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장 도약을 위한 준비
마리안은 다음 날 오후가 되어서야 눈을 떴다.
“잘 잤어, 마리?”
다정하게 웃고 있는 아스터의 얼굴을 마주하자 어쩐지 부끄러워져서 마리안은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허둥지둥 침대에서 일어났다.
“제가 너무 오래 자버렸네요.”
“괜찮아. 나도 일어난 지 얼마 안 되는걸.”
마리안은 비가 내려서 먹구름이 잔뜩 낀 어두컴컴한 하늘을 보며 혀를 찼다. 해가 나지 않는 바람에 그대로 계속 자버린 것이다.
“몸은 좀 어때요, 아스터? 식사부터 해야 하지 않을까요?”
“식사라면 하인이 문밖에 음식을 두고 가서 내가 가져왔어.”
아스터는 싱긋 웃으며 창가의 탁자를 가리켰다. 거기에는 정말로 하인이 가져다준 식사가 놓여있었다.
이미 차갑게 식긴 했지만 아침 점심으로 나오는 음식은 간단한 것들 위주였기 때문에 별로 문제가 될 것은 없었다.
더욱이 아스터가 불을 피웠는지 난로가 타오르고 있었다. 마리안이 놀란 눈으로 보자 아스터는 겸연쩍은 미소를 지었다.
“비가 오니까 좀 추운 거 같아서.”
8월이지만 비가 내리고 바람이 불어 상당히 추운 날이었다. 습기 덕분에 꽤 축축하기도 했다. 마리안은 아스터에게 생긋 웃어주었다.
“고마워요.”
마리안이 얼른 세수를 하고 옷매무새를 가다듬는 동안 아스터는 난로에 주전자를 올려 물을 끓였다.
10분도 지나지 않아서 늦은 아침 겸 점심 식사를 하려고 했을 때였다. 음식이 차려진 탁자 앞으로 다가오던 아스터가 갑자기 비틀거렸다.
“아스터!”
깜짝 놀란 마리안이 달려가서 아스터를 부축했다.
“괜찮아요? 얼굴이 창백해요.”
“괜찮아. 조금 어지러웠을 뿐이야. 대단한 건 아니야.”
마리안을 그토록 열정적으로 안을 힘이 있었던 것과 별개로 아스터의 회복 속도는 생각보다 더뎠다.
신성력으로 등의 상처를 상당히 빨리 아물게 하긴 했지만, 단시간 동안 연달아서 한계까지 신성력을 끌어 쓴 것이 아무래도 그의 몸에 무리를 준 듯싶었다.
이대로 푹 쉬면 될 거라고 예상했던 것과 달리 아스터는 그 뒤로 계속 고열에 시달렸다.
베르트가 전보다 훨씬 더 꼼꼼하게 아스터를 돌보며 이것저것 약을 처방해 주었고, 마리안 또한 그의 곁을 떠나지 않고 지켰지만 아스터의 상태는 좀처럼 호전되지 않았다.
“딱히 상처가 덧나거나 감염된 건 아닌 것 같은데……. 대체 뭐가 문제인지 모르겠군요.”
좀처럼 원인을 알 수 없어서 베르트는 매우 걱정했다. 마리안은 베르트의 시선을 외면한 채 고개를 푹 수그렸다.
아스터가 완전히 회복하기도 전에 신성력을 쓴 데다, 격렬한 정사까지 연달아 반복한 것이 그 이유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던 탓이다.
베르트가 돌아간 뒤 마리안은 다시 이 문제에 대해 이야기를 꺼냈다. 그러나 아스터는 마리안의 의견에 고개를 저었다.
“그보다는 신성력이 잘 모이지 않는 게 문제인 것 같아. 그 힘은 커다란 분수에 물이 차는 것과 비슷하거든. 어느 정도 물이 가득 차면 갑자기 솟아오르는 거야. 그런데 이번에는 그 물이 차오르지 않고 있어.”
마리안은 아스터의 대답에 더욱 걱정스러운 얼굴이 되었다.
“혹시 힘이 사라진 건 아니고요?”
아스터는 이번에도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아닌 것 같아. 내 몸 안 어딘가에 신성력이 머물고 있다는 건 분명하게 느껴지거든. 그런데 물이 흘러나와야 하는 곳이 막혀있는 그런 기분이야. 나도 그 이상으로는 이 상태를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잘 모르겠어.”
아스터는 깊은 한숨을 쉬었다. 새삼 그는 자신의 몸에서 신성력이 굉장히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사실을 절감하는 중이었다.
아스터는 본래 자신에게 깃든 신성력을 전혀 좋아하지 않았다. 신성력이 없었다면 그는 이런 인적이 드문 곳에 유폐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아스터는 철이 들기도 전부터 자신이 쌍둥이로 태어난 것이 문제라면 차라리 신성력 같은 게 없어서 일찌감치 살해당한 편이 낫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그러나 이번 일을 통해 아스터는 신성력이 있었기에 자신이 그동안 건강할 수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돌이켜 보면 그는 클로타르에게 고문을 당해 상처를 입을 때를 제외하면 잔병치레를 해본 경험이 거의 없었다.
아스터는 자신이 본래 건강하고 병에 강한 덕분이라고 생각했었지만, 이번에야말로 그 모든 게 신성력의 영향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시간이 흐르면서 등의 상처가 거의 다 나아가는데도 불구하고 아스터는 여전히 침대 신세를 면치 못하고 있었다. 조금만 움직이면 열이 오르면서 근육통과 오한이 동반돼서 마리안을 안는 것도 힘들어졌다.
마리안은 아스터의 몸 상태가 나쁘다는 사실에 신경이 곤두서서 거기까지 생각할 겨를이 없었지만, 아스터로서는 현재의 상황이 꽤 불만스럽기만 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칼멘까지 아스터의 상태를 살펴보고 간 덕분에 클로타르가 한동안 찾아오지 않고 있다는 점이었다. 클로타르의 입장에서는 아스터에게서 뽑아낼 신성력이 없다면 굳이 성채까지 찾아와서 힘을 뺄 이유가 전혀 없었다.
“둘이서 오붓하게 지내는 건 좋네요.”
아스터가 한숨을 쉬는 것을 보고 마리안은 애써 밝게 말했다. 애초에 클로타르만 오지 않는다면 탑에서의 생활에 큰 불만이 없던 마리안은 사뭇 긍정적이었다.
“그래, 방해꾼이 없어서 그건 좋아.”
아스터도 그 말에 수긍했다.
“그런데 어째서 마법사나 신관은 보내지 않는 걸까요?”
마리안은 줄곧 궁금하게 생각하던 것을 입에 담았다. 마법사나 신관이 아스터를 당장 낫게 할 수는 없다고 해도 증세를 살펴보게 할 수는 있을 터였다. 아스터가 신성력을 쓸 수 없게 되면 곤란해지는 건 클로타르였으니 말이다.
그러나 클로타르뿐만이 아니라 칼멘마저 그동안 그토록 뻔질나게 불러들였던 마법사와 신관의 성채 출입을 금지하고 있었다.
“나도 클로타르처럼 신성력이 사라지는 게 아닐까 염려하는지도 모르지. 왕가의 후계가 둘 다 신성력을 잃는다면 왕위 계승에 문제가 될 테니까.”
“하긴…….”
마리안은 납득하고 말았다.
“그래도 정말 고약한 이야기예요.”
그렇게 덧붙이면서 마리안은 한숨을 쉬었다.
설령 아스터가 신성력을 잃는다고 해도 클로타르는 물론이거니와 왕가가 절대로 진실을 밝힐 생각이 없다는 사실에 기가 막혔다.
“클로타르의 인내심이 다하기 전에는 힘이 회복되어야 할 텐데.”
아스터도 길게 한숨을 쉬었다.
“그 성격상 내가 쓸모없다고 생각하면 나뿐만이 아니라 마리까지 해치려 들 테니까. 지금 이 상태로는 설령 도와주는 사람이 있어도 도망갈 수 없을 것 같고.”
“너무 걱정하지 말아요. 이제 곧 좋아질 거예요.”
마리안은 다정한 목소리로 아스터를 위로하려고 애썼다. 그녀는 아스터의 고민을 누구보다 잘 이해하고 있었다. 클로타르라면 분명 아스터가 쓸모없다고 생각한 순간 죽이려 들게 뻔했다.
하지만 당장은 어떻게 할 방법이 없었기 때문에 마리안은 여느 때처럼 탑에서의 일상을 보냈다. 아스터를 돌보고, 남는 시간에는 성안을 산책하고 책을 읽었다. 특히나 마리안은 왕립도서관에 갔던 날 구해 왔던 책들을 아스터와 함께 열심히 읽었다.
그처럼 변함없던 일상에 변화가 생긴 것은 클로타르가 다녀간 지 거의 한 달이 되었을 무렵이었다. 성채가 있는 북방 지역은 벌써 해가 지면 두툼한 겨울옷 없이는 밖에 나갈 수 없을 정도로 추워졌다.
그날도 마리안은 저녁 식사가 끝난 뒤, 난로에 불을 피우고 아스터와 함께 책을 읽고 있었다. 장작이 타들어 가는 소리와 이따금 책장을 넘기는 소리를 제외하면 방 안은 매우 조용했다.
그런데 갑자기 탁탁하는 소리가 들렸다. 이전에도 마리안이 들어본 적이 있는 소리였다.
“시르안?”
아스터보다 훨씬 빠르게 자리에서 일어난 마리안은 즉시 창가로 다가갔다. 그녀의 예상대로 창문 밖에서 당근색의 비둘기만 한 새가 창문을 날개로 두들기며 기다리고 있었다.
마리안이 창문을 열자 시르안이 즉시 안으로 들어왔다. 새는 방 안으로 들어오자마자 모습이 녹아드는가 싶더니 바로 사람으로 변했다.
“휴, 밤에는 날아오는 게 생각보다 쉽지 않네.”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넘겨 보이며 웃는 시르안은 확실히 지난번과는 달리 조금 지친 모습이었다.
“어서 와요, 시르안. 오래만이에요.”
마리안이 반갑게 인사하자 시르안은 마리안의 뒤에서 자신을 바라보는 아스터와 눈이 마주쳤는지 씩 웃으면서 말했다.
“저번에 만났을 때는 쭉 뻗어있더니 오늘은 일어나 있네?”
마리안은 시르안의 무례한 말투에 당황했지만 아스터는 개의치 않았다. 그는 가볍게 고개를 숙이며 손을 내밀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아스터 시엘라 라베인입니다.”
“시르안 울리에야.”
시르안 역시 아스터의 손을 잡았다.
갑자기 마리안은 굉장히 복잡한 기분이 되었다. 그러고 보니 아스터가 누군가와 통성명하는 모습을 처음 본 것이다.
“얼굴이 꽤 창백하네. 몸이 아직 안 좋은가 봐?”
“네, 신성력을 다루는 데 애를 먹고 있습니다.”
“흠. 그렇구나.”
시르안은 조금 안타깝다는 표정을 했지만 거기까지 듣고 마리안에게 시선을 돌렸다.
“마티아스에게서 전갈을 가져왔어.”
그 말에 마리안이 조금 긴장한 얼굴이 되었다.
“외숙부께서 뭐라 하시던가요?”
“조만간 널 직접 만나고 싶대. 그리고 너에게 소개해 주고 싶은 사람이 있다고 했어.”
“저한테 소개를요?”
“그래, 너 베이퍼스 공작에 대해 들어봤지? 네가 직접 베이퍼스 공작을 만나보는 게 좋겠다고 했어.”
순간 마리안은 깜짝 놀라 눈을 크게 떴다.
베이퍼스 공작은 20개 귀족 가문 연합의 수장인 사람이었다. 지금은 중앙 정계에서 밀려나긴 했지만 본래 왕세자비의 가문인 에베르토 공작가와 함께 대대로 왕실의 방계를 상징하기도 했었다.
“제가 베이퍼스 공작님을요?”
“응, 그 작자가 엄청난 흥미를 보였거든. 너랑 대화하고 싶대.”
시르안은 마리안을 보고, 그리고 다시 아스터를 바라보았다.
“아마도 저 왕자님을 지지하면 자신이 뭘 얻을 수 있는지 궁금해하는 거겠지.”
그러자 아스터는 마리안이 지금까지 본 적 없는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가 나를 진정한 왕세자로 따르고 지지한다면 베이퍼스 공작가가 르샤베 왕국의 3대 공작 가문 중에서 가장 큰 힘을 가질 수 있도록 지원할 생각입니다.”
그러나 시르안은 그 점에 대해서는 시큰둥했다.
“그래, 서로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같은 편이 되는 거지. 하지만 원래 마법사는 그런 데는 별로 관심이 없어.”
마리안이 그랬어? 하고 놀라는 얼굴을 했지만 아스터는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하지만 당신은 적어도 저랑 같은 편이 되어줄 생각은 하는 것 같군요.”
“그래, 나는 하필 베이퍼스 공작가와 블랑디르 백작가처럼 왕실의 눈 밖에 난 귀족 가문의 후원을 받는 마법사니까.”
시르안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후원자가 잘나가면 좋겠지.”
“꼭 그런 이유만은 아니지 않아요?”
마리안이 옆에서 끼어들었다. 그러자 시르안은 피식 웃었다.
“음, 그래. 사실 난 클로타르 라베인이 예전부터 꽤 재수 없었어.”
“그럼 우리는 마음이 잘 맞겠군요. 저도 클로타르가 매우 재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시르안은 아스터의 말에 잠시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러고는 웃음을 터뜨렸다.
“아, 그래. 그 점에서는 마음이 일치하겠네. 넌 클로타르랑 똑같이 생겼는데 걔랑은 정말 다른 것 같다.”
그는 조금 전보다 훨씬 마음에 든다는 표정으로 아스터를 바라보았다.
“칭찬 감사합니다.”
마리안은 여유 있게 받아치는 아스터를 조금 신기한 기분으로 바라보았다. 그가 이런 식으로도 말할 수 있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말인데, 언제 다시 집에 갈 거야?”
시르안의 이 질문은 마리안을 향한 것이었다.
“아직 잘 모르겠어요. 최근 아스터의 건강 상태가 좋지 않아서요.”
“신성력 문제라면 네가 옆에 붙어있는다고 해결되지는 않을걸.”
시르안의 직설적인 말에 마리안은 쓴웃음을 지었다.
“칼멘 후작이 성채에 오면 말해볼게요. 아마 당분간은 클로타르도 오지 않을 것 같으니 허락해 주지 않을까 싶어요.”
“그래, 그게 좋겠다. 칼멘 후작은 언제쯤 와?”
“슬슬 한 번 올 때가 되긴 했어요.”
시르안은 품 안을 뒤져 마리안에게 파란색과 보라색이 뒤섞인 작은 구슬을 건네주었다.
“이걸 손에 올려놓고 내 이름을 세 번 연달아 부르면 나랑 연결이 될 거야. 대단한 물건은 아니라서 고작 서너 마디 정도만 전달할 수 있어. 칼멘 후작이랑 이야기가 되면 집으로 출발하기 전에 이걸로 연락해. 그럼 내가 마티아스에게 알릴 테니까. 마티아스가 직접 너에게 연락할 거야.”
“알겠습니다.”
마리안은 시르안이 건네준 구슬을 받아 들어 잠시 살펴보고는 조심스럽게 품 안에 갈무리해 두었다.
“그래, 그럼 중요한 건 다 얘기한 것 같네.”
시르안이 싱긋 웃고는 다시 새로 변신하려고 해서 마리안은 황급히 그의 옷자락을 붙잡았다.
“응? 왜? 더 할 말이 있어?”
마리안은 아스터를 한 번 돌아보고는 물었다.
“지난번에 말씀드렸던 문제 말인데요. 아스터에게 마나 운용과 간단한 마법을 가르쳐주실 수 있을까요?”
“지금 당장?”
시르안이 조금 놀란 얼굴로 마리안과 아스터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이곳을 탈출할 때를 대비해서 간단한 호신용으로 쓸 만한 걸 알고 싶습니다.”
“호신용 마법이 얼마나 어려운데 그런 말을 해. 이건 기사들이 하듯이 몇 대 맞아가며 체술을 익히는 것도 아니라서 그렇게 쉽게는…….”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이 아스터를 돌아보며 말하던 시르안이 갑자기 고개를 갸웃했다.
“어라? 잠깐만, 실례 좀 할게.”
그는 몇 번이나 고개를 갸웃하다가 아스터의 몸에 손을 대고 눈을 감았다.
“너, 마나가 제법 쌓여있는데? 전에 마법을 배운 적이 정말 없어?”
그 말에 마리안과 아스터가 깜짝 놀라 시르안을 바라보았다.
“없습니다. 책이라면 좀 읽었지만…….”
아스터의 말에 마리안은 얼른 침대 밑에 숨겨놨던, 전에 서재에서 발견한 소책자를 찾아와 시르안에게 내밀었다.
“이 책을 바탕으로 해서 이론을 독학한 게 전부예요.”
시르안이 호기심 어린 눈으로 마리안에게서 소책자를 받아 들어 넘겨보았다.
“오호라.”
그는 책장을 빠르게 넘기며 이따금 아하, 과연, 흠, 하고 혼잣말을 했다.
“이걸 어디서 찾았어?”
“이 성채의 서재에서요. 책장 안쪽에 안 보이게 꽂혀있어서 누군가가 일부러 숨겨놨거나 그것도 아니면 책을 잘못 정리했다고 생각했어요.”
“이건 일종의 기초 마법서의 요약본인데, 누군지는 몰라도 정리를 아주 잘해놨어. 정수를 모아서 그중에서도 핵심만 딱딱 정리한 거야. 그런데 이걸 혼자 공부했다고? 공부한 것만으로도 알았단 말이야?”
시르안이 진심으로 놀랍다는 표정으로 물어서 마리안의 얼굴에는 화색이 돌았고 아스터는 조금 멋쩍은 듯이 대답했다.
“내용을 제대로 이해한 것 같지는 않지만, 그래도 읽다 보면 대강 어떤 이야기인지는 알 것 같다고 생각했습니다.”
“이야, 너 소질 있구나. 이거 꽤 재미있는데? 라베인 왕가에서 마법에 재능 있는 사람이 태어나다니…….”
생각에 잠긴 시선으로 아스터를 위아래로 찬찬히 살펴본 시르안이 다시 물었다.
“지금 신성력에 정확히 어떤 문제가 있는 거야?”
“관계가 있는 건가요?”
“음, 아마도 그럴 수 있을 거 같아. 내가 알기로 라베인 왕가에서 마법을 배운 사람은 지난 400년간 단 한 명도 없거든. 말로는 신성력 하나만으로도 충분해서 굳이 배울 필요가 없었다고 하는데, 내가 보기에 그 집안은 대대로 마법에는 재능을 말아먹다시피 했단 말이지.”
그렇게 말하며 피식 웃은 시르안은 눈을 가늘게 뜨고 아스터를 살펴보며 말을 이었다.
“그런데 오슬라 대륙의 고위 신관 중에는 신성력을 극대화하느라 드물게 마법을 배운 천재들이 있긴 했어. 나도 책으로만 읽고 넘긴 부분이라 자세한 건 모르지만, 그 때문에 신성력이랑 마력이 충돌해서 가끔 문제가 생기는 경우가 있다고 하더라고.”
그 말에 아스터가 자신이 겪고 있는 증세를 자세히 설명했다.
“아하, 그럼 열이 나는 것도 아마 그 때문일 수 있겠네. 불가능한 이야기는 아니야. 아마 네가 잘 모르고 마나를 마구 쌓으면서 신성력이랑 충돌이 일어났는지도 모르지.”
“그럼 고칠 수 있는 건가요?”
마리안의 질문에 시르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음, 물론 가능하긴 할 거야. 그런데 당장은 나도 몰라. 좀 찾아봐야 할 것 같아.”
“부탁드립니다.”
마리안이 절박하게 말하자 시르안이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너무 기대해도 곤란해. 이런 문제는 쉽게 풀리기도 하지만 때로는 가장 어려운 문제가 될 수도 있으니까. 일단 제일 좋은 건 마나를 다루는 법을 제대로 익혀서 저절로 문제가 해결되는 건데, 그게 안 되면 쉽지 않을 거야.”
“도와주시는 것만으로도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아스터의 부드러운 대답에 시르안은 눈을 잠시 크게 뜨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넌 진짜 클로타르랑 다르구나. 어쨌든 방법은 찾아내지 못하더라도 기초적인 마법을 사용하는 방법은 알려줄게. 마나는 쌓여있으니까 아마 그것만으로도 너한테 도움이 되긴 할 거야.”
“감사합니다.”
“정말로 고마워요, 시르안.”
마리안까지 한층 밝아진 얼굴로 기뻐하자 시르안은 콧잔등을 찡그리더니 쑥스러운 듯이 말했다.
“재미있을 거 같아서 그러는 거니까 그렇게 고마워하지 않아도 괜찮아. 아, 그리고 말이지.”
시르안은 아스터를 보면서 말했다.
“한 가지 조건이 있어.”
“말씀하세요.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뭐든 들어드리겠습니다.”
아스터가 시원시원하게 말하자 시르안은 여전히 겸연쩍은 얼굴로 말했다.
“네가 왕세자가 되면 나를 가끔 왕궁에서 손님으로 지내게 해줄 수 있어? 왕실 서고에 재미난 게 많다고 들었는데 아쉽지만 나는 들어가 볼 기회가 없었거든.”
“그건 당신을 후원하는 귀족 가문이 중앙 정계에서 밀려났기 때문인가요?”
“응, 뭐 그렇지. 마티아스나 베이퍼스 공작이 이를 가는 것도 이해가 가긴 해. 중앙 귀족이라는 게 위세가 참 대단해서 별것도 아닌 걸로 으스대면서 사람 비참하게 만드는 게 많더라고.”
아스터는 그 말에 쓴웃음을 지었다.
“물론 찾아만 와주신다면 언제든지 환영합니다. 그렇지, 마리?”
마리안은 갑자기 자신의 이름이 불려서 당황했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하죠. 지금도 이 작은 탑에서도, 그리고 알리체가에서도 당신의 방문은 언제나 환영이에요.”
시르안은 그 말에 기분 좋게 웃었다.
“그래, 그럼 이걸로 내 입장에서도 어떻게든 널 왕세자로 만들어야 할 이유가 하나 더 생겼네.”
시르안은 고개까지 끄덕여 보인 뒤에 이번에야말로 새로 변신했다. 순식간에 당근색의 새가 방 안에서 날아올랐다.
“다음에 오면 마법과 마나에 대해 알려줄게. 오늘은 일단 돌아가서 네 신성력에 왜 문제가 생겼는지 찾아볼 테니까 조금만 기다려. 그리고 마리안은 혹시 내가 돌아오기 전에 집에 가게 되면 연락하는 거 잊지 말고.”
제 할 말만 빠르게 끝낸 시르안이 창가로 날아가자 마리안은 그를 위해 창문을 열어주었다.
“아, 젠장. 새로 변신하니까 밤에는 시력까지 나빠져서 너무 불편해. 변신 마법을 조만간 대대적으로 보완해야 할 것 같아.”
창틀 위로 날아올라 투덜거리듯이 말한 시르안은 아스터와 마리안을 한 번 돌아보고는 이내 창밖을 향해 날개를 쭉 펼치더니 날아가 버렸다.
“재미있는 분이네.”
어둠 속으로 순식간에 사라져버린 새의 뒷모습을 확인한 아스터가 여전히 창밖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그 말에 마리안은 쓴웃음을 지었다.
“마법사들은 괴팍한 사람이 많다더니 시르안도 특이한 분인 것 같아요. 하지만 제가 보기엔 무척 좋은 분이에요. 저래 보여도 제 이야기를 하나하나 다 들어주셨는걸요.”
마리안은 앞으로 아스터가 시르안에게서 마법을 배울 수 있게 되어 정말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동안 아스터는 마법에 관심이 매우 많았지만 정식으로 배울 수 있는 길이 없어서 괴로워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그런데 저분의 이름이 어쩐지 낯설지 않아. 어디선가 본 적이 있는 것 같아. 시르안 울리에라고 했지. 시르안 울리에라, 시르안……. 대체 어디서 본 걸까? 마리도 들어본 적 있지 않아?”
아스터는 몇 번이나 시르안의 이름을 되뇌며 고개를 갸웃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이 탑 밖으로 나간 적이 없고, 극히 제한된 사람들만 만났으니 시르안의 이름을 들어볼 곳이 없었다.
“저는 금시초문인걸요.”
“…아!”
마리안의 대답에 곰곰이 생각에 잠겨있던 아스터가 갑자기 고개를 번쩍 쳐들었다.
아스터는 마리안이 전에 가져온 책 더미로 다가갔다. 그는 어딘가 조급한 손길로 책들을 하나하나 넘겨보기 시작했다. 그렇게 몇 분이 흘렀을 때 그가 외쳤다.
“마리! 여기야. 이걸 봐봐!”
마리안은 얼른 아스터에게로 다가갔다. 지금까지 아스터가 이렇게 흥분한 어조로 말하는 모습은 본 적이 없었다.
“어디서 본 것 같다 했는데 내 생각이 맞았어. 여기 있었어, 마리.”
마리안은 아스터가 가리킨 부분에 시선을 주었다.
“아…….”
마리안의 입에서도 곧 가벼운 탄성이 새어 나왔다.
아스터가 펼친 책은 마나가 무엇인지, 마법사란 어떤 존재인지, 주요 마법에는 어떠한 것들이 있는지를 비교적 쉽게 풀이한 교양 도서였다.
그리고 아스터가 손으로 가리킨 부분에는 르샤베 왕국의 역대 마법사들에 관한 이야기가 짤막하게 나열되어 있었다. 그중에는 150년 전 15세의 나이로 왕립마법협회에 가입해 수많은 독보적인 업적을 세운 최연소 천재 마법사 시리안 울리에에 대한 것도 있었다.
“…150년 전이요? 대체 이 책이 언제 나온 거죠?”
그러나 마리안은 최연소 천재 마법사의 독보적인 업적보다 숫자에 주목했다. 그제야 아스터도 얼떨떨한 얼굴로 책의 맨 뒷장을 펼쳤다.
“음, 16년 전에 출판된 책인데…….”
“그럼 시르안은 지금 대체 몇 살이라는 거죠……?”
“…….”
두 사람은 잠시 말이 없었다.
“겉모습은 아무리 생각해도 우리랑 비슷할 거 같았는데 말이죠.”
“그러게. 그건 그거대로 엄청난 천재라는 말이겠지만.”
아스터도 눈만 깜빡거렸다. 그는 한참 만에야 입을 열었다.
“그래도 그런 굉장한 분이라면 내 상태를 해결할 방법을 찾아주시지 않을까?”
그 말에는 마리안도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분명 그럴 거예요.”
시르안이라면 아스터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본인의 호기심을 충족시키기 위해서라도 분명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내리라는 확신이 들었다.
마리안은 한결 기분이 밝아지는 것을 느꼈다. 정말로 희망적이었다. 시르안이 찾아왔고, 당장은 어떻게 될지 몰라도 조만간 외숙부와 베이퍼스 공작과의 연결고리가 생긴다. 게다가 시르안이 엄청난 마법사라는 사실은 마리안과 아스터를 고무시키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마리안은 방을 정리하면서 한동안 생각에 잠겨있었다. 어쩌면 겨울이 지나기 전에 이 탑에서 벗어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예감이 들었다. 그저 단순한 예감에 지나지 않았지만, 마리안은 부디 그 예감이 현실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 * *
칼멘 후작은 그 후로도 오지 않았다. 아스터의 열이 떨어지지 않아서 베르트가 계속 찾아왔는데, 아마도 그에게서 아스터의 상태에 대해 전해 듣는 것 같았다.
자꾸만 시일이 흐르는 데도 칼멘이 찾아오지 않자 마리안은 초조해졌지만 너무 그 문제에만 매달리지는 않으려고 했다. 큰일일수록 서두르면 오히려 일을 망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마리안은 조바심을 내어 일을 그르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무작정 기다리고만 있을 수도 없었다. 이러다가 어느 날 다시 클로타르가 들이닥치면 또다시 최소 열흘 이상은 탑에 갇히게 되는 셈이니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야 했다.
그래서 마리안은 아스터와 상의한 끝에 베르트에게 부탁을 하나 하기로 했다.
“한동안 집에 못 가서 어머니와 동생이 걱정하고 있을 것 같아서요. 혹시 편지 한 통을 전달해 주실 수 있을까요?”
사실상 그 편지에는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 어머니와 동생이 연락도 없이 오지 않는 마리안을 걱정할까 봐 쓴 편지에 지나지 않았다.
단지 마리안이 집에 편지를 보냈다는 소식을 전해 받은 칼멘이 마리안이 무척이나 집에 가고 싶어 한다고 여겨줬으면 하는 바람은 있었다.
마리안은 베르트가 편지 전달은 자신의 권한 밖의 일이라고 거절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의외로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마침 그 근방을 지나갈 일이 있으니 남작 부인께 전달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아니, 별로 대단한 일도 아니니까요…….”
마리안이 진심으로 고마워하자 베르트는 조금 당황한 듯 보였다.
그러고 보면 베르트는 마리안이 엘리자를 구해준 사건 이래 마리안을 대하는 태도가 예전보다 훨씬 부드러워졌다.
원래 마리안은 베르트 역시 클로타르의 밑에서 아스터를 방치하고 방관하는 사람 중의 하나라고 생각해서 좋아하지 않았다. 대놓고 싫어하는 티를 낸 적은 없었지만 그렇다고 베르트에게 친근함을 느낀 적은 없었다.
하지만 최근에 베르트가 아스터의 열을 내리게 하려고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다 동원해서 애쓰는 데다, 태도마저 바뀌자 베르트를 다르게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베르트를 너무 미워하지 마, 마리.”
아스터는 마리안의 복잡한 심정을 깨닫자 지나가는 말로 그녀를 다독였다.
“어떻게 아스터는 베르트를 옹호할 수 있어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하는 마리안을 보며 아스터는 쓴웃음을 지었다.
“마리가 온 뒤로는 베르트가 덜 찾아오게 되었지만 그래도 전에는 베르트가 나를 돌봤으니까. 유모가 죽은 뒤에는 베르트야말로 그동안 내게 가장 신경을 많이 써준 사람인걸.”
“아스터가 너그러운 건지 무심한 건지 가끔은 잘 모르겠어요.”
마리안은 한숨을 쉬었다. 정말이지 가끔은 아스터가 사람이 너무 좋은 건지, 아니면 오히려 사람에게 관심이 전혀 없어서 이런 식으로 나오는 건지 알 수 없을 때가 있었다.
“베르트를 옹호할 생각은 없지만, 베르트 역시 클로타르의 명령을 거스를 수 없는 사람이잖아.”
“그렇긴 하지만…….”
마리안은 시선을 발끝으로 떨어뜨렸다.
베르트 역시 마리안처럼 어쩔 수 없이 아스터의 치료를 전담하게 되었다는 사실은 마리안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마리안은 처음 이 탑에 와서 빈사 상태의 아스터를 봤던 날을 죽을 때까지 잊을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때의 베르트는 너무나 차갑고 무심한 얼굴로 마리안에게 아스터를 맡기고 떠나버렸다.
지금에 와서는 마리안도 베르트가 의사로서 적절한 판단을 하고 자신에게 아스터를 맡겼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렇다 해도 아스터처럼 심하게 다친 사람을 태어나서 처음 본 데다, 아무런 의학 지식도 없어 당황해하는 자신에게 그런 식으로 막무가내로 맡기고 가버린 점은 영 탐탁지 않았다.
“괜찮아, 마리. 그래도 나쁜 사람은 아니잖아. 마리안에게 고맙다는 말도 했고.”
마리안이 그 말에 한 번 더 한숨을 쉬자 아스터는 그녀의 손을 붙잡고 마리안의 손등에 입을 맞추며 말했다.
“어쩌면 마리의 편이 되어줄 수도 있는 사람을 적대하지는 마. 우리 곁에는 안 그래도 믿을 수 있는 사람이 너무 없잖아. 베르트 같은 사람마저 적대하면 아무도 믿을 수가 없어져.”
마리안은 그 말에 깜짝 놀라 고개를 들고 아스터를 바라보았다.
“왜 그렇게 봐?”
아스터가 조금 겸연쩍은 얼굴을 해 보여서 마리안은 진심을 토로했다.
“요즘 들어 아스터가 가끔 낯설게 느껴질 때가 있어요. 그런 말을 할 줄은 몰랐어요.”
“내 말이 그렇게 이상했어?”
“그런 건 아닌데…….”
마리안이 눈을 깜빡였다. 그녀도 정확히 어떤 점에서 아스터를 낯설게 느끼는지 아직 잘 알지 못했다.
마리안이 당혹스러워하는 모습에 아스터는 그녀에게 얼굴을 기울여 마리안의 입술에 부드럽게 입을 맞췄다. 당장에라도 그녀를 끌어안고 마리안이 숨을 몰아쉴 때까지 키스하고 싶다고 생각하면서 아스터는 미소를 지었다.
“요즘 생각을 좀 바꿔보려고 해서 그런지도 모르지.”
“생각을 바꿔요?”
“응, 어딘가 먼 곳으로 도망가자는 마리의 제안을 거절하고 내 자리를 찾고 싶다고 말한 건 바로 나 자신이잖아.”
아스터는 열 때문에 평소보다 훨씬 뜨거운 손으로 마리안의 손을 붙잡은 채 말했다.
“내 자리를 찾아서 지키려면 지금 이대로여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했어. 내게는 정말로 믿을 수 있는 사람이 마리밖에 없어. 하지만 우리 둘만의 힘으로는 힘들 테니까.”
마리안은 비정상적으로 뜨거운 입술이 눈꺼풀에 닿는 감촉에 가만히 눈을 감았다.
“키스해 줘요, 아스터.”
마리안의 요구에 아스터는 마리안의 오뚝한 코와 부드러운 두 뺨에 입을 맞춘 뒤, 이번에는 그녀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 하지만 키스는 오래 이어지지 못했다.
아스터의 입술이 부드럽고 뜨거워서 더 자극적이었던 것과 별개로 마리안은 이마에 닿은 그의 체온과 등허리에 닿은 손이 뜨거운 것이 아무래도 마음에 걸렸다.
“열이 너무 오래 가네요.”
아스터의 이마를 다시 짚어보며 마리안은 걱정스러운 듯이 말했다.
아스터는 마리안이 떨어져 나가는 것이 못내 아쉬운 듯 입술을 핥았지만, 그로서도 괜히 무리를 했다가 마리안을 놀라게 하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에 참았다.
아스터의 열은 베르트가 새롭게 조제해 온 약을 먹으면 잠깐씩 내렸지만, 밤이 되면 다시 오르곤 했다. 벌써 한 달 반이 훌쩍 넘었다.
다행이라면 내내 고열이 지속되는 현상은 사라졌다는 점이었다. 그러나 발열 자체는 계속되었다.
자꾸만 열이 오르내리다 보니 아스터는 기력을 잃고 있었다. 입맛을 잃어 식사량도 형편없이 줄면서 살이 더 빠졌고, 체력이 떨어지다 보니 아무래도 멍하니 누워있는 시간이 길어졌다.
자꾸만 추위를 느끼는 탓에 아직 한겨울이 아닌데도 마리안은 열심히 난로에 장작을 던져 넣고, 그걸로도 모자라서 아스터에게 여러 겹으로 따뜻한 옷을 입혔다.
마리안은 한층 더 마르고 창백해진 아스터를 바라보기가 속상했지만 아스터의 눈빛은 시간이 갈수록 형형해졌다.
“마리, 좀 더 어깨에 기대도 돼?”
“물론이죠.”
그는 침대에 누워서 책을 읽으면서 마리안의 곁에서 떨어지려 하지 않았다.
마리안은 이제 중정을 산책할 때를 제외하면 하루의 대부분을 허름하고 비좁은 아스터의 침대에서 그와 같이 누워 함께 책을 읽었다.
아스터와 마리안이 읽는 책들은 주로 르샤베를 포함하여 오슬라 대륙 국가들의 역사와 문화에 대한 것이었다. 두 사람은 단순히 교양을 위해 책을 읽는 것이 아니라 어떤 해답을 찾기 위해 책을 읽고 연구했다.
시르안이 돌아간 날 밤, 아스터는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마리, 고마워.”
“뭐가요?”
뜬금없는 감사에 마침 잘 준비를 하며 아스터의 침대를 살피던 마리안이 의아한 얼굴을 했다.
“날 위해 애써주는 이 모든 것들 말이야. 그리고 마리가 블랑디르 백작에게 연락해 준 덕분에 시르안과도 만날 수 있었던 거잖아.”
“그거야…….”
마리안은 입을 다물었다. 베이퍼스 공작까지 아스터의 존재를 알고 그를 만나고 싶어 한다는 걸 보면 예상했던 것보다는 훨씬 일이 수월하게 풀린 셈이었다.
“저는 별로 한 게 없어요. 전 정치에 대해서 거의 모르는걸요. 단지 제 편이 되어줄 만한 사람을 찾았을 뿐이에요.”
“아니, 엄청난 일을 해준 거야. 나 혼자서는 이곳에서 벗어나겠다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을 테니까. 하지만 마리가 귀족연합과의 끈도 만들어줬잖아. 전부 마리 덕분이야.”
마리안은 그 말에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머리를 매만졌다.
“아스터의 말을 듣고 보니까 그래도 이럴 때만큼은 제가 귀족이라서 그나마 다행이라는 생각이 드네요.”
한창 어린 나이에 생계를 위해 평민들 사이에 섞여 온갖 일을 하고 났더니 도무지 귀족으로서의 자긍심 같은 것을 가질 수 없게 된 마리안이었다.
당장 끼니를 걱정하며 사는데, 하루에 적게는 수십 개에서 많게는 수백 개의 금화를 물처럼 쓰는 귀족들과 동질감을 느낄 수 있을 리 없었다.
마리안은 구름 위의 세계에서 사는 귀족들보다 열심히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평민들과 훨씬 가까워졌다. 그리고 마리안은 자신이 늘 접하는 평민들에게서 배우는 게 많았다.
“하지만 베이퍼스 공작이 아스터를 지지하게 하려면 아스터도 그 대가로 어떤 것을 내놓을 수 있는지 생각해야 할 거예요.”
“그래, 그렇겠지.”
마리안의 지적에 아스터는 고개를 끄덕였다.
마리안은 힘든 시절을 보내면서 세상에 결코 공짜가 없다는 사실을 배웠다. 이 세상은 만만하거나 상냥한 곳이 아니었고, 오히려 서로 물어뜯고 잡아먹는 약육강식의 세계였다.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는 어린 마리안은 평민들이 얕잡아 보는 우스운 존재였다. 그녀가 명문 알리체가의 여식이라는 사실은 당장 내일 먹을 빵을 살 돈을 벌어야 하는 마리안에게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다.
가문의 명성과 고귀한 신분이란 어디까지나 부와 권력을 지니고 있을 때만 빛을 발휘했다.
지금의 아스터도 마찬가지였다. 라베인 왕가의 숨겨진 왕자이며 신성력을 보유했다는 사실은 그 베이퍼스 공작이 호기심을 보일 정도로 엄청난 것이었지만, 그래도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다.
이미 클로타르는 국왕과 왕비의 비호 아래 굳건한 정치적 입지를 다진 지 오래였다. 클로타르의 곁에는 왕세자비의 집안인 에베르토 공작가가 있었고, 중앙 정계의 귀족들 태반이 그를 지지했다.
신성력을 사용하지 못한다는 사실이 알려진다고 해도 중앙의 귀족들은 자신들이 가진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모르쇠로 나올 가능성이 컸다.
“설령 베이퍼스 공작과 블랑디르 백작이 움직여 준다고 해도 다른 귀족연합의 가문들이 날 지지하리라는 보장은 없을 테니까. 나도 알아, 마리. 그게 현실이지.”
“그 귀족 가문들은 이미 중앙 정계에서 밀려난 지 꽤 오래되었으니까요.”
마리안의 할아버지 대에, 전쟁을 반대했다는 이유로 억울하게 중앙 정계에서 밀려난 직후라면 어떻게든 복권을 하려는 열망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후로 이미 오랜 세월이 지났다. 지금의 귀족연합 가문 중에는 세대가 바뀌면서 중앙 정계로 다시 진출하겠다는 꿈을 버린 채 적당히 가문을 유지하는 데만 관심을 보이는 이들도 많았다. 패배주의에 빠져 현재의 삶에 안주하게 된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현재의 국왕이 즉위하자 그나마 명맥을 유지하던 귀족연합의 가문들은 경제적 특권마저 상실하면서 형편이 더 나빠졌다. 마리안이 먹고사느라 바빠 다른 귀족들이 어떻게 사는지 관심 없었듯, 귀족연합의 가문들도 먼 왕성의 일에 신경을 쓸 여력이 없었다.
“어떤 보상을 줘야 그들을 움직일 수 있을지 생각해야 할 거예요.”
마리안의 말에 아스터는 고개를 끄덕였다. 심지어 자칫 잘못하면 멸문의 화를 입을 수도 있는 일에 그들이 나서게 해야 했다. 적절한 미끼가 필요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뭐든지 줘버릴 수도 없어.”
아스터는 제왕학을 배우지 않았는데도 자연스럽게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타고난 감각 덕분인지 아니면 제대로 교육받지 못했다고는 해도 제한된 상황 속에서나마 많은 책을 읽어왔기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다.
아스터는 귀족연합을 어떻게든 제 편으로 끌어들여야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을 통제할 수 없어지는 것을 원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정치적인 경험이나 연륜도 없고, 조언을 줄 만큼 경험이 풍부한 사람도 알지 못하는 아스터와 마리안으로서는 자신들만의 방법으로 어떻게든 해결책을 찾아야만 했다.
그래서 두 사람은 성채의 서재에서 찾아낼 수 있는 오슬란 대륙의 역사를 주의 깊게 살펴보고 있었다. 혹시나 도움이 될 만한 정보를 하나라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에서였다.
이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모래사장에서 바늘을 찾는 격인 데다 심지어 아스터는 열이 올라 머리가 멍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두 사람에게는 남아도는 것이 시간이었다. 그래서 아스터와 마리안은 좁다란 침대에 다정하게 누워 함께 책을 읽으며 그때그때 의견을 교환하고 있었다.
탁탁.
두 사람이 책을 읽다 지쳐 아스터가 마리안의 어깨에 머리를 기댄 채 잠들어 있고, 마리안이 다소 지친 얼굴로 『까칠한 공작님의 은밀한 초대』를 읽고 있을 때였다.
마리안은 몇 번이나 들어본 익숙한 소리에 깜짝 놀라 책을 떨어뜨리고는 아스터를 살짝 흔들어 깨웠다.
“아스터, 시르안이 온 것 같아요.”
시르안이 왔다는 소리에 아스터가 곧 눈을 떴다. 하지만 그는 잠에 취한 것인지 그것도 아니면 열 때문인지 꽤 몽롱해 보였다.
마리안은 그런 아스터의 상태가 신경 쓰여서 그의 어깨에 다시 한번 겉옷을 둘러준 다음 얼른 창가로 갔다.
탁탁.
마리안이 다가오는 모습에 예상대로 당근색 비둘기만 한 시르안이 반갑다는 듯이 날개로 창문을 두들겼다. 마리안은 활짝 웃으며 얼른 창문을 열고 시르안을 안으로 들어오게 했다.
창문을 아주 조금 여는 것만으로도 차가운 바람이 몰려들어 왔다. 마리안이 허둥지둥 창문을 닫는 동안 시르안은 방 안을 여전히 새의 모습으로 종종거리며 돌아다니다가 이내 난롯가로 다가가 사람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이 동네는 정말 엄청 춥네.”
시르안의 얼굴은 평소와 달리 파랗게 질려있었다.
“게이트를 통과한 다음부터 얼어 죽는 줄 알았어.”
“따뜻한 차를 한 잔 드릴게요.”
마리안은 시르안의 대답을 들을 새도 없이 난로에 올려놨던 주전자에서 물을 따라 차를 우렸다. 민트와 약간의 라카인을 섞어 만든 차였다.
“아, 고마워.”
마리안이 불쑥 내민 투박한 잔에 시르안은 조금 놀란 듯싶었지만 이내 차를 얌전히 받아 마셨다.
“혹시 입맛에 안 맞으시면…….”
마리안은 그가 조심스럽게 차를 마시고 있는 모습을 보자 그제야 시르안이 이런 민간에서 만드는 허브차 따위는 좋아하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괜찮아. 따뜻해서 엄청 좋아.”
시르안은 팔을 휘휘 내저어 보였다. 그는 정말로 추웠는지 얌전히 차 한 잔을 다 마신 뒤에야 간신히 난롯가 앞을 떠났다.
그러고는 침대에서 일어나려다 현기증으로 기대서 숨을 고르고 있던 아스터를 보며 혀를 쯧쯧 하고 찼다.
“상태가 많이 안 좋네.”
“아스터를 낫게 할 방법은 찾아보셨나요?”
마리안은 기대가 되기도 하고 걱정이 되기도 해서 물었다. 시르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의외로 신성력이랑 마나가 충돌을 좀 잘하는가 보더라고. 그런데 이게 사람별로 반응이 달라서 어떤 방법을 써야 낫는지는 알 수가 없어. 사례가 많기라도 해야 통계라도 내볼 텐데 신성력이랑 마나를 동시에 쓸 수 있는 사람은 진짜 대륙 전체에서도 손에 꼽을 만하거든.”
시르안은 그렇게 말하며 손을 뻗어 아스터의 이마를 짚었다.
“열이 이렇게 심했어?”
“요 며칠 계속 열이 오르락내리락하긴 했지만 이 정도는 아니었어요. 그런데 오늘 밤이 되면서 열이 많이 높아졌어요.”
마리안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사실 마리안은 아스터가 내내 힘없이 늘어져 있는 모습에 내색은 안 했지만 불안해서 미칠 지경이었다. 시르안은 그런 마리안의 마음을 읽었는지 가볍게 눈을 찡긋거려 보였다.
“일단 순서대로 하나씩 해보자. 그다지 까다롭지 않으면 좋겠는데. 마리안, 이리 좀 와봐.”
시르안이 손짓을 해서 마리안은 얼른 마법사의 곁으로 다가갔다.
“일단 왕자를 눕혀봐. 똑바로 누워서 두 손은 가슴에 모은 자세로. 그래, 그렇지.”
마리안이 아스터를 똑바로 눕히자 시르안은 옆에 앉아 눈을 감고 손을 뻗었다. 마리안은 시르안의 몸 주위에서 피어오르는 당근색의 불꽃을 경이로운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그러나 한동안 아스터의 가슴에 손을 얹고 눈을 감고 있던 시르안은 투덜거렸다.
“에이, 안 되네. 역시 단번에 될 리가 없는 건가.”
마리안은 긴장으로 침을 삼켰다. 그런 마리안의 마음을 알았는지 시르안이 마리안을 똑바로 쳐다봤다.
“이것저것 시도해 봐야 하니까 시간이 한참 걸릴 거야. 거기서 그렇게 숨넘어가는 얼굴로 지켜봐도 소용없으니까 너도 네 자리에 가서 누워서 쉬어. 부르면 오고.”
마리안은 시르안이 그녀를 생각해서 해주는 말임을 알고 고마운 마음이 들었지만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는 않았다. 아스터의 몸에서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데 어떻게 모른 척을 할 수 있겠는가.
그래서 마리안은 침대에서 뒤로 물러나서 조용히 앉아 지켜보기만 했다.
“쯧.”
시르안은 고집스럽게 아스터를 지켜보는 마리안이 못마땅한지 혀를 찼지만 그 이상으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뒤로 시르안은 정말로 이것저것을 시도하는 것 같았다. 푸른 불꽃이 번쩍하기도 하고, 안개 같은 연기가 피어오르기도 했다.
거의 두 시간에 걸쳐 뭔가 열심히 노력하던 시르안이 눈을 번쩍 뜨더니 점점 더 초조해져서 침만 삼키고 있는 마리안에게 말했다.
“거의 다 된 거 같아.”
“정말요?”
그동안 뭔지는 몰라도 전부 실패한 것 같았는데, 갑자기 거의 다 된 것 같다는 말에 마리안은 눈을 크게 떴다.
“좀 더 가까이 와. 보여줄 게 있어.”
마리안이 그 말에 가까이 가자 시르안은 품 안에서 뭔가를 꺼냈다.
마리안은 시르안이 꺼낸 것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작은 유리병에 이상한 색을 띠고 있는 액체가 담겨있었다. 시르안이 뭐라고 작게 중얼거리자 허공에서 유리병의 액체가 전부 들어갈 만한 또 다른 유리잔이 나타나서 마리안은 눈을 깜빡였다.
“저기, 이거는 내가 심술을 부리려는 게 아니라…….”
시르안은 드물게 주저하는 얼굴로 말했다.
“이걸 만드는 법을 책으로 출판한 놈이 성격이 많이 이상해서 사람을 시험하는 걸 좋아해. 그래서 말인데, 마리안이 이걸 아스터에게 먹여줬으면 좋겠어. 그, 저기 알지? 입으로 말이야.”
시르안은 마지막 말을 하고는 갑자기 곤혹스럽다는 표정을 했다.
마리안은 시르안이 내민 물약을 바라보았다.
정말로 괴상한 액체였다. 바닥을 닦은 걸레를 짠 물에 이끼가 낀 커다란 웅덩이에서 썩어가는 물을 떠 와서 섞으면 저런 색과 모양이 나올 것만 같았다.
보기만 해도 속이 울렁거릴 것 같은 액체였지만 마리안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망설임 없이 액체를 입 안에 머금었다.
지독히도 쓰고 역겨울 줄 알았는데 기묘하게도 그 액체는 입에 넣는 순간 무척 달콤하고 시원한 맛으로 변했다. 마리안은 놀라서 눈을 크게 떴지만 혹시라도 약을 흘리거나 그대로 삼켜버릴까 봐 얼른 아스터에게 먹였다.
아스터는 힘겨운 듯 눈을 감은 채 마리안이 주는 약을 받아먹은 뒤 잠시 후에야 간신히 눈을 떴다.
“아스터, 정신이 들어요?”
마리안이 그가 눈을 뜬 것을 보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아……. 마리안? 그리고 시르안도?”
아스터가 중얼거리며 눈을 깜빡이는데 시르안이 단호하게 말했다.
“일단 약부터 계속 먹여.”
마리안은 그 말에 유리잔을 바라봤다가 깜짝 놀랐다.
“시르안, 약이 변했는데요?”
그 안에는 처음 봤을 때의 괴이한 액체는 사라지고 달콤한 벌꿀 색의 물약이 담겨있었다. 마리안의 놀란 외침에 시르안은 심드렁하게 말했다.
“아까 말했잖아. 그 약의 제조법을 만든 놈이 성격이 많이 이상하다고. 약을 마실 자격이 있는지 여부를 시험한 건데 넌 그 시험에서 통과한 거야.”
“아…….”
마리안은 짧게 감탄을 흘렸지만 곧 망설이지 않고 남은 물약을 마저 아스터에게 먹였다.
“잘했어. 아스터, 좀 어때?”
“…잘은 모르겠는데 가슴 안쪽이 따뜻한 느낌이에요.”
“아, 그러면 제대로 약이 효과를 내는 거야. 자, 이제 마리안은 저쪽으로 가고, 넌 똑바로 앉아봐.”
시르안은 아스터를 바르게 앉힌 뒤 그의 등에 손을 얹었다.
“지금부터 네가 책에서 읽은 마나 운용법을 떠올리면서 내가 하라는 대로 해봐.”
그날 시르안은 무려 아침 해가 뜰 때까지 아스터를 가르쳤다.
“아, 이런. 해결될 듯 말 듯 해서 시간 가는 줄을 몰랐더니 그새 해가 떴네.”
하늘이 밝아오는 모습에 시르안은 눈살을 찌푸리더니 갑자기 마리안이나 아스터가 뭐라 말할 틈도 없이 새로 변했다.
“난 좀 자야겠어. 밤에 다시 올게. 아, 그래. 오후에 먹을 걸 좀 가지러 올 테니까 빵 한 개랑 아무거나 먹을 걸 좀 남겨줘. 많이는 필요 없어. 새 모습으로 있을 거니까 새가 먹을 정도면 돼.”
“기다려요, 시르안. 어디로 갈 건데요?”
“근처 나무에서 잘 거야.”
“그럴 바에는 여기서 쉬는 게 낫지 않아요? 푹신한 쿠션도 있고 난롯불도 따뜻해요. 밖은 매우 춥잖아요.”
그러자 시르안은 새의 모습을 하고 있으면서도 한눈에 보일 정도로 얼굴을 찡그렸다.
“나보고 너희 사이에서 종일 있으라고? 내가 왜? 싫은데?”
질색하며 대꾸한 그는 마리안에게 재촉했다.
“창문 열어줘.”
할 수 없이 마리안이 창문을 열자 시르안은 전날 밤에 그토록 춥다고 투덜거렸으면서도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날아가 버렸다.
“…날이 추워서 여기 있는 게 좋을 텐데.”
마리안은 그 모습을 지켜보며 안타깝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해서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그녀는 이내 아스터에게 돌아와 그를 지켜보았다.
“좀 어때요, 아스터?”
“가슴이 콱 막힌 것 같던 게 많이 줄었어. 열도 내렸고.”
“어머, 정말 그러네요.”
아스터의 이마에 손을 올린 마리안은 진심으로 기뻐했다.
“열이 내려서 그런지 머리가 멍한 게 많이 사라졌어.”
“다행이에요. 이건 전부 시르안 덕분이에요. 시르안에게 이따가 정말 감사하다고 말씀드려야겠어요.”
“그런데 그게 말이야, 마리.”
기뻐하는 마리에게 아스터가 다소 미묘한 얼굴로 말했다.
“머리가 맑아진 건 마리가 약을 먹여준 다음부터야.”
“그 마법 약이요?”
“그래.”
“정말 이상하고 신기한 약이었는데 그게 잘 들었나 보네요. 다행이에요. 약을 지어다 준 시르안이 정말 고맙네요.”
활짝 웃는 마리안을 보며 아스터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아스터는 머리가 내내 멍하고 열이 심해 전부 기억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시르안이 마리안에게 먼저 약을 입에 대게 하면서, 약을 마실 자격이 있는지를 시험한 거라고 말한 것은 분명히 기억하고 있었다.
아마 그 말대로라면 약효가 작용할 수 있었던 것은 전부 마리안의 공일 터였다. 그러나 아스터 본인도 제대로 알고 있는 게 아닌 데다, 잘못 말하면 약을 조제해 온 시르안의 노력과 배려를 무시하는 셈이라 그는 가만히 있었다.
하지만 시르안은 마리안과 아스터의 상식적인 생각을 초월하는 사람이었다.
“아, 그거?”
그날 밤, 시르안이 다시 찾아오자 마리안은 시르안에게 오늘 종일 아스터가 열이 나지 않았다면서 약을 만들어준 그에게 고마움을 표현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러나 시르안은 대수롭지 않다는 어조로 말했다.
“그건 네 덕이야.”
“저요? 제 덕이라고요? 제가 뭘 했는데요?”
이해하지 못해 눈을 깜빡이는 마리안을 보면서 시르안이 대답했다.
“내가 그 약의 조제법을 쓴 놈이 좀 이상하다고 했잖아. 그 약은 네 추측대로 마나가 잘못되어서 몸에 무리가 생겼을 때 그걸 풀어줄 수 있는 약이야. 그런데 약효가 생기려면 조건이 있는데, 사랑하는 사람이 입으로 먹여줘야 해.”
“…….”
당황한 나머지 시선을 교환하는 마리안과 아스터를 보며 시르안이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설마하니 내가 괜히 마리안에게 입으로 먹이라고 했겠어? 그건 누가 봐도 이상하잖아?”
“그야…….”
마리안은 말을 하다 얼버무렸다. 어제는 어떻게 해서든 아스터의 상태가 좋아져야 한다는 데 몰두해 있어서 그런 걸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더욱이 시르안의 요구가 갑작스럽긴 했지만, 그가 워낙 진지하게 아스터를 돌보고 있었기 때문에 이상하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던 것도 있었다.
“실제로 마법사들이 먹고서 효과를 봤다는 이야기는 거의 없어. 물약이 아무리 봐도 사람이 마실 만하게 생기지 않았잖아. 원래 마법사란 이기적인 족속들이라서 누군가를 사랑하기가 쉽지 않아.”
시르안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다들 성격이 그 모양이라서 연애 같은 걸 할 수 있는 확률이 매우 희박해. 괴상한 물약이라도 마셔서 기꺼이 상대를 살리겠다고 나서줄 만큼 이타적인 사람을 만나기란 더욱 힘든 노릇이지. 사실상 마법사에게 저건 있으나 마나 한 제조법이야.”
“아…….”
아스터는 시르안의 말에 당혹스러워하면서도 마리안을 바라보았다. 그의 황금빛 눈이 녹아내린 꿀처럼 감미롭게 마리안을 바라보고 있었다. 감사함과 기쁨, 그리고 애정이 듬뿍 담긴 시선에 마리안은 얼굴이 달아올랐다.
그러나 시르안은 아스터와 마리안 사이에서 오가는 시선 따위에는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았다.
“그 약이 알려진 계기도, 어떤 희생적인 어머니가 자기 자식을 구하려고 약을 입에 대면서 효과를 입증해서였어. 그리고 일반적인 연인 간에도 성공 사례가 극히 드물어. 따라서 그 고약한 물약을 제대로 쓸 수 있게 만든 사람은 어디까지나 마리안인 거지.”
마리안은 조금 고민하다가 물었다.
“만약 제가 그 약을 도저히 입에 댈 수 없다고 하면 어쩌려고 하셨어요?”
“어쩌긴, 다른 걸 도전해 봐야지. 사실 대부분의 사람은 아무리 상대를 사랑해도 그건 못 먹어. 한 모금 마시고 토하는 사람도 부지기수고. 그러니 그 약을 먹이지 못했다고 해서 잘못이라고는 할 수 없지. 애초에 만든 놈의 발상이 미친 건데. 따지고 보면 네가 좀 이상한 거야. 그러니 넌 저쪽으로 가. 어쨌든 열이 내렸으니까 다음 걸 해보자.”
시르안이 더는 귀찮다는 듯 물약에 대한 이야기를 끝내고 아스터의 상태를 돌보는 데 집중했기 때문에 마리안은 방해가 되지 않도록 조용히 물러났다.
사실 마리안은 그 약이 괴상해 보이긴 했지만 특별히 이상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일단 마법 약이라고 생각해서 일반적인 약과는 전혀 다를 거라 여겼다. 보기에 역겹기는 했지만 그것 역시 원래 그런 거려니 했다.
무엇보다 그녀는 시르안을 믿었다. 마리안도 아스터의 말을 들은 이래 주변에서 도와주는 사람을 좀 더 믿어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마리안은 시르안이 아스터를 대하는 모습에서 그의 진정성을 읽을 수 있었다.
재미있어서이든 이득이 있어서이든 간에 그는 아스터를 도울 요량으로 이 탑까지 찾아왔고, 귀찮음을 무릅쓰고 시간을 들여 아스터를 돕고 있었다. 시르안 같은 사람마저 믿지 못한다면 누구를 믿을 수 있겠는가.
마리안은 말없이 두 사람을 지켜보았다. 아스터는 시르안의 지도를 따라가려고 필사적이었다. 창백하기만 하던 얼굴에 혈색이 돌기 시작한 모습을 확인한 것만으로도 마리안은 한결 마음이 놓였다.
시르안이 그렇게 아스터를 가르치며 돌본 지 나흘이 지났다. 그리고 닷새째의 밤, 마리안은 결국 견디지 못하고 난롯가의 자신의 자리에 기대어 그대로 잠이 들고 말았다.
시르안은 한참 열심히 자신을 따라오던 아스터가 갑자기 집중력을 잃고 실수를 하자 의아한 얼굴로 그를 돌아보았다. 그러고는 아스터가 마리안을 넋 놓고 바라보고 있는 모습에 혀를 찼다.
“그렇게 좋냐?”
마리안을 바라보는 아스터의 눈이 어찌나 부드럽고 애정이 뚝뚝 떨어졌는지, 시르안은 신경 쓰지 말자고 생각하고 있었음에도 불쑥 내뱉고 말았다.
그러자 지금까지 아무리 힘들어도 내색하지 않았던 아스터가 처음으로 고개를 숙였다. 뺨이 조금 달아오르는 모습을 보며 시르안은 다시 혀를 차고 말았다.
아스터는 그런 시르안에게 겸연쩍게 웃어 보였다.
“마리가 많이 피곤한가 봐요. 사실 무리도 아니죠.”
아스터야 해가 뜨고 시르안이 쉬겠다고 가버리면 그때부터 잠을 잘 수 있었다.
그러나 마리안은 아스터의 세 끼 식사와 청소를 전담하는 것 외에도 그 밖의 필요한 물품을 나르느라 들락거리는 하인들을 만나야 했고, 베르트가 진찰을 하러 오면 베르트와도 대화를 나눠야 했다.
마리안 역시 중간중간 잠을 자면서 휴식을 취하긴 했지만 그래도 벌써 닷새나 밤낮이 바뀐 바람에 지칠 대로 지친 것이다.
무엇보다 아스터는 체내에 깃든 신성력 때문에 워낙 튼튼했지만, 마리안은 평범한 보통 사람에 지나지 않았으니 피곤하지 않을 리 없었다.
“저러다가 감기에 걸릴지도 모르겠네요. 제가 담요를 한 장 더 덮어주고 오겠습니다.”
아스터가 그렇게 말하면서 자리에서 일어서려 하자 시르안이 얼굴을 찡그리며 손을 가볍게 펼치고 작게 중얼거렸다. 그러자 창가 의자에 곱게 접혀 걸려있던 담요가 저절로 휙 날아가 마리안의 몸을 부드럽게 감쌌다.
자리에서 일어선 아스터가 다소 허탈한 표정으로 시르안을 한 번 돌아봤지만 시르안은 태연했다.
“왜? 뭐? 넌 하던 거나 다시 해봐. 아까 제대로 한 게 아니잖아. 촛불 다섯 개, 다시 동시에 켜봐.”
별수 없이 아스터는 자리에 도로 앉아 시르안의 가르침대로 마나를 다루는 법을 익히려고 노력했다.
처음에는 배우는 속도가 더뎠지만 아스터는 시르안이 예상했던 것보다는 훨씬 빠르게 마나의 원리를 깨우쳤고 적용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아직 갈 길은 멀기만 했다.
“넌 확실히 마법에 상당한 재능이 있어. 마나를 빨리 쌓은 것도 그 때문이야. 네가 마나를 잘못 쌓은 건 아니야. 일반적으로 마법을 배우는 사람들이 너같이 시작했으면 오히려 천재 소리를 들었을 거야.”
시르안은 아스터가 다시 불꽃을 일으켜 양초 다섯 개에 동시에 불을 붙이는 모습을 확인하면서 말했다. 그러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는 분명하게 알 것 같아. 문제는 네 신성력이야. 신성력이 넘치니까 마나를 써야 하는 곳에 너도 모르게 신성력을 쓰려고 해. 그래서 자꾸만 충돌이 일어나는 거야. 거봐, 지금도 식은땀을 흘리고 있잖아. 호흡도 거칠어졌어.”
시르안의 지적에 아스터는 이마에 맺힌 땀을 닦으며 수긍했다.
“말씀하신 대로인 것 같습니다.”
“지금이야 간단한 마법 주문을 쓰다가 충돌이 일어나는 정도니까 열이 좀 나거나 몸이 약간 아픈 정도로 끝나지만 만에 하나라도 큰 힘을 쓰려고 하면 그때는 감당할 수 없게 될 거야. 그대로 쓰러져 죽으면 오히려 다행이고 그보다 훨씬 고통스러운 상태가 될지도 몰라.”
“그럼 어떻게 해야 합니까?”
아스터는 담담하게 물었다.
“방법은 의외로 간단해. 하지만 쉽지는 않아.”
시르안은 잠들어 있는 마리안을 한 번 살피고는 좀 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한 번 몸 안에 쌓은 마나를 강제로 폐기해 버리는 방법이 있지. 하지만 이 경우에는 폐인이 될 각오를 해야 할 거야. 그게 아니면 신성력을 폐기하는 법도 있는데, 그건 너한테는 불가능한 일이고…….”
아스터는 말없이 시르안을 바라보았다. 계속 말해달라는 의미였다.
“마지막으로는 가장 힘들지만 안전하고 확실한 방법인데, 제대로 마나를 쓸 수 있을 때까지 훈련하는 거야. 마치 오른손으로 글을 쓰고 그림도 그렸는데 어느 날 갑자기 왼손으로 해야 하게 된 것과 마찬가지야. 익숙해질 때까지 끊임없이 반복해서, 어느 순간 네가 의식하지 않았는데도 자연스럽게 신성력을 제어하고 마나를 끌어낼 수 있으면 성공하는 거지.”
아스터는 잠자코 생각에 잠겨있었다.
“결국은 기초 마법을 계속 써보는 수밖에 없군요.”
“그래, 바로 그거야.”
시르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넌 신성력을 자연스럽게 습득하고 써왔어. 그래서 자기도 모르게 쓰기 쉽고 편한 힘을 쓰려고 하는 거니까, 자꾸 마나를 써보는 수밖에 없어. 어린아이들이 마법을 처음 배울 때 한 가지 기초 마법을 몇천 번씩 연습하게 하는 거랑 비슷해.”
“알겠습니다.”
아스터는 고개를 끄덕였다.
“도와주셔서 정말로 감사합니다.”
“아직 감사받을 정도는 아니야. 계속 연습이나 해.”
시르안이 뚱한 얼굴로 무뚝뚝하게 대답해서 아스터는 그만 피식 웃고 말았다. 하지만 그는 이내 정신을 가다듬고 다시 연습에 몰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