들에게 공부를 가르치고, 돌보면서 몸소 배웠던 사실이었다.
“이제는 엘다에게 정식으로 마법을 가르쳐야겠어. 내가 조금씩 가르쳐주는 것만으로는 부족할 것 같아. 이대로는 위험하니까.”
“생각해 둔 엘다의 선생님이 있나요?”
“내가 요즘 계속 바쁘다 보니 시르안이 가르치는 맛이 안 난다고 투덜대고 있었는데, 시르안에게 부탁해 보면 어떨까?”
그러자 마리안이 처음으로 부정적인 의견을 말했다.
“시르안과 엘다를 붙여두면 더 감당할 수 없어지는 게 아닐까요?”
시르안이 워낙 자유로운 영혼의 소유자이다 보니 마리안은 조금 걱정이 되었다.
그가 엘다를 잘 돌봐줄 것이라는 사실에는 일체의 의심을 하지 않았다. 오히려 걱정이 되는 부분은 시르안이 이제 겨우 여섯 살인 엘다와 죽이 너무 잘 맞아서 함께 사고를 치는 경우였다.
“그래도 시르안이 상식을 벗어나는 일을 한 적은 없잖아. 위르나에게는 맡길 수가 없고.”
“그건 그래요.”
마리안은 별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스터는 즉위하는 것과 거의 동시에 시르안에게 왕실 마법사의 자리를 제안했다. 하지만 시르안은 직함 따위를 가지고 싶지 않다며 그 제안을 거절했다.
대신에 시르안은 자신이 원하는 만큼 왕궁에 머물며 왕실 서고에서 시간을 보냈고, 아스터에게 계속 마법을 가르치기도 했다.
그리고 아스터가 거절한 왕실 마법사의 자리는 위르나에게 돌아갔다.
위르나는 기꺼이 왕실 마법사가 되어 베이퍼스 공작가를 비롯한 귀족연합과의 구심점이 되어주었다. 그러면서 르샤베 왕국의 마법사들을 관리하는 중책을 동시에 수행했다.
이미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그녀에게 잠시만 눈을 돌려도 무슨 사고를 칠지 알 수 없는 여섯 살배기 아이의 교육을 부탁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엘다 정도의 재능이라면 평범한 마법사를 스승으로 두게 할 수도 없을 테니까.”
마리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 말이 옳아요, 아스터. 그럼 시르안에게 이 일을 물어보도록 하죠. 시르안은 지금 어디 있지요? 말이 나온 김에 지금 물어보면 좋을 것 같은데요.”
“오늘도 아마 왕실 서고에 있을 텐데…….”
아스터는 말끝을 흐리더니 자리에서 일어나 종이와 펜을 가져왔다.
마리안은 아스터가 종이 위에 마법진을 그리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아주 단순한 그림이 그려지자 아스터는 주문을 외우고 말했다.
“시르안, 내 집무실에 있는 거실로 와줘요. 바쁘지 않다면 지금 당장이요.”
전언을 남긴 아스터는 용도를 다한 마법진을 가볍게 구겼다. 곧 마법진이 그의 손에서 화르륵 불타올랐다.
“매번 보는 거지만 볼 때마다 신기한 광경이에요.”
마리안이 진심으로 감탄하자 아스터가 쓴웃음을 지었다.
“마리안도 마법을 쓸 수 있다면 좋았을 텐데.”
“잘 알잖아요. 저한테는 마법 재능이라는 게 전혀 없다는 걸요.”
마리안은 웃으면서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정말이지 마리안은 마력과 신성력에 있어서만큼은 아이들이 자신을 닮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애들이 절 닮지 않아서 정말 다행이에요.”
엘다와 레이널의 힘이 언제까지 계속 남아있을지는 알 수 없었지만, 마리안은 두 아이가 각기 자신만의 힘을 가지고 있어서 안도했다.
마리안은 아스터와 함께 아이들에게 사랑을 퍼부으며 키울 자신이 있었다. 그녀는 절대로 전대의 국왕과 왕비가 했던 것처럼 쌍둥이라고 해서 아이들을 꺼리거나 두려워하고, 차별할 생각이 없었다.
마리안이 출산했을 때 왕실에 쌍둥이가 태어났다는 사실에 경악하며 수군거리던 몇몇 귀족들은 아스터에게 불려 가 엄중한 경고를 들었다.
르샤베의 젊은 새 왕과 왕비는 라베인 왕가의 쌍둥이에 얽힌 저주 따위를 들먹이는 자들을 모두 반역으로 간주하겠다는 사실을 분명히 했다.
그 저주에 대한 이야기는 워낙 알고 있는 사람이 적었기 때문에 그들을 침묵시키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오히려 아스터와 마리안이 신경 써야 했던 것은 왜 전대 국왕 부처가 쌍둥이 왕자를 지금까지 숨겨왔는지 궁금해하는 사람들의 호기심이었다.
아스터와 마리안은 자신의 아이들에게 아스터가 겪었던 일을 숨길 생각이 없었지만, 너무 어린 나이에 그러한 진실을 모두 알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아스터가 겪었던 일은 아이들이 어른이 된 뒤에 알아도 충분한 일이었다.
그래서 젊은 국왕과 왕비는 쌍둥이 왕자와 공주를 적극적으로 사람들에게 내보이고, 아이들을 사랑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하지만 그래도 고민은 이어졌다.
가장 큰 고민은 엘다나 레이널 중 어느 한쪽이 다른 한 명보다 재능이 뒤떨어지면 어쩌나 하는 것이었다.
한배에서 태어난 쌍둥이라고 해서 천부적인 재능이 똑같을 수는 없었다. 실제로 두 아이는 깜짝 놀랄 정도로 똑같은 금발에 금안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제외하면 성격과 재능이 워낙 달랐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어느 한쪽이 다른 한쪽보다 두드러질 정도로 압도적인 재능을 타고난 게 아니라는 점이었다. 방향이 달랐을 뿐, 엘다에겐 강력한 마력이, 레이널에겐 막강한 신성력이 있었으니 말이다.
‘운이 좋았지.’
마리안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마리안과 아스터가 아무리 사랑한다 한들, 아이들은 자라면서 자연스럽게 경쟁을 하기 마련이다.
엘다나 레이널 어느 한쪽에 천부적인 재능이 쏠려있었다면 사람들은 그쪽만을 바라봤을 것이다. 자연스럽게 다른 한 명은 끊임없는 비교의 대상이 되면서 열등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적어도 지금까지는 그렇게 되지 않았으니까.’
그래서 마리안은 아이들이 아스터를 빼닮았다는 사실에 진심으로 안도했고, 기쁘게 생각했다.
하지만 아스터의 생각은 조금 달랐다.
“난 아이들이 마리를 좀 더 닮았으면 좋겠어.”
아스터는 진심을 담아 말했다.
사실 그는 라베인 왕가의 특징에 불만마저 느끼고 있었다. 왕가가 가진 신성력 때문에 아이들이 모두 자신을 닮아 금발에 금안을 가지고 태어난 게 못내 아쉬웠기 때문이다.
아스터는 마리안의 흑단처럼 새카만 머리카락과 바다처럼 깊고 고요한 푸른 눈을 이어받은 아이가 없다는 사실이 늘 서운했다.
더군다나 어째서인지 쌍둥이들은 외모의 특징도 마리안보다는 아스터를 많이 닮아있었다.
물론 아스터는 그런 아이들을 사랑했지만 조금만 더 마리안을 닮았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신성력과 마력을 가진 아이들이 태어났으니 이젠 그런 힘은 없어도 좋으니까 마리를 닮은 아이가 있으면 정말 좋겠어.”
“이런, 아스터. 그 마음은 고맙지만…….”
마리안은 웃으며 말했다.
“그건 정말 아빠의 이기적인 마음이네요. 아이 입장에서 생각을 해봐요. 엄마를 닮아 아무런 힘도 가지고 있지 않으면 얼마나 슬프겠어요.”
“무슨 소리야. 우리 가족 중에서 가장 강인한 정신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마리인데. 그런 마리를 닮은 아이라면 분명 훌륭할 거야.”
아스터가 힘주어 말해서 마리안은 그저 웃었다.
“그렇게 생각해 줘서 고마워요.”
두 사람이 그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였다. 창가에서 탁탁 하고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꽤 오랜만에 들어보는, 그러나 익히 잘 아는 친숙한 소리였다.
마리안은 여전히 웃음을 머금은 채 자리에서 일어나서 창문을 열었다. 그러자 비둘기만 한 당근색 새가 안으로 날아들어 왔다.
“안녕, 마리, 그리고 안녕, 아스터.”
시르안은 공식적인 자리에서는 아스터와 마리안에게 꼬박꼬박 국왕 전하와 왕비 전하라고 불렀지만, 사석에서는 편하게 대했다.
‘내가 이름으로 부르는 게 싫으면 날 부르지 않으면 되잖아?’
그리고 이러한 사실을 뒤늦게 안 베이퍼스 공작이 한마디 했을 때 시르안은 어깨를 으쓱하며 가볍게 말했다.
물론 베이퍼스 공작은 그 뒤로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국왕 부처가 아무 말도 하지 않는데, 베이퍼스 공작이 이 문제를 지적하는 것도 말이 안 되는 이야기였으니 말이다.
“무슨 일이야? 설마 급한 일이라도 있어?”
날개를 파닥거리며 방 한가운데로 들어온 시르안은 이내 평소의 사람의 형상으로 돌아왔다. 그는 마리안이 권한 의자에 편히 앉아 아스터가 따라주는 찻잔을 받아들였다.
“과자가 있으면 좋을 텐데. 잠깐 기다려봐.”
그러고는 주머니를 뒤져, 점심 무렵에 왕실 주방에서 슬쩍해 온 간식거리를 내놓는 것도 잊지 않았다.
“고마워요, 시르안. 초콜릿이 정말 맛있네요. 요즘 시녀들이 단걸 먹지 말라고 너무 야단이라서 밥도 마음대로 못 먹어요.”
“아니 왜? 어디 몸이라도 안 좋아? 왜 이 맛있는 걸 못 먹게 해?”
“다음 달에 열릴 무도회에 입을 드레스 때문에요. 정말이지, 내 드레스의 허리를 조금 늘린다고 해서 왕국이 망하는 것도 아닌데 왜 그러는지 모르겠어요.”
투덜거리는 마리안의 말에 시르안이 혀를 차더니 주머니에서 초콜릿을 한 줌 더 꺼내주었다.
“마음껏 먹어.”
“고마워요.”
정말로 신난다는 표정으로 마리안이 초콜릿을 먹기 시작하자 옆에서 아스터도 슬쩍 한 개를 집어 들었다.
“나도 한 개 먹어도 돼?”
“어머, 물론이에요. 제가 설마 당신에게 초콜릿 한 개를 나눠주지 않겠어요?”
마리안이 웃음을 터뜨리자 세 사람은 잠시 조촐한 티타임을 가졌다. 모두들 간만에 간식에 집중하느라 도저히 한 나라의 국왕과 왕비, 그리고 대마법사가 모인 자리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풍경이었다.
“그런데 나는 왜 부른 거야?”
“단도직입적으로 물어볼게요, 시르안. 혹시 엘다에게 마법을 가르쳐줄 수 있나요?”
“음, 글쎄.”
시르안이 잠시 생각에 잠긴 얼굴이 되었다.
“엘다의 재능이 너무 뛰어나서 평범한 마법사에게는 맡길 수 없을 것 같아요. 사실 저는 적어도 여덟 살이 될 때까지는 엘다에게 마법을 가르칠 생각이 없었는데, 이러다가는 사고가 날 것 같아서요.”
“오늘 엘다가 무슨 사고를 쳤어?”
“남쪽 정원의 정원수 두 그루를 부러뜨리고 왕궁 벽과 분수대를 파괴했죠.”
“이런, 세상에. 놀랐겠네,”
시르안이 저도 모르게 감탄사를 내뱉으며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그런데 엘다 혼자 그런 거야?”
“물론 레이널이 가세했죠.”
“그래서 애들이 정원 바닥에 붙어있었구나. 아까 날아오면서 보니까 둘이 옹기종기 모여서 뭔가 하고 있더라고.”
“정원 잔디를 복구하라고 했습니다.”
시르안은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사고를 치면 수습해야 한다는 걸 배워야지.”
“사실 나무 한두 그루를 부러뜨린 정도로 크게 야단 칠 일은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다른 사람이 말려들었으면 다쳤을 테니까요. 그 아이들이 뭣 모르고 한 일에 누군가가 피해를 입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맞는 말이야.”
시르안은 차를 한 모금 마시며 대답했다.
“자기 때문에 다른 사람이 다친다면 애들도 감당할 수 없을 거고요. 그런 일이 일어나기 전에 일단 엘다부터 정식으로 가르쳐야 할 것 같다는 아스터의 말에는 전적으로 동의해요.”
마리안도 끼어들자 시르안은 한동안 생각에 잠겨있었다.
“엘다를 보고 있으면 내 어린 시절이 생각나. 나는 그래도 열다섯 살에 왕립마법협회에 가입했는데 엘다라면 열 살에도 가능할지도 몰라.”
그 말에는 아스터와 마리안마저 깜짝 놀라 눈을 크게 떴다.
“뭐야, 그 반응은? 내가 지금까지 엘다에 대해 과장한다고 생각한 거야?”
“아직 너무 어린 애니까 그렇게까지 말해주시는 게 놀라워서요.”
마리안이 당혹스럽다는 듯이 말하자 시르안은 고개를 저었다.
“어차피 천재의 범주에 들어가면 나이는 별로 중요하지 않아. 중요한 건 엘다가 얼마나 집중력을 발휘해서 나한테서 배울 수 있느냐의 문제이지. 그런데 엘다한테는 그럴 생각이 있느냐고 물어봤어?”
“아직이요. 시르안에게 먼저 물어본 거였어요. 엘다를 가르쳐주실 수 있나요?”
마리안이 기대를 품고 묻자 시르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엘다가 좋다고 하면 나도 흥미가 있어. 엘다쯤 되는 재능을 가진 애는 나도 지금껏 본 적이 없어서 가르치는 것도 무척 즐거울 거야.”
시르안이 그다운 대답을 하자 아스터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종을 집어 들려고 했다. 시종을 불러 아이들을 이곳으로 데려오게 하기 위해서였다.
그러자 시르안이 혀를 차더니 창밖을 향해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던졌다.
“그냥 나한테 부르라고 하면 되지, 뭘.”
그리고 잠시 후, 아스터와 마리안은 웃음이 터져 나올 뻔한 것을 참아야 했다.
시르안이 아이들에게 여기로 오라고 전언을 보냈나 했는데, 5분도 지나지 않아 창문이 열리면서 무언가가 둥실둥실 날아들어 왔다. 그것은 거대하고 투명한 풍선 같은 막 안에 들어간 두 아이였다.
밖에서는 왕자와 공주가 둥실둥실 하늘을 날았으니 한바탕 난리가 나고 있었다.
“어떠냐, 재밌었어?”
“와, 정말 재밌었어요. 시르안, 다음에도 또 해주세요!”
“저도요! 너무 재미있었어요!”
시르안이 거대한 풍선 속에 들어있는 아이들을 꺼내며 감상을 물어보는 동안, 아스터는 창문가에 다가가 별일 아니니 괜찮다고 사람들을 물리쳐야 했다.
그리고 아스터가 창문을 닫았을 때는 흥분해서 떠들어대던 아이들도 입을 다물었다. 아이들이 그제야 방 한구석에서 조용히 차를 마시고 있는 자신들의 어머니를 발견한 탓이다.
“왜 그러니? 뺨은 새빨개져서. 밖이 많이 더웠니?”
그러나 자애로운 마리안의 질문에 두 아이는 잠시 눈치를 보다가 얼른 어머니에게로 달려갔다. 아마 쌍둥이는 아직 아스터가 자신들이 저지른 짓을 마리안에게 말하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평소 쌍둥이가 사고를 치면 엄하게 야단을 치는 마리안이었던 만큼, 오늘 있었던 일에 대해 알게 된다면 이렇게 부드럽게 웃어줄 리 없었으니 말이다.
“조금 더웠지만 괜찮았어요.”
“어마마마랑 시르안은 중앙궁에 어쩐 일이세요?”
아이들이 저마다 떠드는 것에 마리안은 미소를 지었다.
“시르안 님이 엘다에게 할 말이 있으시다는구나.”
“저한테요? 뭔데요?”
오늘 가장 크게 사고를 친 당사자인 엘다가 긴장하는 것이 눈에 보였다.
시르안은 그런 엘다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그는 전에 없이 무척이나 진지한 표정이었지만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은 아주 간단했다.
“나한테서 마법 배울래?”
“정말요?”
그 말에 엘다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녀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시르안을 보고 다시 아스터와 마리안을 돌아보았다.
“정말이에요?”
“그래.”
아스터가 고개를 끄덕이자 마리안이 다시 말을 건넸다.
“오늘 이야기를 들었단다, 엘다. 너에게는 아무래도 제대로 된 마법 교육이 필요할 거라는 데 아버지와 뜻을 같이했어.”
엘다는 어머니가 모든 사실을 알고 있다는 사실에 잠시 기가 죽은 얼굴을 했지만 이내 활짝 웃었다.
“최고예요. 감사합니다. 저 진짜 열심히 공부할게요. 그럼 앞으로 시르안 선생님이라고 부르면 되는 건가요?”
“아니 세상에, 날 선생님으로 부르다니. 그런 건 됐어. 그냥 시르안이라고 부르면 돼.”
시르안이 기겁하며 대답하자 엘다는 이제 마리안에게서 벗어나 그에게 쪼르르 달려가서 물었다.
“그럼 공부는 언제부터 시작하는 거예요? 뭐부터 배우면 되나요?”
꼬치꼬치 캐묻는 엘다에게 시르안이 성실하게 대답해주고 있는 동안 레이널이 조금 시무룩한 얼굴로 아스터와 마리안을 바라보며 물었다.
“저는 마법을 배울 수 없나요?”
“너는 엘다가 본격적으로 마법을 시작하면 나에게서 신성력을 다루는 법을 배우게 될 거다.”
아스터는 미리 생각해 뒀던 것을 말했다. 어차피 이 나라에서 가장 강력한 신성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아스터였으니, 레이널에게는 아스터가 가장 훌륭한 선생님이었다.
“정말이요?”
레이널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기뻐했다. 시무룩하던 자그마한 얼굴이 순식간에 환하게 밝아졌다.
“그래, 일단은 신성력을 제어하는 걸 배우고, 조금 빠르긴 하지만 차근차근 제왕학의 기초를 쌓아야겠지.”
그렇게 말하는 아스터의 눈빛은 무척 깊었다.
아스터 역시 신성력의 유무가 라베인 왕가의 왕위를 계승할 진정한 조건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엘다와 레이널의 성격을 비교해 보면, 자유분방한 엘다보다는 어린데도 벌써부터 생각이 깊고 책임감이 강한 레이널에게 국왕의 자질이 있다는 점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이 사실은 아스터뿐만이 아니라 마리안 역시 동의하는 바였다.
제왕학을 배우지 못한 까닭에 즉위한 뒤로도 한동안 애를 먹었던 아스터는, 어차피 교육을 시작해야 한다면 신성력을 가르치면서 조금씩이라도 제왕학도 알려줘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앞으로 무엇을 배워야 할 것인지 한동안 이야기가 오가고 나자, 너무나 신이 난 두 아이를 데리고 나간 사람은 시르안이었다.
시르안은 뭐가 그리 재밌는지 아이들과 손을 붙잡고 인사도 없이 가버렸다.
“…그런데 쟤네는 고작 여섯 살이잖아요. 무슨 애들이 여섯 살부터 공부하고 싶다고 그래요?”
아이들이 나간 뒤 마리안은 조금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아스터를 바라보았다.
그도 그럴 것이 마리안은 여섯 살에 책을 읽고 글을 쓰는 법을 배웠지만 공부하는 것을 그리 좋아하지는 않았다.
지금도 마리안은 자신이 어렸을 때 숙제를 내준 유모를 피해 도망 다녔다는 사실을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저건 날 닮은 게 아닌데. 아스터는 설마 여섯 살에 학구열이 넘쳤어요?”
“그럴 리가. 나는 그때 탑 속에서 이미 읽어서 더는 재미도 없는 동화책을 읽고 또 읽는 것밖에 한 일이 없었는데.”
“그럼 당신을 닮은 게 맞네요.”
“…그게, 그렇게 되나?”
아스터가 당혹스럽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해서 마리안은 웃고 말았다.
“공부하라고 해도 안 하는 애들보다야 알아서 공부하겠다는 애들이라 좋네요. 거봐요, 역시 저 말고 당신을 닮은 애들이라서 정말 다행이라니까요.”
그러자 아스터는 정말로 말도 안 된다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가 없어. 그리고 나는 억울해. 나는 좀 더 마리를 닮은 아이도 있었으면 좋겠단 말이지. 분명 그 아이도 우리를 기쁘고 행복하게 해줄 텐데.”
그렇게 말하던 아스터는 문득 눈을 반짝이며 마리안을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의아한 얼굴을 하는 마리안에게 다가가 그녀를 끌어안으며 은근하게 물었다.
“마리, 셋째는 생각이 없어?”
“국왕 전하, 해가 아직 중천에 떠있습니다.”
“뭐가 어떻습니까, 왕비 전하. 조금 있으면 해가 질 텐데요. 그러고 보니 요즘 바빠서 저녁을 함께 먹은 지 벌써 사흘이나 지났어.”
투덜거리는 듯한 아스터의 말에 마리안이 웃으며 물었다.
“그럼 오늘 저녁은 저와 함께 보내실래요, 전하?”
말뿐만이 아니라 마리안은 두 팔로 아스터의 목덜미를 끌어안으며 장난스럽게 물었다.
아스터는 그녀의 이마에 키스하며 진지하게 말했다.
“당연한 걸 묻지 말아요. 나의 비 전하.”
아스터와 마리안은 서로의 눈을 마주 보며 웃었다. 그러고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키스했다.
외전 완결#키쿠절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