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탑에 갇힌 왕자님-17화 (17/24)

17장 장미 정원의 회합

시르안이 동쪽 탑에 머무는 동안 며칠이 더 흘러갔다. 아스터의 상태는 극적으로 좋아지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열이 많이 내렸다. 하지만 아직 신성력은 예전처럼 회복되지 못한 상태였다.

그리고 드디어 칼멘이 신관을 데리고 성채를 찾아왔다.

“이래서는 매우 곤란하군요.”

아스터의 상태를 확인한 칼멘은 얼굴을 찌푸렸다.

클로타르의 짜증이 극에 달해있었다. 마지막으로 신성력을 내보인 지 거의 두 달이 흘러간 참이었다. 슬슬 신성력을 펼쳐 건재함을 알려야 하는데 정작 힘을 끌어내야 할 아스터가 이 모양이었다.

“신관께서 어떻게 해보실 수 없겠습니까?”

칼멘의 목소리는 날카로웠다.

사실 클로타르가 신관에게 아스터를 내보이는 것을 극도로 꺼리고 있었다. 혹시라도 아스터가 신성력을 영원히 잃게 된다면 그 파장은 어마어마할 터였다.

그러나 클로타르를 비롯해서 아스터에게 신성력이 존재하는지의 여부를 확인할 수 있는 사람은 현 국왕과 극소수의 고위 신관밖에 없었다.

‘국왕 전하께 그런 천한 것을 보러 가시라고 말할 수는 없으니까 늘 데려가던 신관을 데려가도록 해.’

결국 한참 고민하던 클로타르는 칼멘에게 명령했다.

‘그리고 그 짐승 새끼가 신성력을 영원히 잃었다고 판단하면 신관도 탑에 가둬. 정 안되면 그 신관에게서 앞으로 힘을 끌어내서 써야지.’

하지만 클로타르도 칼멘도 고위급 신관을 건드리면 문제가 복잡해진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니 가능하면 신관을 건드리지 않게 아스터가 빠르게 회복해야 했다.

얼굴이 거의 안 보일 정도로 검은 로브를 눌러쓴 신관은 한참이나 주의 깊게 아스터를 살피고는 이내 고개를 저었다.

“아직 신성력은 회복되지 않았습니다.”

“그럼 앞으로도 계속 이 상태인 겁니까?”

칼멘의 걱정스러운 목소리에 신관은 다시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알 수 없습니다만 조금 더 지켜봐야 할 것 같습니다. 신성력의 존재 자체는 분명히 느껴집니다. 이대로 기다리셔야 합니다.”

더는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말이나 다름없었다. 칼멘은 저도 모르게 혀를 차고 말았다.

이틀 뒤에는 신전에서 열리는 행사가 있었고 클로타르는 반드시 참석해야 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몸이 안 좋다는 핑계를 대고 어떻게든 불참해야 하는가 싶어서 칼멘의 미간에는 저절로 주름이 파였다.

평소 신전에서 열리는 행사라면 한두 번 미루는 정도는 가능하겠지만, 이번만큼은 신전과 왕실이 공동으로 주최하는 매우 중요한 행사라서 더욱 곤란했다.

그러다 보니 클로타르는 극도로 신경질적이었다. 칼멘으로서도 짜증을 내는 왕세자를 대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알겠습니다. 먼저 내려가시지요.”

신관이 먼저 물러나자 칼멘은 마리안을 바라보았다.

“너에게 할 말이 있다. 따라오도록.”

마리안은 아스터를 한 번 바라봤지만 곧 칼멘을 따라갔다.

“아스터 님의 상태는 계속 저런 건가?”

중정까지 내려가서야 칼멘은 입을 열었다.

“열이 계속 심했는데 얼마 전부터 그나마 상태가 호전되셨습니다.”

“베르트의 약으로도 별로 효과가 없었다던데.”

“네, 도무지 원인을 모르겠다고 하시더라고요. 그래도 며칠 전부터는 열이 오르지 않았습니다. 이제 회복세에 접어든 게 아닐까요?”

“그래, 그럴 수도 있겠지.”

칼멘은 가능하면 낙관적으로 상황을 보고 싶은 눈치였다. 그래서 마리안은 조심스럽게 말했다.

“지난번에 연달아 두 번 힘을 쓰신 게 아무래도 많이 무리가 되었던 듯하지만 곧 회복하실 겁니다.”

칼멘은 여전히 미간을 찌푸리고 있었지만 고개를 끄덕였다.

“넌 별다른 소식이 없느냐?”

마리안은 그것이 임신 여부를 묻는 말임을 깨닫고 억지로 웃었다.

“아스터 님은 고열로 거동을 거의 못 하셨습니다.”

“그래, 그렇겠지.”

칼멘은 한숨을 쉬었다.

“앞으로 혹시 몸 상태에 변화가 생기면 베르트에게 바로 말하도록 하여라. 베르트는 난산으로 죽어가던 자기 아내도 살려낸 사람이니까.”

“네, 알겠습니다.”

마리안은 옷자락에 가려진 자신의 손으로 허벅지를 세게 꼬집었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화가 난 기색을 숨기지 못할 것 같았다.

“그런데 저는 언제쯤 집에 가볼 수 있을까요?”

그 말에 칼멘은 마리안을 바라보았다.

마리안은 그동안 연이은 수면 부족으로 제법 초췌해져 있었다. 특히나 요 며칠은 아스터의 상태가 호전되면서 마음을 놓았는데, 새벽까지 계속되는 시르안과 아스터의 마법 수업 때문에 잠을 제대로 못 자서 매우 피곤했다.

눈 밑이 퀭하게 변한 마리안을 보며 칼멘은 한숨을 쉬었다.

“너도 휴식을 취할 필요가 있겠지. 그러다 병으로 쓰러지기라도 하면 곤란하니까.”

“아스터 님의 상태가 그래도 제법 좋아졌으니 할 수만 있다면 며칠 집에 다녀오고 싶습니다.”

“그럼 오늘 나와 함께 가겠나?”

마리안은 기다렸던 대답이 드디어 나온 것에 쾌재를 불렀다.

“그래도 괜찮을까요?”

“네 말대로 아스터 님의 상태는 꽤 좋아졌으니 걱정이 된다면 베르트에게 연락을 넣어 네가 없는 동안 성채에 머물라고 하겠다.”

“그렇게 해주시면 정말 감사하겠습니다.”

마리안은 공손히 머리를 숙여 보였다.

베르트는 어차피 정해진 시간에만 꼭대기 층의 방에 들어오니 상관없었다. 그가 집에 가지 못하게 되는 것은 좀 미안했지만 말이다.

“그래, 그럼 나는 잠시 후 출발할 생각이니 준비하고 내려오도록.”

“감사합니다.”

마리안은 다시 한번 인사를 한 뒤 얼른 아스터에게로 달려갔다.

“그럼 바로 집에 가는 거야?”

“외숙부와 베이퍼스 공작님을 뵙고 와야죠.”

칼멘이 찾아왔을 때부터 예상하던 일이었지만 막상 마리안이 자리를 비운다는 이야기에 아스터는 서운해지는 마음을 애써 꾹꾹 눌러 참으며 말했다.

“조심해, 마리. 절대로 위험한 일은 하지 말고.”

“네, 조심할게요.”

마리안은 아스터를 끌어안고 그의 입술에 키스했다.

“그런데 이걸 써야 할까요?”

시르안이 준 파란색과 보라색이 뒤섞인 구슬을 꺼내 보이며 마리안이 잠시 고민하자 아스터가 말했다.

“시르안이 근처에 있다면 분명 칼멘 후작이 온 것도 알고 있을 거야. 그게 아니더라도 내가 말하면 되니까 그 구슬은 만일의 사태를 대비해서 마리가 계속 지니고 있도록 해.”

“네, 그렇게 할게요.”

마리안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주머니 속에 구슬을 잘 챙겨 넣었다.

“귀족연합의 사람들에게 내 뜻을 잘 전해줘, 마리.”

아스터는 마리안의 손을 잡고 그녀의 손에 키스한 뒤 말했다.

“네, 아스터도 제가 올 때까지 너무 무리하지 않겠다고 약속해 주세요.”

“약속할게.”

두 연인은 아쉬운 듯 다시 키스했다. 그러나 너무 시간을 끌 수는 없었다.

결국 마리안은 잘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으로 계단을 내려가 칼멘의 마차에 올라탔다.

거기에는 신관과 칼멘도 함께였다. 마차에 오르려던 마리안은 이미 마차를 타고 있던 두 사람을 보고 흠칫했지만 곧 태연한 얼굴로 칼멘의 맞은편에 앉아 창가에 자리를 잡았다.

왕성까지 가는 동안 마차 안의 공기는 무거웠다. 칼멘도 그리고 검은 로브를 뒤집어쓴 신관도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마리안은 몸을 움츠린 채 무릎에 올려놓은 손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하지만 사실 마리안은 칼멘이나 신관에게 신경 쓸 틈이 없었다.

마음이 무겁고 머릿속이 복잡했다. 그녀의 이번 휴가는 무척이나 중요했다. 외숙부와 베이퍼스 공작을 어떻게 해서든 아스터의 편으로 끌어들여야 했다.

지금까지는 행운이 따라준다고 할 만큼 일이 잘되었지만 앞으로도 과연 그럴 수 있을지는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마리안은 한참이나 손을 내려다보다가 눈을 감았다. 그러다가 피곤한 나머지 잠시 깜빡 잠이 들었다.

마리안이 깨어난 것은 뜻밖에도 신관과 칼멘이 대화를 나눴기 때문이었다.

“그럼 저하께서는 이틀 뒤의 예식에는 참석하지 않으시는 겁니까?”

“신관께서도 그렇게 할 수 없다는 걸 잘 아시지 않습니까.”

마리안은 깜짝 놀라 깨어났지만 눈을 뜰 엄두가 나지 않았다. 하지만 이대로 눈을 감고 있다가 들키는 것도 어색할 것 같아서 이내 눈을 뜨고 자세를 바로 했다.

신관과 칼멘은 그런 마리안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은 채 계속 대화를 나눴다.

“아스터 님은 얼마나 지켜봐야 할 것 같습니까?”

“글쎄요.”

신관은 말끝을 흐렸다. 마리안도 긴장감에 몸에 힘이 들어갔다.

“장담할 수는 없습니다. 신관 중에서도 신성력을 너무 과도하게 쓴 나머지 한동안 몸져눕는 사람이 나오기는 합니다. 그러니 신성력 고갈이 그렇게 특별할 것은 없습니다만…….”

“뭔가 문제라도 있습니까?”

“아스터 님의 내부에는 이미 신성력이 감돌고 있어서 왜 아직도 회복이 안 되는지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보통 신성력이 고갈해서 쓰러진 경우는 정말로 텅 비어버린 느낌이라 아스터 님의 경우랑은 좀 달라서요.”

“그래서 지켜보자고 하는 겁니까?”

“네, 그렇습니다.”

마리안은 신관의 말을 들으며 의아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아까는 칼멘과 같이 있느라 긴장해서 미처 깨닫지 못했는데, 신관의 말대로라면 그는 아스터의 몸속에 쌓여있는 마나의 흐름은 감지하지 못했다는 뜻이 될 것이다.

‘어째서지? 저 신관이 마법을 사용할 줄 몰라서 그런 걸까.’

하지만 신성력으로 타인을 치유할 수 있을 정도의 능력이라면 그는 단순한 고위급 신관이 아니라 엄청난 능력자였다. 그런 사람이 시르안도 아는 아스터의 상태를 알아채지 못하고 있었다.

‘시르안이 정말로 굉장한 마법사인가 봐…….’

첫인상이 당근색의 비둘기였기 때문에 자신이 너무 시르안을 과소평가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정말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시르안 같은 사람이 아스터의 편이 되어주어서 다행이었고, 신관이 아스터의 마나를 눈치채지 못해서 다행이었다. 신관이 이상함을 깨달았다면 여러 가지로 훨씬 문제가 복잡해졌을 것이다.

그때 마리안은 칼멘이 자신에게 시선을 주고 있음을 깨닫고 고개를 들었다.

“왜 그러시죠?”

칼멘에게는 절대로 틈을 보일 수 없어서 마리안은 더욱 고개를 당당하게 들었다.

“네가 보기에 아스터 님에게 특별한 변화는 없었나?”

“특별한 것은 없었습니다. 계속 열이 올라서 몽롱한 상태였으니까요. 식사도 수면도 제대로 취하지 못하셨죠. 나흘 전부터 간신히 열이 내리기 시작했고요. 지친 탓인지 계속 주무시기만 하셨어요.”

마리안의 대답에 칼멘은 미간을 찌푸렸지만 딱히 그녀의 대답을 의심하지는 않았다. 결국 칼멘은 이틀 뒤 마차를 보내겠다고 말하고는 마리안을 알리체가의 문 앞에 내려주고 떠나갔다.

갑작스러운 귀가였기 때문에 이전처럼 집안의 사람들이 나와서 마리안을 기다리고 있지는 않았다.

마리안은 짐을 챙겨온 작은 손가방을 들고 현관의 계단을 올라갔다. 그리고 문을 두드리기 전 눈을 감고 가볍게 심호흡을 했다. 휴가라는 이름으로 집에 왔지만 그녀가 해야 할 일은 이제부터 시작이었다.

‘괜찮아. 잘할 수 있을 거야.’

스스로를 다독이며 결심을 굳힌 마리안은 문을 두드렸다. 그러자 깜짝 놀란 가족들과 트레샤나 부인을 비롯한 고용인들이 마리안을 마중하러 나왔다.

마리안은 먼저 휴식을 취하기로 했다. 2박 3일의 일정은 생각 외로 짧았다. 가족에게도 신경을 써야 했고, 그사이에 외숙부와 베이퍼스 공작도 만나야만 했으니 쉴 시간은 지금뿐이었다.

‘시르안은 외숙부에게 내가 집에 간다고 말을 했겠지?’

마리안은 옷을 갈아입으며 주머니 속의 작은 구슬을 만져보았다.

아스터가 시르안에게 이야기했거나, 아니면 시르안이 마리안이 칼멘의 마차에 타는 모습을 직접 봤을지도 모른다.

마리안은 구슬을 다시 주머니에 넣었다. 긴장한 탓인지 이 구슬을 계속 몸에 지니고 있어야 조금이라도 안심이 되었다.

블랑디르 백작의 연락은 바로 다음 날 아침에 도착했다. 눈부신 아침 햇살에 기지개를 켜며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던 마리안은 자신의 손에 봉인이 찍힌 작은 편지 봉투가 쥐여져 있음을 깨달았다.

“편지?”

깜짝 놀라 편지 봉투를 자세히 들여다보자 익숙한 인장이 찍혀있었다. 바로 블랑디르가를 상징하는 백합 문양이었다.

게다가 편지 봉투에는 작은 새 발자국이 찍혀있었다. 마리안은 발자국에 잠시 시선을 주었지만 일단 편지를 먼저 개봉했다.

그녀의 손길은 꽤 다급했다. 마리안은 편지를 읽고 잠시 멍한 얼굴이 되었다. 편지의 내용은 아주 간단했다.

‘오늘 오후 2시. 알리체가의 장미 정원.’

“여기로 온다고?”

마리안은 의아하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하긴 왕성 안의 어떤 특정 장소를 정하는 것보다는 그편이 낫긴 했다. 마리안이 어디로 가든 간에 그녀를 따라붙어 감시하는 사람들이 있으니 차라리 상대가 찾아오는 쪽이 나았다.

더욱이 마리안뿐만 아니라 외숙부 같은 사람이 왕성 안에서 멋대로 돌아다니다 발견되어도 곤란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귀족연합의 가문들은 왕실이나 국가 단위의 대규모 행사가 있는 경우를 제외하면 왕성에 잘 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외숙부가 콕 집어서 장미 정원이라 언급한 것을 보고 있으려니 기분이 묘해졌다. 장미 정원은 알리체가의 정원 중에서도 특별히 장미로만 꾸몄던 곳으로 무척 아름답기로 유명했다.

지금은 장미가 멋대로 자라면서 장미 덤불이 되어버렸는데, 알리체가가 몰락하면서 가장 먼저 황폐해진 곳 중의 하나이기도 했다. 마리안과 남작 부인은 당분간 장미 정원에는 손을 대지 않기로 이야기를 해놨었다.

초여름부터 피기 시작하는 장미들이 그런대로 운치가 있는 데다, 한번 정원 손질을 하려면 대대적으로 정돈해서 계속 관리해야 하는데 아직 그럴 형편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날카로운 가시가 있는 장미 덤불이 제멋대로 자란 곳이라 최근에는 알리체가의 사람들도 그쪽으로는 잘 가지 않았다. 게다가 집 안에서 내려다보면 장미 정원 안쪽에 누가 있는지 잘 보이지 않았다.

‘우리 집을 다녀갔었나……. 아니면 시르안이 이미 다 살펴보고 이야기 한 걸까?’

아무리 봐도 알리체가에서 몰래 대화를 나눌 만한 곳이 어디인지 너무나 잘 알고 선정한 장소였다.

시르안을 떠올린 마리안은 편지 봉투에 다시 시선을 주었다. 작은 새의 발자국을 눈여겨보며 마리안은 고개를 갸웃했다. 그도 그럴 것이 시르안이 당근색 비둘기로 변신했을 때의 발 크기에 비하면 훨씬 작았다.

새로 변신한 시르안은 창문을 열어달라고 파닥거릴 때마다 마리안의 손 위로 올라오곤 했었다. 어쩌다 보니 발 크기는 잘 알고 있는 마리안이었다. 그건 딱 비둘기만 한 크기였는데, 편지 봉투에 찍힌 발자국은 참새만 했다.

‘참새가 이런 걸 물고 날아다닐 수 있을까.’

순간적으로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아무래도 외숙부나 베이퍼스 공작 측에 시르안을 제외하고도 새로 변할 수 있는 마법사가 한 명 이상 더 있는 게 아닐까 싶었다.

마리안은 편지를 잘게 찢어 부엌을 지나가면서 화덕에서 태워버렸다.

점심을 먹고 난 뒤 마리안은 머리가 아파서 산책이라도 좀 하고 오겠다고 말하고는 시선을 피해 장미 정원으로 들어갔다.

장미 정원에는 아직도 철 지난 장미가 무성하게 피어있었다. 마리안은 웃자란 장미 덩굴을 피해 이끼가 잔뜩 낀 석조 정자에 앉아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려고 애썼다.

그런데 정작 오후 2시가 넘었는데도 외숙부는 오지 않고 있었다.

‘또 내가 모르는 감시가 붙기라도 한 걸까?’

시르안 때도 이런 일이 있었던 것을 생각하며 마리안은 참을성 있게 기다렸다. 그때도 두 시간 정도 기다렸는데 이번에도 그러지 말라는 법은 없었다.

30분 넘게 기다렸을 때 덤불 속에서 바스락하는 소리가 났다. 처음 보는 개 한 마리가 마리안을 보고 있었다. 반질반질한 진한 크림색 털에 연한 초록색 눈을 가진 중형견이었다.

마리안은 고개를 갸웃했다. 떠돌이 개 같지는 않고 털의 윤기나 관리 상태를 보면 누군가가 애정을 쏟아 키우는 개 같은데 대체 어떻게 알리체가의 정원에 들어온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어? 안녕, 넌 어디서 왔니? 어떻게 들어온 거지?”

마리안이 자리에 쪼그리고 앉으며 개에게 손을 내밀자 개는 마리안의 앞으로 다가와서는 뭉툭한 앞발로 그녀의 손을 탁 소리가 나게 때렸다.

“어?”

황당해진 마리안이 당황해서 개를 보는데, 마리안의 눈에 개가 미간을 찌푸리는 게 들어왔다.

“…….”

마리안은 개를 키워본 적이 없었지만 개들도 표정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은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이 크림색 개의 눈빛과 표정이 너무 엄격해서 자기도 모르게 주춤주춤 물러나 눈을 깜빡거렸다.

마리안이 물러서자 개가 마리안의 앞에 근엄하게 앉았다. 기묘한 대치 상태에 마리안이 어찌해야 할지 몰라 당황해하고 있는데, 갑자기 어디선가 참새 한 마리가 포르르 날아왔다.

참새는 마리안과 개의 근처를 몇 번 떠돌며 노래하듯 짹짹하더니 갑자기 새의 형상이 흐릿해지면서 하얀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났다.

그와 동시에 개와 참새가 연한 금발 머리의 키 크고 마른 남자와 짙은 갈색 머리에 검은 눈을 가진 자그맣고 통통한 체구의 여자로 바뀌었다.

“아…….”

마리안은 당황해서 눈만 깜빡거렸다.

“안녕, 마리안. 우리는 초면이지. 하지만 사실 난 전부터 너를 몇 번이나 본 적이 있어. 위르나 베헤른이야. 이쪽은 너도 잘 아는 베이퍼스 공작 각하.”

“아, 안녕하세요.”

마리안은 얼떨결에 인사했다. 그러나 곧 눈을 크게 떴다.

“네? 베이퍼스 공작님이요?”

베이퍼스 공작이라고 소개받은 남자는 아무리 봐도 20대 중반 정도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외숙부인 블랑디르 백작과 비슷한 연령대의 중후한 장년의 신사를 상상했던 마리안은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그녀가 가장 놀란 건 나이보다 다른 데 있었다.

“베이퍼스 공작님이 왜 이런 모습으로 나타나신 거예요?”

너무 놀라고 당황한 나머지 마리안은 속내를 숨기지 못하고 외치고 말았다. 그러자 베이퍼스 공작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고, 위르나는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마리안 네가 아스터 왕자에 대해 제일 잘 알고 있으니까 꼭 만나보고 싶다고 했어.”

위르나의 설명에 마리안은 그만 다시 묻고 말았다.

“이렇게 마법으로 모습을 바꿔서 오실 수 있다면 굳이 저 말고 아스터 님을 직접 만나 뵈면 되잖아요.”

그 말에 위르나가 조금 난감한 얼굴을 해 보였다.

“그게…….”

“위르나, 그 부분에 대해서는 제발 조용히…….”

베이퍼스 공작이 그때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깡마른 체구와 어울리지 않는 중저음의 나직한 목소리였지만 그의 말은 위르나의 대답에 묻히고 말았다.

“내가 동물로 변신시키는 데 능숙하지 않아서 공작 각하를 개로밖에 변신시키지 못해서……. 그런데 개 모습으로는 왕자님을 만나고 싶지 않으시대.”

위르나의 얼굴이 살짝 붉어졌지만 베이퍼스 공작은 단호하게 말했다.

“이런 모습은 곤란해. 너무 개 같잖아.”

굉장히 중의적으로 들리는 마지막 말에 마리안은 그만 흠칫하고 말았다. 그러한 마리안의 모습에 베이퍼스 공작이 한쪽 눈썹을 추켜올리며 못마땅한 얼굴을 해 보였다.

“욕설을 내뱉은 게 아니야. 개는 충성을 상징하는 동물이지 않나. 굳이 개의 모습으로 왕자를 찾아가서 내가 무작정 충성을 다 바칠 것처럼 굴고 싶지는 않을 뿐이야.”

공작은 쌀쌀맞게 말했다. 그러자 위르나가 옆에서 우물쭈물 입을 열었다.

“그것도 사실이고.”

마리안은 화제를 돌리기로 했다.

“제 외숙부께서는 오지 않으시는 건가요?”

그러자 위르나가 이번에야말로 베이퍼스 공작의 눈치를 보며 말했다.

“그게 그쪽은 동물로 변신한 자기 모습을 참을 수가 없대서…….”

“…어째서죠?”

마리안의 질문에 답한 사람은 베이퍼스 공작이었다. 그는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

“위르나는 블랑디르 백작을 검은색 꽃돼지로 변신시켰다.”

“…….”

마리안은 웃음이 터지려는 것을 참기 위해 필사적으로 애썼다.

“하지만 내 잘못이 아니야.”

위르나가 정말 억울하다는 듯이 외쳤다.

“유달리 변신 마법에 특화된 게 아닌 이상 마법으로 변신할 수 있는 동물에는 한계가 있어. 그 사람의 성격이나 모습에 많은 영향을 받는다고.”

“하아……. 알았습니다, 위르나. 이제 그만하죠.”

베이퍼스 공작은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알리체 영애를 직접 만나기 위해 다소 무리를 할 수밖에 없었다. 양해 바라네.”

“…네, 풉.”

마리안은 필사적으로 애썼지만 그래도 결국 웃음이 터지고 말았다.

“죄, 죄송합니다.”

사과했지만 그런데도 웃음이 터져 나왔다.

베이퍼스 공작은 결국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한 번 더 한숨을 쉬었다.

“이제 본론으로 돌아가도록 하지.”

마리안이 좀 진정되었을 때 베이퍼스 공작은 근엄하게 말했다.

그는 신분과 지위 때문인지 20대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만큼 위엄과 근엄함이 넘쳐흐르는 데다 쌀쌀맞았다. 공작은 아스터와는 또 다른 분위기를 가진 사람이었다. 하지만 첫인상이 다정해 보이는 크림색 중형견이었기 때문인지 마리안은 그가 별로 어렵게 느껴지지 않았다.

그렇게 생각한 순간, 마리안은 공작이 왜 개의 모습으로 만나고 싶지 않다고 한 것인지 깨달았다. 처음에는 그의 말이 무척 오만하고 무례하다고 생각했지만 그게 아닌 것 같았다.

‘만만해 보이기 싫었구나…….’

아무래도 첫인상이란 사람에 대한 인상을 좌우하기 마련이니 말이다.

마리안이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공작이 다시 입을 열었다.

“블랑디르 백작과 마법사 시르안에게 전달받긴 했지만 영애와 직접 이야기를 해보고 싶었다. 아스터 왕자께서는 나와 귀족연합에게 정확히 뭘 원하시는 거지?”

마리안은 그 말에 정말로 자세를 바로 했다. 그녀는 베이퍼스 공작만큼이나 진지하고 근엄한 얼굴로 말했다.

“아스터 님께서 어떤 상황에 처하셨는지는 알고 계시리라 생각합니다.”

공작이 고개를 끄덕이자 마리안은 말을 이어나갔다.

“아스터 님께서는 혈통의 정당성 외에도 강력한 신성력을 갖춰 누구보다 옥좌에 앉을 자격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런데도 그분의 쌍둥이 형제인 클로타르 저하께서 사람들의 눈을 속이고 왕세자의 자리를 차지하고 계시죠. 클로타르 저하께는 신성력이 없습니다.”

베이퍼스 공작은 이 또한 알고 있었는지 아무런 말이 없었다.

“그래서 아스터 님께서는 이제 당신께서 본래 누리셔야 했을 지위와 영광을 되찾고자 하십니다. 하지만 솔직하게 말씀드리건대 아스터 님께서는 혼자서는 그 일이 쉽지 않다고 생각하십니다. 그래서 공작님과 귀족연합 가문들의 조력을 바라고 계십니다.”

“왕자께서 바라시는 일이 무척 위험한 일이라는 점은 영애도 알 거다.”

“알고 있습니다.”

마리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감히 왕가의 후계를 논하는 이야기가 된다. 자칫 잘못하면 이 일은 반역자로 몰려 멸문의 화를 피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물론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영애가 아스터 님을 지지하는 이유가 뭐지? 그분이 알리체가에게 무엇을 약속하셨나?”

“물론 알리체가의 재건입니다, 베이퍼스 공작님.”

마리안은 공작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귀족연합에 속한 가문 중 저희 알리체가는 조만간 작위도 몰수당할 지경으로 몰락했습니다.”

마리안의 목소리는 담담했다.

“아스터 님을 따른다면 저는 알리체가의 재건을 감히 바랄 수 있다고 판단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게 된 이유는 아스터 님이 드높고 올곧은 성정을 지니셨을 뿐만이 아니라 합리적이고 자애로우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마리안은 잠시 목소리를 가다듬고 이어서 말했다.

“저는 가장 가까이에서 클로타르 저하와 아스터 님을 함께 보았습니다. 그리고 단순히 신성력의 유무를 떠나 클로타르 저하께서 국왕의 자리에 어울릴 만한 분이 맞는지 의문을 품게 되었습니다.”

“…영애는 지금 자신이 얼마나 엄청난 소리를 하고 있는지 알고 있는가?”

마리안의 말에 베이퍼스 공작이 미간을 찌푸렸다.

하지만 마리안은 속으로 웃었다. 이 젊은 공작이나 그의 뒤에 업혀있는 귀족연합이나 어차피 서로 다 계산할 것은 전부 계산을 끝내고 왔을 것이다.

애초에 계산이 맞지 않아 아스터를 지지할 생각이 없었다면 굳이 이런 모습으로 마리안을 찾아올 이유가 없었다.

“잘 알고 있습니다, 공작님.”

마리안은 여전히 차분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녀는 베이퍼스 공작이 뭘 원하는지 알고 있었다. 위험을 감수하고 아스터를 지지하면 대체 그가 뭘 내놓을 수 있는지 떠보고 싶은 것이다.

그리고 아스터는 바로 자신이 어디까지 뭘 내놓아야 하는가를 두고, 그동안 매일 밤마다 마리안과 더불어 이 문제를 고민해 왔다.

“클로타르 님은 신성력이 없으면서 귀족과 백성들을 기만하고 계십니다. 공작님께서는 거짓말을 하는 그분을 신뢰할 수 있으십니까?”

베이퍼스 공작은 대답하지 않았다. 아마 대답할 말도 없을 것이다. 공작은 물론이고 귀족연합에 속한 누구도 왕실과 클로타르를 믿지 않았다.

“아스터 님께서는 공작님과 귀족연합의 조력을 얻을 수 있다면 귀족연합의 중앙 정계 복귀를 약속하셨습니다.”

순간 베이퍼스 공작은 무척이나 복잡한 표정으로 마리안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여전히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공작님, 저는 배움이 짧고 정치에 대해서는 거의 알지 못합니다.”

마리안은 솔직하게 말했다.

“하지만 클로타르 저하와 아스터 님을 가까이에서 본 사람으로서는 아스터 님이야말로 르샤베 왕국을 이어가실 분이라고 진심으로 생각합니다.”

공작이 뭐라고 말하려고 하는 것을 보고 마리안은 얼른 덧붙였다.

“물론 선량하기만 한 사람이 반드시 훌륭한 군주가 될 수 없다는 사실 정도는 압니다. 하지만 아스터 님은 그저 한없이 속이 넓고 다정하기만 한 분은 아닙니다. 그분께서는 신성력과 더불어 뛰어난 통찰력을 가지고 계십니다. 감히 말씀드리건대 아스터 님을 지지하신다면 후회하지는 않으실 겁니다.”

공작은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잠시 후 그는 무뚝뚝하게 말했다.

“알리체 영애의 말은 잘 알겠다. 하지만 어떤 분인지 그대의 말만 듣고 판단할 수는 없는 법이니까.”

마리안은 그 말에 미소를 머금었다.

‘끝까지 그렇게 나오시겠다.’

베이퍼스 공작이 망설이는 것도 이해는 갔지만 망설이기만 해서는 될 일이 아니었다. 마리안은 어차피 이런 자리에서는 말을 돌리는 것도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다.

“저는 잘 이해가 가지 않는군요. 공작님께서 아스터 님의 인품이 그토록 궁금하셨고 제 말만으로 판단할 수 없다고 생각하셨다면 어떻게 해서든 아스터 님을 직접 만나 뵈었어야 했던 게 아닐까요? 정말로 공작님께는 동물로 변신하지 않고는 아스터 님을 만나러 갈 방법이 없는 겁니까?”

그 말에 정곡을 찔린 공작이 미간을 찌푸렸다.

그는 일부러 아스터를 만나지 않았다. 어쩌면 신중을 기하느라 그랬는지도 모르고, 어쩌면 아무런 지지기반도 없는 아스터를 초반부터 기선 제압하려고 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유가 무엇이 되었든 간에 공작은 아스터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마리안은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생긋 웃었다.

“신 앞에 맹세할 수 있습니다, 공작님. 클로타르 저하보다는 아스터 님 쪽이 믿고 따를 수 있습니다. 누가 뭐라고 해도 클로타르 왕세자는 귀족연합의 가문들을 복권할 생각이 없습니다. 그걸 잘 알고 계시니 공작님께서는 아스터 님이 무엇을 줄 수 있는지 궁금해하시는 게 아니겠습니까?”

노골적인 말에 공작이 마리안을 노려보았다.

“알리체 영애, 말을 조심…….”

“아스터 님께서는 중앙으로의 복직, 그리고 귀족연합 가문들에 대한 향후 5년간의 면세를 약속하셨습니다.”

“…….”

마리안은 공작의 말을 막고 아스터가 그동안 고민해서 정한 미끼를 내밀었다. 말뿐만이 아니라 마리안은 아스터가 자신의 뜻을 담아 서명한 두 장의 종이를 꺼내 공작에게 건네주었다.

그는 떨리는 손으로 종이를 건네받았다. 그러고는 한동안 그 종이를 바라보았다.

“아스터 님은 딱 거기까지만 약속하셨습니다. 하지만 귀족연합은 아스터 님의 기반이 될 테니 아스터 님이 자리를 잡고 나면 그 후에 가질 수 있는 권한은 어마어마하게 되겠지요. 아스터 님은 그분께서 고난을 겪던 시절에 손을 내민 귀족연합을 절대로 외면하지 않으실 겁니다.”

어차피 아스터가 당장 왕좌에 오르는 것은 아니다. 아직 국왕이 건재했다. 그 국왕이 아스터를 클로타르만큼 대우해 줄지도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러니 아스터가 당장 귀족들에게 줄 수 있는 것은 한정적이었다.

그러나 일단 왕세자의 자리가 바뀌게 되면 아스터에게 협력할 귀족들의 수는 점차 늘어날 수밖에 없다. 기꺼이 왕세자의 세력이 되고자 몸을 낮춰 올 수많은 귀족 중에서 가장 힘든 시기에 도움을 준 귀족연합의 가문들은 아스터에게도 각별한 존재가 될 수밖에 없었다.

어차피 모 아니면 도의 게임이었다. 베이퍼스 공작은 중앙에서 잊혔다고는 해도 자신의 영지에서 얼마든지 풍요로운 인생을 살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가 원하는 삶은 그런 게 아니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이 자리에서 마리안과 대면하고 있는 것이다.

“아스터 님의 뜻은 잘 알겠다.”

마침내 공작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보다 진중한 목소리로 마리안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리고 그대의 영리함과 용기, 왕자님을 향한 믿음에도 진정으로 감동했어.”

베이퍼스 공작이 손을 내밀어서 마리안은 엉겁결에 그의 손을 마주 잡았다.

“아스터 님께 베이퍼스 공작가와 블랑디르 백작가를 포함한 귀족연합이 앞으로 그분과 함께할 거라고 전해주게.”

마리안과 악수한 베이퍼스 공작은 마리안이 건네준 종이 두 장에 모두 서명한 뒤 그중 한 장을 마리안에게 건네주었다.

“감사합니다, 공작님.”

마리안은 뛸 듯이 기뻤지만 애써 흥분을 억누른 채 담담한 표정을 지으려고 애썼다. 그런 마리안에게 공작이 계속 말했다.

“앞으로 마법사 시르안과 위르나가 계속 양쪽 사이의 연락을 담당해 줄 걸세. 알리체 영애는 그럼 내일 왕자님께 되돌아가는 건가?”

“네, 그렇습니다.”

“마리안, 그 종이를 줘봐. 혹시 모르니까 다른 사람의 눈에 띄지 않도록 보호 마법을 걸어야겠어.”

위르나가 마리안에게서 종이를 건네받아 마법진을 그리며 작게 중얼거렸다. 곧 종이는 콩알만 한 작은 보석으로 변했다.

“이건 별다른 주문 해제 없이도 아스터 님의 손에 들어가면 원래 모습을 되찾게 될 거야.”

“감사합니다.”

마리안은 소중하게 작은 보석을 챙겨 넣었다.

“아스터 님이 조만간 연락하실 겁니다. 그분께서는 더 이상 탑에서 숨죽여 지내고 싶어 하지 않으시니까요.”

“알겠네. 그게 언제가 되었든 간에 지금 이 순간부터 귀족연합은 아스터 님을 물심양면으로 지켜드릴 것이며 할 수 있는 모든 지원을 다 하겠네. 아스터 님이 부르신다면 우리는 당장 달려갈 준비가 되어있다고 알려주게. 그게 설령 당장 내일이라고 해도 말이지.”

마티아스 블랑디르는 마리안의 이야기가 사실인지 여부를 확인하자마자 바로 베이퍼스 공작을 찾아갔다.

블랑디르 백작은 무척이나 신중한 성격의 사람이었지만 동시에 탁월한 정치 감각을 가지고 있기도 했다. 그는 시르안의 도움으로 아스터의 존재를 확인하자 이번에야말로 중앙으로 되돌아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블랑디르 백작은 지난 한 달 동안 베이퍼스 공작을 비롯한 귀족연합의 모든 가문들을 설득하느라 바쁘게 지냈다. 개중에는 깊은 관심을 보이는 사람들도 있었고, 관심조차 보이지 않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래도 대부분의 귀족들이 이번이 그들이 중앙으로 돌아갈 수 있는 마지막 기회라는 데 동의했다.

단지 이들 가문을 모두 책임져야 하는 베이퍼스 공작이 오히려 젊은 나이답지 않게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결정을 망설였을 뿐이다.

하지만 마리안의 이야기를 들으며 그는 마음을 정했다. 아스터가 제시한 조건은 합리적이었고, 무척이나 매력적이었다. 이걸 거절한다면 그는 역사에 길이 남을 멍청한 겁쟁이가 될 터였다. 베이퍼스 공작은 결정하고 나자 홀가분한 기분마저 들었다.

한결 밝아진 그의 얼굴을 보며 마리안은 우아하게 감사 인사를 했다.

“정말로 감사합니다, 공작님. 아스터 님께 이 사실을 잘 전달하도록 하겠습니다.”

비록 대화를 나눈 시간은 짧았지만 마리안과 공작 모두에게 만족스러운 결과를 가져온 만남이었다. 공작과 마리안은 가능하면 빨리 아스터가 모습을 드러내기로 해야 한다는 데 의견을 모으고 헤어졌다.

그때만 해도 이들은 알지 못했다. 베이퍼스 공작이 언급한 당장 내일이라도 아스터를 지원하겠다고 한 말이 정말로 현실이 되리라는 사실을 말이다.

위르나와 베이퍼스 공작이 다시 참새와 개의 모습으로 정원에서 떠나간 뒤 마리안은 정원을 좀 더 거닐다 들어와서 그날 오후 내내 휴식을 취했다.

‘그래도 이걸로 귀족들의 지지를 얻게 되어서 다행이야.’

마리안은 그날 밤 잠자리에 들기 전에 창문으로 저 멀리 왕궁의 불빛이 반짝이는 모습을 보며 생각했다. 날씨가 맑은 탓인지 오늘따라 왕궁의 화려한 불빛이 꽤 선명하게 보였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왕궁이 너무나 아득하고 멀게만 느껴졌는데 조금은 가까워진 기분이 들었다. 마리안은 정말로 한 걸음 더 발을 내디뎠다고 생각했다.

귀족연합이 비록 중앙 정계에서 밀려난 가문의 집합체라고는 해도 그들의 지지가 있는 것과 없는 것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었다.

더욱이 베이퍼스 공작가는 여전히 르샤베 왕국의 3대 공작가였다. 르샤베 왕국에서는 설령 왕족조차도 베이퍼스 공작가를 함부로 무시할 수 없었다.

베이퍼스 공작은 사려 깊고 신중했지만 그에 못지않은 강렬한 야망을 품고 있는 사람이었다. 비록 그는 시종일관 냉정한 얼굴로 마리안을 대했지만, 눈만큼은 뜨겁게 타오르고 있었다.

공작의 얼굴은 자신의 자리를 찾겠다고 말할 때의 아스터와 무척 비슷했다.

‘이제 남은 건 아스터가 빨리 몸을 회복하는 건데…….’

마리안은 한숨을 쉬었다. 그녀는 이 문제로 고민이 많았다.

마리안이 집에 와있는 동안에 시르안이 계속 곁에 있을 테니 큰 문제는 없을 터였다. 아스터는 밤에는 마법을 공부하고, 낮에는 베르트의 간호를 받으며 쉬고 있을 것이다. 그러니 적어도 그의 상태가 더 이상 나빠지지는 않을 거란 확신은 있었다.

하지만 아스터에게 신성력이 돌아오면 그건 그것대로 문제였다. 신성력이 돌아왔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클로타르가 찾아올 것이다. 아스터는 어차피 평생 겪어온 일이라며 대수롭지 않은 듯 여겼지만 마리안의 마음은 그렇지 않았다.

‘가능하면 클로타르가 더 이상 아스터에게서 신성력을 뺏어가지 못하게 해야 할 텐데.’

마리안은 정말로 더 이상은 아스터가 채찍질을 당하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다. 피투성이가 된 아스터를 보는 것만으로도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

아스터가 신성력을 회복하자마자 클로타르가 찾아갈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날 정도로 마음이 불안했다.

그러니 되도록 빨리 아스터가 신성력을 회복하고, 클로타르가 아직 그 사실을 모르고 있을 때 기습을 해야 했다.

이 모든 생각들은 전적으로 아스터의 몸 상태에 달려있는 데다, 클로타르가 언제 찾아올지를 가늠하기도 어려웠기 때문에 마리안은 오늘 베이퍼스 공작과의 이야기가 잘 끝났음에도 초조함을 느꼈다.

‘얼른 아스터를 만나고 싶어…….’

마리안은 한참이나 왕궁을 바라보다가 창문을 닫고 자신의 침대에 누우며 생각했다.

아스터에게 오늘의 일을 말하고 그의 다정한 미소와 체온을 느끼며 그에게 키스하고 싶었다. 그러면 이 불안이 조금은 가라앉을지도 몰랐다.

조금이라도 빨리 내일을 맞이하고 싶은 마음에 마리안은 일찌감치 잠자리에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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