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탑에 갇힌 왕자님-15화 (15/24)

15장 반복되는 지옥 그리고 희망

마리안은 자칫 얼굴을 찡그려 속마음을 드러내지 않으려고 필사적으로 노력했다.

‘여기서 티를 내면 안 돼. 절대 안 돼, 마리안 알리체.’

그녀는 몇 번이나 자기 자신에게 그렇게 되뇌었다.

“불쌍한 마리안. 왜 이렇게 떨고 있는 거야. 그렇게 내가 무서워?”

그러나 클로타르는 분노를 주체하지 못해 몸을 떨고 있는 마리안의 모습을 전혀 다르게 해석한 듯싶었다.

마리안이 대답하지 않자 클로타르가 인상을 찡그렸다.

“내가 두 번 묻게 하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죄, 죄송합니다.”

마리안은 고개를 숙였다.

“이래서 예의를 모르는 촌것들은……. 그래도 가끔은 네가 소심해서 다행스럽다 싶긴 해. 주제도 모르고 나대는 것들은 상대하기에도 골치 아프고 머리가 아파서 말이야. 네가 지금처럼 내가 무섭다는 걸 잘 알고 행동하면 우리가 서로 얼굴 붉힐 일은 없을 테니까.”

클로타르는 뭐가 즐거운지 킬킬대며 웃고는 뒤편에 서있던 로브를 걸친 여자에게 손짓했다. 그러자 가운데 서있던 여인이 가까이 다가왔다.

마리안은 그제야 그 여인이 짙은 남색 옷을 입고 있는 노부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녀가 로브를 벗자, 하얗게 센 머리를 우아하게 틀어 올린 깡마른 여인이 나타났다. 트레샤나 부인이 엄격하고 깐깐해 보인다면 노부인에게서는 범상치 않은 위엄이 느껴졌다.

“인사해, 마리. 내 유모인 소르엔 부인이야.”

“처음 뵙겠습니다, 알리체 영애. 그리안 소르엔이라고 합니다.”

노부인은 살아있는 궁중 예법의 교본처럼 우아하게 인사했다. 마치 물이 흐르듯 자연스럽고 아름다운 완벽한 인사였다.

“마리안 알리체입니다. 처음 뵙겠습니다.”

마리안은 당황해서 얼른 고개를 숙였다.

클로타르가 어째서 유모까지 대동하고 찾아왔는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러나 그녀의 의문은 곧 풀렸다.

“자, 그럼 난 이만 가봐야겠어. 백작 부인의 여명이 얼마 남지 않은 듯해서 오늘은 빨리 끝내고 가야 하거든. 백작 부인께서 지금 돌아가시면 곤란해서 말이야. 그동안 유모가 너에게 할 말이 있을 거야. 그럼 마리, 다음에 봐.”

클로타르는 가벼운 어조로 말하고는 역시나 우아한 걸음걸이로 방을 나갔다.

마리안은 침을 삼켰다. 소르엔 부인이 새파란 눈동자로 그녀를 직시하고 있었다.

“알리체 영애, 클로타르 저하로부터 영애에 관한 이야기를 여러 번 들었습니다.”

소르엔 부인은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하며 마리안에게 한 걸음 다가왔다.

마리안은 클로타르가 가까이 다가올 때처럼 공포를 느꼈다. 미소를 지으며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부드럽게 말하고 있지만 소르엔 부인의 눈은 전혀 웃고 있지 않았다. 그 모습이 판에 박은 듯이 클로타르와 똑같았다.

“영애를 만나서 반가워요. 한참 전부터 영애를 만나보고 싶었죠. 영애의 얼굴을 좀 더 자세히 볼 수 있게 해주겠어요?”

그녀는 한 걸음 더 다가와서는 마리안을 향해 손을 뻗었다. 마리안은 자기도 모르게 그녀의 손을 탁 쳐버릴 뻔한 것을 간신히 참아냈다.

소르엔 부인은 클로타르가 그랬던 것처럼 마리안의 턱을 쥐고 고개를 양옆으로 돌리며 그녀의 얼굴을 살폈다.

“스물두 살이라고 들었는데 맞나요?”

“…네.”

“정말로 비 저하의 특징적인 부분을 많이 닮았군요. 검은 머리카락도 윤기가 있고, 피부도 매끈하고 좋네요. 그 깊어 보이는 푸른 눈도 그렇고요.”

소르엔 부인은 고개까지 끄덕이며 마리안의 얼굴을 품평했다.

“더욱이 어딘가 고전적인 우아한 느낌이 있어서 좋군요. 비 저하에 비견될 만큼 눈에 띄게 아름다운 용모는 아니지만 당신 정도의 얼굴이라면 저하의 후계자가 될 아이를 낳아도 그런대로 괜찮을 것 같군요.”

마리안은 소름이 끼쳤다. 지금 소르엔 부인은 마리안에게 왕손을 낳게 할 생각으로 찾아온 것이다.

“칼멘 후작님과 저하께 말씀을 듣긴 했지만 이런 건 제대로 확인을 해야 하는 법이니까요. 이런 말을 하긴 그렇지만 남자분들은 꼼꼼하게 일을 하시는 편이 아니거든요.”

소르엔 부인은 입가를 가리고 작게 웃었다.

“남자분들이니 외모는 어련히 알아서 잘 고르셨겠지만 좀 더 확인해야 할 부분이 있어요. 이를 테면 당신이 건강한 왕손을 출산할 수 있는지 따져봐야겠죠.”

말을 마친 소르엔 부인이 눈짓하자 지금까지 조용히 뒤에 서있던 로브를 입은 여자 둘이 마리안에게 다가왔다.

“무, 무슨 짓을 하는 거예요?”

“이들은 저하의 궁전에서 일하는 시녀들입니다. 아주 간단한 검사를 하는 것뿐이니 얌전히 있도록 해요.”

시녀 둘은 체구가 작고 가늘었는데도 힘이 무지막지하게 강했다. 그녀들이 양쪽에서 마리안을 붙잡자 마리안은 발버둥조차 칠 수 없었다.

“이, 이거 놔요.”

마리안은 공포와 혐오감에 질려 소리쳤지만 그녀의 외침은 곧 잠잠해졌다. 소르엔 부인이 마리안의 입 안에 손수건을 쑤셔 넣은 것이다.

“이런, 목청껏 소리 지르는 걸 보면 당신이 건강하다는 건 바로 알겠군요.”

고개를 절레절레 저어 보인 소르엔 부인은 당연하다는 얼굴로 마리안의 옷을 벗겼다. 마리안은 분노와 수치심에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지만 소르엔 부인이 그녀의 몸을 만져보고 확인하는 것을 막을 길이 없었다.

클로타르에게서 왕손을 낳으라는 말을 들었을 때부터 모멸감을 느끼긴 했지만 이런 일까지 겪게 될 줄은 꿈에도 생각 못 했던 마리안이었다.

이들은 정말로 마리안을 종마의 번식을 위해 데려온 암말쯤으로 여기고 있는 것 같았다. 하긴 아스터조차 종마처럼 대하고 있는데 마리안을 인격적으로 대할 리가 없었다.

“읏!”

하지만 소르엔 부인이 장갑 낀 손으로 밀부에 손가락을 밀어 넣어 안쪽을 확인하자 마리안은 끝내 참지 못하고 눈물을 흘렸다.

소르엔 부인은 마리안이 눈물을 뚝뚝 흘리는 모습을 보면서도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골반의 크기도 적당하고 아래도 깨끗하군요. 혹시라도 성병에 걸렸거나 성기가 기형이라거나 하는 문제가 있을까 봐 염려해서 살펴본 거니 그렇게 울지 말아요. 다 당신을 위한 거니까. 출산 중에 잘못해서 죽기라도 하면 여러 사람이 곤란하잖아요?”

그녀의 말투는 정말로 비싼 돈을 들여 교배한 암말이 도중에 죽기라도 하면 아까워서 어떻게 하냐고 말하는 듯했다.

검사가 끝났다며 소르엔 부인이 다시 손짓하자 시녀들이 마리안을 놓아주었다.

마리안은 입 안에 들어간 손수건을 뱉고 덜덜 떨리는 손으로 옷을 입었다. 눈물이 자꾸만 흘러나오는 것에 참을 수 없이 화가 났다.

이런 상황에서는 아스터처럼 말없이 노려봐야 하는데, 어째서인지 자꾸만 눈물이 났다. 그 눈물이 마치 자신이 얼마나 나약한지를 알려주는 것 같아서 마리안은 울화가 치밀었다.

“자, 당신에게 이걸 줄게요. 아주 귀중한 약이니 잘 다루도록 해요. 대대로 왕가에서 왕비 전하에게만 진상하는 약이거든요.”

소르엔 부인은 마리안이 잘 볼 수 있도록 피처럼 붉은색으로 된 물약 병을 흔들어 보이고는 그것을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그녀는 이어서 성인의 엄지만 한 섬세하게 세공된 작은 유리잔을 꺼내 그 옆에 놓았다.

“매일 이 잔으로 자기 전에 한 컵씩 약을 먹도록 해요. 이 약은 여자의 몸을 건강하게 만들어서 아이를 가지기 좋게 해주니까요. 이 약을 다 먹고 나면 보통은 두 달 안에 임신할 수 있어요. 당신은 아직 젊지만 아스터 님과 이미 여러 번 관계를 했을 텐데도 아직 임신하지 못했으니까요. 앞으로의 일을 생각하면 약을 먹고 하루 빨리 아기를 낳기 좋은 몸을 만들어두는 게 좋겠죠.”

소르엔 부인은 마리안의 대답조차 듣지 않은 채 부드럽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오늘은 초면에 실례가 많았어요, 알리체 영애. 부끄럽고 괴로웠겠지만 머리의 열기가 식으면 이게 다 당신을 위해서 한 일이라는 걸 이해하게 될 거예요. 당신이 클로타르 저하의 협조자가 되겠다고 스스로 말한 만큼 신의를 지키도록 하세요. 자, 영애. 대답을 해야지요?”

어쩜 이 여자는 이렇게 소름이 끼치도록 클로타르와 똑같이 말할 수 있는 걸까.

그런 생각을 하던 마리안은 자신이 전후 관계를 잘못 짚었다는 사실을 바로 깨달았다. 이 여자를 유모로 두고 자랐기 때문에 클로타르가 그처럼 소름 끼치는 인간이 되었을 것이다.

“…명심하겠습니다.”

마리안이 잔뜩 갈라진 목소리로 간신히 대답하자 소르엔 부인은 그제야 만족스럽다는 듯 미소 지었다.

“그리고 이건 저하께서 내리시는 성의 표현이에요. 이번에 당신에게 연달아 간병을 하게 만든 보상이죠. 이걸 받고 저하께서 얼마나 관대한 분이신지 가슴속에 잘 새기도록 해요.”

그녀는 한눈에 보기에도 묵직해 보이는 돈주머니를 품에서 꺼내어 약병 옆에 놓았다.

“그럼 이제 잠시 쉬도록 해요. 조금 지나면 당신이 돌봐야 할 아스터 님이 돌아올 테니까.”

소르엔 부인은 다정하게 말한 뒤, 마리안의 어깨를 손으로 한 번 짚고는 방을 나섰다. 곧 시녀들이 묵묵히 그 뒤를 따라 나갔다.

마리안은 온몸이 부들부들 떨려서 그대로 무너지듯 바닥에 주저앉았다. 눈물이 바닥 위로 툭툭 떨어져 내려서 마리안은 이를 악물었다.

“이건 아무것도 아니야.”

스스로에게 들려주기 위해 마리안은 소리를 내어 말했지만 목소리는 형편없이 갈라져 있었다.

“괜찮아. 아스터가 당하는 일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잖아, 이런 거.”

하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전혀 괜찮지가 않았다.

마리안은 결국 두 손으로 입을 막고 한참을 그렇게 숨죽여 울었다. 아무리 울어도 가슴속에 맺힌 분노가 풀리지 않았다.

* * *

아스터는 소르엔 부인이 떠나고 40분쯤 지난 뒤에야 기사들에게 이끌려 돌아왔다. 마리안은 울어서 눈과 코가 아직 새빨갛게 충혈된 채 아스터가 침대 위에 눕혀지는 모습을 보았다.

아스터는 의식이 없었다.

클로타르의 빨리 끝낸다는 말은 평소와 달리 적당히 봐주겠다는 말이 아니라 단시간 내에 반죽음 상태로 만든다는 뜻이었음을 깨닫고 마리안은 입술을 깨물었다.

따끔한 느낌에 자기도 모르게 손가락을 입술에 대본 마리안은 실제로 피가 나고 있는 것을 보고 허탈해서 헛웃음을 짓고 말았다.

기사들이 나가자 하인들이 알아서 뜨거운 물과 수건을 가져왔다.

마리안은 넋이 나간 얼굴을 한 채 기계적으로 움직였다. 피에 젖어 넝마가 된 아스터의 옷을 벗겨내고 상처를 닦았다.

방 안에는 피 냄새가 진동했다. 아스터의 얼굴이 핏기 하나 없이 새하얗게 되어있는 것을 보며 마리안은 이를 갈았다.

상처를 닦은 수건을 뜨거운 물에 담그자 핏물이 배어 나오는 것을 보면서 그녀는 살인 충동을 느꼈다. 진심으로 클로타르를 그리고 소르엔 부인을 죽이고 싶었다. 그냥 죽이는 것도 아니고 온갖 고초를 당한 끝에 비참하게 죽게 만들고 싶었다.

“이런 짓을 저지르는 인간들이 어째서 멀쩡하게 사는 거지?”

웃는 얼굴로 이런 끔찍한 일을 자행하는 인간들이 왜 아무런 벌도 받지 않는 것인지 마리안으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마리안은 베르트가 오지 않을까 기다려 보았지만 예상과 달리 의사는 오지 않았다. 아마도 클로타르가 갑작스럽게 오게 되어서 베르트에게는 연락이 닿지 못한 것 같았다.

“개자식.”

클로타르를 잠시 떠올린 순간 마리안은 자기도 모르게 욕설을 내뱉고 말았다. 하지만 아무리 욕설을 퍼부어도 답답한 속이 풀리는 일은 없었다.

마리안은 응급처치를 하고 아스터의 이마에 손을 대보았다. 열이 나고 있었다.

그녀는 억지로라도 마음을 다잡으려고 애를 쓰며 베르트가 전에 주고 갔던 약을 찾아와 아스터에게 먹였다. 피딱지가 내려앉은 부르튼 입술에 약을 발라주고, 열기로 뜨끈한 아스터의 손을 잡았다.

아침이 되면 베르트가 올 것이다. 아스터가 치료를 받고 며칠이 지나면 이 또한 흘러가는 일이 되리라는 사실을 마리안은 잘 알고 있었다.

이미 석 달이나 이곳에서 왕세자가 저지르는 이 미친 짓거리를 목격했던 마리안이었다. 그러나 오늘만큼은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그녀의 몸을 무례하게 더듬으며 품평하던 소르엔 부인과 내내 가벼운 어투로 말하며 웃고 있던 클로타르를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속이 뒤집힐 것 같았다.

무엇보다 창백한 얼굴로 죽은 듯이 누워있는 아스터를 보고 있으면 화가 나서 견딜 수가 없었다. 분하고 원통하고 억울하고 슬퍼서 마리안은 아스터의 손을 잡은 채 다시 눈물을 흘렸다.

악몽 같은 밤이 계속 이어졌다. 마리안은 울다 지쳐 잠들었다가 아스터의 신음에 놀라 깨어나 그의 상태를 확인하고는 다시 울다 지쳐 잠들기를 반복했다.

얼마나 울었는지 눈이 심하게 부어서 눈을 떠도 뜬 것 같지 않은 기분이 들었다. 눈이 따갑고 화끈거려서 괴로웠다.

잠을 자는 것도 아니고 깬 것도 아닌 그런 상태로 마리안이 넋이 나가 멍하니 있는 동안에도 시간은 착실히 흘러갔다.

긴긴밤이 끝나고 어느덧 동편 하늘에서는 해가 떠오르고 있었다.

마리안은 멍한 눈으로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또 다른 하루가 시작되었다는 사실을 좀처럼 믿을 수 없었다. 오늘 하루도 지옥일 게 뻔한데, 새롭게 뜨는 해가 원망스럽기까지 했다.

마리안이 그런 생각을 하며 멍하니 있을 때, 남쪽으로 나있는 작은 창에 탁탁하고 무언가가 부딪치는 소리가 들렸다. 마리안은 소리가 난 쪽을 돌아보았다.

탁탁.

소리는 꽤나 규칙적으로 들렸다. 하지만 마리안은 소리를 들어도 그 소리가 귀에 잘 들어오지 않는 상태였다. 이런 높은 꼭대기 층의 탑에 규칙적으로 창문을 두드리는 소리 따위가 들릴 리 없었다.

‘환청인가…….’

마리안은 자조적으로 웃었다. 자신이 지금 제정신이 아니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지만 환청까지 들릴 줄은 몰랐다.

그러나 그 탁탁 부딪치는 소리는 계속되었다.

마리안은 미간을 찡그렸다. 작은 소리이긴 하지만 신경이 날카롭게 곤두서서 매우 거슬렸다.

결국 그녀는 견디지 못하고 자리에서 일어나 창문으로 다가갔다. 아무것도 없다는 걸 확인하고 나면 환청이 조금 사라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였다.

그러나 창가로 간 마리안은 놀라서 눈을 크게 떴다. 주황색 새로 변신한 시르안이 날개를 파닥거리며 창문을 두들기고 있었다.

마리안이 정신없이 창문을 열자 새가 안으로 들어왔다.

“아, 뭐야. 왜 이렇게 문을 안 열어? 제 자리에서 날갯짓하는 게 얼마나 힘든지 알기나 해? 안 그래도 네가 열어주지 않으면 들어갈 수가 없는데!”

온 방 안을 날아다니며 조그만 새의 몸으로 소리를 질러대던 시르안의 움직임이 딱 멎었다. 작은 새는 빠르게 날아올라 마리안의 눈높이에서 멈춰선 채 날갯짓을 했다.

“너 울었어?”

엉망으로 부어있는 마리안의 얼굴을 보면서 새는 조금 당혹스러운 듯 물었다.

마리안이 대답하는 대신 고개를 끄덕이자 주황색 새는 천천히 바닥에 내려앉았다. 곧이어 새의 형체가 녹아드는가 싶더니 시르안이 본래의 모습으로 나타났다.

“쯧, 얼굴이 그게 뭐야. 완전히 엉망으로 부었잖아.”

마리안의 얼굴을 보며 혀를 차던 시르안은 침대에 엎드려 누운 채 의식을 잃은 아스터를 그제야 발견하고는 입을 다물었다. 그의 눈에도 마리안이 감아놓은 붕대 위로 붉은 피와 진물이 배어 올라온 상처가 들어왔다.

“아스터 라베인이지?”

마리안이 여전히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자 시르안은 얼굴을 찌푸렸다.

“정말로 클로타르랑 똑같이 생겼네. 와, 진짜 심하다. 등짝을 아주 걸레짝으로 만들어놨어. 어떻게 이런 짓을 할 수가 있지?”

마리안은 고개를 푹 숙였다. 시르안의 말 한마디에 갑자기 눈물이 차올랐던 것이다.

흐느끼는 마리안을 보며 시르안은 혀를 찼다.

“왜 또 울어. 울지 마, 뚝! 네 말대로라면 처음 보는 것도 아니잖아.”

그 말에 마리안은 가슴속에서 응어리가 북받쳐 올라오는 것을 느꼈다.

“…참…겠…어요.”

“응? 방금 뭐라고 했어?”

마리안이 울면서 하는 말을 알아듣지 못한 시르안이 의아한 얼굴로 되묻자 마리안은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말했다.

“도저히 못 참겠다고요. 이대로는 정말이지 미쳐버릴 것 같아요.”

서러움이 폭발한 마리안은 울면서 소리쳤다. 밤새 울어서 더는 나올 눈물도 없다고 생각했는데 눈물은 계속해서 흘러넘쳤다.

정말로 미칠 것 같았다. 그녀가 이곳에서 당한 인격적인 모독은 차치하고서라도 누구보다 소중한 아스터가 이토록 고통스러워하고 있는데도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마리안은 벌써 석 달이 지나도록 자신이 단 한 번도 클로타르를 막아낼 수 없었다는 사실이 너무나 괴로웠다. 그녀는 그저 이 모든 상황을 지켜보는 사람에 지나지 않았다.

“나도 클로타르나 그 사람들과 똑같잖아요. 아스터를 이토록 학대하는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방관만 하고 있다고요. 그런 나 자신이 소름 끼치도록 싫어서 정말로 미칠 것만 같아요.”

마리안의 절규에 시르안은 입을 딱 벌렸다.

“어, 음.”

그는 당혹스러운 얼굴로 눈을 깜빡였다.

“네가 왜 클로타르랑 똑같다는 거야. 네가 얘 등짝을 이렇게 만들었어? 아니잖아.”

마리안은 우느라 정신이 없어서 시르안의 말을 귀담아듣지 않았다.

시르안은 난처한 얼굴로 마리안을 바라보다가 그녀가 이제 딸꾹질까지 하며 울자 한숨을 푹 쉬었다. 그는 방 안을 둘러본 뒤 컵에 물을 따라와서 마리안에게 건네주었다.

“자, 이거 마셔. 쉬지 말고 단번에 마셔.”

시르안이 마리안의 손에 강제로 물컵을 쥐여주자 마리안은 울면서 물을 마시기 시작했다. 마리안은 한 번에 물을 마시려고 노력했지만 중간에 딸꾹질이 다시 나오는 바람에 그만 사레가 들리고 말았다.

“어이구.”

마리안이 가슴을 움켜쥔 채 콜록거리자 시르안은 다시 한숨을 쉬고는 그녀의 곁에 다가가 등을 쓸어주었다.

“자자, 진정. 진정해, 아가씨.”

가슴을 찌르는 듯한 통증에 한동안 고통스럽게 기침하던 마리안이 간신히 진정하자 시르안은 이번에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러고는 마리안의 얼굴에 손을 뻗었다.

“얼굴이 이게 뭐야. 다 큰 어른이 애도 아니고.”

순간 마리안은 시원한 기운이 퍼져나가는 것을 느끼며 눈을 감았다. 다시 눈을 떴을 때는 얼굴 전체를 화끈거리게 하던 열감이 사라진 뒤였다.

“이제 좀 낫네.”

시르안의 말에서 잔뜩 부은 얼굴이 가라앉았다는 사실을 깨달은 마리안은 그의 팔을 붙잡았다.

“방금 그건 치유 마법인가요?”

“그런 거창한 건 아니야.”

“치유 마법을 쓸 수 있다면 아스터를 치료해 주세요. 제발 부탁이에요.”

그러나 시르안은 마리안의 팔을 떼어내며 냉정하게 말했다.

“정신 차려, 아가씨. 내 치유 마법은 이런 상처는 낫게 하지 못해. 설령 그게 가능하다고 해도 내가 클로타르의 쌍둥이 형제에게 치유 마법을 걸면 사람들이 알아차리잖아. 안타깝지만 저 상태로 내버려 둬야 해.”

마리안이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표정을 지어 보여서 시르안은 헛기침을 했다. 당연한 말을 했을 뿐인데 어쩐지 마리안을 괴롭히는 기분이 들었던 탓이다.

“어쨌든 내가 찾아온 이유를 이야기해 줄게. 이제는 정신이 좀 들었지?”

마리안의 눈은 아직 흔들리고 있었다. 하지만 마리안은 주먹을 꼭 쥐고 입술을 깨물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시르안은 그 모습을 보며 입을 열었다.

“마티아스가 네가 말한 이야기가 사실인지 확인해 보고 네가 있는 성채를 찾아내라고 해서 왔어. 일단 네 말이 모두 사실이라는 건 이것으로 입증이 되었으니 마티아스는 아마 널 도와줄 거야.”

마리안은 그 말에 벌떡 몸을 일으켰다.

“정말인가요?”

이렇게 사는 하루하루가 너무나 지옥 같다고 생각했는데 갑자기 희망이 보인 기분이었다.

마리안이 눈을 반짝이자 시르안은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블랑디르 가문의 앞날도 그리 창창하지는 못해서 말이야. 귀족연합에 속했던 가문들이 알리체가만큼은 아니어도 다들 힘들거든. 이 기회를 놓치려 하지 않을 거야. 정치란 원래 그런 거니까.”

현재의 국왕은 아스터에게는 부모라고도 할 수 없는 무정한 방관자에 지나지 않았지만 실정자로서는 상당히 합리적이고 영리했다. 그는 각 귀족들의 권력을 적절히 통제해서 왕권을 강화했고, 그런대로 선정을 베풀어 백성들의 지지도 매우 높았다.

선대 국왕에 의해 중앙 정계에서 배제된 귀족연합의 가문들은 마리안이 제시한 기회를 놓친다면 두 번 다시 예전의 세력을 회복하기 힘들다는 사실을 바로 깨달았다.

특히 지금의 국왕과 정치적으로 견해가 같은 클로타르가 왕권을 계승하면 그들의 정계 복귀는 불가능에 가까워질 터였다.

“다행이에요.”

마리안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마리안은 이 귀족연합이 전적으로 아스터에게 충성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들은 다루기 매우 까다로운 존재였고, 훗날 아스터에게도 심각한 골칫덩이가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금으로서는 아스터를 지지해 줄 수 있는 귀족이 절실하게 필요했다. 아스터가 홀로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는 것만으로는 지지받을 수 없다는 건 정치에 문외한인 마리안도 잘 알고 있었다.

“네가 어디에 있는지도 알았으니까 앞으로는 종종 찾아올게. 대신에 내가 문을 두들기면 반드시 문을 열어줘야 해. 대단한 건 아니지만 이 성채에도 보호 마법이 걸려있어서 안에 있는 사람이 입구를 만들어주지 않으면 들어오기 까다롭거든.”

“네, 알겠어요.”

마리안은 시르안이 찾아오겠다는 이야기에 마음이 놓였다.

“그런데 여기는 대체 어디인 거죠? 절 어떻게 찾아내신 거예요?”

“여긴 쿠르스 산맥 근처야. 왕성에서 한참 떨어진 북방 지역이지. 네 짐작대로 게이트를 탄 게 맞았어. 네가 여기로 돌아오던 날 네가 탄 마차를 따라가다가 중간에 게이트에서 놓치는 바람에 왕궁에서 줄곧 서성거리고 있었거든.”

시르안이 씨익 웃었다.

“클로타르를 주시하면 뭐라도 실마리가 잡힐 거라 생각했는데 오늘 당장 여기로 올 줄은 몰랐지 뭐야.”

“그랬군요.”

마리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이곳은 짐작했던 대로 북방 지역이었다. 왕성은 한여름이지만 이곳은 여전히 서늘한 기온을 유지하고 있었고, 밤이 되면 꽤 싸늘하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일단 위치를 알았으니까 너무 걱정 마. 네가 어딨는지 알았으니 앞으로는 연락을 주고받기가 훨씬 수월해질 거야.”

“네, 감사합니다.”

마리안은 진심으로 시르안에게 고마워했다. 더 이상 어딘지 알 수도 없는 곳에 홀로 고립된 게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그럼 난 이만 가볼게. 저 왕자는 괴로워하고 있긴 하지만 생명의 기운이 강하니까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될 거야.”

시르안이 위로하듯 말하자 마리안은 퍼뜩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저, 시르안 님. 부탁을 하나 드려도 될까요?”

“응, 뭔데?”

별생각 없이 되묻는 시르안에게 마리안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아스터는 신성력을 사용하는 방법조차 한 번도 제대로 교육받은 적이 없다고 했어요. 하지만 이곳을 나가려면 아스터에게도 약간의 힘이 필요할 거 같아서요. 사실 최근에 마나를 다루는 법을 공부하고 있긴 했는데 쉽지가 않았어요. 여기에 오실 때마다 아스터를 좀 도와주실 수 있을까요?”

시르안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왕자가 신성력을 쓰는 모습을 본 적이 있어? 어느 정도로 사용할 수 있지?”

마리안은 그 말에 얼른 대답했다.

“클로타르에게 힘을 전해주는 것 외에 자신의 상처와 제 상처를 치료할 수 있었어요. 아, 언젠가 날개 다친 작은 새를 치료해 준 적도 있고요.”

마리안은 작은 새라는 말을 듣자 시르안이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 주황색 새의 모습으로 자신을 변화시키는 것을 보며 눈을 깜빡였다.

눈앞의 마법사는 직선적이고 거침없는 성격 같았지만, 그의 행동거지는 매번 마리안을 당혹스럽게 했다.

“흠, 그래. 배운 적이 없는데도 신성력을 그 정도로 다룰 줄 알면 꽤 재능이 있다는 소리일 거야. 조금만 응용하면 아마 자기 몸을 지키는 정도로는 힘을 쓸 수 있게 될 테니까 다음에 한번 봐줄게.”

마리안의 얼굴이 한결 밝아졌다. 마리안은 창틀에 앉아있는 주황색 새를 향해 정중하게 허리를 숙였다.

“정말로 감사합니다.”

마리안이 너무 정중하게 인사해서 시르안은 조금 곤란한 기분이 들었다.

“아직 한 것도 없는데 벌써 그렇게 예의 차릴 것 없어. 어쨌든 난 이만 가볼게. 다음에 또 봐.”

주황색 새가 그 말을 마치고 날갯짓을 하더니 그대로 날아가 버렸다.

마리안은 이제 완전히 밝아진 수해의 푸른 하늘 아래에서 힘차게 날갯짓을 하는 주황색 새를 한동안 바라보았다. 그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마리안은 한결 위안이 되었다. 정말로 너무나 끔찍한 밤이었는데 해가 뜨면서 희망을 얻은 기분이었다.

마리안은 몸을 돌려 아직도 의식이 없는 아스터에게로 다가갔다. 식은땀이 배어난 이마와 목덜미를 닦아주고 늘어져 있는 그의 손을 살며시 잡았다.

“조금만 견뎌요, 아스터.”

마리안은 그의 손을 끌어안고 손등에 가만히 입을 맞췄다. 그녀는 한동안 그렇게 마치 기도하듯 아스터의 손을 계속 잡고 있었다.

의사 베르트는 평소에 비하면 꽤 이른 시간에 찾아왔다. 하인들이 아침 식사도 올려 보내기 전에 찾아왔던 것이다.

“새벽에 전갈을 받아서 오는 길입니다.”

마리안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데 베르트는 마치 변명하듯 그렇게 말하고는 왕진 가방에서 약과 도구들을 꺼냈다.

그는 능숙하고 빠른 손놀림으로 아스터의 상처를 돌봤다. 이미 전날 마리안이 상처를 씻기고 약을 발라 응급처치를 한 뒤라 크게 할 일이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는 평소보다 훨씬 신중하게 움직였다.

시르안이 돌아간 뒤에 긴장이 조금 풀린 마리안은 피곤한 눈으로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갑자기 너무 극심한 피로가 몰려온 탓에 마리안은 베르트의 분위기가 평소와 다르다는 사실을 눈치채지 못했다.

마침내 진료가 끝나고 상처 소독부터 시작해서 모든 일이 끝나자 베르트는 새로운 약을 주었다. 마리안이 그것들을 받아 들어 아스터의 침대 머리에 내려놓자 베르트는 한동안 물끄러미 마리안을 바라보았다.

그제야 마리안은 베르트를 돌아보았다.

“선생님?”

그가 무슨 할 말이 있는 것 같아서 마리안은 기다렸다.

“알리체 영애, 엊그제 영애가 길거리에서 어린 여자아이를 구해줬다고 들었습니다.”

마리안은 의아한 얼굴이 되었다. 누구에게도 말한 적이 없는데 베르트가 그 사실을 어떻게 알았는지 의문이 든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마리안을 감시하는 사람들이 베르트에게 그런 사소한 이야기를 말했을 것 같지도 않았다.

“…아, 네.”

마리안은 얼버무리듯이 대답했다. 마리안으로서는 그 일은 이제 아무래도 좋았다. 차라리 베르트가 아스터의 상태에 대해 좀 더 이야기를 해줬으면 싶었다.

그러나 베르트의 이야기는 끝난 것이 아니었다. 그가 갑자기 마리안에게 다가왔다.

“알리체 영애. 엘리자를 구해줘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말뿐만이 아니라 베르트가 고개까지 숙여서 마리안은 잠시 어안이 벙벙했다. 그녀가 눈을 크게 뜬 채 바라보자 베르트가 정중하게 말했다.

“엘리자는 늦게 본 제 외동딸입니다.”

“아…….”

마리안은 깜짝 놀라 베르트를 다시 눈여겨보았다. 그제야 베르트의 이목구비가 엘리자와 상당히 닮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얼굴 윤곽이 이렇게나 닮아있는데도 베르트와 달리 엘리자가 밝은 금발에 연한 초록색 눈을 가지고 있어서 금방 깨닫지 못했던 것이다.

“엘리자의 유모가 사람들에게 엘리자가 얼마나 큰일을 당할 뻔했는지 전해 들었다고 하더군요. 영애가 큰 위험을 무릅쓰고 딸아이를 구해줬다고 들었습니다. 정말로, 정말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베르트가 너무나 진지한 얼굴로 감사 인사를 되풀이해서 마리안은 당황했다.

“아니에요, 선생님. 저뿐만이 아니라 그 자리에 있었다면 누구라도 그렇게 했을 거예요.”

“짐말이 날뛰었다고 들었습니다. 누구나 그런 용기를 낼 수는 없는 법입니다. 저라면 몸이 얼어붙어서라도 절대로 영애같이 행동하지 못했을 겁니다.”

마리안은 쓴웃음을 지었다.

“엘리자가 딱 제 동생만 한 나이라서 몸이 저절로 움직였던 것 같아요. 그러니 그렇게 고개 숙여서 말씀하실 필요 없어요, 선생님. 엘리자는 잘 지내나요?”

“그 아이는 건강하게 잘 지내고 있습니다. 전부 영애 덕분입니다.”

베르트는 손을 내젓는 마리안에게 그 후로도 몇 번이나 감사 인사를 했다. 그러고는 돌아가기 직전에 무척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언젠가 도움이 필요하게 되면 제가 반드시 영애를 돕겠습니다.”

“…….”

마리안은 그 말에 상당히 놀랐다. 하지만 베르트의 눈이 너무나 진실한 감정을 품고 있어서, 마리안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말씀 감사합니다, 선생님.”

베르트는 고개를 끄덕여 보이고는 말했다.

“아스터 님의 상태는 그리 나쁘지 않으니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곧 의식을 회복하실 겁니다. 내일 다시 찾아오겠습니다.”

“네, 감사합니다.”

의사가 돌아가자 마리안은 지친 기분으로 아스터의 침대 옆에 앉았다.

한참이나 멍하니 있다가 창밖을 내다보니 어느덧 정오 근처인지 태양이 높이 떠있었다. 하룻밤 새에 너무나 많은 일이 일어나서 마리안은 여전히 정신이 없었다. 하지만 간밤에 그토록 괴로웠던 것에 비하면 지금이 훨씬 나았다.

“정말 죽으란 법은 없나 보네.”

어제는 정말로 죽고 싶을 정도로 고통스러웠는데, 그래도 해가 뜨니 시르안과 베르트가 찾아와서 그녀의 힘을 북돋워 주었다.

“그래, 조급해하지 말고 기운 내자.”

마리안은 이제는 약 기운에 취해 잠들어 있는 아스터의 머리카락을 넘겨주고는 그의 이마에 살짝 입을 맞췄다. 아스터에게 입 맞추는 마리안의 얼굴은 이제 평온해져 있었다.

그녀는 아스터의 손을 잡은 채 계속해서 그의 곁을 지켰다. 동요했던 마음이 가라앉은 덕분에 그녀는 좀 더 여유를 가질 수 있었다. 오후가 되면서부터는 아스터의 곁에서 책을 읽다가 책 속의 재밌는 구절에 이따금 작은 소리로 웃을 정도가 되었다.

그렇게 마리안이 아스터가 회복하기를 조용히 기다린 지 만 이틀이 지난 뒤에야 아스터는 눈을 떴다.

“정신이 들어요?”

아직 흐릿한 황금빛 눈을 바라보며 마리안은 다정하게 물었다.

“마리…….”

“아픈 건 좀 어때요? 그래도 열은 많이 내렸어요.”

“참을 만해.”

아스터는 갈라지는 목소리로 작게 말했다.

10년도 넘는 세월 동안 매번 겪어온 일이었지만 이 끔찍한 아픔에는 도저히 익숙해질 수 없었다.

하지만 아스터는 눈을 뜬 순간 마리안이 그의 곁에서 인사를 건네준 것만으로도 훨씬 기분이 밝아졌다. 마리안의 다정한 목소리와 미소를 보고 있으면 죽을 것 같은 고통 속에서도 그는 기운을 낼 수 있었다.

“약을 좀 드세요.”

그리고 이어지는 깊은 키스에 아스터는 눈을 감았다. 마리안이 머금은 약물이 그녀의 입술을 통해 입 안으로 밀려 들어왔다.

베르트는 늘 그에게 강력한 진통 효과가 있는 약을 처방해 주었는데, 내성이 생겨 약효가 듣지 않을까 봐 약을 자주 바꿨다.

차라리 이대로 죽여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할 정도로 상처가 고통스러웠기 때문에 아스터는 늘 정신없이 그 약을 받아마셨다. 그래서 단 한 번도 진통제가 달콤하다고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

그러나 마리안이 먹여주는 약은 약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향긋하고 달았다.

마리안의 입술이 잠시 떨어져 나가는가 싶더니 그녀가 다시 약을 한입 가득 머금고 입술을 부딪쳐 왔다. 슬쩍 입술을 벌리면 작고 매끄러운 혀가 부드럽게 입천장을 핥으며 약물을 건네주었다.

“이번이 마지막이에요.”

귓가에 마리안의 목소리가 울려 퍼지더니 다시 한번 약물이 목을 타고 넘어와서 아스터는 얌전히 받아 마셨다.

그는 이 키스를 좀 더 오래 이어가고 싶었다. 고통스러웠던 시간 끝에 단비를 만난 듯, 마리안의 키스가 너무나 달콤하고 좋아서 이렇게 있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잔뜩 고양되었다.

그런데 그런 생각을 한 것은 아스터만이 아니었던 듯, 바로 떨어져 나갈 줄 알았던 마리안이 두 손으로 아스터의 뺨을 감싼 채 그에게 좀 더 깊이 입을 맞췄다.

혓바닥을 살살 간질이던 그녀의 혀가 입천장을 긁더니 열정적으로 얽어와서 아스터는 몸에서 힘을 뺀 채 그녀의 리드에 몸을 맡겼다.

오늘의 마리안은 전에 없이 적극적이었다. 그녀는 아스터가 늘 그랬듯 아스터의 아랫입술을 살살 문지르고, 파묻을 듯 그의 입술을 머금고 빨아들이기도 했다. 타액이 흘러내렸지만 마리안도 아스터도 신경 쓰지 않았다.

호흡이 가빠지고 머리가 멍해지면서 아스터는 자신이 약 기운 때문에 통증을 잊은 것인지, 그것도 아니면 마리안의 키스가 너무 황홀해서 정신이 팔린 나머지 통증을 느끼지 못하는 것인지 알 수 없어졌다.

마리안과 관련된 모든 것은 감미롭고 달고, 부드럽고 따스했다. 쇠사슬에 묶인 채 절반쯤 허공에 매달려 모진 채찍질을 당하면서 황폐해졌던 심신이 마리안으로 인해 치유되는 기분이었다. 이토록 다정하고 따스한 마리안이 곁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아스터는 행복해져서 눈을 감았다.

한참 만에야 두 사람의 입술이 간신히 떨어졌을 때 아스터는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핏기 하나 없이 창백하던 얼굴에는 불그스름하게 혈색이 돌아왔다.

마리안은 그런 아스터를 바라보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상처를 치료할 수 있겠어요?”

아스터는 그 말이 신성력으로 바로 치료할 수 있겠느냐는 소리임을 알아들었다. 그는 조용히 눈을 감고 집중했다. 극한까지 힘을 빼앗긴 데다 체력도 떨어져 있어서 힘을 끌어내기가 쉽지 않았다.

평소 아스터가 등의 상처가 그토록 고통스러운데도 신관이 와서 치료해 줄 때까지 기다리며 의학적인 처치로 견뎌냈던 것은 이런 몸 상태로 신성력을 쓰는 게 힘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마리안의 걱정스러운 눈을 보자 조금 무리를 해서라도 빨리 상처를 낫게 하고 싶었다. 그리고 얼른 마리안을 끌어안고 싶어 견딜 수가 없었다.

그는 평온한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그의 내면에는 평소 느껴본 적이 없는 기이할 정도로 강렬한 욕정이 들끓고 있었다.

아스터는 잡생각을 지우고 집중하려 노력했다. 꽤 오랜 시간을 노력한 끝에 그는 몸 안에서 신성력이 감돌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조금 더 집중력을 발휘해서 그 힘을 끌어오기 위해 아스터는 필사적으로 애썼다. 처음에는 쉽지 않았지만 마침내 그의 손에는 희미한 빛이 모이기 시작했다.

마리안은 아스터가 조용히 눈을 감고 있는 모습을 지켜보며 초조하게 기다렸다. 키스의 여운이 사라지자마자 아스터의 얼굴이 다시 새하얗게 질려가는 광경을 보고 있으려니 가슴이 타들어 갔다. 한 달에 한 번씩 힘을 빼앗겨도 힘든데 이번에는 단기간에 너무 무리한 상태였다.

등의 상처가 매우 심해서 치료할 수 있겠냐고 물어보긴 했지만, 자신이 괜한 말을 해서 아스터가 더 무리하는 것 같아서 마리안은 입술을 깨물었다. 지금이라도 아스터를 말려야 하는 것인지 아니면 그대로 내버려 둬도 되는 것인지 몰라 그녀는 망설이고 있었다.

어차피 괴로울 거라면 상처라도 빨리 아물게 하고 푹 쉬는 게 좋을 것 같았지만 혹시라도 너무 무리한 나머지 몸에 더욱 부담이 갈까 봐 무서웠다.

그래도 아스터의 손에 조금씩 빛이 모여들기 시작해서 마리안은 숨을 죽인 채 계속 기다렸다.

아스터가 자신의 가슴에 손을 올리고 집중하자 그의 몸이 은은한 금빛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힘을 쓰기 쉽지 않은지 평소보다 상처가 아무는 속도가 느렸지만, 그래도 시뻘겋게 살점을 드러내고 있던 상처는 조금씩 아물었다.

거의 한 시간이 지나서야 아스터는 숨을 몰아쉬며 침대 앞으로 무너지듯 쓰러졌다.

“아스터!”

깜짝 놀란 마리안이 그의 몸을 부축하며 침대에 누울 수 있도록 도왔다.

“아스터, 괜찮은 건가요?”

불안하게 흔들리는 목소리를 들으며 아스터는 간신히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피곤해서 그래. 조금 자고 나면 괜찮…….”

그렇게 말하던 아스터는 채 말을 끝맺지도 못한 채 그대로 의식을 잃었다.

마리안은 얼른 아스터의 몸을 살폈다. 등의 상처는 그런대로 아물어있었다. 지난번에 아스터가 신성력을 썼을 때에 비하면 완전히 나은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더는 약을 바르지 않아도 될 정도로는 회복되어 있었다.

마리안은 불안한 표정으로 아스터의 열을 재고 그의 상태를 확인했다. 다행히 그 이상의 문제는 없었지만, 아스터가 깨어날 때까지는 이 불안감을 해소할 수 없을 것 같았다.

다시 지루한 기다림의 시간이 계속 이어졌다. 아스터는 꼬박 만 하루가 지난 뒤에야 눈을 떴다. 창백하던 얼굴에는 어느 정도 혈색이 돌아와 있었다.

그는 힘겹게 고개를 들어 올려 주변을 살피다가 침대 옆에 기대어 잠들어 있는 마리안을 보고 쓴웃음을 지었다. 밤새 아스터의 곁을 지켰는지 마리안의 얼굴은 잔뜩 초췌해져 있었다. 눈 밑이 거뭇해진 것이 안타까워서 아스터는 손을 뻗어 마리안의 뺨을 만졌다.

은은한 빛과 함께 신성력이 발휘되면서 마리안의 얼굴에서 피로가 사라졌다. 아스터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손을 떼는 순간 마리안이 눈을 반짝 떴다.

아스터는 빛을 머금은 푸른 바다 같은 눈동자가 자신을 바라보는 모습에 잠시 숨을 쉬는 것도 잊고 마리안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푸른 눈을 볼 때마다 매번 세차게 가슴이 뛰었다.

“일어났어?”

“아스터…….”

잠이 덜 깬 목소리로 중얼거리던 마리안은 곧 얼른 몸을 일으켰다.

“이제 좀 괜찮나요?”

“응, 어제보다 한결 좋아졌어.”

아스터의 목소리는 확실히 전날보다 힘이 들어가 있었다. 그 사실을 깨달은 마리안이 깊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다행이다. 얼굴이 너무 창백해서 걱정했어요.”

말뿐만이 아니라 마리안의 눈에 다시금 눈물이 고였다. 아스터는 그런 마리안의 손을 잡으며 그녀를 달랬다.

“미안해, 걱정하게 해서.”

“아스터가 미안할 게 뭐가 있어요. 어제 제가 괜히 신성력 이야기를 꺼내는 바람에 무리하게 했나 싶어서 걱정했을 뿐이죠.”

“조금 무리하긴 했지만 그래도 빨리 치료하는 게 나으니까. 앞으로 며칠 잘 쉬면 괜찮아.”

아스터가 손을 다독이며 힘주어 말하자 마리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다행이에요. 목이 마르진 않아요? 아니면 식사를 바로 준비하게 할까요?”

마리안이 자리에서 일어서며 당장에라도 설렁줄을 잡아당기려 해서 아스터는 고개를 저었다.

“아냐, 지금은 괜찮아.”

“그래도 거의 사흘이나 아무것도 못 먹었잖아요.”

“신성력 덕분에 괜찮아. 정말이야. 그보다는…….”

“필요한 게 있으면 말하세요.”

마리안을 안심시키던 아스터가 갑자기 난감한 얼굴로 미소 지었다. 그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마리안의 손을 잡고 그녀를 자신 쪽으로 끌어당겼다.

갑작스러운 행동에 마리안은 아스터에게 끌려 들어가 그의 품에 얼굴을 묻게 되었다. 당황한 마리안이 고개를 들어 아스터를 바라보자 그는 더할 나위 없이 진지한 얼굴로 고백했다.

“마리를 원해.”

마리안은 잠시 당황해서 눈을 깜빡였다. 하지만 곧 그녀의 얼굴이 귀까지 빨갛게 달아올랐다.

“지금은 푹 쉬어야 하는 게 아닌가요?”

“그렇긴 하지만…….”

아스터가 정말로 곤란하다는 듯이 마리안의 손을 이끌어 자신의 하체를 만지게 하자 마리안은 얼굴을 더욱 붉혔다.

그의 성기는 이미 바지 속에서 단단하게 솟아있었다. 사실 처음에는 아침이라 자연스럽게 발기한 것에 지나지 않았지만 마리안의 푸른 눈을 보는 순간 아스터 자신도 잘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욕망이 들끓었다.

아스터는 그의 하반신에서 얼른 손을 떼려 하는 마리안을 놓아주지 않은 채 그녀의 목덜미에 키스했다.

“해도 돼?”

아스터의 목소리는 다정하지만 어딘가 초조한 기색이 느껴졌다. 마리안은 금방 그 사실을 깨닫고 잠시 주저했다.

“괜찮긴 하지만…, 앗!”

마리안이 우물우물 대답하자 아스터는 부드럽게 웃으며 마리안의 귓가에 후 하고 숨을 불어넣었다. 등줄기에 소름이 쫙 돋는 그 느낌에 마리안이 몸을 부르르 떨자 아스터는 다시 한번 마리안에게 속삭였다.

“하게 해줘.”

마리안은 눈을 가늘게 뜨며 아스터를 살짝 흘겨보았다. 하지만 그녀는 이내 활짝 웃으며 아스터의 목에 팔을 감았다.

“그럼 키스해 줘요.”

마리안의 당당한 요구에 아스터는 얼른 마리안을 끌어당겨 그녀의 장미 꽃잎처럼 보드라운 입술에 키스했다. 한여름의 소나기처럼 아스터의 키스가 마리안의 눈과 코와 입술에 쇄도했다.

아스터가 너무나 폭풍우처럼 키스를 퍼부어 대서 마리안이 당황한 나머지 자신의 가슴을 손으로 눌렀을 정도였다. 아스터 때문에 그녀의 심장은 벌써부터 세차게 뛰고 있었다.

“자, 잠깐.”

평소보다 성급하고 격렬한 느낌에 마리안이 조금 천천히 하자고 말하려고 했을 때, 아스터의 혀가 마리안의 입술을 열고 미끄러지듯 침범해 들어왔다.

“으응…….”

마리안은 단박에 그녀의 혀를 감싸며 빨아대는 남자 때문에 그 이상 말을 할 수 없었다. 그리고 조금 시간이 지난 뒤에는 자신이 무슨 말을 하려고 했었는지조차 잊고 말았다. 그녀는 아스터를 밀어내는 대신 두 팔로 그의 목을 휘감고 매달렸다.

어느덧 마리안의 등이 침대에 닿았다. 입천장을 살살 긁어내리며 마치 삼켜버릴 듯이 입술을 물고 놓아주지 않는 아스터의 키스에 마리안은 머릿속이 뜨겁게 달궈지는 기분이었다.

키스만으로도 녹아내리기 시작한 몸은 허벅지와 아랫배를 문질러오는 단단한 감촉 덕분에 이미 젖어 들고 있었다.

“하…응…….”

남자의 성기가 밀부의 계곡을 스치듯 지나가는 느낌에 마리안은 저도 모르게 안달이 나서 허리를 꼬았다. 단전의 안쪽 깊은 곳, 척추가 시작되는 어느 지점에서 뭉근하게 열이 나는 것처럼 안달이 났다.

하지만 아스터는 마리안의 허벅지와 아랫배에 성기를 비벼대고 있으면서도 그녀의 가슴을 어루만지며 계속해서 키스에만 몰두해 있었다.

마리는 그의 키스도 부드러운 애무도 좋았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그가 좀 더 다른 것을 해주길 간절히 바랐다.

결국 참지 못한 그녀가 손을 뻗어 아스터의 옷 속으로 손을 밀어 넣었다. 이미 잔뜩 부풀어 올라 선액을 줄줄 흘려대는 그의 성기를 잡아 기둥을 아래에서부터 위로 천천히 훑었다.

순간 남자의 몸이 움찔하면서 아스터의 입술이 마리안에게서 떨어져 나갔다. 그는 조금 놀란 듯 보였지만 이내 눈매를 부드럽게 휘었다.

“오늘따라 과감한데?”

하지만 마리안은 아무런 대꾸 없이 손에 쥔 그의 성기를 몇 번이나 위아래로 훑어 내렸다. 앞섶을 적실 정도로 흘러내린 선액 때문에 기둥을 살살 훑어 내리는 손은 이미 젖어 미끈거리고 있었다.

덕분에 손바닥으로 아스터의 성기의 윤곽과 함께 도드라진 핏줄의 감촉까지 더욱 생생하게 느낄 수 있어서 마리안은 저도 모르게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녀는 몸을 좀 더 일으켜 아스터의 귓가에 마치 비밀 이야기를 하듯 속삭였다.

“넣어줘요. 지금 엄청 젖었단 말이에요.”

그러자 아스터의 몸이 갑자기 딱딱하게 굳어졌다.

마리안은 갑작스레 그가 몸을 경직시키는 바람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자신이 무언가 말을 잘못했나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왜 그러냐고 묻기도 전에, 마리안은 아스터의 얼굴이 갑자기 시뻘겋게 변하더니 그가 허둥지둥 바지를 벗어 던지는 모습에 그만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아스터는 정말로 다급하게 서두르고 있었다. 관계를 가진 이래 그가 이렇게까지 허둥대는 모습은 처음 보았다.

마리안은 아스터의 그런 모습을 보는 게 꽤 기분 좋았다. 그만큼 아스터가 그녀를 원한다는 사실에 마음이 뿌듯했다.

아스터는 온몸이 새빨갛게 되어 손에 잡히는 대로 자신의 옷을 벗고 있었다. 속옷째 바지를 벗어 던진 그는 얼른 침대로 기어 올라와 마리안의 두 발목을 낚아챘다.

“아!”

“미안, 마리. 내가 조금 급해졌어.”

그는 두서없는 사과를 하며 마리안의 옷 속으로 손을 넣어 그녀의 속옷을 끌어 내렸다.

하지만 마리안은 당황하는 대신 그가 자신의 옷을 벗길 수 있도록 허리를 살짝 들어주며 대답했다.

“괜찮아요. 저도 급해요.”

마리안이 웃으면서 말하자 아스터는 정말로 숨을 훅 하고 들이마셨다.

그는 마리안의 다리 사이에 자리를 잡고는 손을 뻗어 그녀가 충분히 젖었는지를 살폈다. 그리고 마리안의 밀부가 정말로 흠뻑 젖어있는 것을 확인하자 얼굴이 더욱 빨갛게 달아올랐다.

마리안은 그런 아스터에게 팔을 뻗어 그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어서요.”

그녀가 마치 유혹하듯 그를 끌어당기자 아스터는 침을 한 번 삼키고는 당장에라도 터질 것 같은 성기를 계곡의 작은 입구에 가져다 댔다. 그는 천천히 허리를 움직여 물을 잔뜩 머금은 계곡의 동굴 속으로 들어갔다.

“흐읏.”

단번에 입구를 한계까지 벌리고 들어오는 감각에 마리안은 눈을 감으며 목을 뒤로 꺾었다. 이제는 더 이상 처음 했을 때처럼 통증을 느끼지는 않았다. 그보다는 내부를 꽉 채운 아스터의 존재감에 숨이 가빠져 왔을 뿐이다.

벌써 몇 번이나 반복되는, 천천히 밀고 들어와서 다시 느릿하게 빠져나가는 동작에 마리안이 붉게 달아오른 입술을 벌렸다.

그녀의 숨결은 조금 전보다 훨씬 뜨겁게 달아올라 있었다. 아스터와 키스를 나누는 동안 단전의 안쪽에서 뭉근하게 타오르기 시작했던 불길은 이제 거세게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흣.”

아스터가 작게 신음을 내뱉는 소리에 살며시 눈을 뜨자, 그녀의 허리를 끌어안은 아스터가 거친 숨을 몰아쉬며 규칙적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아스터가 치받으면서 처음에는 약하게 흔들리던 침대는 어느덧 삐거덕거리는 요란한 소리를 내고 있었지만 마리안과 아스터는 그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

두 사람이 느낄 수 있는 것은 서로의 거칠어진 숨소리와 세차게 뛰는 심장의 고동, 그리고 미칠 듯한 쾌감뿐이었다.

아스터가 좀 더 강하게 안쪽으로 내리꽂자 마리안은 경련하듯 몸을 뒤척였다. 울컥하고 그녀의 계곡에서 둑이 터지듯 물이 흘러내렸다.

마리안은 어느덧 아스터의 목을 끌어안고 있던 팔을 떨어뜨렸다. 온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서 더 이상 아스터를 끌어안고 있을 수 없었다.

침대 위로 축 늘어진 그녀의 몸이 아스터가 움직일 때마다 흔들렸다. 온몸을 활활 태우는 것 같은 그 강한 쾌감에 마리안은 입술을 깨문 채 자꾸만 터져 나오는 신음을 참으려고 애쓰는 것이 고작이었다.

“아아앗!”

그때 아스터가 강하게 푹 들어와서는 아주 느릿하게 빠져나가서 마리안은 진저리를 쳤다. 숨이 턱 하고 막히면서 심장이 너무 빠르게 뛰어서 이대로는 죽을 것 같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입을 벌리고 숨을 쉬려고 노력하면서 마리안은 자신의 가슴을 쥐어뜯었다.

“아, 아아! 하읏!”

그리고 점점 새어 나오는 신음을 어쩌지 못한 채 허리를 흔들며 몸부림쳤다.

아스터는 아스터대로 그런 마리안의 모습을 보며 숨을 헉헉 몰아쉬었다. 마리안이 쾌감을 느끼면 느낄수록 좁고 뜨겁던 그녀의 내부가 진득하게 녹아들며 그의 성기를 감싸 부드럽게 쥐어짜고 있었다.

쾌락이 너무 강하면 오히려 고통스러울 수 있음을 아스터는 지금 막 깨닫고 있었다. 온몸이 달아올라 불에 덴 듯 홧홧했다. 손바닥도, 발바닥도 빨갛게 달아오른 채 아스터는 더는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어 본능이 이끄는 대로 몸을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절정이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다. 아스터는 마리안의 허리를 끌어안은 채 좀 더 빠르게 움직였다.

마리안이 새빨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그를 바라봤다. 눈물이 맺힌 푸른 눈이 마치 햇빛을 반사하는 바다처럼 빛나고 있었다.

그 푸른 바다에 온몸으로 뛰어든 것 같은 기분을 느끼며 아스터는 마리안을 끌어안았다. 눈앞이 새하얗게 변할 정도로 강렬한 쾌락이 마치 파도처럼 그를 덮쳐왔다. 순간 절정에 달한 아스터는 자기도 모르게 눈을 감았다.

마리안 역시 한동안 꼼짝도 하지 않고 아스터를 그대로 마주 안았다. 그녀는 지금 손가락 하나 움직일 기운이 없었다.

눈을 감고 숨을 몰아쉬는 아스터의 뺨은 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파르르 떨리는 그의 속눈썹이 짙은 금빛인 것을 바라보다가 마리안 역시 눈을 감았다.

그녀는 한동안 아스터의 심장이 요동치는 소리를, 그리고 그의 거칠어진 숨소리를 가만히 느끼고만 있었다. 마리안 자신이 숨을 몰아쉬는 소리도 매우 거칠고 커서 아스터의 숨소리를 들으려면 귀를 기울여야 했다.

두 사람의 호흡이 간신히 잦아들었을 무렵에는 꽤 많은 시간이 지나있었다.

마리안은 그제야 눈을 떴다. 아스터가 언제 눈을 떴는지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마리안을 바라보는 그의 눈동자는 오늘도 꿀처럼 달고 그녀를 향한 욕망으로 뜨거웠다.

마리안은 다시금 가슴이 두근거려서 남몰래 한숨을 내쉬었다. 다정하게 바라보는 아스터의 눈빛을 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빨리 뛰었다.

“왜 한숨을 쉬는 거야, 마리. 부족해?”

그때 그녀의 한숨을 들은 아스터가 눈가를 휘며 질문했다.

마리안은 얼른 고개를 저었다. 단 한 번 한 것만으로도 기운이 쭉 빠진 상태라 이대로 한숨 자고 싶은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그러나 아스터는 아직 관둘 생각이 없다는 듯 마리안을 다시 끌어안았다. 그는 힘이 빠져 늘어져 있는 마리안의 가슴을 한참이나 어루만지며 그녀의 입술을 물고 희롱하듯 키스했다.

그 손길과 키스가 무척이나 따뜻하고 기분 좋아서 마리안은 아스터에게 안긴 채 눈을 감았다. 그대로 깜빡 잠이 들려는 순간, 매끈한 둔부와 허벅지를 쓸어내리던 그의 손이 아직도 젖어있는 계곡 사이로 파고들었다.

“아!”

마리안은 꽃잎의 핵을 부드럽게 문지르는 감각에 몸을 떨었다. 한순간에 잠이 확 달아났다. 아스터는 마리안이 깬 것을 보고 웃으며 젖어있는 꽃잎을 손가락으로 쥐고 장난하듯 비벼댔다.

“흣!”

순간 마리안은 작게 소리를 내고 말았다. 식어가고 있던 몸 안의 열기가 단숨에 다시 타오르려 하고 있었다.

“아직 자지 마, 마리. 난 한 번 더 하고 싶은걸.”

말뿐만이 아니라 아스터의 손은 여전히 손안에 잡힌 꽃잎을 놓으려 하지 않았다. 그는 손바닥 안에서 점점 더 젖어가는 꽃잎을 느끼며 속삭이듯 물었다.

“더 해줄까?”

허리를 비틀며 입술을 깨물던 마리안이 다시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스터는 짧게 웃고는 한 번 더 마리안에게 키스했다. 그러고는 자세를 바꿔 그녀의 다리 사이로 들어갔다.

“앗, 아앗!”

마리안의 입에서 달뜬 숨소리가 새어 나왔다.

활짝 벌린 다리 사이로 마리안의 붉게 달아오른 꽃잎이 그대로 드러났다. 꽃잎은 그녀가 흘린 애액과 아스터가 쏟아낸 희뿌연 정액으로 흠뻑 젖어있었다.

적나라하면서도 외설스러운 그 광경을 보며 아스터는 입맛을 다셨다. 그의 입술이 거침없이 마리안의 꽃잎 위를 내리덮었다. 매끄러운 혀가 진득하게 몇 번이나 핥자 마리안은 몸을 떨며 입술을 좀 더 세게 깨물었다.

이미 한 차례 정사를 나눈 뒤라 마리안은 아스터의 애무를 평소보다 더 예민하게 느끼고 있었다.

츱, 츠읍, 하고 민망한 소리와 함께 아스터는 흥건하게 젖은 계곡을 따라 깊숙이 안쪽으로 파고들어 꽃잎을 물고 빨아댔다. 그는 바르작거리는 마리안의 허벅지를 꽉 움켜쥔 채 꽃잎의 핵을 혀끝으로 몇 번이나 힘주어 문지르고 있었다.

마리안은 숨을 몰아쉬었다. 구멍 안쪽으로 깊숙이 혀를 밀어 넣고 진득하게 핥는 감촉만큼은 아무리 해도 익숙해지지 않았다.

하지만 아스터는 그 깊은 계곡에서 쏟아져 나오는 애액을 세상에서 가장 달다는 듯이 받아 마시며 좀처럼 마리안을 놓아줄 생각을 하지 않았다.

단전의 안쪽 어딘가에서 불꽃이 피어오르며 몸이 뜨겁게 달궈지고 있었다. 그리고 몸이 달아오르는 만큼 그녀의 숨결도 뜨거워졌다. 어느덧 마리안의 풍만한 가슴은 눈에 띌 정도로 빠르게 위아래로 오르내렸다.

아스터는 마리안의 호흡이 그처럼 달뜨는 모습을 보며 빙그레 미소 짓고는 손가락을 계곡 안쪽으로 밀어 넣었다.

“앗!”

순간 마리안이 부르르 몸을 떨며 숨을 삼켰다. 이미 붉게 달아오른 얼굴이 좀 더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손가락 한 개가 안쪽을 휘저어 주자 몸 안쪽에 피어오르기 시작하는 불길이 점점 거세지는 기분을 느꼈다. 마치 불을 붙인 난로에서 불길이 고루 번질 수 있도록 장작더미를 들쑤시는 것 같았다. 하지만 불길은 아직 제대로 타오르고 있지 않은 상태였다.

마리안은 침을 삼켰다. 몸 안쪽, 아마도 단전 어딘가가 간질거려 견딜 수가 없었다. 안달이 나서 미칠 것만 같은데 아스터는 마리안의 상태를 아는지 모르는지 딴청을 피우고 있었다.

평소보다 한층 더 붉게 달아오른 아스터의 입술이 마리안의 하얀 허벅지 안쪽의 부드러운 살결을 따라 옮겨갔다.

“흣!”

그때 안쪽을 세게 빨아들이는 따끔한 감각에 마리안은 화들짝 놀라 몸을 움츠리며 작게 소리를 냈다.

“미안, 아팠어?”

아스터가 미안해하는 얼굴로 바라봐서 마리안은 고개를 저었다. 조금 전 그가 뭘 했는지는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마리안은 좀 더 많은 것을 원했다. 그녀는 좀 더 격렬한 자극을 바라고 있었다.

아스터가 다시 한번 마리안의 허벅지 안쪽에 입술을 댔다. 그곳에는 방금 전에 만든 조그마한 자국이 붉은 꽃잎처럼 새겨져 있었다. 아스터는 그 흔적이 무척이나 마음에 든다는 듯 혀끝으로 살살 그 자국을 핥았다.

“아, 아스터.”

결국 견딜 수 없어진 마리안이 허리를 비틀며 그의 이름을 불렀다.

“왜 그래, 마리?”

“아, 아앗!”

아스터는 천연덕스러운 얼굴로 되물으면서, 동시에 손가락으로 다시 꽃잎 위를 더듬었다. 손가락이 안쪽을 헤집으면서 새어 나온 희뿌연 액체로 인해 그녀의 계곡은 다시 흠뻑 젖어있었다.

아스터는 꽃잎 위로 흘러내린 액체를 마치 윤활유처럼 사용해 달아오른 핵을 자극했다. 부드럽게 움직이던 그의 손목이 조금씩 속도를 더해가자 마리안이 가쁜 숨을 뱉어냈다.

“읏!”

참을 수 없는 쾌감에 마리안은 잇새로 새어 나오는 신음을 막지 못한 채 입술을 다시 깨물었다.

아스터와 하나가 되었을 때와는 또 다른 쾌락이 그녀를 덮쳐오고 있었다. 단전에 머물고 있던 열기가 척추를 따라 머리 위로 올라가는 것 같았다. 뜨거운 열기 때문에 마리안은 몇 번이나 머리를 도리질 쳤다. 시트에 닿은 뺨이 뜨거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아스터 역시 달아오르고 있는 마리안을 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파정하면서 잠시 힘을 잃었던 그의 분신이 언제 그랬냐는 듯이 흉흉할 정도로 일어서 있었다. 하지만 그는 참을성 있게 계곡 안쪽의 구멍 속으로 손가락을 한 개 더 밀어 넣었다.

마리안은 이제 숨을 헐떡거렸다. 안쪽의 여린 살을 자극하는 손가락이 견디기 힘들었다. 이제는 몸 안쪽에서 불꽃이 거세게 타오르는 것 같았다.

“하읏!”

더는 참기 힘들어서 저절로 신음이 흘러나왔다. 온몸이 너무 뜨거웠다. 하지만 여전히 그녀는 채워지지 않는 갈망으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아직도 아스터는 그녀가 원하는 것을 주고 있지 않았다.

“아, 아스터! 읏, 제발!”

손가락 따위로는 채워지지 않는 갈망에 눈가에 눈물까지 고인 순간 마리안이 비명처럼 아스터의 이름을 부르짖었다.

“마리.”

그러자 아스터가 더할 나위 없이 달콤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말해줘, 마리. 지금 날 원한다고.”

“원해요.”

마리안은 즉시 대답했다.

“원해요, 원한다고요. 당신을 원해요!”

그녀의 솔직한 대답에 아스터의 얼굴이 다시금 빨갛게 달아올랐다.

“마리, 너는 정말이지…….”

그러나 아스터도 그 이상의 말을 할 수는 없었다. 그 역시 마리안의 반응을 보고 싶은 마음에 억지로 참고 있었던 것이다.

“아아아!”

다시 한번 아스터가 자신을 깊숙이 파묻은 순간, 마리안은 길게 교성을 내지르며 그에게 매달렸다. 원하던 것을 드디어 얻은 그녀의 눈에서 고여있던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아스터는 그런 마리안의 눈에 키스하며 숨을 몰아쉬었다.

똑같은 행위를 반복하고 있을 뿐인데, 마리안의 내부가 처음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뜨겁게 녹아있어서 삽입하는 것만으로도 숨이 막혔다. 아까와는 전혀 다른 느낌으로 그의 분신을 꽉 조여오는 마리안 때문에 아스터는 숨을 쉴 수가 없었다.

마리안을 안을 때마다 그는 늘 이성을 잃었다. 늘 따스하고 부드럽던 그녀가 뜨겁게 달아오르면 생각이라는 것을 전혀 할 수 없어지곤 했다.

본래 아스터는 다른 사람의 온기에 전혀 익숙하지 않았다. 그는 철이 들었을 때부터 언제나 혼자였다. 아스터의 곁에서 머물러준 사람은 유모가 유일했다. 하지만 그 유모조차 마리안처럼 24시간 곁을 지켜주지는 못했다.

아스터의 유모는 늘 아스터에게 잘 자라는 인사를 하고 나면 다음 날 해가 뜰 때까지 그를 홀로 내버려 뒀다. 무서운 악몽이라도 꾼 날, 어두운 탑 안의 방에서 아무리 목이 터져라 외쳐도 유모는 결코 모습을 드러낸 적이 없었다.

유모가 차갑고 매정해 그런 것은 아니었다. 그것이 탑 안의 규칙이었다. 유일하게 유모가 밤에도 남아 곁을 지켜줄 때는 아직 나이가 어렸던 아스터가 아플 때뿐이었다.

그렇게 자란 탓에 아스터는 누군가가 곁을 지켜주며 함께 온기를 나누는 일이 처음이었다. 그래서 마리안이 동쪽 탑에 들어온 첫 한 달 동안 그는 그녀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알지 못해 당황했다.

하지만 조금씩 친밀해진 마리안은 다정했고, 따스하고 부드러웠다. 뒤늦게 알게 된 다른 사람의 체온이 너무나 따스해서, 그녀의 심장이 뛰는 소리가 너무나 포근해서 아스터는 마리안을 손에서 놓고 싶지 않았다. 그녀를 가만히 끌어안고 있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았다.

그리고 이렇게 마리안과 살을 맞대고 그녀의 안에 자신을 파묻을 때면, 자신의 모든 것을 그녀에게 내맡긴 기분이 되곤 했다. 실제로 아스터는 마리안과 하나가 될 때마다 그녀의 감정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었다.

마리안은 한 번도 그에게 거짓말을 한 적이 없었지만 이렇게 정사를 나누고 있을 때는 더 솔직했다. 그래서 아스터는 더욱 마리안을 원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마리안이 사랑한다고 말해줄 때의 목소리는 아스터에게 황홀하기 그지없었다. 홍조로 물든 뺨과 물기에 젖은 눈동자로 애타게 자신을 바라보는 마리안을 보고 있으면 아스터는 가슴 속이 뜨겁게 달아오르면서 동시에 미칠 듯한 애정을 느꼈다.

지금도 마리안을 향한 감정을 참을 수 없어서 아스터는 정신없이 그녀에게 키스를 퍼부었다.

그는 쉼 없이 마리안의 아름다운 눈꺼풀 위에, 눈물이 흘러내리며 불그스름해진 눈가에, 오뚝한 코와 숨을 쉬기 위해 벌어진 장미 꽃잎 같은 입술 위에 계속해서 입을 맞췄다. 뜨겁게 달아오른 아랫입술을 물고 부드럽게 빨아들이면 마치 꿀물을 머금은 것처럼 달기만 했다.

그동안 마리안은 눈을 감은 채 쏟아져 내리는 아스터의 애정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아스터가 자신을 이렇게나 소중히 대해준다는 사실만으로도 마리안은 행복했다.

“마리, 마리.”

아스터가 점점 빠르게 움직이면서 간절하게 마리안의 이름을 불렀다.

숨이 가빠진 마리안은 대답하는 대신 손을 내밀었다. 아스터의 손이 마리안의 손을 붙잡아 이내 깍지를 꼈다. 마리안이 그 손을 힘주어 잡은 순간, 두 사람은 거의 동시에 절정에 도달했다.

마리안은 무너져 내리는 아스터를 온몸으로 끌어안았다.

“마리, 사랑해.”

아스터가 귓가에서 몇 번이나 사랑한다고 속삭였다.

마리안은 그 말에 대답해 주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지만 전신에서 힘이 빠져나가면서 갑자기 수마가 밀려드는 바람에 대답하지 못했다. 그녀는 마치 기절하듯 잠에 빠져들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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