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탑에 갇힌 왕자님-18화 (18/24)

18장 베스나 신전#키쿠절갠

휴가의 마지막 날 아침은 여느 때와 똑같았다. 마리안은 가족들과 함께 아침 식사를 하고, 성채로 돌아가기 전에 마지막으로 집을 둘러보며 집안일을 점검했다.

그러고는 점심때에 맞춰 돌아올 요량으로 동생과 함께 마차를 타고 거리로 나가 성채에 가져갈 책과 간식거리 같은 것들을 구입했다.

알리체가의 대저택으로 돌아왔을 때 이변이 일어났다. 못 보던 마차 한 대와 한 무리의 병사들이 집 앞을 둘러싸고 있었다.

당황한 마리안이 마차의 창문을 열자, 두 명의 기사가 다가왔다.

“마리안 알리체 영애?”

“네, 그렇습니다만.”

마리안이 긴장한 목소리로 대답하자 기사가 정중하게 말했다.

“클로타르 저하의 명령을 받고 왔습니다. 함께 가주셔야겠습니다.”

“어디로 가는 거죠?”

“베스나 신전입니다.”

마리안의 머릿속에 이틀 전에 성채에 찾아왔던 신관과 칼멘의 대화가 생각났다. 그들은 분명 이틀 후의 신전 행사에 클로타르가 참석하지 못할 거라는 말을 했었다.

베스나 신전은 왕성에서 가장 큰 신전으로 선신 아라크를 주신(主神)으로 모셨다. 아라크의 신화와 관련이 있는 왕가에서는 주기적으로 베스나 신전에서 신성력을 내보여 왕가를 향한 백성들의 존경을 공고히 하곤 했다.

“저하께서도 베스나 신전에 가셨나요?”

“그렇습니다. 서두르셔야 할 것 같습니다. 신전 행사가 오후 2시에 시작되니까요.”

기사는 정중하게 대답해 주었지만 마리안은 극도로 불안해졌다. 가슴이 빠르게 뛰고 있었다.

클로타르가 신전에 갔다는 말은 아스터에게서 신성력을 빼앗았다는 말일 것이다. 마리안은 표정이 일그러지려는 것을 억지로 참았다.

더욱이 풀리지 않는 의문은 또 있었다. 대체 클로타르가 왜 마리안을 신전까지 부르는 것인지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언니…….”

리아나가 겁먹은 얼굴로 마리안을 바라보았다. 집 앞을 병사들과 기사들이 둘러싸고 있으니 이런 일을 처음 겪는 리아나가 겁을 집어먹을 만도 했다.

“동생을 집 안까지 데려다주고 가도 될까요?”

“…알겠습니다.”

기사는 조금 초조한 듯 보였지만 마리안이 정중히 요청하자 고개를 끄덕였다.

마리안은 마차에서 내려 리아나를 집 안까지 데려다주고, 걱정을 하고 있는 남작 부인에게도 잠시 사정 설명을 했다.

“클로타르 저하께서 너를? 아니 어째서?”

느닷없는 왕세자의 부름에 남작 부인이 눈을 반짝였다. 그 모습에 마리안은 그만 자기도 모르게 한숨을 쉬었다.

“아, 그래. 칼멘 후작님이 클로타르 저하를 보필하시니까 아마 관계가 있겠구나. 그런 옷으로 가도 되는 거니? 아, 하지만 한시가 급할 테니 옷을 갈아입을 수도 없겠구나. 붙잡아서 미안하구나, 마리안. 네가 제일 초조할 텐데, 어서 다녀오렴.”

그런 마리안의 한숨을 잘못 이해한 남작 부인 때문에 마리안은 더욱 미칠 것 같은 기분이 되었다. 하지만 여기서 불안함이나 초조함을 내보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트레샤나 부인, 마차 안에 리아나와 함께 산 물건들이 있으니까 잘 정리해 주세요. 이따가 가지고 갈 거라서요.”

“알겠습니다, 아가씨.”

트레샤나 부인은 깍듯하게 대답했지만 마리안은 그녀의 눈이 계속 자신을 살피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

“그럼 일단 다녀오겠습니다.”

마리안은 가족을 등지고 기사가 안내해 주는 대로 마차에 올라탔다. 마차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왕성의 동쪽에 있는 베스나 신전으로 달려가는 동안 마리안은 입술을 깨물고 무릎 위에 올려놓은 손을 바라보았다.

마리안의 머리는 빠르게 돌고 있었지만 대체 어떻게 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그녀에게는 정보가 너무 없었다. 클로타르가 성채에 다녀가긴 한 건지, 아스터는 무사한 건지도 알지 못했다. 클로타르가 대체 무슨 의도로 그녀를 불렀는지는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일단 시르안에게 연락해야겠어.’

마리안은 주머니 속에서 시르안이 준 구슬을 꺼냈다.

“시르안, 시르안, 시르안.”

마리안은 혹시라도 마차 밖에 들릴까 봐 걱정하며 작은 목소리로 시르안의 이름을 세 번 불렀다. 그러자 구슬이 빛을 머금더니 공중에 살짝 떠올랐다.

“마리안?”

시르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마리안은 그가 전에 서너 마디의 말밖에 전하지 못한다고 했던 것을 떠올리고 빠르게 말했다.

“베이퍼스 공작님과의 일은 잘 끝났어요. 클로타르가 저를 불러서 베스나 신전으로 가는 중이에요. 대체 왜 저를 데려오게 하는지 모르겠어요. 아스터는 무사한가요?”

거기까지 말한 순간 구슬의 빛이 사라졌다. 아마 기능이 다 한 것 같았다. 푸른색과 보라색으로 신비하게 보이던 구슬은 이제 새카만 검은색으로 변해있었다.

마리안은 그 구슬을 도로 품 안에 갈무리해 넣으며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매우 불안했지만 해야 할 말은 다 전했다. 시르안이나 위르나가 소식을 전해줄 테고, 귀족연합의 사람들이 나서긴 할 것이다.

‘부디 베이퍼스 공작이 아직 왕성에 남아있어야 하는데…….’

마리안은 두 손을 모았다.

‘아스터가 무사하기를. 제발, 신이여. 아스터가 무사하게 해주세요.’

누구에게 기도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쌍둥이에 얽힌 저주의 이야기를 듣고 난 뒤로는 아라크를 믿는 것조차 꺼림칙해진 마리안이었다.

평소라면 클로타르가 죽음에 이를 정도로 아스터를 학대할 리는 없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클로타르는 이미 두 달이나 기다린 상태였다. 아스터가 여전히 신성력을 회복하지 못했다면 무슨 짓을 당했을지 알 수 없었다.

더욱이 마리안은 아스터뿐만이 아니라 그녀 자신의 신변도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제 바로 왕성 안에서 베이퍼스 공작과 만난 것을 클로타르가 눈치채지 말란 법도 없었다. 위르나의 위장술이 굉장하기는 했지만 클로타르의 옆에도 유능한 마법사가 있었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두려워져서 마리안은 손발이 모두 차갑게 식는 것을 느꼈다. 어느덧 몸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

‘아냐, 괜찮을 거야.’

마리안은 필사적으로 의연하게 생각하려고 노력했다. 병사들을 보내 죄인처럼 마리안을 끌고 가게 할 수도 있었는데, 비교적 정중하게 데려오게 한 것을 보면 최악의 사태가 아닐지도 몰랐다.

한편으로는 또 다른 걱정이 마리안을 덮쳐왔다.

‘시르안에게 괜히 연락한 건 아니겠지…….’

자신이 괜히 겁을 먹고 섣불리 연락한 것은 아닌지, 그래서 혹시 일을 그르치는 것은 아닌지 두려웠다. 마리안은 진정하기 위해 억지로 창문 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어느덧 베스나 신전에 가까워져 가고 있었다. 마리안도 어렸을 때 부모님을 따라 베스나 신전에 몇 번이나 가본 적이 있어서, 가는 길 정도는 알고 있었다.

“침착하자.”

점점 신전이 가까워지는 모습을 보며 마리안은 필사적으로 자신에게 들려주었다. 호랑이에게 잡혀가도 정신만 바짝 차리면 산다고 했다. 지금이야말로 정신을 바짝 차리고 눈치껏 행동해야 할 때였다.

“도착했습니다, 알리체 영애. 마차에서 내리시지요.”

이윽고 마차가 도착하자 그녀를 이곳까지 데려온 기사가 문을 열고 여전히 정중한 말투로 말했다.

마리안은 천천히 마차에서 내렸다. 기사가 그녀를 잡아 주기 위해 옆에서 손을 내밀었지만 마리안은 씩씩하게 자신의 힘으로 내려왔다.

“감사합니다.”

그래도 기사의 호의에 미소를 지으며 감사 인사를 하자 그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쪽입니다. 클로타르 저하께서는 북쪽의 새벽에 계시니 그리로 모시겠습니다.”

“부탁드립니다.”

우아함과 여유를 가장한 마리안은 떨리는 손을 감추기 위해 필사적으로 옷자락을 꽉 말아 쥐고 기사를 따라갔다.

북쪽의 새벽은 베스나 신전 안에서도 역대 왕가의 후손을 위해 마련된 건물이었다. 당연히 마리안은 그런 건물이 있다는 말만 들었을 뿐 한 번도 가본 적이 없었다.

기사는 마리안을 계속해서 신전의 북쪽으로 인도했다. 긴장감과 걸어도 걸어도 끝이 없는 신전의 구조에 지칠 대로 지쳤을 무렵, 마침내 기사는 마리안을 온통 하얗게 칠한 건물의 한편으로 데려갔다.

“저하께서는 이 안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마리안은 심호흡을 크게 한 번 하고는 안으로 들어섰다.

문 안쪽에는 새하얀 의복을 입은 클로타르가 칼멘과 마리안이 처음 보는 여성과 함께 있었다. 마리안은 단번에 그 여성이 누구인지 알아보고 숨을 삼켰다.

방 안에 있던 세 명이 모두 안으로 들어서는 마리안에게 시선을 집중하자, 마리안은 얼른 치맛자락을 쥐고 인사했다.

“마리안 알리체가 왕세자 저하와 왕세자비 저하를 뵙습니다.”

“어서 와, 마리. 잘 지냈어?”

클로타르가 격의 없이 인사를 던졌지만 마리안은 손에서 식은땀이 나고 있음을 깨달았다. 방 안의 공기는 성채가 있는 북부의 차가운 공기만큼이나 싸늘했다.

그리고 마리안은 검은 머리에 깜짝 놀랄 만큼 크고 푸른 눈을 가진 아름다운 왕세자비가 초췌할 대로 초췌한 얼굴로 당장에라도 눈물을 떨어뜨리기 직전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마리는 세레나를 처음 만나지? 아, 세레나가 백성들에게 손을 흔들며 인사하는 광경 정도는 본 적이 있으려나?”

세레나는 왕세자비의 이름이었다. 에베르토 공작가의 적녀로 태어나 어린 나이에 왕세자의 약혼녀가 되었던 세레나는 왕성에서는 모르는 사람이 없을 만큼 유명인이었다.

마리안은 떨지 않으려고 애쓰며 대답했다.

“예, 왕세자비 저하의 모습은 먼발치에서나마 여러 차례 뵌 적이 있습니다.”

“역시 그렇구나. 이럴 때는 비천한 것들에게 애써 웃어주며 손을 흔들어 준 보람을 느끼게 된다니깐. 그렇지, 세레나?”

마리안은 왕세자비의 얼굴이 한순간 굳어지는 것을 보았다. 그러나 그녀는 이내 부드럽고 차분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저는 단지 왕세자비로서 해야 할 의무를 다했을 뿐입니다, 저하.”

“물론이지. 탓하려고 한 이야기는 아니야. 세레나가 기특하고 대견해서 한 이야기라고. 당신은 어째서 매번 내 말뜻을 한 번에 알아듣지 못하는 거야?”

말뿐만이 아니라 클로타르는 왕세자비의 머리를 한심하다는 듯 손가락으로 톡톡 두들기기까지 했다.

그러나 그 행동은 장난스럽고 충만한 애정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그가 아내를 얼마나 경멸하고 무시하는지를 보여주고 있었다.

왕세자비의 얼굴이 한순간에 빨갛게 달아올랐다. 하지만 그녀가 즉시 부채를 펴서 얼굴을 가렸기 때문에 마리안은 왕세자비의 얼굴을 더 볼 수 없었다.

마리안은 두려운 한편으로 당황하고 있었다. 이미 클로타르가 마리안의 앞에서 왕세자비를 존중하지 않는 태도를 보인 적이 있어서 왕세자 부부가 소문과 달리 사이가 좋지는 않을 거라 생각했었다.

하지만 방금 전의 대화는 마리안의 예상을 뛰어넘는 것이었다. 마리안은 클로타르가 자신과 아스터를 함부로 대하긴 해도 왕세자비에게는 최소한의 예의는 차릴 줄 알았다. 그러나 아니었다.

“그나저나 내가 오늘 널 왜 불렀는지 알고 있어?”

마리안의 상념을 끊듯 갑자기 클로타르가 입을 열어서 마리안은 몸을 바짝 굳혔다.

“죄송합니다, 저하. 사실 영문을 모르겠습니다.”

마리안은 정말로 이유를 알지 못했다. 그녀의 솔직한 대답에 클로타르가 눈을 반짝이며 미소를 지었다.

마리안은 그 미소에 온몸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클로타르가 저렇게 웃는 게 언제인지를 그녀는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바로 사경을 헤맬 때까지 아스터를 채찍질할 때였다.

아무래도 좋은 일로 부른 게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잔뜩 굳어진 칼멘의 얼굴만 봐도 예감이 좋지 않았다.

“오늘이 무슨 날인지 알아, 마리?”

클로타르는 한숨을 한 번 쉬고 물었다.

“…….”

순간 마리안은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몰라 잠시 망설였다. 그러자 클로타르가 다시 물었다.

“마리, 너도 참 머리가 나빠. 내가 두 번 묻게 하지 말라는 말을 너에게 대체 몇 번이나 해줘야 하는 거지?”

“죄송합니다, 저하. 제가 생각하는 게 맞는지 몰라 그랬습니다. 왕실에서 추수 감사제 전에 한 해의 풍년과 번성을 기원하는 마지막 의례를 올리는 날이라고 알고 있습니다만…….”

“하아…….”

클로타르가 다시 성대하게 한숨을 쉬는 바람에 마리안은 얼른 무릎을 꿇었다.

“제가 어리석어 저하의 말씀을 잘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마리안의 머릿속에서 경고음이 울렸다. 클로타르의 앞에서 무릎을 꿇기란 죽기보다 싫은 일이었지만 그의 심기를 거슬러서는 절대로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리안이 재빠르게 무릎을 꿇은 덕분인지 클로타르는 그 이상 그녀를 책망하지는 않았다.

“넌 멍청한 것 같으면서도 이런 건 제법 눈치가 빨라. 사죄할 필요는 없어, 마리. 네가 말한 그 행사가 맞으니까.”

하지만 마리안은 자리에서 일어서지 않았다. 입 안이 바짝 마르는 것을 느끼며 조심스러운 눈길로 클로타르를 살피고 있었다.

이제 보니 그는 웃고 있었지만 기분이 매우 나빠 보였다. 웃으면서도 눈이 웃지 않는 일은 이미 숱하게 봐왔지만 오늘은 어딘지 분위기가 달랐다.

“그래서 정말로 짜증스러운 일이 있었지. 네가 섬기는 그 빌어먹을 짐승 새끼가 아직도 신성력을 회복하지 못했잖아.”

순간 마리안은 하마터면 안도의 한숨을 쉴 뻔했다. 아스터가 신성력을 회복하지 못했다는 소식은 실망스러웠지만, 클로타르는 그에게서 힘을 빼앗지 못한 것이다. 게다가 그의 표정을 보면 적어도 아직까지는 아스터에게 끔찍한 짓을 한 것 같지 않았다.

그러나 기뻐하기는 일렀다. 클로타르가 말을 하다 말고 활짝 웃었는데 그의 얼굴에 독기와 살기가 가득했기 때문이다. 마리안은 온몸에 소름이 쫙 돋아서 최대한 고개를 수그릴 수밖에 없었다.

“더욱이 내가 오늘 행사에 불참하겠다고 했더니, 존경하고 사랑해 마지않는 우리 국왕 전하께서 불같이 노여워하셨단 말이지. 덕분에 아침부터 그 빌어먹을 노인네의 온갖 폭언이란 폭언은 다 들어야 했어.”

마리안은 당황해서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국왕이 클로타르에게 폭언을 쏟아부었다고?’

마리안이 알기로 국왕은 왕세자를 무척이나 아끼고 사랑했다. 왕세자에게 국정 운영의 태반을 넘겼으며, 모든 일에서 왕세자를 자신보다 앞세우기도 했다.

그러나 이미 씩씩거리기까지 하는 클로타르를 보면 그가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애초에 클로타르가 마리안에게 이런 일로 거짓말을 할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마리안이 저런, 그러시군요, 라고 반응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마리안은 그저 필사적으로 송구하다는 표정을 한 채 바닥을 보고 있는 수밖에 없었다.

“정말이지 그 노인네는 하는 이야기가 바뀌지도 않아. 세레나, 당신이 말을 좀 해봐. 당신 눈에도 내가 그렇게 쓸모없고 버러지 같은 놈으로 보여?”

“다, 당치도 않습니다, 저하.”

왕세자비는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대답했다.

그녀의 반응을 보며 마리안은 미간을 좁혔다. 그 말은 국왕이 정말로 클로타르에게 쓸모없고 버러지 같다고 폭언을 퍼붓는다는 뜻이었다.

“그깟 신성력이 대체 뭐가 그렇게 대단하다는 건지.”

클로타르는 코웃음을 쳤다.

“아무리 국정을 잘 돌보고 좋은 외교 성과를 일궈내도 그 빌어먹을 신성력 하나 때문에 언제까지 이런 취급을 참고 살아야 하는 거지? 응?”

홀로 벽을 보고 말하던 클로타르가 갑자기 마리안에게 시선을 맞춰 와서 마리안은 다시 한번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그의 눈에는 증오와 광기가 서려있었다.

한 마디로 오늘의 클로타르는 정상이 아니었다. 마리안이 침을 삼키는데 클로타르가 씨익 웃었다.

“마리, 이게 다 네가 일을 똑바로 안 해서야.”

소곤거리듯 귓가에 속삭이는 클로타르의 눈빛이 마치 먹이를 앞에 두고 도사리는 거대한 뱀 같아서 마리안은 저도 모르게 부르르 떨었다.

“제, 제가…….”

“그래, 바로 너 때문이지. 내가 왜 너 같은 걸 성채까지 데려다 놨겠어. 그 망할 짐승 새끼를 돌보라고 보낸 거잖아. 내가 너와 그 짐승 새끼에게 들이는 돈과 정성이 얼마나 큰데 대체 어떻게 돌봐서 그 짐승 새끼가 아직도 신성력을 못 쓴다고 하는 거야? 으응? 어디 그 입으로 설명해 봐, 마리.”

마리안은 파랗게 질린 얼굴로 입술만 달싹거렸다. 클로타르가 하는 짓은 어디까지나 분풀이에 지나지 않았지만 마리안으로서는 지금 자신을 보호할 수 있는 수단이 하나도 없었다.

다시 한번 엎드려서 용서와 자비를 빌어야 하는지 아니면 이대로 입을 다물고 가만히 있어야 하는지조차 판단이 서지 않았다. 커다란 뱀에게 사로잡힌 작은 들쥐라도 된 듯 그녀는 바들바들 떨기만 할 뿐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

“더욱이 넌 아직 임신조차 못 했잖아. 마리, 널 그 탑에 넣은 지 벌써 다섯 달이나 지났어. 넌 건강하고 젊잖아. 짐승도 그만큼 한 공간에 넣고 교배시키면 지금쯤이면 순조롭게 이 배 속에서 새끼를 키우고 있어야 하는데…….”

말뿐만이 아니라 클로타르의 손은 마리안의 평평한 아랫배를 힘껏 움켜잡았다.

마리안은 순간 너무 고통스러워서 허리를 꺾었다. 내장을 바로 세게 비트는 듯한 엄청난 통증이 복부에 전달되었다. 하지만 그녀는 비명조차 지르지 못했다.

“그런데 대체 네가 하는 일이 뭐야, 마리. 응? 그놈이 비록 짐승 새끼이긴 하지만 감히 너 따위에게 어울릴 만한 것도 아닌데 말이야. 더럽고 비루하게 빌어먹던 널 데려다가 감히 나와 똑같이 생긴 짐승 새끼와 붙여주고 잠자리와 먹을 것뿐만이 아니라 돈까지 쥐여주며 돌봐줬잖아. 그럼 지금쯤은 눈치껏 새끼라도 뱄어야지.”

클로타르는 경멸스럽다는 듯 입꼬리를 비틀었다.

“귀족의 자리에서 굴러떨어지니까 저능하고 게으른 평민 놈들과 똑같은 수준이 되어버린 거야, 마리? 그래서 이렇게 주제 파악을 못 하고 염치도 모르게 된 걸까.”

마리안은 바닥에 주저앉아 숨을 몰아쉬었다. 방금 잡아 뜯을 것처럼 아랫배를 힘껏 움켜쥐었던 클로타르 때문에 제대로 숨을 쉴 수가 없었다.

더욱이 클로타르가 가까이에서 여전히 만면에 미소를 머금고 그녀를 보고 있었다.

“이런, 그렇게 아파? 많이 아프구나, 마리. 가엾어라, 괜찮아?”

혀를 차며 클로타르는 마리안의 머리를 다정하게 쓰다듬었다. 마리안은 너무 끔찍한 나머지 그를 밀쳐내고 싶은 것을 참기 위해 이를 악물었다.

“하지만 오늘 왕비 전하는 너보다 여기가 더 아팠을 거야.”

마리안은 클로타르가 갑자기 자신의 가슴을 가리켜 보이는 것에 의아해졌다.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친애하는 국왕 전하가 왕비 전하의 아픈 상처를 또 잔인하게 후벼 팠거든. 왕비 전하는 그래도 이 쓸모없는 세레나에 비하면 전하에게 아이를 셋이나 낳아줬는데. 그런데도 국왕 전하는 쌍둥이를 낳았다고 고마운 줄도 모르고 일평생 왕비 전하를 괴롭혔으니까 말이야.”

클로타르의 입꼬리가 삐뚜름하게 올라갔다.

“정말 소름 끼치지 않아, 마리? 국왕 전하께서는 왕비 전하가 얼마나 고통스럽게 자신의 아이를 낳았는지에는 눈곱만큼도 관심이 없어. 심지어 왕비 전하가 그때 건강을 상해서 지금까지 괴로워하고 있다는 사실도 전혀 돌아보지 않아. 그깟 말도 안 되는 이야기 하나 때문에 말이지.”

“…….”

마리안은 입술을 깨물었다. 클로타르는 아마도 쌍둥이에 얽힌 라베인 왕가의 저주에 대해 이야기하는 게 분명했다.

마리안은 그보다는 국왕과 왕비의 사이가 원만하지 않다는 이야기에 놀라움을 느꼈다. 그런 내력이 있는지는 전혀 알지 못했다. 백성들 사이에서는 국왕과 왕비의 사이가 매우 좋다고 알려져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선대 국왕이 여러 명의 정부를 거느렸던 것과 달리 현 국왕은 단 한 명의 정부도 거느리지 않았던 데다, 공식적인 자리에서는 늘 왕비에게 다정한 모습을 자주 보여주었다.

마리안은 절로 미간이 찌푸려지는 것을 느꼈다. 아스터의 존재를 알게 된 이후로, 자신들의 쌍둥이 아들 하나를 탑에 유폐한 국왕과 왕비가 정상일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까지 알고 있던 것들이 전부 거짓이라고 생각하자 세간에 알려진 라베인 왕가에 대한 이야기 중에서 과연 진실한 것이 있기는 한지 의문이 들었다.

“왕비께서 원해서 쌍둥이를 낳은 것도 아니었는데 말이지. 그런 흠이 있어도 어쨌든 그분은 나의 어머니고 나를 아끼고 사랑해 주시는 분이잖아. 안 그래, 마리? 그런 어머니를 괴롭히면 내 기분이 좋을 리가 있겠어? 더군다나 친애하는 국왕 전하께서는 어머니를 괴롭히면 내가 제일 고통스러워한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아시거든.”

클로타르는 마리안의 턱에 손가락을 대고 그녀의 얼굴을 들어 올렸다.

“넌 틀림없이 그 짐승 새끼가 불쌍하다고 생각하겠지만, 그 짐승 새끼 때문에 매번 쓸모없는 버러지 취급을 당하는 내 입장도 생각을 좀 해봐. 쓸모없는 것 하나 때문에 고귀한 내 어머니까지 함께 쓸모없다는 소리 따위를 매일 들으며 살아야 한다니 너무하지 않아? 정말이지 그런 건 태어나지 않았으면 좋았을 텐데.”

클로타르는 마치 미친 사람처럼 웃음을 터뜨렸다.

“왜 그런 얼굴을 하는 거야, 마리. 그 짐승 새끼가 태어나지 말았어야 했다고 하니까 가슴이 아파? 그 새끼가 하다못해 태어나야 할 시기만 제대로 알고 태어났어도 왕실이 이 모양이 되지는 않았을 거야. 그러니 이 모든 건 그놈 탓이라고. 게다가 무슨 염치로 그깟 놈이 신성력을 가지는 거야? 그것도 태어났을 때만 해도 별다른 힘도 없었던 놈이 말이야.”

“네? 방금 뭐라고 하셨어요?”

순간 깜짝 놀란 마리안은 자기도 모르게 클로타르를 똑바로 바라보며 묻고 말았다. 그러나 마리안은 이내 자신이 큰 실수를 했음을 깨달았다.

그녀의 눈앞에서 클로타르의 입매가 일그러졌다. 그는 입술을 앙다물더니 마리안을 노려보았다. 마리안은 증오로 활활 타오르는 눈이 어떤 것인지 분명하게 깨달을 수 있었다.

그 매서운 시선에 저도 모르게 등줄기에 차가운 것이 흘러내리는 기분이 들었다. 마리안이 창백해져서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떨구는데 클로타르가 갑자기 활짝 웃었다.

아스터와 똑같은 얼굴로 어떻게 저렇게 일그러진 웃음을 지을 수 있는지 마리안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그래서 마리안은 클로타르가 더욱 끔찍했다. 그녀가 사랑하는 아스터의 겉껍질을 뒤집어쓴 남자가 너무나 악랄하고 저열해서 몇 배나 더 소름이 끼쳤다.

“넌 정말이지 무척이나 용기가 있고 돼먹지 못한 데가 있어, 마리. 난 그래서 네가 좋아. 그 돼먹지 못함이 그 짐승 새끼랑 아주 잘 어울리거든. 역시 돼먹지 못한 것들은 돼먹지 못한 것들끼리 어울려야지, 안 그래?”

“…….”

“주제도 모르고 감히 날 똑바로 바라보면서 물어보는 네 눈빛은 그 새끼랑 너무 닮았어. 나도 정말이지, 골라도 어떻게 너 같은 걸 골라서 그 짐승 새끼 옆에 붙여놨던 걸까? 하긴, 너 정도로 돼먹지 못한 애가 아니라면 그 짐승 새끼랑 붙어먹을 수 없었을지도 모르지.”

클로타르는 마리안의 옆에 쪼그리고 앉아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

“내가 그동안 너에게 너무 관대했던 것 같아. 네가 분수를 모르잖아. 하지만 그거 알아, 마리? 기어오를 때는 결국 매가 최고라는 거.”

그 말에 마리안의 얼굴은 백지장처럼 하얗게 질렸다.

“저하…….”

분위기가 도무지 심상치 않다고 생각했던지 지금까지 한마디도 하지 않던 칼멘이 끼어들었다.

“저하, 곧 의례가 시작됩니다. 이미 지금쯤이면 국왕 전하와 왕비 전하께서도 오셨을 테니…….”

“그래, 시간이 얼마 없으니 빨리 끝내도록 하지.”

클로타르는 고개를 끄덕였다.

“기사들을 불러, 칼멘. 채찍을 가져오게 해.”

“…저하!”

당황하여 부르짖는 칼멘을 보며 클로타르가 얼굴을 찌푸렸다.

“내 말 못 들었나, 후작?”

그 싸늘한 음성에 칼멘이 숨을 삼켰다. 그는 흔들리는 눈으로 마리안을 보고 클로타르의 얼굴을 다시 바라본 뒤 고개를 수그렸다.

“알겠습니다, 저하.”

칼멘이 대답하고 걸어 나가는 모습을 보며 마리안 역시 숨을 삼켰다. 가슴이 너무 심하게 뛰어서 제대로 숨을 쉴 수가 없었다.

클로타르가 그녀에게도 채찍질을 하려 하고 있었다. 마리안은 걷잡을 수 없이 떨리는 몸을 지탱하기 위해 이를 악물었다.

‘괜찮아. 정말 괜찮아. 저들은 귀족연합에 대한 걸 모르는 것 같으니까…….’

클로타르의 말을 들어보면 지금 이 모든 것은 아침부터 국왕에게 폭언을 당한 데 따른 단순한 분풀이였다. 어쩌면 폭언만이 아니라 국왕은 클로타르에게 더한 짓을 했는지도 모른다.

그래도 일단 귀족연합이나 베이퍼스 공작, 그리고 외숙부의 이야기를 모른다는 사실은 천만다행이라 할 만했다. 마리안이 그들과 접촉했다는 사실을 알았다면 클로타르는 마리안을 살려두려 하지 않을 것이다.

지금은 채찍질을 하더라도 죽이지 않을 거라는 확신은 있었다. 그래서 마리안은 어떻게든 미친 듯이 뛰는 가슴을 진정시키고 용기를 내려고 했다.

하지만 기사 두 명이 방 안으로 채찍을 가지고 들어오는 모습을 보자 마리안은 공포에 질렸다.

클로타르는 이제 미소까지 띤 얼굴로 기사가 건네주는 가죽 채찍을 바라보고 있었다. 떨면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마리안은 그 채찍에 이미 붉은 피가 묻어있음을 깨달았다.

“아, 이거?”

그녀의 눈이 흔들리는 것을 본 클로타르가 해맑게 웃었다.

“신성력이 필요해서 어쩔 수 없었어.”

마리안은 숨을 삼켰다.

아스터에게서 신성력을 뽑아낼 수 없는 클로타르가 겨냥한 상대는 다른 신성력의 보유자였을 것이다. 그렇다면 분명 탑에 계속 찾아왔던 신관이 희생된 게 분명했다.

그러나 마리안은 더 생각할 수가 없었다.

“저 여자를 붙잡아.”

클로타르가 마치 ‘차를 한 잔 가져와.’라고 말하는 듯한 가벼운 말투로 기사들에게 명령했다.

기사 둘은 표정 하나 변하지 않은 채 마리안을 일으켜 세운 뒤 양쪽에서 마리안의 팔을 단단히 붙잡았다.

마리안은 저도 모르게 두려움으로 숨을 몰아쉬었다. 무서워서 견딜 수가 없는 나머지 마리안은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러나 아무리 기다려도 당장 채찍이 날아들지는 않았다.

“생각해 보니 이 일은 나보다는 당신에게 어울릴 거야, 세레나.”

대신에 클로타르가 꿀이 떨어질 것 같은 다정한 목소리로 왕세자비에게 말을 걸었다. 자기도 모르게 눈을 뜬 마리안은 왕세자비의 얼굴이 더욱 희게 질리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마리안처럼 흔들리는 눈동자로 클로타르를 바라보았다.

“…제, 제가요, 저하?”

“그래. 바로 당신 말이야, 세레나.”

클로타르는 환하게 미소 지었다. 그 얼굴이 순간적으로 아스터와 닮아 보여서 마리안은 이를 악물었다.

닮았다니 당치도 않았다. 아스터는 절대로 저런 짓을 하지 않는다. 아스터는 절대로 웃으면서 다른 사람을 궁지로 몰아가며 그 광경을 즐기는 사람이 아니었다.

“제, 제가 어떻게…….”

마리안이 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든 말든 클로타르는 여전히 왕세자비를 몰아세우고 있었다. 그는 다정하게 웃으며 말했다.

“하지만 우리 왕세자비 저하가 하지 않으면 내가 해야 할 텐데, 내가 지금 기분이 좀 나쁜 상태라서 말이야. 내가 때리면 저 영애는 죽게 될걸? 그렇게 되면 그건 당신 탓이잖아?”

그 말에 마리안은 정말로 기가 차서 클로타르를 쳐다보았다. 하지만 세레나는 반박할 생각도 하지 못한 채 그저 덜덜 떨고만 있었다.

“당신이 아이만 낳을 수 있었어도 이런 일이 발생하지 않았어. 하지만 우리 사이에 후계자가 태어나지 못한 데는 내 탓도 있으니까 내가 이런 귀찮은 방법을 고안해서 저 여자를 그 짐승 새끼 옆에 붙여둔 거잖아. 안 그래, 나의 비 저하? 내가 이렇게까지 수고하는데 어째서 당신은 날 도와줄 생각을 하나도 하지 않는 거지?”

“저, 저는…….”

“당신이 할 수 없다면 내가 해야지.”

클로타르는 짐짓 성대하게 한숨까지 쉬고는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건 매우 유감이야, 마리. 나는 널 죽일 생각까진 없었는데, 혹시 잘못해서 네가 죽게 된다면 그건 내 탓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왕세자비의 탓이…….”

“제, 제가 하겠습니다.”

마리안이 기가 막힌다는 눈으로 클로타르를 쳐다보는데 세레나가 눈물이 가득한 눈으로 외쳤다.

“제가 저하를 대신하겠습니다.”

말뿐만이 아니라 왕세자비는 황급히 달려와서 클로타르의 손에서 채찍을 빼앗기까지 했다.

“저하께서 이런 일에 얼마나 괴로워하고 계시는지 제가 잘 아는데 어떻게 저하께 맡기겠습니까. 차라리 제가 하겠습니다.”

마리안은 이번에는 왕세자비를 바라보았다. 그녀가 정말로 자신이 클로타르의 손에 살해당할까 봐 겁이 나서 대신 나선 것인지, 그것도 아니면 사실 둘 다 한통속이라서 저러는 것인지 종잡을 수가 없었다.

정황만으로 보자면 싫다는 왕세자비에게 클로타르가 마리안을 때리라고 강요한 것으로 보였다. 하지만 마리안은 그녀가 방금 한 말에 어쩐지 등줄기가 오싹해지는 것을 느꼈다.

“역시, 나의 비는 마음이 여리고 너무 다정해. 하긴, 그대가 앞으로 키울 아이의 어미가 될 여자니까 당신이 돌봐줘야지.”

마리안은 클로타르의 말이 끝난 순간 왕세자비의 눈에서 섬뜩한 빛이 번쩍이는 모습에 더욱 오싹함을 느꼈다.

그녀의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하게 맺혀있는 데다 채찍을 들고 있는 가녀린 손목은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그래서 마리안은 왕세자비 또한 아스터처럼 클로타르에게 좋을 대로 이용당하며 감정적인 학대를 받는 것 같다고 처음에 생각했다.

그러나 방금 번득인 그녀의 눈빛은 아무리 봐도 섬뜩했다.

“며, 몇 대를 때리면 되나요, 저하?”

왕세자비는 여전히 울먹거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일단 다섯 대. 그리고 상태를 보고 이상이 없다면 다시 다섯 대를 추가하지. 말 안 듣는 짐승들을 훈육할 때는 조금 엄하게 할 필요가 있거든.”

세레나가 숨을 들이마시는 게 보였다. 그리고 마리안은 그녀가 매우 날카롭게 자신을 쏘아보는 것을 느꼈다.

마침내 왕세자비가 굳은 결심을 했다는 표정으로 한 걸음, 그리고 또 한걸음 다가오자 기사들이 마리안을 뒤로 돌아서게 해서는 그녀의 팔을 양쪽에서 잡아당겼다.

마리안은 어처구니가 없기도 하고 얼이 빠지기도 해서 떨면서 눈을 질끈 감았다.

아스터가 어려서부터 늘 당했던 일이었다.

‘나도 견딜 수 있어…….’

마리안은 이를 악물었다. 매번 이런 일을 겪는 아스터를 보면서 자신만 언제나 안전하고 무사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외숙부를 포함해서 귀족연합에게 연락을 취할 때도 어떤 위험이 닥칠 수 있는지 늘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지금까지는 정말로 어쩌다 운이 좋아서 일이 잘 풀렸을 뿐이었다.

‘하지만 괜찮을 거야. 지금까지 잘 됐으니까…….’

마리안은 자신에게 필사적으로 들려주었다. 시르안에게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도 알렸으니 어떻게든 버티면 살아서 여기를 나가 아스터를 볼 수 있을 거라고 몇 번이나 생각했다.

촤악!

공기를 가르는 날카로운 소리가 들려왔다. 그와 동시에 전신에 어마어마한 충격이 가해지면서 마리안은 허억 하고 신음을 토해내며 그대로 앞으로 고꾸라졌다.

분명 등을 향해 채찍을 휘둘렀을 텐데 전신을 엄청난 힘으로 후려친 것 같은 통증에 단번에 눈앞이 새카맣게 변했다. 하지만 양쪽에서 팔을 팽팽하게 잡아당기는 기사들 때문에 그녀는 넘어지지 않았다.

“오, 역시 나의 비는 소질이 있어. 잘하는데?”

아득히 먼 곳에서 클로타르가 웃는 소리가 들린 것 같았다. 눈앞이 새카맣게 변하고 깊은 물속에 빠진 듯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마리안은 두 번째로 공기를 가르는 날카로운 채찍 소리를 들은 것을 끝으로 의식을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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