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탑에 갇힌 왕자님-21화 (외전) (21/24)

외전 1. 아스터의 즉위 (1)

“잠이 안 깨네…….”

마리안은 조금 멍한 눈으로 이제는 제법 눈에 익은 창밖의 풍경을 바라보며 하품했다. 햇살이 상당히 뜨겁게 느껴지는 평화로운 6월의 어느 날이었다.

벌써 오전 10시가 넘어가고 있었지만 간밤에 늦게까지 무도회에 참석했던 탓인지 마리안은 아직 잠이 완전히 깨지 않은 상태였다.

여름이 되면서 날씨가 더워진 데다 환경마저 바뀌어서 그런지는 몰라도 요즘 들어 계속 졸리고 피곤했다. 오찬에 참석하려면 슬슬 몸단장을 시작해야 했지만 마리안은 할 수만 있다면 이대로 오후까지 푹 자고 싶었다.

간신히 몸을 일으킨 마리안은 미련이 뚝뚝 떨어지는 눈빛으로 침대를 바라보다가 별수 없이 편안한 실내복 차림으로 창가에 놓여있는 기다랗고 널찍한 의자에 기대앉았다.

이대로 딱 5분만 눈을 감고 쉬다가 종을 흔들어 시중을 들어줄 사람을 부를 생각이었다.

그러나 그 생각이 무색하게도 의자가 너무나 부드럽고 편안한 나머지 마리안은 자기도 모르게 잠이 들었다. 그녀는 어느덧 푹신한 의자 위에 몸을 웅크리고 눕기까지 했다.

감미롭고 달콤한 수마가 마리안을 덮쳐왔다.

도저히 거역할 수 없는 그 잠기운에 빠져든 뒤로 대체 얼마나 시간이 흘렀던 것일까. 인기척도 전혀 느끼지 못했는데 불현듯 이마에 부드러운 감촉이 와 닿았다.

마리안은 여전히 눈조차 뜨지 못하고 있었지만 입가에 미소를 머금었다.

“다녀왔어요?”

“응. 마리는 좀 잤어?”

부드럽고 다정한 목소리에 천천히 눈을 뜨자 아스터의 눈부신 황금빛 머리카락이 시야에 들어왔다. 따스한 금안이 마리안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스터는 허리를 깊이 숙여 마리안의 입술에도 한 번 더 가볍게 입을 맞추고는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많이 피곤해, 마리? 안색이 별로 좋지 않아.”

“괜찮아요. 그냥 좀 졸려요. 밤마다 파티에 나간 지 벌써 닷새째니까요.”

“정말이지…….”

아스터는 작게 한숨을 쉬고 두 손으로 마리안의 뺨을 감싸 신성력을 불어넣었다.

마리안은 따스하고 부드러운 빛이 자신을 감싸는 것에 다시금 눈을 감았다. 온몸을 계속 묵직하게 누르는 것 같던 피로가 순식간에 사라지면서 몸이 한결 가벼워졌다.

“좀 어때?”

“훨씬 좋아졌어요. 고마워요, 아스터.”

마리안이 아까보다 생기 넘치는 목소리로 대답하자 아스터는 그제야 마리안의 얼굴에서 손을 떼고 그녀의 곁에 앉았다.

“미안해. 나 때문에 마리가 고생이 많아.”

“아스터가 미안할 게 뭐가 있어요? 요 며칠 잠이 좀 부족해서 그런 거니까 괜찮아요. 저보다도 당신이 걱정인걸요. 아스터는 괜찮아요? 동이 트자마자 사냥하러 갔던 거죠?”

“응…….”

마리안의 말에 아스터는 이번에야말로 성대한 한숨을 쉬었다.

“시르안의 말이 맞았어.”

느닷없이 튀어나온 이름에 마리안이 의아하다는 눈빛으로 바라보자 아스터가 설명했다.

“전에 시르안에게 베이퍼스 공작이 어떤 사람이냐고 물었을 때 욕심쟁이니까 조심하라고 했었거든. 그 말을 주의 깊게 새겨들었어야 했어.”

“아……. 정말 그러네요. 역시 시르안은 현명해요.”

마리안은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그리고 마리안과 아스터는 서로 마주 보며 웃음을 터뜨렸다.

그들은 지금 남부 에르베 지방에 있는 베이퍼스 공작의 영지에 와있었다. 베이퍼스 공작은 왕세자 부처를 자신의 성으로 초청해 매일같이 무도회와 사냥 대회를 열어 극진하게 대접하고 있었다.

이번 초청이 단순한 초대가 아니라 남부에 근거지를 둔 귀족연합 가문들과 왕세자의 친선을 도모하는 중요한 자리였기 때문이다.

베이퍼스 공작은 이번 기회에 왕세자와의 친분을 과시하여 자신의 세력을 더 키우기 위해 철저하게 준비했다. 그리고 아스터는 자신의 절대적인 지지자인 베이퍼스 공작이 힘을 키울 수 있도록 최대한 협조하는 중이었다.

아스터가 정식으로 왕세자의 자리에 오른 지도 벌써 2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그동안 르샤베 왕국의 귀족들은 대부분 아스터를 지지하는 쪽으로 돌아섰다.

그러나 이전 왕세자비였던 세레나의 집안인 에베르토 공작가를 포함해서 클로타르와 정치적 이해관계를 함께하던 몇몇 주요 가문들은 아직도 아스터의 휘하에 들어오지 않은 상태였다.

클로타르는 아스터가 전에 갇혀있던 쿠르스 산맥 근처의 탑에 유폐된 까닭에 이제는 사실상 아무런 힘도 가지고 있지 못했다.

그러나 여전히 국모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왕비가 문제였다. 왕비는 아스터를 끝내 자기 아들로 인정하지 않았으며, 클로타르만이 이 나라의 진정한 왕세자라고 계속해서 우기고 있었다.

왕비가 이처럼 고집을 부리자 여러 가지 정치적 이유에서 클로타르를 포기할 수 없었던 몇몇 귀족 가문들이 왕비를 등에 업고 아스터에게 저항하고 있었다.

특별히 클로타르나 왕비와 같은 편이 아닌데도 아스터에게 돌아서지 않은 귀족도 있었다. 이들은 대부분 중앙 정계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갖춘 보수적인 귀족들이었다.

‘강력한 신성력을 가지고 계신 아스터 왕자께서 왕세자의 자리에 적합한 분이라는 사실은 잘 알고 있습니다. 그 점을 부정하지는 않습니다.’

아스터의 편이 되라고 설득하러 찾아간 마리안의 외숙부 블랑디르 백작에게 이같이 말한 사람은 로베르 카디아나 백작이었다. 그는 바로 아스터가 병을 치료해 준 카디아나 백작 부인의 남편이었다.

카디아나 백작가는 중앙 정계에서 강력한 권력을 가지고 있었으며, 지금까지 왕비와 매우 친밀한 관계를 유지해 왔다.

실제로 카디아나 백작은 상당한 공을 들인 끝에 왕비의 여동생을 자신의 아내로 맞아들였으며, 그 후로는 왕비의 인척이라는 지위를 적절히 잘 활용해 자신의 권력을 키웠다.

그러나 카디아나 백작 본인은 친왕비파로 분류되는 것을 매우 경계했다. 국왕이 어떤 사람인지 정확하게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백작은 자신의 충성을 오로지 국왕 한 사람을 향해 바쳤고, 그 때문에 지금까지 살아남을 수 있었다.

그래서 카디아나 백작은 비록 국왕이 아스터를 왕세자로 내세우긴 했지만, 그 후로 국왕이 왕비를 견제하지도 않을 뿐더러 왕세자에게 특별히 어떤 힘도 실어주지 않는 모습을 보며 선을 그었다.

‘르샤베 왕국이 건국된 이래 벌써 400년이란 세월이 흘렀습니다. 이미 라베인 왕가의 통치는 매우 굳건한 상태이니 왕세자가 반드시 신성력을 갖추고 있을 필요가 없다는 사실은 블랑디르 백작께서도 잘 알고 계시겠지요.’

카디아나 백작은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사실상 신성력의 유무에 구애받고 있는 건 왕가뿐입니다. 특히나 국왕 전하께서 강력한 신성력에 가장 집착하고 계시지요.’

카디아나 백작은 국왕이 자신의 보잘것없는 신성력에 상당한 자격지심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막강한 신성력을 가지고 있는 아스터를 왕세자로 내세웠지만, 그의 힘을 질투하고 있다는 사실도 분명하게 알고 있었다.

아직 이 나라의 실권은 국왕에게 있었다. 그러니 카디아나 백작으로서는 섣불리 아스터의 편을 자처할 수 없었다. 애초에 국왕이 건재한 이상 카디아나 백작에게는 일부러 나서서 아스터를 지지할 이유가 없었다.

‘이미 귀족들은 신성력을 내보이는 왕가의 행사를 왕권의 증명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제 그런 건 백성들에게 내보이는 의식에 불과할 뿐이죠.’

‘그래서 카디아나 백작께서는 앞으로도 클로타르 왕자를 지지하시겠다는 겁니까?’

결국 더 참지 못하고 질문한 블랑디르 백작에게 카디아나 백작은 고개를 저어 보였다.

‘그런 의미는 아닙니다. 저는 아스터 저하를 후계자로 내세우신 국왕 전하의 뜻을 받들고 있으니까요. 하지만 그동안 클로타르 왕자께서 보여주신 정치력을 깊이 신뢰하고 있었다는 사실만큼은 말씀드리고 싶군요. 귀족연합의 가문들에게는 만족스럽지 못한 이야기가 되겠지만, 왕성의 귀족들은 클로타르 왕자께서 왕세자로서 나라를 다스리는 것에 지금까지 아무런 불만이 없었습니다.’

그건 당연한 이야기였다. 국왕은 베이퍼스 공작가와 알리체 남작가, 그리고 블랑디르 백작가를 비롯한 귀족연합의 가문들을 중앙에서 배제한 뒤 그들이 가진 힘을 자신을 따르던 다른 중앙 귀족들에게 주었다.

그리고 클로타르는 그런 국왕과 정치적인 이해관계를 같이하는 사람이었다.

이제 와서 아스터와 손을 잡은 귀족연합의 가문들이 본래 가지고 있던 권력을 되찾겠다고 말해봤자, 중앙의 귀족들에게는 자신들의 것을 빼앗으려는 것으로밖에 여겨지지 않았다.

카디아나 백작은 힘주어 말했다.

‘오히려 지금에 와서 군주에게 더 필요한 덕목은 신성력이 아니라 뛰어난 정치력입니다. 아스터 왕자께서 분열된 귀족들을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여 포용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계신 분이라면 그 사실을 확인한 뒤 그분을 따라도 늦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카디아나 백작의 뜻은 분명했다.

어차피 이변이 없는 한 아스터가 왕위를 계승한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아스터의 즉위는 기존의 중앙 귀족들에게는 이득이 될 게 전혀 없었다.

그러니 아스터가 그들에게 미끼가 될 만한 것을 내밀며 어떤 이득이라도 보장하지 않는 이상, 굳이 미리 나서서 아스터의 편을 들어 국왕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 필요가 없었다.

‘백작 부인께서도 백작님과 똑같이 생각하십니까?’

블랑디르 백작은 카디아나 백작의 뜻을 명확하게 이해했다. 그래도 그의 곁에서 묵묵히 자리를 지키고 있는 백작 부인에게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사경을 헤매던 그녀를 구해준 사람이 다른 누구도 아닌 아스터가 아니었던가.

‘저는 아스터 저하께 큰 도움을 받았습니다. 그 점에 대해서는 저하께 진심으로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저하께서 베풀어주신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것입니다.’

백작 부인은 창백하게 굳은 얼굴로 말했다.

‘하지만 저는 왕비 전하의 여동생입니다. 저로서는 지금 당장 왕비 전하의 뜻을 거스를 수 없습니다. 제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으시겠지만 블랑디르 백작님께서도 제 입장을 조금은 생각해 주셨으면 합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블랑디르 백작이나 베이퍼스 공작은 아스터에게 힘을 실어주지 않는 국왕에게 불만이 많았다.

그러나 정작 당사자인 아스터는 느긋했다.

‘아무래도 클로타르가 상당히 오랜 세월에 걸쳐 왕세자의 자리에서 귀족들을 상대해 왔으니, 그들이 한순간에 내 편이 될 수는 없는 노릇이지. 하지만 그들은 결국 내 휘하에 들어오게 될 거야. 그러니 너무 조급해하지 말았으면 좋겠군요, 베이퍼스 공작.’

‘그건 그렇습니다만…….’

베이퍼스 공작은 한숨을 쉬었다. 그가 아무리 신중하고 능력이 출중하다고는 해도 젊고 혈기왕성한 나이이다 보니 능구렁이 같은 늙은 귀족들을 상대하기가 쉽지는 않았다.

‘지금은 서두를 때가 아닙니다. 급하게 몰아붙이면 반감만 키울 뿐이죠. 공작이 원하는 기회는 다시 찾아올 겁니다.’

‘저하의 말씀이 옳습니다.’

베이퍼스 공작은 수긍했다. 하지만 중앙 정계에서 하루라도 빨리 귀족연합의 세력을 넓히고 자신의 입지를 다지고 싶었던 공작에게는 현 상황이 만족스러울 리 없었다.

그래서 베이퍼스 공작은 보다 적극적으로 아스터의 편이기를 자처했다. 그는 지난 몇 달에 걸쳐 아스터에게 자신의 영지를 방문해 달라고 끈질기게 초대장을 보냈다.

그러고는 초대에 응한 왕세자 부처를 융숭하게 대접하는 한편, 자신이 짜놓은 엄청나게 빽빽한 일정에 맞춰 남부 귀족 가문의 사람들을 열정적으로 소개했다.

“공작이 보통 사람은 아닐 거라고 짐작했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지.”

“그러게요. 정말로 대단한 분이에요.”

베이퍼스 공작이 마련해 둔 일정은 마리안까지 혀를 내두를 정도로 빽빽했다.

덕분에 아스터는 베이퍼스 공작의 영지에 온 뒤로 꼬박 닷새째 오전에는 사냥에 나가고 저녁에는 무도회에 참석해야 했다.

마리안은 오찬과 오후의 티 파티, 그리고 만찬과 무도회에 참석하는 바쁜 날들을 보내고 있었다.

엄밀히 말하면 몸이 힘든 것은 아니었다. 아스터는 강력한 신성력의 소유자였고, 마리안은 여느 귀족 영애들에 비해 튼튼했다.

하지만 끊임없는 귀족들과의 만남은 아무래도 정신적인 소모가 매우 큰 일이었다.

베이퍼스 공작이 왕세자 부처에게 만나달라고 요청한 귀족들은 한결같이 아스터에게 호의적이었으며 그를 적극적으로 지지했다.

그러나 이들은 이해득실을 고려해 아스터의 편에 붙어 그와 친분을 얻고 싶어 한 것이지 아직 진정으로 아스터의 사람이라 할 수는 없었다.

그들은 모두 아스터가 과연 차기 국왕으로서 그들이 진심으로 충성을 바칠 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인지를 날카롭게 평가하고 있었다.

마리안 역시 귀부인과 귀족 영애들에게서 대단히 친밀하고 호의적인 대접을 받았다. 동시에 마리안은 그녀들이 사교계에 데뷔조차 해본 적이 없는 자신의 예의범절과 화법을 매의 눈으로 지켜보고 있다는 사실 역시 잘 알고 있었다.

“미안해, 마리. 나 때문에 계속 무리하게 만들어서.”

아스터가 마리안을 자신의 쪽으로 끌어당기며 사과해서 마리안은 피식 웃었다.

“아스터가 미안할 게 뭐가 있어요. 괜찮아요. 조금 피곤할 뿐이지 할 만해요. 우리가 겪은 일들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잖아요.”

마리안의 씩씩한 대답에 아스터는 웃으며 그녀에게 다시 한번 입을 맞췄다.

사실 아스터에게도 그리고 마리안에게도 귀족들의 탐색하는 눈빛은 피곤할 뿐이지 이렇다 할 정신적인 타격을 주는 것은 아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아스터는 열여섯 살부터 채찍질을 당하며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을 쳐야 했고, 마리안은 열일곱 살부터 평민들이 사는 거리로 나가 일거리를 구걸하다시피 찾아다니며 생계를 이어나갔다.

순탄치 못한 삶을 살아왔던 두 사람이 고작해야 탐색하는 눈초리로 쳐다보는 귀족들의 시선 따위에 괴로워할 리가 없었다.

애초에 왕궁이라 해서 아스터와 마리안에게 특별히 더 편한 장소는 아니었다. 아스터는 2년째 냉담하고 사무적인 국왕과 서먹서먹한 왕성의 중앙 귀족들에게 둘러싸여 정무를 익히고 있었다.

마리안은 독기 어린 눈빛으로 그녀를 노려보며 사사건건 방해를 하려 드는 왕비의 기 싸움을 해탈한 심정으로 받아넘기고 있었다.

오히려 남부의 귀족들은 국왕과 왕비에 비하면 훨씬 대하기 쉬웠다. 어쨌거나 이곳의 귀족들은 아스터와 마리안에게 잘 보여야 하는 사람들이었다.

단지 귀족들이란 워낙 콧대가 높다 보니 자신들이 아쉽다고 해서 처음부터 넙죽 엎드리려 들지 않았을 뿐이다.

하지만 아스터와 마리안은 그런 자들을 어떻게 다뤄야 하는지 이미 잘 알고 있었다.

에르베 지방의 날씨는 왕성보다 기온이 높아서 벌써 한여름의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

활짝 열린 창문을 통해 한차례 시원하고 기분 좋은 바람이 들어오자 아스터는 마리안을 품에 안은 채 몇 번째인지 모를 깊은 한숨을 쉬었다.

“오찬에 안 가면 안 되겠지?”

그는 이대로 마리안을 끌어안고 그녀와 시간을 보내고 싶었다.

“완전히 사기당한 기분이야. 공작은 나에게 자기 영지에 와서 푹 쉬라고 했었는데 말이지.”

푹 쉬기는커녕 닷새 동안 마리안과 함께 보낸 시간 자체가 극히 짧았다.

간밤에도 지쳐서 잠든 그녀를 몇 번 토닥이다가 날이 밝는 대로 사냥터로 끌려 나간 아스터였다. 마리안은 그와 같은 아스터의 반응에 웃었다.

“공작 부인께서 실망하실걸요.”

지금의 베이퍼스 공작은 아직 미혼이라 마리안이 말하는 공작 부인은 그의 어머니를 의미했다. 공작 부인은 베이퍼스 공작만큼이나 열성적인 사람인 데다 그만큼 엄격하고 까다롭기도 했다.

“…하긴, 아까 베이퍼스 공작이 내가 잡은 커다란 사슴을 점심에 대접하겠다고 신이 나서 들고 갔어.”

“사슴을 잡았어요?”

놀란 마리안이 눈을 동그랗게 뜨자 아스터는 어깨만 으쓱해 보였다.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어.”

“하지만 지켜보는 사람들은 깜짝 놀랐겠네요.”

“응, 꽤 호들갑을 떨었지.”

다른 사람이라면 큰 사슴을 잡았다며 하루 종일 입이 닳도록 자랑했겠지만 아스터는 대수롭지 않다는 말투였다.

애초에 그는 사냥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고, 병사들을 시켜 몰아 온 짐승을 한두 마리 잡는 일이 대단하다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그럼 오찬에 꼭 참석해서 목에 힘을 잔뜩 줘야겠네요. 베이퍼스 공작이 그렇게 판을 깔아줬으니까요.”

그런 아스터의 성향을 잘 아는 마리안이 마치 달래듯 그의 황금빛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하자 아스터는 쓴웃음을 지었다.

“그래야겠지.”

“그럼 저도 그만 늑장을 부리고 드레스를 입어야겠어요.”

마리안이 시녀들을 불러들여 치장을 시작하자 아스터도 별수 없이 옷을 갈아입고 오찬에 나갈 준비를 했다.

한참이나 공들여 의관을 정돈한 끝에 두 사람은 오찬이 마련된 식당으로 내려갔다.

아스터와 마리안이 들어갔을 때 거대한 공작가의 식당은 남부의 귀족들로 빼곡하게 차있었다.

“오늘도 무척 아름다우시군요, 왕세자비 저하.”

왕세자 부처가 언제 식당으로 내려오는지 이제나저제나 하고 기다리고 있던 베이퍼스 공작은 두 사람을 발견하자마자 만면에 희색을 드리운 채 다가왔다.

“고마워요, 베이퍼스 공작.”

정중하게 손등에 입을 맞추는 베이퍼스 공작에게 마리안이 미소 짓자 그가 웃으며 말했다.

“오늘 왕세자 저하께서 엄청나게 커다란 수사슴을 잡으셨다는 소식을 들으셨습니까?”

“물론이에요. 공작께서 그 사슴으로 맛있는 점심을 대접해 주실 거라고 장담하셨다는 이야기도 들었죠.”

“기대해 주셔도 될 겁니다. 감히 말씀드리자면 저희 집 요리사는 왕궁 요리사에 비견될 만한 인재니까요.”

넉살 좋게 말하는 베이퍼스 공작에게 미소 지으며 마리안은 자신의 자리에 앉았다.

곧 오찬이 시작되었다. 사냥에 다녀온 직후라 그런지 평소보다 활기차고, 어찌 보면 다소 소란스럽기도 한 자리였다.

수많은 남부 고위 귀족들이 앉아있는 기다란 테이블에서 귀족들은 저마다 자신의 무용담을 자랑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마리안은 그 소란 속에서 베이퍼스 공작 부인과 몇몇 백작 부인들의 이야기를 듣느라 바빴다.

그런데 한참 식사가 이어지고 있을 때, 창밖에서 참새 한 마리가 포르르 날아 들어왔다. 처음에는 참새의 존재를 눈치챈 사람이 거의 없었다.

그러나 마리안은 참새가 바로 베이퍼스 공작의 어깨에 앉는 것을 보고 곧 하던 말을 멈췄다. 당사자인 베이퍼스 공작 역시 대화를 멈추고 새를 바라보았다.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참새와 눈을 마주한 순간 베이퍼스 공작은 즉시 왕세자 부처와 귀족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마리안은 공작이 사라진 방향을 계속 바라보았다. 어쩐지 초조한 기분이 들었던 탓이다.

그녀는 저 참새를 아주 잘 알고 있었다. 분명 마법사 위르나였다. 그녀가 뭔가 급한 일로 찾아온 것이 분명했다.

잠시 후, 오찬이 행해지는 식당 안으로 베이퍼스 공작이 돌아왔다. 그러나 그는 위르나와 함께가 아니라 혼자였다.

“식사를 즐기시는 중에 방해해서 죄송합니다.”

베이퍼스 공작의 심각한 목소리에 대화하던 사람들이 모두 말을 멈추자 식당 안에는 고요한 침묵이 감돌았다.

아스터는 자신을 바라보는 베이퍼스 공작에게서 심상치 않은 기운을 느끼며 침착하게 물었다.

“무슨 일이 있습니까, 공작?”

“저하.”

베이퍼스 공작은 분명 동요하고 있었다. 그의 연한 초록색 눈이 전에 없이 흔들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심호흡을 한 번 하고는 이내 차분한 말투로 말했다.

“국왕 전하께서 오늘 아침에 갑자기 쓰러지셨다고 합니다.”

마리안은 깜짝 놀라서 아스터를 바라보았다. 그녀뿐만이 아니라 이 자리에 참석한 귀족들이 모두 크게 놀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아스터는 당혹스럽다는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베이퍼스 공작처럼 동요하고 있지는 않았다. 그런 왕세자의 얼굴을 보며 베이퍼스 공작도 침착함을 되찾고 말했다.

“왕세자 저하. 지금 당장 왕성으로 돌아가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러자 아스터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들 식사를 마저 하고 계십시오. 베이퍼스 공작은 나와 잠시 이야기를 합시다. 그리고 마리, 마리도 함께 가지.”

아스터의 부름에 마리안이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서자 아스터는 그녀의 곁으로 다가와 에스코트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마리안은 아스터를 따라 식당을 빠져나가면서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다들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기다란 테이블에는 훌륭한 요리가 가득 쌓여있었지만 아무도 음식에 손을 대지 않았다.

마리안이 아스터와 함께 베이퍼스 공작에게 다가가자 그는 정중한 태도로 왕세자 부처를 식당 옆의 작은 거실로 안내했다.

“어떻게 된 건가요?”

공작이 거실의 문을 닫자 가장 먼저 마리안이 질문했다.

“마법사 시르안이 위르나를 통해 급보를 보냈습니다. 아침에 갑자기 국왕 전하께서 쓰러지셨는데, 상황이 그리 좋지 않은 것 같습니다.”

베이퍼스 공작은 아스터를 잠시 바라본 뒤 낮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아무래도 두 분 저하께서는 바로 즉위식을 준비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국왕 전하의 상태가 그렇게 나쁜 건가요?”

마리안이 깜짝 놀라 묻자 베이퍼스 공작은 고개를 저어 보였다.

“시르안의 말로는 베스나 신전의 고위급 신관들이 급하게 왕궁으로 달려왔다고 합니다. 고비는 넘긴 것 같지만 문제는…….”

베이퍼스 공작은 아스터의 기색을 살피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왕비 전하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고 합니다. 아무래도 쿠르스 산맥의 탑으로 가신 게 아닐까 싶습니다.”

“아…….”

마리안은 짧은 탄식과 함께 얼굴을 찌푸렸다. 그녀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아스터를 돌아보았다.

왕비는 국왕이 쓰러졌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어떻게 해서든 클로타르에게 왕위를 잇게 할 속셈으로 탑으로 달려간 게 틀림없었다.

아스터는 별다른 표정의 변화 없이 묵묵히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마리안은 그런 아스터가 더욱 안쓰러운 마음에 손을 뻗어 그의 손을 잡았다. 그제야 아스터가 마리안을 보며 쓴웃음을 지어 보였다.

“난 괜찮아, 마리.”

“아스터…….”

마리안은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똑같은 아들인데 이렇게까지 차별하는 왕비를 마리안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아무리 아스터가 부모에게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는다고는 해도 어쨌거나 왕비는 그의 생모였다. 클로타르만을 아들이라고 주장하는 왕비의 태도에 상처받지 않을 리가 없었다.

그러나 마리안은 이 문제에 있어서는 아스터를 위로할 말이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아스터의 손을 힘껏 잡아주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데도 아스터는 마리안의 마음을 잘 안다는 듯 다정한 미소를 지으며 그녀의 손을 잡은 손에 가볍게 힘을 주어 응답했다.

그러고는 베이퍼스 공작을 바라보며 물었다.

“시르안이 그 밖에 무슨 이야기를 했습니까? 시르안도 내가 당장 왕궁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했습니까?”

“그렇습니다, 저하.”

베이퍼스 공작은 난감하다는 얼굴을 하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왕비 전하께서 당장 어떤 일을 하실 수 있지는 않겠지만, 혹시 또 모르는 일이니까요. 제가 보기에도 저하께서는 가능하면 빨리 왕궁으로 돌아가시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이미 위르나에게 게이트로 가는 마법진을 준비하게 했습니다.”

아스터는 고개를 끄덕였다.

“왕성에 있는 귀족들에게도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라고 연락해야겠군요. 종이와 펜을 좀 빌려주겠습니까?”

베이퍼스 공작이 그 요청에 서둘러 종이와 펜을 가져오자 아스터는 즉석에서 편지를 한 장 쓰고는 다른 종이 한 장에 펜으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빠른 연락을 하기 위한 간단한 마법진이었다.

지난 2년 동안 시르안의 지도를 받은 그의 마법 능력은 놀라울 정도로 향상되어 있었다. 아스터가 작게 중얼거리자 은은한 녹색 불이 일렁이는 가운데 편지가 천천히 녹아들었다.

“뭐라고 쓰셨습니까?”

“블랑디르 백작에게 내가 곧 갈 테니 당황하지 말고 만일의 사태를 대비해 사병을 모아두라 했습니다. 공작, 당신도 나와 함께 가겠습니까?”

“당연한 것을 물으시는군요, 저하. 이럴 때일수록 제가 저하의 곁을 지켜야 하지 않겠습니까?”

결의에 찬 공작의 말에 아스터는 희미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고맙습니다, 공작. 그렇게 말해주니 마음이 든든하군요. 그럼 바로 왕궁으로 가도록 하죠.”

베이퍼스 공작은 아직 영문도 모른 채 식당에 모여있는 귀족들에게 간단한 전언을 남기고는 곧바로 왕세자 부처를 2층의 넓은 방으로 데려갔다.

그곳에서는 마법사 위르나가 제법 크고 정교한 마법진을 한창 그리고 있었다.

“거의 다 됐으니까 안쪽의 동그란 원 안으로 들어가요. 게이트까지 가서 거기서 마차를 타고 달릴 겁니다.”

남쪽의 에르베 지방에서 왕성까지의 거리는 말로 쉬지 않고 꼬박 달려도 일주일이 필요할 만큼 멀었다. 마법진으로 단번에 왕성으로 이동하려면 어마어마한 마력과 정교한 마법진이 필요했지만 지금은 그런 것을 준비할 여유가 없었다.

그래도 게이트를 두 번만 타면 반나절 안으로 왕성까지 갈 수는 있었다. 물론 이 정도의 마법을 시전하는 데는 고위급 마법사가 필요했는데, 위르나는 그 정도의 마법은 충분히 부릴 수 있는 능력자였다.

일행이 왕성 근처의 게이트에 도착했을 때는 슬슬 해가 지려 하고 있었다.

“저기, 마차가 기다리고 있군요.”

위르나가 지친 듯한 목소리로 가리킨 곳에는 시르안이 보낸 게 틀림없는 마차가 있었다.

“수고했어요, 위르나. 좀 쉬도록 해요.”

아스터는 위르나에게 감사를 표한 뒤 자신이 직접 마차로 다가갔다.

마차에는 마부가 없이 갈색의 말 네 마리가 얌전하게 매여져 있었다. 분명 이들은 시르안의 마법으로 움직이는 것 같았다.

아스터가 마차에 가장 먼저 오르며 손을 내밀자 마리안이 그 손을 붙잡고 올라탔다. 이어서 베이퍼스 공작이 지칠 대로 지친 위르나를 부축해 함께 마차에 오르자, 저절로 문이 닫히더니 마차가 달리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마차 안에는 주먹만 한 크기의 당근색 불덩이가 둥실 떠오르더니 시르안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어서들 와. 베스나 신전에서 기다리고 있어. 한 시간쯤 전에 국왕이 여기로 옮겨져 왔거든.”

“오랜만입니다, 시르안. 국왕 전하의 상태는 어떻습니까?”

담담하게 묻는 아스터의 질문에 시르안이 말했다.

“당장 세상 하직할 상태는 아닌 거 같아. 하지만 그다지 좋은 상태라고 장담할 수도 없어. 지금 그의 건강 상태를 제대로 아는 사람은 재상과 시종관밖에 없거든. 하루 종일 난리도 아니었어.”

“국왕 전하께서는 베스나 신전의 어디에 계십니까?”

“해와 달의 성역에 홀로 앉아있어. 그 모습을 보면 아마 기다리는 것 같아…….”

시르안은 잠시 뜸을 들였다.

“…아마도 자신의 진정한 후계자가 될 사람이 찾아오길 말이지.”

그 말에 일동의 표정이 어두워졌지만 오로지 아스터만은 담담했다.

“국왕 전하께서 제 앞으로 연락을 보내긴 했습니까?”

“…아니.”

그 대답에 마리안의 얼굴이 일그러지려 했을 때 시르안이 이어서 말했다.

“하지만 클로타르에게도 연락을 보내지는 않았어. 아마 지금 이 순간에도 자신이 쓰러졌다는 소식에 사람들이 전전긍긍하는 모습을 보는 게 즐거운가 봐. 하여간에 성격 참 마음에 안 든단 말이야.”

한 나라의 국왕에게 하는 말치고는 너무나 불경한 표현에 베이퍼스 공작이 헛기침을 했지만 시르안은 전혀 개의치 않았다.

“왕비 전하도 참 대단해. 그래도 이런 순간에는 쓰러진 남편의 곁을 지킬 줄 알았는데 국왕이 숨넘어가는데 쳐다도 안 보고 편애하는 아들에게 달려가더라. 하긴, 뭐. 자업자득이니 어쩌겠어. 그따위로 구는데 정떨어질 만도 하지. 어쨌든 기다리고 있으니까 빨리 와.”

그 말이 끝나는 것과 동시에 네 마리의 말이 히이잉 하고 울더니 마차의 속도가 한결 빨라졌다.

“그래도 생각했던 것보다 심각한 상황은 아닌 것 같군요.”

침묵하는 마차 안의 일행들을 돌아보며 아스터는 평온한 어조로 말했다.

사실 아스터는 일행 중 그 누구보다도 침착하고 담담한 상태였다.

아스터가 생각한 최악의 상황은 왕비가 지지 세력과 손을 잡고 병력을 동원해서 강제로 왕궁이나 베스나 신전을 점거하고 클로타르를 왕으로 내세우는 경우였다.

그러나 국왕이 홀로 있는 데다 시르안의 목소리에서도 위기감이 느껴지지 않는 것을 보면 아직 그만한 일이 일어난 것 같지는 않았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대비는 하셔야 할 겁니다.”

베이퍼스 공작이 조심스럽게 의견을 내세우자 아스터는 고개를 끄덕였다.

“위르나, 많이 피곤하십니까? 혹시라도 베스나 신전에서 전투를 하게 될 경우가 생길 때 함께 싸워주실 수 있겠습니까?”

위르나는 아스터의 질문에 고개를 끄덕였다.

“이동 마법 때문에 조금 피곤해서 그럴 뿐이지 이 정도로는 괜찮습니다.”

“신성력으로 도와드려도 되겠습니까?”

그러자 위르나는 조금 주저하는 얼굴이 되었다.

“하지만 지금 굳이 저 때문에 저하의 힘을 낭비하지 않는 게 좋지 않을까요?”

“낭비라니요. 위르나는 저를 지지해 주시는 소중한 동료입니다. 혹시 모를 위험한 일이 일어났을 때 위르나가 도와주셔야 제게도 편합니다.”

“아스터의 말대로예요, 위르나. 피로를 조금이라도 회복하는 게 좋겠어요.”

마리안까지 거들자 위르나는 여전히 주저하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그러자 아스터는 즉시 손을 뻗어 위르나의 이마에 대고 신성력을 불어넣었다.

“정말로 놀라운 힘이군요. 사실 신성력은 한 번도 직접 경험해 본 적이 없었거든요.”

불과 5분도 지나지 않아서 피로한 기색을 떨친 위르나가 놀랍다는 표정으로 말하자 아스터가 부드럽게 미소 지어 보였다.

“도움이 되어 다행입니다.”

아닌 게 아니라 아스터의 신성력 역시 마력과 함께 2년 전보다 더욱 강해져 있었다. 다른 사람의 피로를 풀어주기 위해 신성력을 약간 쓰는 정도는 별로 힘든 일이 아니었다.

그렇게 나름 위르나의 전력을 보충한 일행은 이윽고 베스나 신전에 도착하자마자 어떻게 움직여야 할지를 논의했다.

“위르나가 마리안의 곁을 꼭 지켜주시길 바랍니다.”

“물론이에요. 제가 비 저하를 목숨 걸고 지킬 것이니 저하는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물론 베이퍼스 공작님도 제가 지켜드릴 거고요.”

마차 안에 있는 사람의 수는 고작 네 명이었지만 사실상 아스터와 위르나는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최근 들어 계속해서 왕성에 머물던 블랑디르 백작이 자신의 사병을 데리고 달려오기로 한데다, 신전에는 이미 시르안이 도착해 동향을 살피고 있었다.

왕궁 마법사와 베스나 신전의 고위급 신관들이 목숨을 걸고 싸우려 들지 않는 이상 이 정도 인원만으로도 몸을 지키는 데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그러나 유일하게 베이퍼스 공작만큼은 걱정이 많았다. 혹시라도 왕비와 왕비의 일가친척들, 그리고 그녀를 지지하는 귀족 세력들이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넌 나머지 사생결단의 각오로 덤벼들 경우를 상정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시르안의 마법 덕에 나는 듯이 달린 마차가 베스나 신전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해가 지고 주변이 어두워진 뒤였다.

“어서 와.”

마차의 문을 연 순간, 일행을 반겨준 것은 당근색의 비둘기만 한 새의 모습을 하고 있는 시르안이었다.

“베이퍼스 공작의 영지까지 가서 얼마 지내지도 못하고 올라왔네. 가는 데만도 2주쯤 시간을 잡아먹지 않았어? 본전도 못 찾고 고생만 했겠네.”

혀를 차는 시르안의 인사에 아스터가 쓴웃음을 삼켰다.

실질적으로 왕세자 부처의 진정한 고생은 에르베 지방에 내려가는 동안이 아니라, 베이퍼스 공작가에 도착한 다음부터 시작되었다.

그러나 그 이야기를 당사자가 있는 앞에서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오랜만에 만나니 반갑습니다, 시르안. 그나저나 국왕 전하의 동태는 어떻습니까?”

“여전히 해와 달의 성역에 홀로 앉아있어. 신관들까지 물리친 걸 보면 버틸 만한 것 같아. 이대로 가보겠어?”

“그래야죠.”

아스터가 고개를 끄덕이자 당근색 비둘기가 어둠 속으로 녹아들더니 사람의 모습으로 변했다.

“그럼 지금부터는 내가 같이 가도록 하지.”

“감사합니다. 그런데 블랑디르 백작은 어디 있습니까?”

“백작은 해와 달의 성역 앞에서 왕궁 기사단과 대치하고 있어.”

“상황이 매우 위험한 거 아닌가요?”

그 말에 깜짝 놀란 마리안이 끼어들었다.

그도 그럴 것이 베스나 신전 안에 사병을 이끌고 와 왕궁 기사단과 대치 중이라는 것은 언제 싸움이 터져도 이상하지 않은 일촉즉발의 상태라는 말과 다를 바가 없었기 때문이다.

“언제 상황이 급변할지는 모르겠지만 아직은 그런 분위기는 아니야.”

시르안은 일단 마리안을 안심시킨 뒤 위르나를 돌아보았다.

“그래도 만일의 사태가 일어났을 때는 위르나가 마리랑 공작님을 지켜줘. 나는 아스터를 지킬 테니까. 안에서 국왕이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으니 조심해야 할 거야.”

“고맙습니다, 시르안. 그리고 다시 한번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위르나.”

아스터마저 고개를 숙이며 부탁하자 위르나는 조금 긴장한 얼굴로 말했다.

“걱정 말아요. 내가 비 저하와 공작님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지켜드릴 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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