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장 아스터의 분노
한편 아스터는 마리안이 칼멘과 함께 떠나자 시르안이 되돌아오기를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었다.
창가에서 서성이던 그는 마리안이 떠나고 두 시간이나 지난 뒤에야 시르안이 느긋하게 날아와서 창문을 탁탁 두들기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시르안, 혹시 보셨습니까? 칼멘 후작이 와서 마리안을 데리고 갔어요.”
“뭐? 언제?”
막 창밖에서 날아 들어와 아스터의 손바닥 위로 내려앉던 시르안이 눈을 크게 떴다.
눈을 크게 떴다고는 해도 비둘기만 한 당근색 새가 눈을 동그랗게 뜬 것에 지나지 않았지만, 평소와 달리 아스터는 그 귀여움을 눈여겨볼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두 시간쯤 되었어요. 마리안이 당신에게 구슬로 연락해야 하는지 고민해서 제가 전하겠다고 했습니다.”
“아, 그건 잘했어. 마리안에게도 급할 때 내게 연락할 방법이 있으면 좋으니까.”
순식간에 사람의 모습으로 변한 시르안은 품 안에서 종이를 하나 꺼내 마법진을 그리더니 나직하게 읊조렸다. 마법진이 번쩍이기 시작하자 그는 허공에 대고 말했다.
“위르나, 마리안이 칼멘 후작과 두 시간 전에 출발했어. 내일 찾아가.”
시르안이 말을 끝낸 것과 동시에 마법진의 불이 꺼졌다. 시르안은 이제 평범한 종이로만 보이는 그것을 동그랗게 뭉치더니 바로 난롯불 속으로 던져 넣었다.
“방금 그건 블랑디르 백작에게 연락하신 겁니까?”
“그래, 그쪽에도 나 말고 위르나라는 마법사가 하나 있거든. 상당히 유능하니까 별로 걱정하지 않아도 될 거야.”
시르안은 그렇게 말하더니 이번에는 허공에 대고 주문을 외워 난롯불에 주전자를 걸고 차를 끓이기 시작했다.
“마실래?”
“네, 부탁드립니다.”
시르안은 솜씨 좋게 마리안이 만들어낸 민트와 라카인을 섞어 만든 차를 만들어주었다.
“이거 은근히 생각나더라. 마리안 덕분에 재밌는 걸 알게 됐어.”
김을 후후 불어 차를 마시던 시르안은 아스터가 묵묵히 자신을 바라보자 입을 열었다.
“왜? 뭐?”
“마리안이 집에 가면 블랑디르 백작은 어떻게 할 생각이라고 합니까? 당신은 그들과 줄곧 연락을 주고받지 않았나요?”
“블랑디르 백작이 베이퍼스 공작을 필두로 귀족연합의 가문들을 설득하러 다녔어. 아마 내일 귀족연합의 수장인 베이퍼스 공작이 마리안을 만나서 어떻게 할 건지 확정을 내리겠지.”
“당신은 별로 걱정하지는 않는군요.”
“내가 걱정해야 해? 어차피 다들 너와 손잡는 것을 제외하면 딱히 뾰족한 수를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잖아?”
그 말에 아스터는 쓴웃음을 지었다.
“그래도 거절할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글쎄. 그럼 귀족연합이라는 곳이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멍청이들만 모여있는 집합소라는 소리가 되겠지. 눈앞의 기회도 잡을 줄 모르는 얼간이라는 소리니까.”
가차 없는 시르안의 말에 아스터는 엷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시르안은 베이퍼스 공작이 어떤 사람인지 알고 계십니까?”
“아, 베이퍼스 공작 말이지.”
시르안은 차를 한 모금 더 마시고 고개를 끄덕였다.
“너랑 좀 비슷한 것 같으면서도 달라. 나이는 너랑 비슷할걸?”
그러자 아스터가 조금 놀란 얼굴이 되었다.
“블랑디르 백작과 동년배일 거라고 생각했는데요.”
“크루아 베이퍼스 공작이라면 3년 전에 갑자기 병으로 죽는 바람에 지금은 아들인 루카 베이퍼스가 작위를 이었어. 귀족연합이 그동안 형편이 좋지 않았던 건 크루아 베이퍼스가 갑자기 사망하면서 구심점을 잃은 게 꽤 컸지. 새로운 베이퍼스 공작은 걸출한 수완가라는 말이 있는데 아마 너랑 이야기는 잘 통할 거야. 그런데 루카 베이퍼스는 욕심쟁이야. 그것만 잘 기억해.”
두 사람이 차를 마시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 시르안이 갑자기 몸을 살짝 떨더니 주머니에서 작은 구슬을 꺼냈다. 그 구슬을 잠시 보며 나직하게 읊조리던 시르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베이퍼스 공작이 내일 마리안의 집으로 만나러 가겠대. 그쪽은 걱정하지 말고 너는 아침에 하다 만 연습을 계속하는 게 좋겠다.”
시르안은 지치지도 않고 아스터를 계속 돌보며 마법을 가르쳤다. 그래 봤자 시르안이 가르치는 것은 기초적인 내용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방식은 큰 효과를 봐서 아스터는 전보다 몸 상태가 많이 좋아졌음을 느낄 수 있었다. 여전히 신성력이 정체되어 있긴 했지만 몸에 가해지던 부담은 월등히 줄어든 상태였다.
다음 날 마리안과 베이퍼스 공작 사이에서 이야기가 잘되었다는 희소식도 전해졌다. 시르안은 소식을 전해 듣자마자 아스터에게 결과만 말해주고는 그 이상의 말은 일절 하지 않았다.
“베이퍼스 공작과 귀족연합이 널 지지하기로 했대. 자세한 건 마리안에게 들어. 고생한 건 그 애니까. 마리안에게서 전해 듣는 게 순리에 맞지.”
“감사합니다.”
아스터는 무뚝뚝하게 말하고 다시 마법을 훈련하게 하는 시르안에게 부드럽게 미소했다. 눈앞의 마법사는 제멋대로이고 종잡을 수 없는 것 같아도 의외로 상식을 넘는 일은 절대로 하지 않았다.
“마리안을 빨리 만나고 싶군요.”
“내일 오후면 올 텐데 뭘 그래. 고작 2박 3일 떨어져 있었는데.”
“그래도 보고 싶습니다. 그 2박 3일이 무척 길게 느껴지네요.”
담담하게 말하는 아스터를 보며 시르안은 혀를 차더니 그날도 동이 틀 때까지 가르쳤다.
마리안이 되돌아오는 날이 밝았다.
아스터는 해가 떠오를 때까지 밤을 꼬박 새워가며 시르안에게서 마법을 배웠기 때문에 아침에 기절하다시피 잠들어 있었다. 그런데 갑작스러운 마차 소리에 그는 잠에서 깨어나야 했다.
“뭐죠, 무슨 일입니까?”
깜짝 놀라 눈을 뜨자 아침이 되면서 새의 모습으로 돌아가 난롯가 근처의 창틀에 앉아 꾸벅꾸벅 졸고 있던 시르안이 미간을 찌푸린 채 창가에 서있는 모습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그는 마리안이 없는 동안에 베르트가 오기 전까지는 창밖으로 나가지 않고 계속 꼭대기 층의 방에 머물고 있었다.
“칼멘 후작인데.”
시르안의 목소리에 아스터는 창밖을 내다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칼멘이 로브를 눌러쓴 사람과 함께 마차에서 내리고 있었다.
“일단 창밖에 나가있어요, 시르안.”
“가까이에 있을 거니까 무슨 일이 생기면 바로 불러.”
시르안이 새로 변신해서 창밖으로 날아가자마자 칼멘이 계단을 걸어 올라오는 소리가 들렸다.
잠시 후, 아스터는 잠이 덜 깬 얼굴로 칼멘을 맞이했다.
“오늘 또 보게 될 줄은 몰랐군.”
“주무시고 계신 데 깨운 것 같군요. 몸은 좀 어떠십니까?”
“이틀 전보다는 나아졌지만 신성력은 돌아오지 않았어.”
아스터의 말에 칼멘의 얼굴은 바로 일그러졌다.
“오늘 힘을 꼭 써야 할 일이 있나 보지?”
“…그렇습니다. 오늘은 베스나 신전의 의례가 있는 날이니까요.”
아스터는 그저 고개만 끄덕여 보였다.
한숨을 쉰 칼멘이 손짓하자 함께 따라온 이가 아스터에게 다가왔다. 바로 고위급 신관이었다. 그는 찬찬히 아스터의 상태를 살피고는 칼멘에게 고개를 저어 보였다.
“아스터 님의 몸에는 아직도 신성력이 쌓이지 않았습니다.”
“하아, 그렇군.”
칼멘은 드물게 깊은 한숨을 쉬며 난감한 얼굴을 했다.
“마음이 조급해 다시 찾아뵈었습니다. 이만 물러가도록 하겠습니다.”
단 이틀 만에 아스터의 상태가 극적으로 좋아지지는 않으리라고 생각했지만, 역시나 그에게서 신성력을 뽑아 쓸 수 없게 되자 칼멘은 매우 낙담한 눈치였다.
그러나 신성력이 없는 아스터와는 오래 나눌 이야기가 없었는지 그는 몇 마디 의례적인 인사말로 아스터에게 어서 좋아지길 바란다고 말하고는 서둘러 방을 떠나려 했다.
“오늘 마리안이 돌아오는 데는 변화가 없겠지?”
그런 칼멘의 뒤통수에 대고 아스터는 담담하게 물었다.
“네, 오후에 제가 마차를 보낼 예정입니다. 혹시 오늘 베르트의 진료가 꼭 필요한 게 아니라면 제가 그를 데려가도 괜찮겠습니까?”
“그래, 상관없어.”
“그럼 다음에 뵙도록 하겠습니다.”
칼멘이 빠른 걸음으로 나가자 신관도 그 뒤를 바로 따라 나갔다. 그러나 그는 잠시 멈칫하는 얼굴로 멈춰 서서 아스터를 살폈다.
“왜 그러지?”
“아, 아닙니다.”
신관은 어딘가 묘한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그 이상 말하지 않고 가버렸다.
“저 신관이 조금 눈치챘나 보네.”
신관이 나가자마자 방으로 다시 들어온 시르안이 혀를 찼다.
“눈치를 채다니요?”
“너에게서 마나를 느낀 거 같은데.”
“지금까지는 전혀 못 느꼈단 말입니까?”
아스터가 의아한 얼굴을 하자 시르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상태가 마나와 신성력이 뒤섞여서 진흙탕같이 되어있는 중이니까. 나야 마나에 무척 예민하니까 금방 깨달은 거고, 저 신관은 아마 신성력만 느끼다가 오늘 처음 마나를 느꼈는지도 모르지. 어지간해서는 네 상태는 깨닫기 쉽지 않을 거야. 뭐랄까, 좀 복잡하거든, 넌.”
시르안의 말을 들으며 아스터는 그가 비정상적일 정도로 오랜 시간을 살아온 마법사라는 데 생각이 미쳤다.
“전 정말로 운이 좋았던 것 같군요.”
“뭐가?”
“그래도 제 상태를 바로 알아봐 주신 분을 만났지 않습니까.”
“그거야 뭐, 재밌었으니까.”
시르안은 어깨를 으쓱하더니 떠나가는 마차에 계속 시선을 주며 말했다.
“그런데 쟤네 좀 급한가 보네.”
“이제 슬슬 클로타르가 자기 힘을 증명해 보여야 할 시기이긴 하죠.”
“그럼 조만간 다시 들이닥치겠구나.”
“아마도 그럴 겁니다.”
아스터는 담담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하루빨리 신성력을 되찾아서 이곳을 나가야 할 것 같습니다. 이대로는 클로타르가 날뛰는 바람에 마리안이 괴로워할 만한 일이 또 생길지도 모르겠네요.”
“그래, 넌 여기에서 너무 오래 머물렀으니까.”
시르안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칼멘의 방문으로 잠이 완전히 깨어버린 탓에 아스터는 오전 내내 새의 모습을 하고 졸고 있는 시르안의 옆에서 책을 좀 더 읽고 있었다.
그 조용하던 상황에 변화가 생긴 것은 갑자기 시르안이 푸드덕 소리를 내며 날아올라서였다. 깜짝 놀란 아스터가 돌아보자 시르안이 사람의 모습으로 돌아와서 손에 빛나는 작은 구슬을 쥐고 있었다.
“마리안, 그래 나야. 말해.”
시르안의 말에 아스터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알았어.”
시르안은 아주 짧게 대답했다.
아스터는 시르안이 그렇게 대답하자마자 빛나던 구슬이 새까맣게 변해가는 모습을 보았다.
“마리안에게 무슨 일이 있는 겁니까?”
“클로타르가 마리안을 베스나 신전으로 불러들였어.”
“클로타르가 말입니까?”
아스터의 얼굴이 심각해졌다.
“베스나 신전에서 신성력을 내보이는 의례를 한다고 했었지? 그런데 클로타르가 왜 마리안을 불러들인 거지? 혹시 전에 클로타르가 마리안을 따로 어딘가에 데려간 적이 있나?”
“그런 적은 한 번도 없습니다.”
“흐음.”
“시르안, 어쩐지 예감이 좋지 않아요. 클로타르가 신성력을 쓸 수 없게 되어 굉장히 화를 내고 있을 텐데, 왜 하필 이런 시점에서 마리안을 데려간 것인지 불안합니다.”
시르안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전에 없이 진지한 얼굴로 아스터를 바라보았다.
“이제 어떻게 할래, 왕자님?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어. 위르나가 아직 왕성에 있을 테니 베이퍼스 공작과 함께 상황을 살펴보라고 할 수 있고, 시간은 조금 걸리겠지만 내가 가보는 방법도 있지. 그리고 베스나 신전 인근에서…….”
시르안이 하나하나 손가락을 접어가며 말하는데, 아스터가 시르안의 말을 잘랐다.
“제가 가겠습니다.”
시르안은 아스터의 말에 눈을 깜빡였다.
“네가 직접? 클로타르가 마리안을 부른 이유가 별 게 아니었을 수도 있어.”
“알고 있습니다.”
아스터는 고개를 끄덕였다.
“넌 아직 신성력을 회복하지 못했는데 벌써부터 모습을 드러낼 필요는 없어.”
“마리안은 절 위해 항상 위험을 감수해 주었습니다. 그녀가 위험한지도 모르는 지금 제가 외면한다는 건 말이 되지 않습니다.”
아스터의 목소리는 단호했다.
“더욱이 아까 시르안도 말씀하셨잖습니까. 저는 이미 이곳에서 충분히 오래 머물렀습니다. 절 도와주시겠습니까?”
시르안은 아스터를 바라보았다. 아스터의 얼굴은 전에 없이 진지했고 표정에는 절박함이 담겨있었다.
시르안은 잠시 생각하다가 물었다.
“그럼 오늘 베스나 신전을 뒤엎는 거야?”
그는 어딘가 기대에 찬 표정을 하고 있었다. 아스터는 그런 시르안을 바라보며 손을 내밀었다.
“같이 엎으시죠.”
순간 시르안이 볼 근육을 씰룩였다. 그는 곧 웃음을 터뜨리며 아스터의 손을 잡고 악수했다.
“난 진짜 네가 볼수록 마음에 들어.”
“단, 마리안의 안전이 확보된 다음입니다.”
“물론이지. 그럼 귀족연합이고 뭐고 작전 변경이긴 하지만, 베스나 신전으로 가기 전에 일단 연락부터 해보자.”
아스터는 시르안이 마법진을 그리며 마법사 위르나에게 아직 왕성에 있다면 베스나 신전으로 오라고 전갈을 보내는 동안 천천히 옷을 챙겨 입었다.
그런 그의 눈에 마리안이 늘 머무는 난롯가의 자리가 들어왔다. 마리안이 잘 개켜놓고 간 담요 위에는 그녀가 입는 옷이 놓여있었다. 아스터는 손끝으로 마리안의 옷을 한 번 쓸었다.
그의 얼굴에는 마리안과 시르안에게 늘 보여주던 다정한 미소가 사라져있었다. 클로타르가 마리안을 불러들였다는 사실만으로도 그는 가슴속이 타들어 가는 듯한 초조함을 느꼈다.
“난 이제 그만 여기서 나가야겠어, 마리.”
아스터는 열심히 마법진을 그리고 있는 시르안을 한 번 돌아보고는 다짐하듯 작게 속삭였다.
“오늘은 내가 널 구하러 갈 거야.”
잠시 후, 성채의 동쪽 탑에서는 폭발음이 울려 퍼졌다. 깜짝 놀란 성채의 병사들과 기사들, 그리고 수비 대장 토르튼이 뛰쳐나왔을 때는 꼭대기 층으로 올라가는 나선형 계단을 따라 모락모락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매캐한 먼지 냄새와 함께 무너지는 소리가 나서 성채의 병사들은 한 걸음씩 뒤로 물러났다.
잠시 후 사람의 형상을 하고 있는 시르안과 아스터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은 빠르게 계단을 뛰어 내려오고 있었다.
“아, 아스터 님이 도주한다!”
“안 돼, 잡아! 절대로 놓쳐서는 안 된다!”
“성채 문을 닫아!”
절박한 외침이 여기저기서 터져 나오는 가운데, 병사들은 우왕좌왕하고 있었다.
그들은 평소 수비 대장 토르튼의 지시에 따라 훈련을 게을리하지 않았지만, 먼지와 연기가 피어오르면서 시야가 가로막힌 데다 건물 한쪽이 무너지는 소리가 나자 섣불리 덤벼들지 못하고 있었다.
“계속 달려!”
그런 병사들의 상태를 곁눈질하며 시르안이 바람처럼 가볍게 달렸다.
아스터는 시르안이 새의 모습으로 미리 봐둔 길을 따라 성채의 마구간으로 정신없이 달렸다. 체력이 아직 전부 돌아오지 않은 데다 이렇게 달려본 적이 없는 아스터는 숨이 금방 턱 끝까지 차올랐다. 그러나 그는 마구간에 도착할 때까지 한 번도 쉬지 않았다.
“자, 그럼 가보자고.”
시르안이 건장한 군마 한 필에 올라타면서 빠르게 마법을 걸었다. 그는 바로 손을 뻗어 아스터에게 내밀었다.
“잡아, 왕자님!”
아스터가 손을 내밀자 시르안은 그를 재빨리 끌어 올렸다.
“저기 따라오는 애들 좀 처리해 줘.”
시르안은 말을 달려 앞으로 나가면서 외쳤다.
아스터는 시르안의 외침에 지난 며칠 동안 밤을 새워가며 배운 마법을 펼쳤다.
그는 아직 비어있는 신성력 대신, 몸 안에 차곡차곡 쌓여있는 마나를 끌어 올려 뒤따르는 병사들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조심해! 상대는 마법사다!”
몇몇 사람들의 비명이 울려 퍼지는 것과 동시에 상당히 묵직한 기운이 아스터의 손안에 모여들었다가 병사들을 향해 쏘아져 나갔다.
엄청난 바람이 뒤따르던 병사들을 덮쳤다. 마치 허리케인에 휘말리기라도 한 듯이 병사들이 바람에 밀려 나갔다.
“오, 잘하는데?”
지난 며칠 동안 시르안이 여름철에 부채를 부치는 대신에 유용하게 써먹을 수 있다며 가르친 바람 마법이었다.
감탄하며 씨익 웃은 시르안은 손을 펼쳐 눈앞의 성채의 대문을 향해 불구슬을 던졌다. 이내 폭발음과 함께 아우성이 들리고 성문이 활짝 열렸다.
‘성채에 걸려있는 보호 마법 때문에 안에서는 이동 마법을 쓰기 힘들어. 그러니 일단 문을 돌파해서 나간 뒤, 게이트를 통과해서 왕성으로 갈 거야.’
불과 이 소동이 일어나기 10분 전에 시르안이 내놓은 작전이었다.
아스터는 성인 남자 두 사람도 거뜬히 태울 수 있도록 마법에 걸려 바람처럼 달려 나가는 말 위에서 멀어져 가는 성채의 모습을 이상한 기분으로 바라보았다.
그는 자신이 언제부터 탑에 갇혔는지 기억하지 못했다. 그런대로 사물을 판별할 줄 알게 되었을 무렵부터 그는 성채의 탑에서 살고 있었다.
평생 성채를 떠나본 적이 없는 아스터로서는 이렇게 성채의 정문이 빠르게 뒤편으로 사라지고 있는 지금의 상황이 비현실적으로 느껴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시르안이 필사적으로 말을 달려 게이트에 뛰어들어 버렸기 때문에 아스터는 긴 생각을 할 수 없었다.
* * *
아스터가 시르안과 함께 베스나 신전에 도착하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시르안은 게이트를 통과하자마자 전에 그 근방에 미리 만들어둔 마법진을 발동시켜 이동했다.
“여기가 베스나 신전입니까?”
눈앞에 거대한 흰색 석조 건물들이 나타나자 아스터는 신기하다는 듯이 물었다.
“그래, 여기가 베스나 신전이야. 넌 처음이지?”
“네.”
아스터는 고개를 끄덕였다.
왕성에 사는 사람들은 아이가 태어나면 반드시 이 베스나 신전에서 아이에게 축복을 내리는 의식을 거행하곤 했다.
본래 베스나 신전은 왕성의 동쪽에 지어진 평범하고 자그마한 신전에 지나지 않았지만, 르샤베 왕국이 건국될 무렵에 신전의 크기를 크게 확장했다. 그래서 현재에는 보기만 해도 압도될 정도로 거대한 건축물들을 가지게 되었다.
아스터는 조금 막막한 기분으로 시르안을 돌아보았다.
“이 넓은 신전 안의 어디에 마리안이 있는 걸까요?”
“지금부터 찾아봐야지. 마리안이 내가 준 구슬을 아직 간직하고 있다면 비교적 빨리 찾을 수 있을 텐데…….”
시르안이 작게 중얼거리며 마법을 펼치려 했을 때였다. 저편에서 검은 눈에 갈색 머리를 가진 자그마하고 통통한 여인이 반갑게 이쪽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빨리 왔네? 전력을 다해 달려왔구나.”
“그래. 위르나, 너도 지금 도착한 거야?”
“응, 나머지도 이제 곧 올 거야.”
위르나라 불린 여인이 고개를 끄덕이자 이번에는 베이퍼스 공작이 이끄는 한 무리의 사람이 나타났다.
“이거 꽤 재미있게 됐는데.”
시르안이 짧게 웃어 보이고는 아스터와 위르나, 베이퍼스 공작에게 각자 서로를 소개했다.
“이쪽이 바로 마법사 위르나야. 그리고 위르나, 공작님. 이쪽이 바로 우리의 왕자님입니다.”
“안녕하세요, 아스터 시엘라 라베인입니다.”
아스터는 환하게 웃으며 위르나와 사람들에게 인사했다. 아스터는 베이퍼스 공작에게 손을 내밀었다.
“이곳까지 와줘서 고맙습니다, 베이퍼스 공작. 오늘의 일을 잊지 않겠습니다.”
“그렇게까지 말씀해 주셔서 무한한 영광입니다.”
베이퍼스 공작은 여전히 무뚝뚝했지만 진심으로 손을 내밀었다.
그리고 아스터와 공작의 인사가 끝나자 한 남자가 가까이 다가왔다. 아스터는 그의 얼굴을 보는 것만으로도 그가 누구인지 알 것 같았다. 검은 머리에 푸른 눈을 가진 장년의 남자는 눈매가 마리안과 빼닮아 있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아스터 님. 마티아스 블랑디르입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블랑디르 백작. 드디어 만나는군요.”
블랑디르 백작은 어딘가 복잡하기도 하고 감회가 새롭기도 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는 이내 무릎까지 꿇으며 고개를 깊이 숙였다.
“왕자 저하의 힘이 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고맙습니다, 블랑디르 백작.”
아스터가 블랑디르 백작을 일으키자 시르안이 입을 열었다.
“자, 그럼 대충 소개도 끝났으니 마리안을 찾으러 가봐야지.”
아스터는 신전의 풍경을 둘러보았다. 새하얀 건물들이 아름답고도 장엄하게 꾸며진 공간이었다.
“베스나 신전에는 다섯 개의 건물이 있습니다. 먼저 북쪽의 새벽, 동쪽의 아침, 남쪽의 정오, 서쪽의 저녁이란 이름의 건물 네 채가 있고, 중앙에 왕을 상징하는 ‘해와 달의 성역’이 있습니다. 북쪽의 새벽은 왕가의 사람들에게, 동쪽의 아침은 귀족들에게, 남쪽의 정오는 평민에게, 그리고 서쪽의 저녁은 신관과 이곳을 찾는 외국인에게 개방된 공간입니다.”
베스나 신전에 대해 설명한 사람은 베이퍼스 공작이었다. 그가 여기에 있는 그 누구보다 신전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북쪽의 새벽을 먼저 뒤져봐야 하지 않을까? 왕가의 사람들에게 개방된 곳이라면.”
시르안이 먼저 의견을 내는데 위르나가 말했다.
“눈속임을 노릴 수도 있지.”
“일단 평민들이 오가는 남쪽의 정오에는 병사를 두셋 보내고 다른 곳은 각자 나눠서 찾아보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평민들이 많이 와있는데 마리안을 숨기면 아무래도 눈에 띌 테니까…….”
시르안이 다시 의견을 내고 있는데 종소리가 들렸다.
“방금 종소리는 뭡니까?”
“의식이 끝나갈 때 울리는 종소리입니다. 해와 달의 성역에서 신관들이 주도하는 의식이 거의 끝난 것 같으니 이제 슬슬 클로타르 저하가 신성력을 내보일 때가 된 것 같습니다.”
아스터의 질문에 베이퍼스 공작이 대답했다.
“남은 의례에 시간이 얼마나 걸릴까요? 클로타르가 신성력을 내보이면 모든 게 끝납니까?”
“아라크 신에게 다시 감사 기도를 할 테니 3~40분 정도는 시간이 남습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아스터는 잠시 눈을 감았다 떴다. 그의 얼굴에는 괴로운 기색이 역력했다. 아스터는 당연히 마리안부터 찾으러 가고 싶었지만 그러기에는 시간이 너무 부족했다.
그는 먼저 블랑디르 백작과 위르나를 바라보았다.
“블랑디르 백작과 마법사 위르나는 20명의 병사와 함께 마리안을 찾아주십시오. 북쪽의 새벽을 먼저 돌아보고 그다음에 동쪽의 아침, 서쪽의 저녁, 마지막으로 남쪽의 정오의 순서로 남은 건물들을 확인해 주시길 바랍니다.”
그 말에 당황한 사람은 시르안이었다.
“무슨 소리야, 아스터. 설마 마리안을 구하지 않고 이대로 들어가려고? 아직 신성력이 제대로 회복되지 않았잖아. 지금 그 상태로 클로타르를 만나서 어쩌려……. 어, 어엇? 너…….”
말하던 중간에 시르안은 얼빠진 소리를 냈다. 그는 깜짝 놀란 얼굴로 위에서 아래로 아스터를 찬찬히 살폈다.
“잠깐 실례.”
그러고는 아스터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너…….”
아스터에게서는 신성력이 느껴졌다. 마나와 마구 뒤섞여 있는 상태가 아니라 신성력이 확연하게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었다.
시르안의 눈이 커졌다.
“이게 대체 어떻게 된 거야? 신성력이 돌아왔잖아!”
“아직 전부 돌아온 건 아닙니다. 이 신전에 들어온 다음부터 가슴 한곳이 답답하며 막힌 것 같던 느낌이 사라지면서 어느 순간 힘이 조금씩 돌아온다고 느꼈습니다.”
“여기가 베스나 신전이라 그런 게 아닐까? 신성력이 아라크의 힘이라는 말은 정말인가 보네.”
위르나의 한마디에 시르안은 골똘히 생각에 잠긴 채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역시 함부로 재단할 힘이 아닌가 봐.”
두 마법사가 생각에 잠겨있는 모습을 보며 베이퍼스 공작은 길게 한숨을 쉬었다. 이 긴급한 와중에도 마법사들은 마나와 신성력의 차이에 대해 생각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는 아스터를 돌아보며 물었다.
“그럼 오늘 여기서 모습을 드러낼 작정이십니까?”
“이왕 여기까지 온 거 그렇게 하고 싶습니다. 여기서 마리안을 구해 바로 도주하는 선택지도 있겠지만 그렇게 하면 앞으로 꽤 어려운 싸움을 해야 될 겁니다. 차라리 지금 정체를 밝혀 클로타르의 왕세자로서의 정통성과 명분에 타격을 줄 필요가 있습니다.”
“그 말씀에는 동의합니다만…….”
아스터는 난감해하는 공작을 바라보며 물었다.
“지금 신전 밖에 있는 병력이 얼마나 됩니까?”
“대략 30명 정도 더 있습니다. 그리고 현재 왕성에 남아있는 귀족연합 각 가문의 사병을 다 끌어모으면 110명 정도 됩니다. 그들에게도 만일의 사태를 대비해서 대기하게 해두긴 했습니다.”
아스터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정도면 충분합니다. 우리는 전쟁을 하려는 것도 아니고 반란을 일으키려 하는 것도 아니니까요. 공작은 우선 신전 밖의 병력을 이곳으로 불러들이고, 귀족연합의 사병들을 빠르게 신전 앞에 모이게 하십시오. 블랑디르 백작이 마리안을 구출하는 동안 클로타르의 신성력이 가짜라는 것을 밝히고 왕궁으로 들어가겠습니다.”
“만일 국왕 전하와 귀족들이 거세게 반발하면 그때는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베이퍼스 공작의 질문에 아스터는 담담하게 대답했다.
“오늘 반드시 클로타르를 왕세자의 자리에서 끌어내리지 못한다고 해도 상관없습니다. 이 세상에 나란 존재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하는 것만으로도 귀족들은 크게 동요하게 될 겁니다.”
“음…….”
베이퍼스 공작이 침음을 흘렸다. 그의 얼굴은 무척 복잡해 보였다.
“하지만 그들이 그 와중에도 힘을 모아 나의 왕궁 진입을 방해한다면 힘으로 뚫고 가야지요. 나 또한 르샤베의 왕자입니다. 내가 왕궁에 들어가지 못할 이유는 없습니다.”
아스터의 목소리에는 힘이 있었고 여유도 있었다. 결국 베이퍼스 공작은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그래도 우리 쪽은 수가 적으니 만에 하나 상황이 매우 불리하게 진행될 경우를 대비해서 시르안과 위르나 두 마법사께서 탈출에 도움을 주시길 부탁드리겠습니다.”
그 말에는 시르안과 위르나도 고개를 끄덕였다.
“해와 달의 성역으로 진입하는 순간 탈출에 필요한 마법을 미리 준비해 놓고 있을게.”
“나는 빨리 마리안을 찾아서 합류할게.”
아스터는 시르안과 위르나에게 감사의 눈빛을 보낸 뒤 블랑디르 백작의 눈을 바라보며 간절하게 말했다.
“마리안을 잘 부탁드립니다.”
“제 조카입니다. 목숨을 걸고 찾아내어 지키겠습니다.”
“아, 맞아.”
블랑디르 백작의 결연한 얼굴을 보고 있던 시르안이 문득 생각났다는 듯이 위르나에게 구슬을 건넸다. 마리안이 소식을 전한 뒤로 까맣게 변해버린 구슬이었다.
“그 구슬의 다른 한쪽을 찾아봐, 위르나. 마리안을 더 빨리 발견할 수 있을지도 몰라.”
“알았어.”
위르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드디어 일행이 나뉘었다. 위르나가 블랑디르 백작과 함께 병사들을 이끌고 떠나자 베이퍼스 공작도 사람을 보내 신전 밖의 병사들을 불러오게 했다. 아스터는 결연한 눈빛으로 남은 일행을 둘러보았다.
“이제 해와 달의 성역으로 갑시다.”
* * *
그 무렵 해와 달의 성역에서는 의례가 한창 진행되고 있었다. 베스나 신전에서는 1년에 네 차례의 중요한 왕실 의례가 거행되었는데, 왕성 밖에 사는 백성들에게는 그리 잘 알려져 있지 않았다.
표면적으로 이 시기의 의례는 본격적인 추수철이 시작되기 전까지 한 해의 풍년과 번성이 계속될 수 있기를 기원하기 위한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러나 실제로 이 네 차례의 의식은 라베인 왕가가 귀족들을 상대로 왕자(王者)로서의 정통성을 과시하는 매우 중요한 자리였다. 왕국의 정통성을 드러내는 가장 크고 중요한 예식인 건국제에 이어 왕가의 혈통이 아라크의 후손임을 기리는 행사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날의 의례에는 중앙 정계의 귀족들이 거의 빠짐없이 참석했다.
행사장 전면에는 화려하게 치장한 국왕 부처와 더불어 왕세자 부부가 앉아있었고, 그 주위부터 순차적으로 고위 귀족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왕성 안의 백성들 또한 모여든 왕족과 귀족들을 구경하기 위해 빼곡하게 몰려들었다.
오늘 의례에는 아직 파리한 안색의 카디아나 백작 부인이 제단의 중앙에 앉아있었다.
왕비의 여동생인 카디아나 백작 부인은 얼마 전 병으로 쓰러져 사경을 헤맸다. 클로타르가 신성력을 쏟아부어 간신히 살려내기는 했지만 카디아나 백작 부인의 얼굴은 여전히 병색이 짙었다.
그녀를 살리느라 아스터는 한 달 사이에 두 번이나 극한까지 신성력을 빼앗겨 심한 고생을 해야 했다.
왕비는 마음이 편치 않은 나머지 불안한 눈초리로 동생과 아들인 클로타르 왕세자를 계속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는 클로타르가 열세 살이 되는 해에 신성력을 쓸 수 없게 되었다는 사실을 가장 먼저 깨달은 사람이었다.
본래 클로타르는 갓 태어났을 때만 해도 미약하게나마 신성력을 품고 있었고, 열두 살까지는 작은 기적들을 보여주었다.
‘엄마가 좋아하는 장미꽃에게 어서어서 빨리 꽃을 피워달라고 노래를 불러줬는데 정말로 꽃이 피었어요!’
왕비는 아직 장미가 필 수 없는 3월에 흐드러지게 피어난 붉은 장미를 한 아름 안고 달려와 품에 안겼던 어린 아들의 모습을 영원히 잊을 수가 없었다.
왕비에게 클로타르는 누구보다 다정하고 완벽한, 자랑스러운 아들이었다.
‘신께서는 어째서 무정하게도…….’
그러나 그 능력은 클로타르가 열세 살이 되던 해에 마치 증발하듯 사라져버리고 말았다. 아무도 이유를 알지 못했다. 왕비의 절망은 매우 컸다.
라베인 왕가에서 신성력이 없는 사람은 왕위를 이을 수 없었다. 그래서 르샤베 왕국의 계보를 보면 여왕이 등극한 경우도 여러 번 있었다. 문제는 지금의 공주는 태어날 때부터 신성력을 조금도 가지고 있지 않다는 점이었다.
‘탑에 있는 그 아이는 어떤가?’
그때 무심한 목소리로 말한 사람은 남편인 국왕이었다.
‘전하, 어떻게 그런 말씀을?’
‘그 아이에게 신성력이 있을지도 모르지.’
‘그럴 리가 없습니다. 저와 전하가 함께 확인했던 일이지 않습니까?’
기다려 마지않았던 왕자가 태어난 순간, 국왕은 크게 기뻐하며 클로타르에게서 신성력이 느껴진다고 말했다. 온몸이 부서지는 것 같은 고통 속에서도 건강한 왕자를 출산한 왕비의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컸다.
산파와 의사가 당황한 목소리로 배 속에 아직 아이가 하나 더 있다고 말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르샤베 왕국의 의술은 상당한 수준이었지만 왕비는 다른 임신부들에 비해 배가 많이 나오지 않았던 데다, 그 밖의 특이할 만한 증상이 하나도 없었기 때문에 아무도 왕비가 쌍둥이를 임신했을 거라고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기력을 모두 짜내 이미 클로타르를 출산한 왕비에게는 그때부터 지옥이 시작되었다. 왕비는 긴 시간 동안 난산으로 엄청난 고생 끝에 아스터를 낳았으나, 아스터에게 신성력이 없다는 소리를 들었다.
고귀한 집안에 태어나 곱게만 자라났던 그녀에게 인생에서 가장 괴롭고 힘든 순간은 바로 아스터를 낳았을 때였다. 원치 않았던 쌍둥이인 데다 신성력마저 가지고 있지 않은 아이는 그녀에게는 필요 없는 혹 같은 존재일 수밖에 없었다.
국왕은 클로타르를 낳은 순간 무척 다정하게 왕비의 손을 잡고 수고했다며 사랑을 속삭였다. 그러나 아직 아스터가 남아있다는 의료진의 당혹스러워하는 목소리에는 안색을 완전히 바꾸고 방에서 나가버렸다.
그리고 왕비는 그날 이후로 왕이 예전처럼 자신을 대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싫어도 깨닫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애는 내 인생에서 하등 쓸모가 없는 존재야.’
왕비의 마음속에는 아스터를 향한 증오가 쌓여갔다. 이성적으로는 갓 태어난 아이에게 죄가 없다는 것을 알았지만, 그런데도 그녀는 아스터에게 조금도 애정을 줄 수가 없었다.
클로타르와 똑같은 얼굴로 강보에 싸여있는 아스터를 볼 때마다 싸늘하게 식어가던 왕의 얼굴을 떠올리며 등줄기에 차가운 게 흐르는 기분이 들기도 했다.
우연히 임신한 셋째 공주가 쌍둥이가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한 다음에야 국왕은 예전처럼 다정한 모습으로 왕비를 대했다. 그러자 왕비는 아스터의 존재를 더욱 눈엣가시처럼 여겼다.
아스터가 세 살이 되던 해에 국왕은 먼 북방 쿠르스 산맥 근처의 탑에 어린 왕자를 유폐하겠다고 통보했다. 라베인 왕가의 저주에 대해 알고 있는 왕비는 아무런 반대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의 오점인 아스터가 빨리 사라져주기만을 바랐다.
그 후로 10년간 왕비는 단 한 번도 자신이 낳은 또 다른 왕자를 생각한 적이 없었다.
그런데 클로타르에게서 갑자기 신성력이 사라지면서 국왕이 10년 만에 그 아이의 이야기를 꺼낸 것이다. 게다가 확인 결과는 더욱 절망적이었다. 신관이 보고한 바에 따르면 아스터에게는 신성력이 넘쳐흘렀다.
‘아스터를 데려와야 하지 않나 싶소.’
국왕이 그런 말을 꺼낸 날 왕비는 처음으로 국왕과 험악하게 싸웠다.
‘지난 10년간 한 번도 돌아보지 않은 아이를 신성력 때문에 데려온다고요? 그럼 내 아이는요? 내 클로타르는 어쩌란 거죠?’
‘아스터 역시 그대의 아이이지 않소.’
‘그렇지 않아요. 나는 모르는 일이에요. 내 아들은 하나뿐이라고요! 내게서 클로타르를 빼앗으려 한다면 나는 차라리 죽고 말겠어요.’
왕비의 대응이 너무나 감정적이었기 때문에 국왕은 더 이상 그 문제에 대해 언급하려 하지 않았다. 그러나 클로타르에게서 신성력이 없다는 사실은 심각한 문제였다.
사실 라베인 왕가의 깊은 고민은 현 국왕마저 갈수록 신성력이 약해지고 있다는 점에 있었다. 현재의 국왕도 그저 신성력을 보유만 하고 있을 뿐, 그 힘이 특별히 강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왕의 다른 형제들 중에는 신성력을 보유한 사람이 아무도 없었기 때문에 국왕은 자신의 아버지가 형제들과 치열한 왕위 계승 전쟁을 벌여야 했던 것과 달리 무난하게 왕위를 계승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의 미약한 힘은 갈수록 더 약해졌다. 그 와중에 클로타르에게서 신성력이 더 이상 느껴지지 않는다는 사실은 정말로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었다.
400년 전 루트윈 라베인은 고만고만한 귀족들 사이에서 자신만이 가진 신성력으로 왕좌의 정통성을 내세워 왕위에 올랐다.
그래서 그의 후손들은 끊임없이 신성력을 내보여 정통성을 확인해야 했으며, 지금에 와서는 왕국의 안정을 위해 신성력을 내보여야 했다. 그러니 신성력을 잃은 클로타르를 그대로 둘 수는 없었다.
생각다 못한 국왕은 그의 아버지가 했던 짓을 떠올렸다. 지금에 와서는 진실을 알고 있는 사람들이 감히 입 밖으로 꺼낼 수 없는 일이 불과 몇십 년 전에 일어났던 것이다.
클로타르와 아스터의 조부인 선대 국왕은 정치적인 술수를 이용해서 자신보다 강력한 신성력을 갖춘 누이를 유폐했다. 그런 뒤 그녀가 죽을 때까지 평생 그 신성력을 빼앗아 자신의 것으로 삼았다. 그리고 웬만큼 신성력을 가진 아들이 성년이 되자 일찌감치 왕위를 넘겨 왕권을 강화했다.
국왕은 자신의 아버지가 형제에게 했던 짓을 그대로 아들인 아스터에게 되풀이했다. 그는 클로타르에게 아스터의 신성력을 빼앗는 방법을 알려줬다.
비록 국왕이 왕비와 클로타르에게 냉담하게 굴긴 했지만, 그래도 역시 10년 동안 탑 속에 가둬두고 방치한 아들보다는 클로타르를 심정적으로 지지했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었다.
하지만 클로타르가 결혼한 뒤로 새로운 문제가 터졌다.
‘왕세자 저하는 후손을 보실 수 없습니다.’
클로타르가 결혼한 지 2년째가 되던 해에 의사뿐만 아니라 신관과 마법사 모두에게서 확인받은 사실이었다.
그날 이후로 왕세자를 바라보는 국왕의 시선은 한층 더 차가워졌다. 그 사실을 예민하게 감지한 클로타르는 성격이 더욱 포악하게 변해갔다.
그러나 왕비에게는 아무래도 좋은 일이었다. 그녀에게 클로타르는 여전히 다정하고 착한 맏아들이었다.
상념에서 벗어난 왕비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녀는 동생인 카디아나 백작 부인의 파리한 얼굴을 보고 있었다.
동생을 죽게 할 수는 없었다. 카디아나 백작가는 왕실의 절대적인 지지자 중 하나로 국왕과도 정치적 이해관계를 같이하는 막강한 원군이었다.
무엇보다 카디아나 백작 부인쯤 되는 사람이 왕실의 신성력의 가호를 받지 못한다면 정통성에 대한 의문이 생겨날 것이 뻔했다.
그러나 그 쓸모없던 왕자가 단 두 번 신성력을 내줬다는 이유만으로 힘을 잃었다고 했다.
‘저는 베스나 신전에 갈 수 없습니다. 제게는 아무런 힘도 없어요.’
신경질적으로 대답하는 클로타르에게 국왕은 쓸모없는 놈이라며 폭언을 내뱉었다. 심지어 국왕은 왕비에게도 분노를 참지 못했다.
‘그러게 클로타르가 힘을 잃었다는 사실을 확인했을 때 그 애를 데려왔다면 좋았을 것을. 이걸 앞으로 어떻게 책임질 거요?’
왕비는 순간 두 손에 힘을 꼬옥 주었다.
평생을 함께 살았던 국왕이었지만 그 순간 왕비는 국왕에게서 혐오를 느꼈다. 말도 안 되는 저주가 마음에 걸려 쌍둥이를 꺼린 것도 국왕이었고, 태어난 아이 중에 신성력을 가진 아이를 잘못 골라낸 쪽도 국왕이었다.
클로타르가 힘을 잃기 전까지는 단 한 번도 그 아이에게 관심을 가졌던 적도 없었으면서, 이제 와서 클로타르를 쓸모없다며 내치려 드는 국왕에게 왕비는 격심한 분노를 느꼈다.
왕비의 속마음이 어떻든 의례는 절차에 따라 계속 진행되고 있었다. 신관과 사제들이 관례에 따라 의식을 집전하고, 기도가 있었으며, 꽃을 뿌리고 성가를 불렀다.
의례는 점차 절정을 향해 나아갔다. 이제 라베인의 혈통이 카디아나 백작 부인의 병을 치유해 아라크의 후손임을 입증하고 신전으로부터 왕가의 정통성을 인정받는 절차가 남아있었다.
왕비는 사랑해 마지않는 아들을 바라보았다. 오전에 매우 기분이 나빠 보였던 왕세자는 지금은 평소의 여유를 되찾고 조용히 제단을 응시하고 있었다.
왕비는 왕세자를 위해 신전과 매우 큰 거래를 한 참이었다. 고위급 신관 하나를 희생해 그의 신성력을 왕세자가 쓸 수 있게 했다. 이 때문에 왕비는 왕비궁의 모든 재산을 털어 어마어마한 기부를 약속한 참이었다.
‘그까짓 돈 따위…….’
왕비는 다시금 입술을 깨물었다. 돈 따위는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그녀의 아들이 무사히 왕위에 오르는 모습을 보기만 하면 되었다.
이제 드디어 왕세자의 차례가 되었다. 눈부신 흰색 의복을 입은 클로타르가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제단의 정중앙으로 걸어 나갔다. 신관의 지도에 따라 몇 가지 의식을 행한 뒤, 클로타르는 카디아나 백작 부인에게 손을 내밀었다.
왕비는 두 손을 기도하듯 모은 채 눈을 빛내며 그녀의 아들을 바라보았다.
클로타르의 손에서 아름다운 황금색 빛이 퍼져 나가며 백작 부인의 몸을 빛이 감싸기 시작했다. 주변에서 작은 감탄사와 술렁거림이 일어났다. 볼 때마다 정말로 성스럽고 아름다운 광경이었다.
얼마나 힘을 쏟아부었는지 클로타르가 조금 비틀거리자 신관이 얼른 그를 부축했다. 왕비는 비틀거리는 아들의 모습에 안색이 창백해져서 자기도 모르게 손으로 옷자락을 꽉 쥐었다.
하지만 클로타르는 부드럽게 신관을 물리치고는 그의 이모인 카디아나 백작 부인에게 손을 내밀었다.
“카디아나 백작 부인, 몸 상태는 어떠십니까?”
그의 목소리는 다정하고 부드러웠다.
“왕세자 저하……. 저하 덕분에 많이 괜찮아졌습…….”
그러나 말을 끝맺기도 전에 카디아나 백작 부인이 갑자기 손으로 자신의 입을 틀어막았다. 다음 순간 그녀는 격렬한 기침과 함께 피를 토했다.
신성력을 쏟아부어 넣은 탓에 조금 발그레해졌던 두 뺨이 격한 기침으로 새빨갛게 물들어 갔다. 그녀가 고통스러운 듯 가슴을 쥐어뜯으며 신음하자, 백작 부인의 얼굴을 바라보는 클로타르의 표정이 그리 밝지 못했다.
그는 급한 대로 다시 손을 뻗어 백작 부인을 치료하려 했지만, 고위 신관에게서 빼앗아온 신성력은 아스터에 비해 터무니없이 부족했다.
클로타르의 얼굴이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갑자기 왕세자가 크게 비틀거려서 술렁임이 더 커졌다.
“저하, 괜찮으십니까?”
놀란 신관이 다급히 부축하자 클로타르는 지친 듯 신관을 붙잡았다.
“조금, 힘들군요.”
“저하께서 무리하시면 안 됩니다. 힘을 너무 많이 소진하셨습니다. 카디아나 백작 부인은 다음에도 치료해 드릴 수 있으니 일단 저하께서 쉬셔야 합니다.”
만일에 대비해 미리 짜 맞춘 각본대로 신관이 큰 소리로 말했을 때였다.
“대체 왕세자가 신성력을 얼마나 썼다고 벌써 힘이 소진됐다는 겁니까?”
“누구냐? 누가 그런 무례한 말을…….”
신전 안으로 걸어 들어온 사람을 본 신관이 깜짝 놀라 눈을 크게 떴다. 신관만이 아니라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자신들이 무엇을 보고 있는지 믿을 수 없어 모두 경악했다.
왕비는 제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아…….”
자기도 모르게 신음이 터져 나와서 왕비는 입을 막고 숨을 헐떡였다.
신전 안으로 들어온 사람은 아스터와 베이퍼스 공작, 그리고 시르안이었다. 그들을 따르던 병사들은 모두 신전 문 앞에 대기 중이었다.
“누, 누구냐?”
클로타르에게 신성력이 없다는 사실만 알 뿐 아스터의 정체를 알지 못하던 신관은 떨리는 목소리로 되물었다.
아스터는 그 질문에 자기도 모르게 웃고 말았다.
“나는 아스터 시엘라 라베인이다. 저 클로타르 리엘 라베인의 쌍둥이 형제지.”
장내가 크게 술렁거렸다.
아스터는 말하면서도 무척 묘한 기분이 들었다.
사실 아스터는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자신이 라베인 왕가의 일원이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지금 이 자리에서 자신의 존재를 세상에 밝히고 증명하기 위해 라베인의 일원이라고 말하려 하니 기분이 매우 이상했다.
“마, 말도 안 돼.”
더욱이 그의 정면에는 자리에서 일어서며 발작적으로 소리를 지르는 여인이 있었다. 작은 관을 쓰고 푸른색 벨벳 옷을 보석으로 치장한 그녀가 아마 자신의 어머니인 왕비일 것이다.
아스터는 새파랗게 질린 그녀의 얼굴과 그 옆에서 기묘한 표정으로 자신을 보고 있는 국왕과 당장에라도 자신을 죽일 듯 노려보는 클로타르의 얼굴을 모두 바라보았다.
저들이 그의 핏줄이자 가족이라고 생각하니 어처구니가 없었다. 저들은 모두 그를 라베인이라고 인정하지 않고 있을 테니 말이다.
“처음 뵙겠습니다, 왕비 전하. 아니, 어머니라고 불러야 하는 걸까요?”
아스터는 여전히 입가에 담담한 미소를 띤 채 물었다.
“나, 나는…….”
왕비는 온몸을 부들부들 떨면서도 말을 잇지 못했다.
“베이퍼스 공작, 이게 대체 어떻게 된 건가? 자네는 왜 이곳에 있는 거지?”
그때 비교적 이성을 유지한 국왕이 아스터의 뒤에 서있는 베이퍼스 공작에게 엄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러자 공작은 지금까지 아스터에게 한 번도 보여준 적이 없는 표정으로 말했다. 그는 지금 일어난 이 모든 사태가 지극히 한심하다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신성력을 가지고 있지 않은 왕자가 왕세자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으로도 모자라, 심지어 정당한 후계자를 핍박하고 있어 이렇게 모셔왔습니다.”
“무엄하다,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냐?!”
클로타르를 지지하는 귀족 중 누군가가 외쳤지만 베이퍼스 공작은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국왕 전하, 르샤베 왕국은 아라크의 후손이 만든 나라로서 성별과 연령에 관계없이 신성력을 보유한 사람에게 왕위가 이어지는 곳이 아니었습니까? 언제까지 신성력을 가지고 있지 못한 클로타르 왕자를 감싸고 계실 겁니까?”
“무례하오! 클로타르 저하께 이 무슨 망언이란 말입니까?”
“증거, 증거가 있습니까?”
“증거를 보이시오, 증거를!”
“증거라면 저분의 존재가 증거가 아니면 뭡니까, 여러분.”
아우성을 치는 귀족들을 바라보던 베이퍼스 공작이 싸늘한 어조로 말하자 저마다 떠들어 대던 귀족들이 갑자기 입을 다물었다.
아스터는 그런 그들을 바라보며, 제단의 중앙에서 당장에라도 기절할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는 카디아나 백작 부인에게 다가갔다.
아스터가 다가가자 카디아나 백작 부인이 흠칫하며 도망치려 했지만 그녀는 다리가 풀린 나머지 제대로 걷지 못했다.
“조심하세요, 이모님.”
아스터는 자신의 입에서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이모라는 말에 어처구니가 없는 나머지 그저 웃음이 나왔다. 그래도 그는 어떻게든 다정한 목소리를 유지하려고 애썼다.
카디아나 백작 부인은 새파랗게 질린 왕비와 무표정하게 이 사태를 지켜보고 있는 국왕을 바라보고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클로타르와 아스터를 번갈아 가며 바라보았다.
“나에게… 남자 조카가 둘이나 있었다고?”
“그렇습니다, 이모님. 어머님이 당신께도 비밀로 하셨나 보군요. 그럴 만도 하지요. 라베인 왕가는 쌍둥이가 왕가를 멸망시킬 수 있는 저주받은 존재라고 생각하니까요.”
갑자기 술렁이던 소리가 딱 멎었다. 카디아나 백작 부인이 숨을 삼키는 소리가 들린 것을 제외하면 아무도 말을 하지 않았다.
“왜요, 제가 못 할 말을 했습니까? 제가 보기에도 어느 정도 일리 있어 보이는데요. 안 그렇습니까, 국왕 전하?”
아스터는 고개를 들어 국왕을 바라보았다.
“신성력도 없는 왕자가 왕세자의 자리를 차지하고 신성력을 가진 진짜 그 자리의 주인을 학대하며 괴롭혔는데, 충분히 나라가 망할 만한 일 아닙니까?”
“네, 네놈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 거야?!”
드디어 참지 못한 클로타르가 소리쳤지만 아스터는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내 말에 반박하고 싶다면 네가 카디아나 백작 부인을 이 수많은 사람들 앞에서 완치시키면 되겠지. 그렇게 되면 너에겐 신성력이 있다는 증거가 될 것이고 이모님은 건강을 되찾게 되실 테니까.”
클로타르가 이를 악무는 모습이 눈에 들어와서 아스터는 그저 미소를 지었다.
“뭘 망설이지? 카디아나 백작 부인은 네 이모님이잖아. 어서 치료해 드려, 클로타르. 아니면 치료해 드릴 수가 없는 거야?”
클로타르의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이 다시 해쓱하게 질려갔다. 그러나 클로타르는 큰 결심을 한 듯 카디아나 백작 부인에게 다가갔다.
“제가 치료해 드리겠습니다, 백작 부인.”
“그, 그러지 않으셔도 됩니다, 저, 저하.”
그의 사나운 얼굴과 기세에 겁을 먹은 백작 부인이 자기도 모르게 떨면서 왕비를 바라보았지만 왕비는 그녀를 노려보고만 있을 뿐이었다.
백작 부인은 그와 같은 왕비의 눈초리에 가슴이 섬뜩해지는 것을 느꼈다. 언니인 왕비와는 평생 사이가 좋았지만, 지금 이 순간 그 언니가 마치 남처럼 여겨졌기 때문이다.
왕비는 마치 이 모든 일이 카디아나 백작 부인의 탓이라고 말하고 싶기라도 한 듯 그녀를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
클로타르는 남은 신성력을 다 끌어내려고 애썼다. 그러나 그의 손이 반딧불만큼이나 희미하게 한 번 빛난 것을 제외하면 아무런 변화도 일어나지 않았다.
“빌어먹을…….”
클로타르의 얼굴이 너무나 흉할 정도로 일그러졌다.
그 모습을 보며 아스터는 카디아나 부인에게 손을 내밀었다. 밝고 따스한 빛과 함께 그의 손끝에서 모아진 성스러운 힘이 순식간에 그녀를 뒤덮었다.
흠칫 놀라 몸을 뒤로 젖혔던 카디아나 백작 부인은 점점 몸이 따뜻해지면서 찌를 듯이 아프던 가슴이 편안해지는 것을 느꼈다.
아스터가 별다른 힘을 들이지 않고 손을 뗐을 때, 카디아나 백작 부인의 얼굴은 혈색이 돌아온 데다 표정 또한 편안해 보였다.
“어떠십니까?”
“…정말 편해졌어.”
카디아나 백작 부인은 놀라워하면서 대답했다. 그녀는 국왕과 왕비를 바라볼 용기가 없어서 잠시 눈을 질끈 감았지만, 이내 눈을 뜨고 아스터를 바라보며 말했다.
“고맙구나, 아스터. 네가 날 살려줬어.”
그녀의 인사에는 진심이 담겨있었다.
“별말씀을요.”
아스터는 부드럽게 말했다. 그러고는 시선을 국왕과 왕비에게로 돌렸다.
“다른 증명이 더 필요합니까?”
아무도 입을 열지 않는 가운데 신전 안은 쥐 죽은 듯이 조용했다. 그때 왕비가 입술을 짓씹으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나, 나는 인정할 수 없다. 내 아이는 클로타르 하나뿐이야! 클로타르만이 이 나라의 진정한 왕세자다. 너 같은 건, 너 같은 건 내 자식이 아니야! 넌 왕세자가 될 수 없어!”
왕비가 온몸을 부들부들 떨며 외쳤지만 아스터는 그저 담담하게 그녀를 바라보았다.
너 같은 건 자식이 아니란 소리를 들어도 그의 표정은 무너지지 않았다. 애초에 이 정도로 실망하고 가슴 아파하기에는 그는 자신의 혈육들에게 기대하는 게 없었다.
“어찌 되었든 제가 왕비님에게서 태어났다는 걸 부정하지는 않으시는군요.”
“나, 나는!”
왕비는 입술을 깨물고 아스터를 노려보았다.
아스터는 그런 왕비를 무심히 바라보고는 다시 국왕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그는 여전히 기분 나쁠 정도로 무표정하게 이 사태를 남의 일처럼 쳐다보고 있었다.
아스터는 그런 국왕에게 물었다.
“국왕 전하께서는 지금도 저 클로타르가 왕세자의 자리에 어울린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래도 전하께 남아있는 미약한 신성력이 진실을 알려주고 있을 텐데요.”
국왕의 얼굴이 처음으로 일그러졌다. 평생 자신의 신성력에 열등감을 가지고 살아왔던 나머지 아스터의 지적에 자존심이 상한 탓이었다. 하지만 적어도 국왕은 표면적으로는 큰 동요를 내보이지 않았다.
“네놈이 감히…….”
하지만 이 상황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사람이 있었다. 당연히 클로타르 본인이었다. 그는 피가 날 정도로 입술을 깨문 채 아스터를 노려보며 외쳤다.
“네놈이 감히 르샤베의 왕세자를 능멸하고도 무사할 것 같으냐? 감히 신성력을 소진해 힘을 쓰지 못하는 나를 모함하고, 왕세자의 자리를 빼앗으려 들다니. 이런 게 모반이 아니면 뭐가 모반이란 말이냐?”
그는 사납게 외치고는 자신을 지지하는 귀족들을 둘러보았다.
“경들은 저 반역자가 감히 자신이 왕세자에 어울린다고 말하는데 어찌하여 조개처럼 입을 꼭 다문 채 한마디도 하지 않는 것이오? 저놈의 발칙한 행동을 고발할 자는 없소?”
귀족들이 당황하여 저마다 얼굴만 쳐다보고 있을 때였다.
“클로타르 저하를 고발할 사람이라면 있습니다.”
그런데 클로타르의 기대와는 달리 커다란 목소리로 그를 고발하겠다며 신전 안으로 들어오는 사람이 있었다.
소리가 나는 쪽을 돌아본 아스터의 얼굴이 흠칫 굳었다. 아스터뿐만이 아니라 신전 안에 있던 사람들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셨다.
“나 마티아스 블랑디르 백작은 공식적으로 클로타르 저하를 고발하겠소. 고발 사유는 나의 조카딸이자 알리체 남작가의 적녀 마리안 알리체를 불법적으로 감금, 폭행, 고문하고 방치한 죄요. 나는 국왕 전하의 법정에서 이 문제의 잘잘못을 가리겠소. 뿐만 아니라 그녀의 곁에서 발견된 신관의 몸에 난 똑같은 상처에 대해서도 클로타르 저하는 해명하셔야 할 것이오.”
블랑디르 백작이 품에 안고 있다가 사람들을 향해 내보인 것은 피투성이가 되어 기절한 마리안 알리체였다. 그리고 그 뒤에는 병사 두 사람이 마찬가지로 피투성이가 된 신관 하나를 업어 오고 있었다.
“마리!”
아스터는 처음에는 석상처럼 굳어져 있었지만 곧 정신없이 마리안에게로 달려갔다. 그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리며 일그러졌다.
마리안은 핏기가 하나도 없는 얼굴로 의식이 없는 상태였다. 그녀의 등에는 채찍질로 생겨난 것이 분명한 핏자국이 선연하게 찍혀있었다.
“블랑디르 백작, 어떻게 된 겁니까? 알리체 영애를 어디서 찾은 겁니까?”
놀라기는 베이퍼스 공작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의 질문에 블랑디르 백작은 울화가 치민 얼굴로 클로타르를 향해 삿대질까지 하며 외쳤다.
“나는 갑작스레 왕세자가 데려갔다는 내 조카딸을 베스나 신전의 북쪽의 새벽에서 찾았습니다. 오늘의 의례가 있기 전까지 그곳에서 왕세자와 왕세자비 두 사람이 머물고 있었다는 사실을 증언할 사람은 이 신전에 무척 많습니다.”
블랑디르 백작은 클로타르를 무섭게 노려보았다.
“제가 증언하겠습니다.”
그리고 작게 들려온 목소리에 블랑디르 백작은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거기에는 방금 전까지 그와 함께 있었던 의사 베르트가 창백한 얼굴로 서있었다.
“저는 칼멘 후작님의 명령으로 지금까지 아스터 왕자님의 건강 상태를 돌봐왔던 베르트 랭스입니다.”
베르트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주저하지 않고 계속 말했다.
“오늘 오전에 칼멘 후작님의 갑작스런 부름으로 베스나 신전에 와서 채찍질을 당해 정신을 잃은 알리체 영애와 신관님의 상처를 돌보라는 지시를 받았습니다. 저는 제 눈으로 본 사실의 진실성을 신전에서 맹세하며 국왕 전하의 법정에서도 이 사실을 증언하겠습니다.”
베르트의 얼굴에는 분노가 가득했다.
오전에 칼멘의 명령으로 마차에 올라탔던 베르트는 목적지가 베스나 신전임을 깨닫자 클로타르가 신관 하나를 희생양으로 삼았을 거라고 여겼다. 별로 놀랍지는 않았다. 지금까지의 클로타르의 행보를 생각해 보면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신관뿐만이 아니라 아스터처럼 채찍질을 당한 채 의식을 잃은 마리안을 발견했을 때는 아무리 베르트라고 해도 분노하지 않을 수 없었다.
베르트까지 증언하자 신전 안은 난장판이 되었다. 모든 귀족들이 저마다 떠들어 대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스터의 귀에는 이 모든 것들이 들어오지 않았다. 그는 떨리는 손으로 마리안의 호흡을 살펴보고 그녀의 얼굴을 조심스럽게 만져보았다. 다행히 마리안의 호흡은 안정적이었고 몸도 따뜻했다.
찢겨나간 옷자락 사이로 등의 상처가 아스터의 눈에 고스란히 들어왔다. 평소 아스터가 당했던 학대보다야 상태가 낫긴 했지만, 소중한 마리안이 이런 일을 당했다는 사실만으로도 아스터는 당장에라도 머리가 터져 나갈 듯이 분노하고 있었다.
갑자기 좌중이 조용해졌다. 저마다 목소리를 높이던 귀족들이 아스터가 신성력을 써서 마리안을 치유하기 시작하자 모두 조용해진 것이다.
아스터는 정말로 맹렬하게 마리안의 상처를 치료했다. 카디아나 백작 부인 때와는 비교가 되지 않는 밝고 환한 햇살 같은 황금색 빛이 마리안을 감싸는가 싶더니, 그녀의 상처가 빠른 속도로 아물기 시작했다.
상처가 모두 아물자 블랑디르 백작은 얼른 자신의 망토를 벗어 마리안의 너덜거리는 옷자락 위에 덮어주었다.
하지만 아스터는 그런 블랑디르 백작조차 쳐다보지 않은 채 마리안에게 시선을 주고 있었다. 그의 손은 여전히 밝게 빛났다.
얼마나 빛이 쏟아져 들어갔을까. 마침내 마리안이 눈을 떴다.
“아스터?”
그녀의 목소리는 평소처럼 맑고 부드러웠다.
아스터는 깊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제야 숨을 제대로 쉴 수 있었다.
드넓은 바다처럼 고요한 푸른 눈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그는 상처 입은 마리안을 보고 분노로 타올랐던 심장이 조금씩 평정을 되찾고 있음을 느꼈다.
“괜찮아, 마리?”
“여기는 어디예요? 제가 아까, 클로타르 저하랑 그러니까…….”
마리안은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순간 떠오르지 않았다. 어째서 갑자기 아스터의 품 안에 안겨 있는지도 알 수가 없었다.
몇 번이나 눈을 깜빡이며 마리안은 횡설수설 말을 이어나갔지만 이내 그녀는 당황한 얼굴로 입을 다물었다. 자신이 아스터와 단둘이 있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그제야 깨달았기 때문이다.
“여긴 아직 베스나 신전이야, 마리.”
아스터의 목소리는 부드럽고 나직했지만 그 목소리에는 숨길 수 없는 분노가 담겨있었다.
“몸은 어때? 이제는 괜찮아?”
“아…….”
마리안은 자신의 몸에 어떤 일이 일어났었는지를 떠올리고는 잠시 몸을 움츠렸다. 그러나 그녀는 이내 고개를 저어 보였다.
“아무렇지도 않아요. 당신이 날 치료해 줬군요. 고마워요, 아스터.”
“아프지 않다니 다행이야. 블랑디르 백작, 잠시 마리안을 봐주겠습니까?”
그는 의아한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는 마리안을 다독인 뒤 그녀를 블랑디르 백작에게 넘겼다. 마리안은 정말로 오랜만에 만난 외숙부가 어색해서 어떤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녀의 고민은 길지 않았다.
정말로 화가 난 아스터가 클로타르를 향해 입을 열었다.
“클로타르, 나는 그래도 네가 내 형제라는 생각을 아주 조금은 했었다. 여기에 있는 사람 중에 아무도 나를 라베인 왕가의 혈육이라 인정하려 하지 않는다 해도, 어쨌든 전부 다 사연이 있어 생긴 일이라고 생각하고 이해하려고 했었지.”
아스터는 똑바로 클로타르를 응시하고 있었다.
“네놈이 열여섯 살이 되던 그해부터 달마다 나를 찾아와 내게 채찍을 휘두르고, 강제로 신성력을 빼앗아 자신의 힘인 척했어도 너에게도 나름의 고충은 있을 거라고 생각하며 참았다.”
그의 목소리는 화가 난 사람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차분하고 부드러웠다. 하지만 그 때문에 아스터의 음성을 듣는 사람들은 더욱 무섭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신전 안에는 바람이 조금씩 스며들고 있었다. 분노한 아스터의 주변으로 모여드는 바람이었다.
“아……. 쟤 사고 치겠네.”
시르안이 작게 중얼거리자, 창백한 얼굴로 떨고 있는 베르트의 옆에서 여전히 의식이 없는 신관을 돌보고 있던 위르나도 한숨을 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가 마리안에게 내 아이를 낳게 해서 양자로 들이겠다며 그녀를 겁박할 때도 어떻게든 참아보려고 했었지. 그런데 그래서는 안 되었다는 걸 이제야 깨달았어. 너 같은 놈은 처음부터 힘으로 찍어 누르지 않으면 절대로 정도라는 걸 알 리가 없는데도. 내가 그 사실을 너무 늦게 깨달았다.”
클로타르의 얼굴도 조금씩 굳어졌다.
평소 아스터를 짐승 새끼라며 멸시하다 보니 잠시 잊고 있었지만, 아스터가 가진 힘이 엄청나다는 사실은 클로타르가 제일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 그 힘이 자신을 향할 거라고 생각하자 그의 얼굴에서는 핏기가 사라졌다.
“누, 누가 없느냐? 저놈이 감히 왕세자를 시해하려고 한다. 막아! 막으라고!”
클로타르가 울부짖듯이 외친 순간이었다. 아스터의 주위에 모여들고 있던 바람이 한순간에 고요해졌다. 마치 폭풍 전야처럼 기이한 정적이 주변을 감쌌다.
아스터는 잠시 눈을 감았다가 떴다. 다시 눈을 뜬 그의 황금빛 눈동자는 전에 없이 살벌하게 타오르고 있었다.
아스터는 그동안 참고 억눌렀던 화를 클로타르를 향해 전부 쏟아냈다. 엄청난 바람이 마치 찢어발기려는 듯 클로타르를 향해 쏘아져 나갔다.
“아아악, 안 돼! 왕세자를 지켜라!”
새파랗게 질린 왕비가 비명을 지르자 그제야 정신을 차린 왕실 마법사들이 보호막을 쳤다. 기사들은 클로타르와 왕비, 국왕을 보호하는 한편 아스터를 향해 공격을 감행했다.
“이야, 정말로 화끈하게 엎어버리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시르안은 쯧 하고 혀를 차며 손을 휘둘렀다. 하지만 혀를 차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그의 얼굴에는 신난 기색이 역력했다.
시르안의 주위로 당근색의 빛무리가 모여들더니 그의 손에서 시뻘건 화염이 쏟아져 나왔다.
“물러서! 방패를 들어 막아라! 전하를 지켜!”
왕실 기사단장이 겁을 먹은 기사들에게 정신없이 명령을 내렸지만 이미 한발 늦은 뒤였다.
“아니, 잠깐! 시르안, 너까지 사고를 치면 어떡해?”
그 모습에 깜짝 놀란 위르나가 황급히 주문을 외웠다. 가만히 내버려 뒀다가는 왕실 기사단 전원이 몰살할 판이었다.
지옥의 불길처럼 무시무시하게 타오르는 시르안의 불꽃이 위르나가 간발의 차이로 만들어낸 물의 기둥에 막혔다. 그 덕분에 왕실 기사단은 간신히 괴멸을 피할 수 있었다.
어마어마한 바람과 불길과 물기둥이 주변을 뒤덮으면서 굉음과 함께 먼지가 피어올랐다.
르샤베 왕국의 400년의 역사가 담긴 베스나 신전의 해와 달의 성역은 순식간에 건물의 절반가량이 무너져 내렸다.
비명을 지르며 우왕좌왕하는 사람들로 인해 주변은 난장판이 되었다. 귀족들마저 체통을 잊고 이리 뛰고 저리 뛰고 있었다.
다행히 시르안과 위르나를 포함해서 그 안에 있던 왕실의 마법사들과 신관들이 적절히 보호막을 펼친 탓에 건물 붕괴로 크게 다친 사람은 없었다.
그러나 단 한 사람만은 상황이 그리 좋지 못했다.
“으아, 으아아아악.”
바로 클로타르였다.
“클로타르, 클로타르!”
아들의 모습을 본 왕비가 찢어질 듯한 비명을 질렀다.
클로타르는 거대한 빛의 구슬 속에 갇혀있었다. 아스터가 만들어낸 마법의 구슬이었다. 왕실 마법사들이 클로타르를 꺼내기 위해 필사적으로 그 구슬을 깨부수려고 했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오, 저 왕자님, 엄청 굉장한데.”
그 모습에 저도 모르게 솔직하게 감상을 내뱉은 것은 시르안이 아니라 뜻밖에도 위르나였다.
왕실 마법사들은 개개인이 전부 상당한 수준의 고위 마법사들이었다. 그런데 시르안에게 속성으로 기초 마법 몇 가지를 배운 게 전부인 아스터가 그들을 모두 무력하게 만들어 버린 것이다.
“저런 게 바로 천부적인 재능이지.”
시르안도 혀를 내두르고 있었다. 지금의 아스터는 어디까지나 클로타르를 향한 순수한 분노로 움직이고 있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데도 그 힘이 저렇게 무시무시했다.
“나는 마리안에게 약속한 게 하나 있어, 클로타르. 그게 뭔지 궁금하지 않아?”
그리고 그 소동의 중심에 서있는 아스터는 여전히 살벌한 눈빛으로 클로타르를 노려보며 차분하게 말했다.
클로타르는 빛의 구슬 속에서 허공에 매달려 있었다. 그 모습은 매번 클로타르가 아스터를 쇠사슬에 매달아 놓고 채찍질을 할 때와 비슷했다.
“네, 네놈이 감히…….”
클로타르는 아스터를 향해 악을 썼지만 그의 얼굴에는 두려운 기색이 역력했다. 아스터에게서 느껴지는 어마어마한 신성력과 마나, 그리고 분노로 인해 지금 그는 제정신이 아니었다.
“네가 마리안의 뺨을 때렸으니 열 배로 후려쳐 주겠다고 했었지. 이건 그 열 대야.”
“비, 빌어먹을 짐승 새끼가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너 따위가 감히! 으아악!”
클로타르가 두려움을 떨치며 아스터에게 욕설을 퍼부으려 했지만 그는 이내 비명을 질렀다.
아스터가 허공을 향해 가볍게 손을 휘둘렀을 뿐인데 그의 뺨에 시뻘건 자국이 남으며 코피가 주르륵 흘러내렸다.
“클로타르! 네, 네 이놈! 네놈이 감히 내 아들에게!”
그 모습에 왕비가 눈을 까뒤집으며 달려들려고 했지만 왕비는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아스터가 그녀를 향해 차갑게 말했기 때문이다.
“거기에 가만히 계시지요, 왕비 전하. 열 대만 맞으면 될 걸 스무 대로 늘리고 싶지 않으시다면 말이죠.”
왕비는 흠칫하고 굳어져 움직이지 못했다. 그녀는 이를 악문 채 남편인 국왕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국왕은 여전히 무표정하게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을 뿐이었다.
“아, 아아아!”
결국 견디지 못한 왕비는 귀를 막으며 비명을 질렀다.
아스터가 손을 휘두를 때마다 클로타르가 처참한 비명을 질렀다.
아스터와 똑같던 왕세자의 아름다운 얼굴은 이제 피투성이였다. 코피가 줄줄 흐르고 입술이 터진 데다 뺨에는 피멍이 들어있었다.
마리안은 눈을 깜빡였다. 마리안에게는 지금 눈앞에서 펼쳐지는 광경이 너무나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클로타르가 처참한 몰골을 하고 있어서는 아니었다.
아스터가 낯설었다. 마리안은 저렇게나 차갑고 냉담한 아스터를 본 적이 없었다.
처음 아스터를 만났을 때는 그의 눈빛이 맹수처럼 느껴진 적도 있었다. 하지만 점차 아스터와 정을 쌓으면서 마리안은 그의 다정하고 상냥한 모습에 익숙해져 있었다.
그런데 지금 아스터에게서는 그런 다정한 모습이 온데간데없었다. 그는 매우 분노하고 있었고, 클로타르를 응징하는 손속에는 자비가 없었다.
“고작 열 대 맞은 정도로 뭘 그렇게까지 비명을 지르는 거야, 클로타르.”
차분하고 나직한 아스터의 목소리에 마리안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아스터가 이렇게 두렵게 느껴진 것은 처음이었다.
“넌 마리안에게 감히 채찍질을 했어. 그에 대한 대가도 치러야지.”
코피를 줄줄 흘리는 클로타르의 눈에 두려움이 번져갔다. 아스터의 손에는 어느 틈에 빛으로 만들어진 채찍이 들려있었다.
“뭐, 뭣들 하는 거야. 마법사와 기사들은 왕세자를 구하지 않고 뭘 하는 거냐?”
이제는 눈물범벅이 된 왕비가 외쳤지만 그녀의 외침은 허무하게 허공에 메아리칠 뿐이었다.
어떻게든 클로타르에게 다가가려는 기사들을 아스터는 단 한 번의 손짓으로 날려버렸다. 기사들은 강한 바람에 마치 낙엽처럼 우수수 나가떨어졌다.
마법사들을 저지한 것은 시르안이었다. 시르안은 강력한 불의 마법으로 마법사들을 구석으로 몰아세웠다.
“아, 아스터…….”
이 상황이 당혹스러운 나머지 마리안은 몸을 일으켰다. 덜덜 떨리는 몸으로 그녀는 아스터에게 한 발자국 가까이 다가가려 했지만 곧 그 자리에 우뚝 서고 말았다.
“으아아아아!”
클로타르의 등에 빛의 채찍이 날아드는 광경에 마리안은 숨을 삼켰다.
“꺄아아아아아!”
왕비가 새된 비명을 질렀다.
“안 돼! 내 아들! 내 아들이!”
왕비는 더는 견디지 못하고 그대로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그러나 왕비의 발작과 같은 비명은 짐승처럼 포효하는 클로타르의 외침에 가로막혔다.
“네, 네놈이. 빌어먹을 짐승 새끼가. 네가 감히!”
그러나 클로타르의 그와 같은 외침은 두 번째 채찍이 날아들자 곧 잠잠해졌다. 채찍이 허공을 나는 소리와 함께 클로타르의 비명이 울려 퍼졌다.
채찍질이 열 번째에 도달했을 때 클로타르가 만신창이의 모습으로 피를 토해내면서 아스터를 노려보았다.
“네, 네놈이 이러고도 무사할 줄을 아느냐? 너는 형제를 공격해서 죽게 했으니 역사에 길이 패륜아로 이름을 남기게 될 것이다!”
흥분해서 외치다가 다시 피를 한 움큼 토해내고 컥컥거리는 클로타르를 보며 아스터는 담담히 말했다.
“아직 열 번밖에 안 때렸어.”
“뭐, 뭐라고…….”
“세어보니까 마리안의 등에 난 채찍 자국이 전부 열 개였는데, 난 마리안에게 열 배로 후려쳐주겠다고 약속했으니 아직 90대가 남았어.”
클로타르의 얼굴은 흑색으로 변했다. 그는 간절한 시선으로 국왕을 쳐다봤다. 그러나 클로타르의 얼굴에는 곧 절망감이 떠올랐다.
국왕은 상황이 이 지경에 이르렀는데도 표정의 변화 없이 지켜만 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는 동요하는 귀족들을 보면서도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아스터는 클로타르의 시선 끝에 있는 국왕을 흘긋 보고는 다시 채찍을 휘둘렀다. 비명과 함께 피가 튀었다.
“네, 네가 이런 식으로 날 죽이려고…….”
클로타르가 피거품을 물고 발악하듯 외치자 아스터는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그럴 리가. 넌 죽을 리 없어, 클로타르. 넌 끝까지 네가 신성력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했잖아. 네가 가진 신성력으로 상처를 치료하면 절대로 죽지 않을 거야. 그다음에는 궁전 마법사와 신관들이 치료해 줄 테니 상처도 금방 좋아지겠지. 내가 왜 널 죽일 거라고 생각하지? 네게는 그럴 만한 가치가 없어, 클로타르.”
클로타르의 얼굴이 무참할 정도로 일그러졌다.
마리안은 그 광경을 지켜보며 입술을 깨물고 있었다. 속이 시원해야 할 텐데 전혀 그렇지 못했다. 속이 시원하기는커녕 채찍질을 하는 아스터를 지켜보는 것이 고통스러웠다.
‘난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그녀는 국왕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차라리 그가 이 상황을 어떻게든 멈춰주길 원했다. 하지만 국왕은 그저 묵묵히 이 모든 상황을 지켜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는 아스터를 만류하지도 않았고 클로타르를 위해 도움의 손길을 내밀지도 않았다. 마리안의 얼굴에 혐오의 감정이 스쳐 지나갔다. 정말이지 국왕은 클로타르만큼이나 싫은 사람이었다.
클로타르의 비명은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마리안은 아스터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의 얼굴은 여전히 차가웠고 눈빛은 맹수처럼 번득였다.
하지만 마리안은 의문이 들었다.
‘아스터는 이게 클로타르를 향한 복수라고 생각하는 걸까.’
아스터는 클로타르에게 복수할 마음 따위는 없다고 말했다. 실제로 그의 눈빛은 냉정했고 그 어떤 즐거운 기색도 엿보이지 않았다.
마리안은 겁에 질려있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며 다시 한번 입술을 깨물었다. 왕세자의 자리를 되찾으려는 아스터가 너무 잔인한 모습을 보여주는 것은 좋지 않았다.
클로타르가 상처의 고통을 참아내지 못하고 눈을 까뒤집고 기절했을 때, 마리안은 결심을 굳히고 한 발 더 앞으로 나섰다.
“아스터, 이제 그만 해요.”
“마리…….”
아스터는 그제야 마리안을 돌아보았다.
“아직 열 배를 채우지 못했어.”
“괜찮아요. 당신이 절 위해 복수한 거라면 이미 충분히 마음이 풀렸어요.”
마리안은 아스터의 손을 잡았다.
“더 때렸다가는 죽을지도 몰라요. 이제 그만 해요.”
마리안은 부드럽게 설득했다. 아스터는 잠시 마리안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단번에 아스터의 손에서 빛으로 만들어진 채찍이 사라졌다.
아스터는 담담한 얼굴로 기절한 클로타르와 무너진 신전, 그리고 겁에 질린 사람들의 표정을 돌아보았다.
“여기서 그만 나가요, 아스터.”
마리안이 아스터의 손을 꼬옥 잡으며 말하자 그는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소기의 목적은 다 달성한 상태였다.
그런데 그때 지금까지 새파란 얼굴로 모든 것을 지켜보고 있던 왕세자비가 울면서 소리쳤다.
“아, 안 돼요. 안 돼요, 아스터 님. 클로타르 님에게는 신성력이 없어요. 이대로 가시면 이 사람은 죽어요. 제발, 클로타르 님을 살려주세요. 클로타르 님에게는 신성력이 없단 말이에요!”
그녀의 날카로운 외침이 사람들의 귓속에 천둥처럼 내리꽂혔다. 클로타르가 정말로 신성력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사실이 새삼스레 사람들의 가슴 깊이 와닿았다.
아스터는 왕세자비를 거들떠도 보지 않은 채 아직까지도 무표정한 얼굴로 침묵을 지키고 있는 국왕을 돌아보았다. 너무나 고요하고 무표정한 얼굴에 아스터의 눈빛도 싸늘하게 식어갔다.
아스터는 국왕을 바라보며 차갑게 물었다.
“여전히 이 나라의 왕세자가 클로타르라고 생각하십니까?”
국왕은 달려온 시녀들의 시중을 받고 있지만 여전히 깨어나지 못한 왕비와 의식을 잃은 채 허공에 매달려 있는 클로타르, 그리고 아이처럼 엉엉 울고 있는 세레나를 둘러보았다. 그는 쯧 하고 혀를 차고는 차갑게 말했다.
“르샤베 왕국의 왕세자는 오늘부터 아스터 시엘라 라베인이다.”
주위가 다시 쥐 죽은 듯이 조용해진 가운데 아스터가 왕을 한참이나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왜, 왕세자의 자리를 받지 않을 생각이냐?”
“아닙니다. 왕세자의 자리도, 지금 전하께서 쓰고 계신 그 왕관의 다음 주인도 저라고 생각할 뿐입니다.”
담담하지만 냉담한 아스터의 대답에 국왕은 처음으로 헛웃음을 지었다.
“그래. 앞으로 나의 후계자로서 르샤베의 왕관을 물려받을 사람은 오직 너뿐이다.”
왕은 다시 한번 차갑게 내뱉고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왕궁으로 돌아가야겠다. 새로운 왕세자는 이 모든 사태를 수습하고 왕궁으로 들어오라.”
국왕의 명령에 아스터는 가만히 고개를 숙여 보였다. 국왕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허둥지둥 자신을 향해 예를 차리는 귀족들에게 차가운 시선을 던진 뒤 엉망으로 무너져 내린 신전에서 빠져나갔다.
곧 국왕을 호위하는 기사와 병사, 그리고 왕의 시중을 드는 시녀와 시종의 무리도 황급히 왕의 뒤를 따라 나갔다.
“축하드립니다, 왕세자 저하.”
가장 먼저 아스터에게 축하의 말을 건넨 사람은 워낙 압도적인 힘을 발휘한 아스터로 인해 활약할 기회를 놓친 베이퍼스 공작이었다. 그는 겸연쩍으면서도 어딘가 기뻐하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고맙습니다. 오늘의 일은 모두 여러분의 도움이 있어서 가능할 수 있었습니다.”
아스터는 시르안과 위르나를 포함해 그의 주변을 둘러싸며 한마디씩 건네는 일행들에게 차분하게 감사를 표하고는 마리안을 돌아보았다.
“괜찮아, 마리안?”
느닷없는 다정한 물음에 마리안은 당황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괜찮아요.”
하지만 아스터는 미간을 찌푸리더니 마리안을 안아 올렸다.
“아, 아스터?”
당황한 마리안이 허둥대며 그의 품에서 벗어나려 하자 아스터는 마리안을 더욱 단단히 안았다.
“가만히 있어, 마리. 그러다 떨어지면 다쳐.”
“저, 저는 정말 괜찮아요. 직접 걸을 수 있어요.”
“아니, 마리는 무리했어. 이제는 푹 쉬어야 해.”
아스터는 단번에 마리안의 말을 자르고는 베이퍼스 공작을 바라보았다.
“공작, 뒷정리를 부탁해도 되겠습니까? 알리체 영애가 힘들어하니 한시바삐 휴식을 취해야 할 것 같습니다.”
베이퍼스 공작은 아스터의 품에서 벗어나려고 힘차게 버둥거리는 마리안을 잠시 바라보다가 헛기침을 했다.
“예, 저하. 제가 책임지고 모든 것을 잘 처리하겠습니다. 클로타르 님도 치료해 둘 테니 염려하지 마십시오.”
“공작만 믿겠습니다.”
아스터는 이제 시르안을 돌아보았다.
“시르안, 베이퍼스 공작을 도와주시겠습니까?”
“어? 으응, 그래.”
당황한 시르안이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스터는 이제 사납게 타오르던 눈빛을 거두고 부드러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그에게서는 전에는 느낄 수 없었던 위압감이 느껴져서 감히 거역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하지만 시르안은 곧 그와 같은 생각을 떨치고 아스터를 향해 손을 휘휘 내저어 보였다.
“마리안이 고생 많았으니까 어서 데리고 가봐. 여긴 우리가 대충 정리할게.”
베이퍼스 공작도 거들었다.
“저하께서는 염려 마시고 먼저 왕궁으로 돌아가 쉬십시오. 위르나가 저하와 알리체 영애를 궁으로 안내할 것입니다.”
아스터는 감사의 뜻으로 고개를 끄덕여 보인 뒤 위르나를 바라보았다.
“왕궁까지 부탁드립니다.”
그러자 갑작스러운 상황에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지켜보고 있던 위르나가 한숨을 한 번 푹 쉬고는 앞장서서 걷기 시작했다. 새로운 왕세자의 쉬고 싶다는 강력한 뜻을 거부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깨달았던 것이다.
그렇게 해서 아스터는 마리안을 안아 든 채 유유히 신전을 빠져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